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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말(2줄 요약)
1853년 흑선내항으로 시작된 막말(幕末, 1853~1868)은 서로 다른 사상이 부딪히며 결과적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시대였습니다. 여러 사상들 중 존왕론(尊王論)과 양이론(攘夷論)이 합쳐진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이 탄생했고, 일본 전체가 기존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됩니다.
1. 막말의 사상들
1-1. 존왕론(尊王論)
존왕론(尊王論)은 왕(王)을 존중(尊)하는 사상을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덴노(天皇)를 숭배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원래는 중국 유교에서 일어난 사상인데 이것이 일본에 전래되어 독자적인 변용을 이루어 발전하게 되었는데요.
맹자는 '인덕에 의한 통치'를 왕도(王道)로, '무력에 의한 통치'를 패도(覇道)라고 봤는데(왕패론), 일본에서는 덴노의 입장은 왕도(王道), 막부와 같은 무가정권은 패도(覇道)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에도 시대 중반에 국학(国学)이 흥하기 시작했고, 국사(国史, 일본사)나 신도(神道)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국학은 학자들에게만 그치지 않았으며 다른 지식층인 무사와 호농(豪農, 부유하고 세력 있는 농가)으로도 확대되고 있었죠. 이에 더해 실천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는데, 바로 천황릉(天皇陵) 복원 사업, 번조(藩祖)를 황족(皇族)으로 연결하는 움직임 등이 그 예로 꼽을 수 있겠네요. 이러한 흐름속에서 존왕론은 에도시대 중기부터 유력한 사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상이 더 널리 퍼지게 된 전환점은 바로 막말의 도래였습니다.
1853년 흑선내항으로 막부의 권위는 실추됨과 동시에 덴노나 조정의 존재감이 높아짐에 따라, 국학이나 유학의 영향을 받은 미토학(水戸学)에 의해 견고한 민족주의가 형성되어 존왕론은 전국적인 고양을 보여주게 됩니다.
1-2. 양이론(攘夷論)
양이론(攘夷論)은 오랑캐(夷)를 물리치자(攘)는 사상인데, 일본에서는 해외와의 개국 통상을 거부하고 외국 배척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에도 시대에 행해진 쇄국(鎖国)을 계승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이에 해당하죠.
양이론도 중국 유학에서 유래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 사상이 바로 화이사상(華夷思想)입니다. 이 화이사상은 중국 화족 자국을 중심으로, 그 주변국을 야만적인 나라라고 보던 사상을 말하죠...
이러한 양이론은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로 인한 위기감에 등장했습니다. 이전부터 크리스트교와 같은 새로운 서양식 사상이 침투함에 따라 일본 문화가 침략당한다는 의식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고, 따라서 양이론을 주창한 미토학이 폭넓은 지지를 획득했으며, 18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양이론이 확립됩다.
이 양이파의 대표주자는 바로 조슈번(長州藩)이었습니다.
어느정도였나하면 1863년 조슈번은 대한해협을 항행하는 미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함선에 무작위 포격을 하는 것으로 양이론을 직접 몸소 보여줬죠... 그러나 이런 무작위 포격으로 1863년 7월부터 1864년 9월까지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패한 조슈번은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곧 이 사상에서 탈피함과 동시에 서양식 무기를 구매하고, 서양식으로 군대를 재편합니다.
1-3. 좌막론(佐幕論)
좌막론(佐幕論)은 막부(幕府)를 보좌(補佐)한다는 사상입니다.
에도 막부는 조정에서 대정(大政, 천하의 정치)을 위임받은 입장이었습니다. 즉, 좌막론에는 충분히 존왕론(尊王論)이 일부 포함되는 부분도 있긴 하죠~ 실제로 막부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국정의 안정을 바라는 입장이었던 코메이 덴노(孝明天皇, 1931~1867)도 강고한 좌막파(佐幕派)였다고 합니다.
막말에 좌막파의 대표 격으로 활약한 자는 아이즈번주(会津藩主)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 容保, 1836~1893)입니다.
1862년,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에 취임해 코메이 덴노의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교토의 치안 유지에 매진합니다. 또 에도성에서는 타마리노마즈메(溜間詰)로서 막부정치에 관여하는 입장이기도 했죠. 거기다 이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가문은 토쿠가와가(徳川家)의 한 분파였을 정도니 말 다했습니다.
아이즈번 아래에서 활약한 쇼군 보호 목적으로 창설되었지만 이후 반막부세력을 조사하는 임무도 맡은 신센구미(新選組, 1863~1869)도 좌막파 집단입니다. 또 한편, 신센구미의 국장(局長) 콘도 이사미(近藤 勇, 1834~1868), 부장(副長)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歳三, 1835~1869)는 무사시노쿠니(武蔵国)의 타마군(多摩郡) 백성 출신이었습니다. 이 타마(多摩) 지역은 에도 막부의 천령(天領, 쇼군 직할 영지)으로, 예로부터 그 혜택을 받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타마군 지역은 좌막파가 꽤 많았을 것으로 보이며 그 도움을 받은 신센구미의 여러 인물들 또한 막부와 꽤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1-4. 개국론(開国論)
개국론은 나라(国)를 열어야(開)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시 일본에서는 나라를 열어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당시 정세로는 기술적으로 열세였던 일본이 양이는 실현이 불가능했습니다. 잘못했다간 여러 나라와의 전쟁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거나, 거기에 더해 타국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었죠...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개국통상을 거쳐 일본의 국력증강을 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개국론은 에도 시대 말기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장되기 시작합니다.
18세기부터 일본 근해에는 서양 세력이 출몰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대외적인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감이 현실이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1853년, 에도 인근 우라가(浦賀)에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내항했고, 1854년에는 결국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됩니다. 1859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각지에서 차례차례 항구가 열리고 여러 나라들과의 무역이 시작되었죠.
개국파로 유명한 사람은 카츠 카이슈(勝 海舟, 1823~1899)였습니다. 카츠 카이슈는 186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해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귀국함과 동시에 군함봉행(軍艦奉行)에 취임해 서양식 해군 도입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한때는 사카모토 료마(下本 龍馬, 1836~1867)도 그의 문하로서 고베 해군 조련소(神戸海軍操練所)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어요. 이렇게 개국론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사상이었죠.
1-5.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은 존왕론(尊王論)과 양이론(攘夷論)이 결합되어 생겨난 사상으로, 즉, 덴노를 존경함과 동시에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 사상은 막말에 미토번(水戸藩)의 번교(藩校) 코도칸(弘道館)의 교육 이념을 나타낸 양이파 다이묘의 대표 격인 토쿠가와 나리아키(徳川 斉昭, 1800~1860)가 쓴 <코도칸기(弘道館記)>에 기록된 것이 (막말을 기준으로) 시초로, 적어도 막말에 유포된 존황양이(존왕양이)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이 사상에 감화된 유력 다이묘와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존왕양이론자가 되었으며, 이는 1860년에 일어난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당시 막부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 1815~1860)를 암살하는 것으로 이어집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그치지 않은 존왕양이운동은 특히 서일본의 웅번(雄藩)들을 필두로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조슈번은 교토에서 조정에 접근했고, 급진파 공경(公卿)의 후원자가 되어 존왕양이운동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또, 요시다 쇼우인(吉田 松陰, 1830~1859)이 세운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다녔던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 1839~1867), 쿠사카 겐즈이(久坂 玄瑞, 1840~1864),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1841~1909) 등이 존왕양이론자의 대표자였습니다.
토사번(土佐藩)에서도 특히 존왕양이론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타케치 즈이잔(武市 瑞山, 1829~1865)은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을 결성했고, 사카모토 료마나 나카오카 신타로(中岡 慎太郎, 1838~1867) 등이 가맹해 이 존왕양이운동에 참가했다.
이렇게만 보면 무사들만 존왕양이를 추종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재야에 있던 무사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사시노쿠니의 치아라이지마(血洗島)에서는 관료이자 사업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 1840~1931)가 존왕양이운동에 참가했고, 막부 전복을 위해 타카사키성(高崎城) 탈취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 존왕양이론은 점차 반막부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후 이는 도막운동(倒幕運動, 막부타도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6.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은 공(公)으로 표현되는 조정(朝廷)과 무(公)로 표현되는 막부(幕府)가 협력해 난국에 대처한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조정과 막부의 관계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서 에도 막부가 덴노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조인했기에 악화됩니다. 이에 존왕양이파는 격렬하게 막부를 규탄했고, 따라서 막부 측으로는 조정과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고 막부의 권위 강화를 목표로 할 필요가 있었죠.
운이 좋게도 1862년 코메이 덴노는 그녀의 여동생인 카즈노미야(和宮, 1846~1877)를 쇼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 1846~1866)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결정됩니다. 이는 노중(老中) 안도 노부마사(安藤 信正, 1820~1871)가 추진한 결혼으로, 이로써 막부와 조정의 유대를 강화하게 되었죠.
이 공무합체론은 막부 안팎을 막론하고 많은 찬성을 얻고 있었는데, 특히 히토츠바시가(一橋家)의 당주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1837~1913)나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 久光, 1817~1887), 에치젠번(越前藩)의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 春嶽, 1828~1890) 등이 공무합체파로 유명합니다.
1-7.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은 합의제에 의한 정치 결정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의회제도를 일본에 도입하기 위해 나타난 사상이었습니다.
1863년, 조정은 다이묘였던 사람들을 조의참예(朝議参預)로 임명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참예회의(参預会議, 1863~1864)가 성립하게 된다. 참예회의의 구성원 대부분은 토쿠가와 요시노부, 시마즈 히사미츠 등 공무합체파였었습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에도 공의정체론은 계속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실제로 메이지 정부의 시정방침을 적은 <5개조 서약문> 맨 처음에서도 '널리 회의를 열어 만기(萬機, 모든 중요사항)는 공론에 따라 정할 것'이라면서 공의정체론의 필요성이 강조된 것처럼 말이죠.
1-8. 도막론(倒幕論)=토막론(討幕論)
도막론(倒幕論) 혹은 토막론(討幕論)은 에도 막부를 내쫓고 신정부를 수립하자는 사상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무력으로 막부를 내쫓는 것을 토막(討幕), 대정봉환(大政奉還) 등의 온건한 수단과 방법으로 정권 이양을 도모하는 것을 도막(倒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둘 다 막부를 내쫓고 신정부를 세우는 것엔 동의하는데, 그 방법에 따라 온건파면 도막, 강경파면 토막이 되는 것이죠.
도막파(倒幕派)의 대표 격은 사쓰마번이나 조슈번, 토사번 등 서일본의 웅번들입니다.
1864년, 공의정체론의 대표 기구였던 참예회의의 붕괴로 사쓰마번은 막부를 내쫓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꿉니다.
1866년에는 조슈번과 삿쵸동맹(薩長同盟)을 맺게 되는데, 이 삿쵸동맹에는 토사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중개하는 형태로 관여해 탄생합니다.
한편, 도막(倒幕)과 토막(討幕)은 절묘한 관계로 존재했죠.
1867년 10월 14일, 삿쵸동맹에서 온건적인 <도막의 밀칙(討幕の密勅)>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에 토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실행했는데, 이는 토사번의 야마우치 요도(山内 容堂, 1827~1872)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야마우치 요도의 배후에는 토사번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1838~1897)가 존재했습니다. 게다가 고토 쇼지로는 사카모토 료마의 조언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죠. 토사번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어디까지나 공의정체론의 수단으로써 도막을 목표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정복고와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1868.01)로 삿초 동맹은 관군(官軍)이 되었고, 이후에는 무력을 사용한 토막파(토막노선)가 대세를 차지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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