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존에서 상급국민(上級国民)이란 단어를 보게 되다.
아마존을 둘러보다가 이질적인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교양으로서의 일본의 상급국민(教養としての日本の上級国民)>라는 책 제목에서 본 '상급국민(上級国民)'이라는 말이다. 일본어로는 上級国民[죠-큐-코쿠민]이라고 발음한다. 국민이면 그냥 국민이지 상급국민이란 도대체 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 찾아봤다.
2. 상급국민(上級国民)
상급국민(上級国民)은 일반국민(一般国民)과 다르게 말 그대로 상급(上級)의 국민(国民)을 뜻하는 인터넷 은어(인터넷 속어)를 말한다. 사실 인터넷 은어이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명확하게 어떤 부류가 상급국민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단순히 부유층이나 상류층을 지칭하기도 하고, 일반인의 이해를 벗어난 언동을 보인 정치가, 전문가, 관료 등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정치력이나 재력과 같은 힘을 이용해 범죄나 책임에서 벗어나는 계급을 지칭하기도 한다.
2-1. 2015년, 도쿄올림픽 로고 문제(東京オリンピックロゴ問題)가 발생하다.
Tokyo, Team, Tomorrow의 'T'를 중심으로 붉은색과 하얀색의 일장기 이미지를 담았다.
- 일본 올림픽 위원회(2015.07)
그러나 이 엠블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절 논란이 일어났다. 벨기에의 그래픽 디자이너 올리비에 도비(Olivier Debie)가 자신이 2013년쯤 자신이 직접 만든 리에쥬 극장 로고와 흡사하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로고를 디자인한 일본 사노 켄지로(佐野 研二郎, 1972~)는 이에 전면 부인한다.
표절은 사신 무근이며,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을 집대성해 만든 작품이다.
- 사노 켄지로(佐野 研二郎, 1972~)
그런데 여기서 당시 일본 올림픽 조직위원회 국장을 맡았던 마키 히데토시(槙 英俊)가 큰 불을 지펴버린다.
벨기에 디자이너 측의 로고는 상표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된 것으로 생각된다.
- 마키 히데토시(槙 英俊)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노 켄지로 측에 의한 과거의 디자인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사진이나 작품으로부터 무단 유용하거나 추적한 적이 있었던 것이 판명되면서, 사노 켄지로는 이를 인정했다. 그 여파로 사노 켄지로가 이 올림픽 엠블럼 안에서도 무단 유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노 켄지로와 이 엠블럼 안을 채택한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대한 비판과 때리기도 거세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노 켄지로는 다른 부분에서는 인정했지만 이 올림픽 엠블럼 안 자체에 대해선 도용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엠블럼 안이 그대로 사용될 가능성도 열려 있어 사용을 계속할지, 혹은 중단할지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판단에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던 중 2015년 9월 1일 일본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 엠블럼 안의 채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그 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회견에서는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무토 토시로(武藤 敏郎, 1943~)가 이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는데, 그중에서 엠블럼 응모 작품의 심사에 임한 심사위원장 나가이 카즈마사(永井 一正, 1929~)의 의견을 소개한다는 형태로, '일반 국민 분들(一般の国民の方々)'이나 '일반국민(一般国民)'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사노씨(佐野氏)는 모방을 부정하고, 엠블럼은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한 후에) 나가이(永井) 심사위원장은요, 저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디자인계의 이해로는요, 그러한 사노씨의 9분할된 디자인의 기본, 그것은 피리어드(period, 종지부)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 사노씨의 말대로 이것은 사노씨의 오리지널인 것으로 인식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디자인계로서는 그런 이해입니다."라고 하셨는데, 동시에 말이죠, "이렇게까지 여러 형태로 문제가 되었을 때, 일반 국민분들(一般の国民の方々)이 지금과 같은 설명으로 정말 납득하실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현재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이것은 나가이씨 스스로가 한 이야기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이러한 설명, 그리고 사노씨의 설명은 전문가 사이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서도, 일반국민(一般国民)에게는 알기 어렵고, 유감스럽게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이러한 발언의 문맥에서는 '일반 국민 분들(一般の国民の方々)'이나 '일반 국민(一般国民)'과 대비되고 있던 것은 '디자인계(デザイン界)'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기자회견에서 '일반국민'이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디자인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 즉, '비전문가'라는 의미였다. 다르게 말하면, 본래 의미로는 얼마나 부자든,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있든, 디자인에 정통하지 않으면 일반국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자회견 후 일본의 인터넷 게시판 2ch 뉴스 스레드나 마토메 사이트(まとめ サイト, 게시판의 로그를 따로 저장해 놓은 사이트) 중 이 일반국민(一般国民)이라는 표현을 '위에서부터 내려보는 시선'이라는 식의 논조로 비판적으로 요약해 전달한 글들이 많았다. 그중 일반국민(一般国民)의 대비로 상급국민(上級国民)이라는 표현도 인터넷상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덧붙여 이 말이 퍼지면서, '일반국민'이 '디자인 전문가'와 대비시킨 '비전문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는 원래의 의미는 퇴색했고, '상급국민(上級国民)'이라는 말은 '디자이너', '전문가'가 아니라, '특권 계급', '상류 계급'을 가리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굳이 따지자면 본래의 어형 성립으로 보면 엄밀하게는 오용이긴 하다.
2-2. 2019년, 상급국민(上級国民)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다. (이케부쿠로 폭주사건)
사건 당시를 CG로 구현한 영상이니 참고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5NU7jcVPF4
2019년 4월 19일 12시 25분경, 도쿄도 도시마구 히가시이케부쿠로(東池袋)에서 87세 고령 운전자가 폭주해 그 자신을 포함해 10명이 다치고 모자 2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이케부쿠로 폭주사건(池袋暴走事故)).
일본에서도 교통 사망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 가해자가 체포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닌데, 이 사고를 낸 이즈카 고조(飯塚 幸三, 1931~)는 해당 사고로 가슴이 골절되어 직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일본 경시청은 당장 구속과 수사를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회복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5월 18일에 그가 퇴원했고 그는 곧 메지로 경찰서(目白警察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받았는데, 이 조사를 마치고 경시청은 그가 도망가거나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다고 판단해 그 간단한 조사를 끝내곤 그를 불구속수사했다.
블랙박스 기록과 차량 조사를 마친 결과, 이즈카 고조가 사고 직전부터 빨간불을 두 번이나 무시했던 것이 판명되었고, 그가 브레이크를 밟은 기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차량 결함은 더더욱 없었다!
이즈카 고조의 약력 |
도쿄대학 졸업 계량연구소 소장(1983~1986) 국제도량형위원회 위원 공업기술원장 쿠보타 부사장 일본계량진흥협회 회장 계측자동제어학회 회장 일본공학아카데미 부회장 일본공업표준조사회 부회장 국제도량형위원회 부위원장 국제계측연합(IMEKO) 회장 서보중광장 수여 |
여기서 논란점은 경찰이 아무리 상해를 입었던 사람이라 한들 용의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은 것과 그리고 보도 기관이 그를 '용의자'가 아니라 이즈카씨(飯塚さん) 혹은 '이즈카 전원장(飯塚 元院長)'이라고 불렀다는 것에 대해 일본 경시청이나 미디어가 그를 특별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특권계층을 비꼬는 의미로 표현한 상급국민(上級国民)이 인터넷에 다시 퍼지게 된다.
2-3. 상급국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2-3-1. 정치가
특히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국회 회기 중에 불체포 특권이 있거나 신칸센이나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무료 패스가 지급되기도 하는 등 법률이나 제도에서 여러 가지 혜택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진지하게 일하고 있는 정치가들에 대해서도 상급국민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2-3-2. 고위 관료
정치인이 선거를 통해 당선되는 반면 관료는 시험에 합격해 채용되면 법에 의해 신분이 지켜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 이상의 상급 민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공무원이어야 할 고위 관료가 상급국민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관공서 인허가 권한과 같은 다양한 권력을 갖고 감독하는 입장 자체는 공무 직급상 크게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상급국민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2-3-3.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도 이 그룹에 해당하지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이들 뿐만은 아니다. 폭넓은 의미에서 업계 단체의 장은 그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대기업 사장, 대학과 같은 연구기관의 수장 등도 상황에 따라서는 이 상급국민에 해당할 수도 있다. 요점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사람은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도 주변이 신경을 써서 여러 가지 일에 우대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상급국민 대우를 받게 될 수도 있다.
2-3-4. 재력가
돈을 지불하고 나쁜 일을 무마한다는 것이 표면화되어 뉴스가 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유전무죄'라는 말이 한 때 유행하기도 했고 지금도 종종 쓰이고 있다. 이런 일은 재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재력가=악'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재력이 있다는 것은 상급국민이 되는 하나의 요인일 수도 있다.
2-3-5. 부모의 후광(親の七光り)을 받은 사람
부모의 후광을 받고 쉽게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2세라도 나름대로의 고생은 있지만, 배경이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의 사람에 비하면 훨씬 무언가를 이룩하기가 쉽다. 젊은 나이에 상급국민처럼 보이는 사람은 '부모의 후광'이 크다고 생각된다. 물론, 부모의 후광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부정한 방법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아님을 꼭 염두하자.
3. 내 의견
전형적인 급나누기 문화의 하나로 보여지는 일본의 '일반국민(一般国民)-상급국민(上級国民)' 논쟁은 아마, 고위직에 있거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만큼 더 책임을 느끼고, 더 선한 영향력을 펼쳐주길 바라는 일본 국민들의 바램에서 나타난 말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든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높으신 분'이라는 말이 꽤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실제 그 높으신 분들이 떼어먹거나 돈이나 힘으로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경우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 그런 사람도 있는 편이지만, 아직은 대체적인 이미지나 다양한 뉴스를 접했을 때 듣는 이야기를 모아보면 아직 우리 사회부터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위치에 맞게 다시 마음을 다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업에 충실히 임하며 위로 나아갈 기회를 다잡았으면 좋겠고, 마음속으로는 그 높으신 분들도 사실 그냥 우리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의견은 고위층과 그들의 잘못을 옹호한다는 발언은 아니다(당연히 고위층이라는 명목으로 법적 편의를 봐주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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