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폭투하와 패전
1945년 8월 6일, 미국에 의해 일본의 패배가 예견된 상황에서 당시 대본영이 있던 일본제국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또 8월 9일에는 군수공장이 모여있던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했다. 참고로 이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폭격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리고 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총사령부(GHQ)의 보도 통제로 50년대 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립조약에 의해 교전하지 않던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의 얄타 회담 합의에 따라 8월 8일 밤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렇게 소련은 쿠릴 열도, 사할린, 만주, 한반도 북부로 차례차례 진격했다.
전일본군의 무조건항복(제국정부에 대해서는 '포츠담 선언 수탁'이라는 조건부 항복) |
8월 10일에는 덴노의 국가 통치권에 변경을 가할 수 있는 요구를 포함하지 않음을 양해한다면 포트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발표가 일본 국내의 라디오와 국외의 중립국에게 전해졌다.
8월 14일 저녁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이른바 성단(聖断, 덴노의 결단)에 따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 中
이는 다음 날 8월 15일, 쇼와 덴노가 스스로 <종전의 칙서(終結ノ詔書)>을 읽으면서 녹음한 옥음방송(玉音放送)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후 8월 17일 스즈키 칸타로 내각(鈴木貫太郎内閣, 1945.04~1945.08)이 총사퇴하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東久邇宮内閣, 1945.08~1945.10)이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태평양전쟁은 끝나게 된다.
전투는 끝났지만 땅따먹기와 사후 처리는 계속되었다.
8월 15일 이후에도 소비에트 연방은 쿠릴 열도의 슘슈섬과 사할린 섬 남부 등을 8월 23일까지 점령했으며, 9월 2일에는 <포츠담 선언>에 일본이 조인하면서 일본의 주권이 제한되어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 또는 총본부(GHQ)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일본이 현재까지도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방지역(北方地域)은 결국 9월 5일 소비에트 연방의 손에 모두 들어가게 된다.
2. 전쟁과 오키나와
이에 대해서는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913)을 참고 바라며, 내용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간단히 요약한 표로만 정리할 것이다.
오키나와 근현대사 요약 | |
1872 | 일본제국 메이지 정부에 의해 류큐번으로 편입 |
1879 | 일본제국 메이지 정부에 의한 강제 병합 |
1945 | 오키나와 전투(태평양 전쟁 격전지) : 일본 본토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 |
일본 패전 이후 미국령으로 편입 => 현재 일본 내 미군시설의 70%가 오키나와에 위치하게 된 결과를 가져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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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70' | 한국 전쟁(1950~1953), 베트남 전쟁(1955~1975) 중 미군의 전초 기지 역할 => 현재 일본 내 미군시설의 70%가 오키나와에 위치하게 된 결과를 가져옴 |
1972 | 일본국에 반환 |
3. 전쟁과 원폭에 대한 시각들
침략전쟁의 책임 논쟁 | 원폭투하의 정당성 논쟁 |
"정부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군부가 일으킨 군사행동일 뿐!" "일본의 지도자들끼리 회의를 해 미국과의 전쟁을 결쟁한 것을 보면 정부도 전쟁에 책임이 있음!" "사실상 군의 통수권자인 덴노에게 전쟁을 그만할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덴노에게 책임이 있음!" |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최후의 수단!" "원폭 투하 자체로 수 많은 이들이 사망하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기에 그 자체로서 용납할 수 없다!" |
4. 총사령부(GHQ)의 점령 통치
4-1. 영토 분할
종전 후, 일본은 이전의 통치권을 들고 있던 타이완, 조선, 남양군도, 그리고 일본 본토(=내지)의 일부였던 남카라후토(南樺太, 현 사할린 섬), 치시마 열도(千島列島, 현 쿠릴 열도) 및 시코탄 섬(色丹島), 하보마이 군도(歯舞群島),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난세이 제도(南西諸島)의 북위 30도 이남을 잃게 된다. 이 중, 난세이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는 후에 미국으로부터 반환된다.
쿠릴 열도에 대해서는 <상트페테르 조약(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ий договор, 1875)>에 의해 영유권을 확정했기에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에 속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일본 정부는 현시점에서는 쿠릴 열도 중 쿠나시리 섬(国後島), 에토로후 섬(択捉島, 이투루프 섬) 두 섬에 대해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은 홋카이도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합국의 일본 점령정책은 소련이 자국령으로 편입한 사할린 남부, 쿠릴열도를 제외하고 사실상의 미합중국 단독으로 이루어졌으나 미국의 고등판무관의 직접통치방식에 의한 군정은 오키나와에만 시행되었을 뿐 일본 본토는 간접통치방식을 채택해 일본정부를 통해서 정책이 실시되었다.
점령을 둘러싸고 연합국 내부에도 이견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8~1953)은 홋카이도 북쪽 절반의 소련 점령을 제안했으나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이 이를 거부했다. 한편 트루먼은 공산주의 봉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며 그리스 내전(Eμφύλιος Πόλεμος, 1943~1949)에 개입했고 영국 총리 처칠이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에서 예측한 동서 냉전이 본격화됐다.
4-2. GHQ의 통치 기간 중
1945년부터 1952년까지 7년간 일본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주체는 총사령부(GHQ)라고도 불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였으며, 그 최고사령관은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우파로, 본래 반공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으나, 전후 직후의 민주화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東久邇宮内閣, 1945.08~1945.10)의 예상을 뛰어넘는 급진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후 직후의 민주화의 기본 목표는 군국주의의 재발을 막고 일본에 민주정부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민주화 진전에 대응하지 못하고 총사퇴했으며, 이후 시데하라 내각(幣原内閣, 1945.10~1946.05), 요시다 내각들(吉田内閣, 1차, 2차, 3차, 1차 개조, 2차 개조, 3차 개조 모두를 포함), 카타야마 내각(片山内閣, 1947.05~1948.03), 아시다 내각(芦田内閣, 1948.03~1948.10) 등을 통해 농지 개혁, 재벌 해체, 노동 개혁의 3대 경제 개혁(三大経済改革)이라 불리는 민주화 조치가 시행된다. 이런 여러 조치 시행들은 병력과 자원 투입에 여력이 없었기에 간접통치로 이루어졌다. 다행인 것은 일본인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이러한 통치는 성공적이었다는 것.
또 부인참정권(婦人参政権, 여성참정권)이 인정되는 한편,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 철폐됨과 함께 2차례에 걸친 공직 추방으로 사회지도자층 20만 명이 군국주의자로 공직에서 추방처분된 데다 피선거권도 정치처분된다. 특히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1967)와 총리 자리를 다투는 위치에 있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 一郎, 1883~1959)의 경우, 전쟁 전 교토제국대학에서 발생한 사상탄압사건인 타키가와 사건(滝川事件, 1933) 당시 문부상(현 문과상(文科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또, 점령군에 의해 검열이 철저해져 연합국이나 조선인에 대한 비판하는 보도는 금지되었다. 실제로 원자폭탄으로 인해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총사령부(GHQ)의 보도 통제로 50년대 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1946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極東国際軍事裁判, 1946.05~1948.11)이 열려, 전쟁범죄인(전범)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A급(전쟁을 계획하고 수행한 평화에 대한 죄), B급(포로 학대 등 관례적 전쟁범죄), C급(학살 등 사람의 도리에 대한 죄)으로 구분해 각각 처벌되었다. 참고로 A, B, C는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고 죄의 종류를 분류한 것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921)을 참고바란다.
다만 이 제판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철저히 추궁치 않았으며, 특히 쇼와 덴노는 <쇼와덴노 독백록(昭和天皇獨白錄)>에서 '자신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개전을 결정한 군부와 내각의 방침을 승인했을 뿐'이라며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과거의 군국주의자들이 다시 복귀해 전후 일본의 정관계, 경제계는 전쟁 전의 인적 관계를 계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51년 4월, 맥아더는 6.25 전쟁 중에 원자폭탄을 사용하려고 하는 등 강경한 입장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다 해임되었고, 일본 GHQ 최고사령관은 미군 육군 대장 매슈 벙커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1993)가 되었다.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임명권자 |
1대 | 더글러스 맥아더 | 1945.08.15~1951.04.11 | 핸리 S. 트루먼(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
2대 | 매슈 벙커 리지웨이 | 1951.04.12~1952.04.28 |
일본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소련 점령지역(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 미국 점령지역(류큐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을 제외한 일본정부 통치지역(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이즈 제도 및 그 부속 도서)에서는 일본에도 주권이 있었지만, 모든 법령, 문서는 연합군의 엄격한 사전검사와 허가가 필요했다.
덴노(天皇)는 일본국(日本国)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 - <일본국헌법> <제1장 덴노> <제1조> : 천황제를 일본의 상징적 구심점으로 인정(상징천황제(象徵天皇制)) |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希求)하며,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은 기를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 <일본국헌법> <제2장 전쟁의 포기> <제9조> |
제1차 요시다 내각(1946.05~1947.05)은 연합군의 허가 아래에서 '국민주권, 평화주의, 기본인권의 존중'이라는 3대 원칙에 따라 GHQ에 의해 초안이 작성된 1946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이 공포되었고, 이듬해 1947년 5월에 시행되었다. 이후에는 1951년 9월 8일에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1951.09.08)>를 맺어 연합국과의 강화가 완료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대신 조속한 시일 내에 아시아의 반공 파트너로서의 일본 재건을 목적한 것이었고 낮은 강도의 느슨한 배상만 청구했으며, 주요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의 의견은 제외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 조약으로 1952년 4월 28일에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주권은 회복했지만 주일미군은 거의 그대로 잔류했고, 전 국토기지 방식으로 불리는 방법에 따라 일본 각지에 미군기지가 남겨졌다.
5. <국화와 칼>
<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Patterns of Japanese Culture)> 혹은 약칭 <국화와 칼(菊と刀)>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가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 국무부의 요청으로 집필한 일본의 문화를 설명한 문화인류학적 도서다. 이 책은 당시의 일본인은 어떠했는가를 쓴 책으로서 전후 일본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조금 있었기에 당시엔 널리 읽혔던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치해야 할 것인가?
- 미국 국무부가 책을 읽기 전까지의 고민
이 책은 미국 전쟁정보국(OWI) 일본팀의 장이었던 베네딕트가 정리한 5장으로 이루어진 보고서 <일본인의 행동 패턴(Japanese Behavior Patterns)>을 기초로 해서 쓰였으며 1946년에 출판되었다. 베네딕트는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1858~1942)로부터 배운 급진적 문화상대주의의 개념을 일본문화에 적용하기 위해 은(恩, 은혜)나 의리(義理)와 같은 일본문화 고유한 규범을 분석했다.
일본 점령 성공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음으로써 패 전 후의 일본 처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
- 미국 국무부가 책을 읽은 후에 내린 결론
6. 상징천황제(象徴天皇制)
덴노(天皇)는 일본국(日本国)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
- <일본국헌법> <제1장 덴노> <제1조>
상징천황제(象徴天皇制)는 <일본국헌법><제1조>에 규정된 덴노(天皇)의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하는 제도를 말한다.
정의에서 설명했듯 <일본국헌법><제1조>는 덴노를 일본국과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한다. 이 지위는 주권자인 일본국민(주권재민)의 전체의 의사에 근거하는 것으로(제1조), 국회가 의결하는 <황실전범(皇室典範)>에 근거해 세습에 의해 계승된다(제2조). 덴노의 직무는 국사행위를 행하는 것으로 한정되며(제7조),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한다(제3조). 국정에 관한 권능을 전혀 갖지 않는다(제4조).
또한 <대일본제국헌법>에서는 '덴노는 나라의 원수로 하여 통치권을 총람(総攬, 모두 관할함)해 이 헌법의 조규에 의해 행한다(제4조)'고 규정되어 있어 덴노가 일본의 군주이자 원수였으나, <일본국헌법>에서는 '상징'으로 있어 국정에 관한 권한을 갖지 않으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에 통상 상징천황제라고 부른다.
이는 당시 이런 헌법을 만들 때 덴노를 전쟁범죄인으로 재판에 회부할 경우 폭동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덴노
의 부재는 일본 점령 정책이 원활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그러면서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는 무력한 덴노의 존재를 허용함과 동시에 이용해 덴노를 축으로 일본을 보수적이고 통합적인 사회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7. 미국과의 반공(反共) 동맹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 국내 경제는 궤멸하고, 국민 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으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것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사태는 순식간에 변했다.
미국은 당초 일본의 완전무장해제를 통해 비군사화를 수행하고 극동의 스위스를 건설하겠다고 똑똑히 말했다. 그러나 정치 반동의 경향은 1947년에 일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 북쪽에 공산주의 세력을 형성하거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더 나아가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으며, 전후 일본 국내 변화의 특징적인 부분인 노동운동의 고조로, 일본국유철도(日本国有鉄道)이나 요리우리신문(読売新聞) 등에서의 노동조합에 의한 자주관리 등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일전략을 완전히 전환해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고, 동아시아의 최대 중요 군사 전략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면서 민주화보다 반공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으로의 전환인 역코스(reverse course, 逆コース)라는 정책 전환이 차례차례 일어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찰예비대를 자위대로 바꾼 것..! 이는 모두 공산주의와 소련을 의식한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구상 중 하나였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결국 일본의 보수세력은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용해 지배체제를 재확립하게 되었다. 즉, 국가체제 빼고는 과거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8. 한국전쟁과 일본
한국전쟁은 전쟁이 발발한 이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점령하 일본의 정치, 경제, 방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쳐 하나의 중대한 전환 동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중계기지로 쓰이면서 일본은 미국과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전쟁을 계기로 안정적 산업 발전을 이룰 기반 또한 형성되어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8-1. 주한미군에서 일어난 분쟁
일본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과 영국군에서는 한국에 대한 원군이 차례차례 보내졌으나 열세가 전해지던 시기에는 사기가 저하되어 오구라 흑인 미군 집단 탈영 사건(小倉黒人米兵集団脱走事件, 1950.07)과 같은 탈영병에 의한 소란 사건도 발생했다.
8-2. 역코스
정치적, 방위적으로는 북한을 지원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전범 추궁이 완만해지거나 배상 부담이 갑자기 줄어들었고 그 상태로 미국의 비호 아래 국제 무대에 재등장하게 된다. 또한 일본을 독립시키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이 시급해 1951년 9월 8일 <(구)미일안전보장조약>과 함께 체결되었다. <센프란시스코 조약> 발행에 앞서 연합국 최고 사령관(SCAP) 각서에 따라 전쟁 배상 책임은 완전히 면제되기도 했다... 여기에 치안 유지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1950.08~1952.10)가 발족되면서 사실상 군대까지 부활한다... 이러한 현상을 <요미우리신문>에서 역코스(逆コース)라고 불렀다.
8-3. 재일교포와 일본공산당에 의한 무장봉기, 테러 사건 및 좌익 운동 규제 강화
한국전쟁 중 재일조선인을 필두로 일어난 사건 | |
1951.03.21 | 아사쿠사 미군 폭행 사건(浅草米兵暴行事件) |
1951.12.01 | 히가시나리 경찰서 습격 사건(東成警察署襲撃事件) |
1951.12.16 | 집속탄 사건(親子爆弾事件) |
1952.05.25~1952.05.26 | 타카다 사건(高田事件) |
1952.05.30 | 오오카지미나미 사건(大梶南事件) |
1952.06.24~1952.06.25 | 스이타 사건(吹田事件) |
히라카타 사건(枚方事件) | |
1952.07.07 | 오오스 사건(大須事件) |
공산주의계 재일본조선인련맹(在日本朝鮮人連盟, 1945~1949) 소속을 포함한 여러 재일조선인, 일본공산당원 등에 의한 일본정부와 경찰에 대한 무장봉기, 테러사건도 다수 발생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한국전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연합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소비에트 연방과 이에 호응한 일본내 공산주의계의 계획적 소요사건이었다. 에이 일본 정부는 1952년 7월 21일 <파괴활동방지법(破壊活動防止法, 1952~)>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러한 사건들은 간간히 일어났는데, 특히 재일
9. 요시다 독트린
요시다 독트린(吉田ドクトリン)은 <일본국헌법>에 명시된 제한 중 안전보장의 많은 부분을 미국에 담당하게 하고, 일본 정부는 경제 성장과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경무장(軽武装, armed lightly), 경제외교에 근거한 국가방침이자 국가전략을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이 방침을 명확히 내세운 요시다 시게루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 미국은 이를 미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의 국제적 야망을 막는 역할이라고 꽤 좋아했다.
요시다 시게루의 목적은 국력의 전부를 제2차 세계 대전 후 피폐해진 일본 경제 부흥에 충당하고, 그동안의 국방을 미국에 담당케 하는 것에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후에야 일본의 군사비를 증가시키도록 재차 요구했고, 이에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일본국헌법> 중 제9조의 '국권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라고 정한 조문을 내세웠다.
그렇게 미국과는 1954년 3월 서명한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日米相互防衛援助協定, 1954)>을 통해 미국은 지역의 안전보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국토에 미군을 배치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일본은 자신의 방위에 책임을 다하도록 의무화되어 방위 목적으로만 재군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경찰예비대(警察予備隊)와 해상경비대(海上警備隊)에서 보안대(保安隊), 경비대(警備隊)로, 최종적으로 1954년 7월에는 육상자위대(陸上自衛隊)와 해상자위대(海上自衛隊)를 창설했으나, 세출(歳出, 지출되는 세금)을 차지하는 군사비의 비율을 늘리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미국이 일본을 보호하기에 일본은 국방비에 투입해야 할 돈을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할 수 있었다.
경찰예비대 (警察予備隊, 1950.08~1952.10) |
보안대 (保安隊, 1952.10~1954.06) |
육상자위대 (陸上自衛隊, 1954.07~) |
해상경비대 (海上警備隊, 1952.04~1952.07) |
경비대 (警備隊, 1952.08~1954.06) |
해상자위대 (海上自衛隊, 1954.07~) |
결과적으로 이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선진국 건설'을 환영하는 대중들의 지지로 무역 및 기술 혁신에 초점을 맞춘 이 국가 방침을 취함으로써 일본은 군사비를 들이지 않고 평화와 안정을 누리면서 기적적인 경제 부흥을 이루어 세계 대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이루자 요시다 시게루는 노년에는 헌법 개정에 의한 국방군의 유지를 주장했다. 일본은 이미 세계 제3위(요시다의 죽음 이듬해 1968년에 서독을 제치고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경제 부흥의 목적은 달성했고, 요시다 독트린은 역할을 마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시다 시게루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그가 취한 요시다 독트린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이 방침의 원래 목표는 국제정세를 잘 이용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존재감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요시다 독트린은 냉전기 내내 일본 주류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여겨졌다.
10. 보수정치체제(55년 체제)의 탄생
10-1. 55년 체제 탄생 배경
GHQ 점령하의 일본에서 GHQ 지령에 의해 무산정당(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이 합법화되는 한편 동시에 보수정당이 난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일본사회당은 1951년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대한 태도 차이로 우파사회당, 좌파사회당으로 분열됐으나 보수정권에 의한 역코스나 개헌에 대항하기 위해 '호헌'과 '반안보'를 내걸고 1955년 사회당 재통일이 이뤄졌다. 이 일본사회당의 통일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의 요청으로 그동안 존재했던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이 보수합동해 자유민주당이 탄생하고, 보수정당이 제1정당이 됐다. 외관상으로는 개헌 보수와 안보 유지를 표방한 자유민주당과 호헌 혁신과 반안보를 표방한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제가 되어 널리 환영받았으나, 기본적인 의석 비율은 자유민주당 2/3, 일본사회당 1/3로 양대 정당제의 장점이어야 할 정권교체 원활화에 기여하지는 못했으며, 그렇게 보수안정정권이 수립된다.
1955년, 당시의 세계정세는 미합중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이 한창이었는데, 55년 체제도 냉전이라는 국제사회에 맞춘 이른바 대리전쟁으로서의 일본 국내 정치구조(국내 냉전(国内冷戦))라고 지적하는 의견 또한 있다.
다른 부분이지만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에 초점을 둔 국제적 목표를 추구하며 비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수단에 집중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11. 안보 투쟁(安保闘争)
11-1. 안보 투쟁의 배경
1951년 9월 8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47개국과 일본 사이에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당시 조약을 맺을 때 주석전권위원으로 있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동시에 평화조약에 편입되어 있던 특약(제6조a항 '단, 양국 협정에 의한 특정 국군만의 주둔 용인')에 근거한 <구 미일안보조약>이라고도 부르는 <일본국과 미국 간의 안전 보장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국군 중 하나인 미군이 재일미군(在日米軍)이 되어 계속해서 일본에 주둔하게 된다.
또한 당시 냉전 중이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서방권과 대치하던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권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립 의사를 표현해, 49개국의 조약 체결국에 들지 못한 데다, 자국을 사실상의 가상적국으로 삼은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대해서도 극렬한 비난을 보였다.
1958년경부터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의 키시 노부스케(岸 信介, 1896~1987)가 주도한 내각들에 의해 개정 교섭이 이루어져 1960년 1월에 키시 노부스케가 보낸 전권단이 미국을 방문에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와 회담을 한 뒤 <신안보조약> 조인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에 합의했으며, 그렇게 1960년 1월 19일, <신 미일안보조약>이라고도 부르는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을 맺게 된다.
<신미일안보조약> |
1. 내란에 관한 조항 삭제 2. 미일 공동 방위 명문화 :일본을 미군이 지켜주는 대신에 재일미군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자위대와 재일미군이 공동으로 방위행동을 할 것 3. 재일미군의 배치, 장비(装備, 무장 준비)에 대한 양국 정부의 사전협의제도 설치 등등 |
이러한 안보조약을 단순히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기 위한 조약에서 미일공동방위를 의무화한 보다 평등한 조약으로 개정하는 것이었다.
키시 노부스케 수상은 <신미일안보조약>을 둘러싼 국회 심의가 이뤄지자 안보 폐기를 내세우는 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 노농파에서 유래)의 저항으로 진척되지 않았다. 체결 전부터 개정으로 일본이 전쟁에 휘말릴 위험이 커진다는 우려와 <재일미군 재판권 포기 밀약>에서 파생된 재일미군 범죄 면책 특권에 대한 비판(재일미군 재판권 포기 밀약 사건)으로 인해 1960년대에는 <신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이 고조된다.
스탈린 비판을 받고 공산당을 탈당한 급진파 학생들이 창당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공산동, 분토(ブント))이 주도하는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 전학련)은 '안보를 무너뜨릴 것인가, 분트(공산동)가 쓰러질 것인가'를 내걸고 총력을 기울여 반안보투쟁에 나섰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회주의적 투쟁과 기존의 보수 정치에 반대하는 대중의 움직임이 지속해서 일어났는데, 이렇게 1959년부터 1960년,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열린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노동자, 학생, 시민, 비준 자체에 반대하는 좌익과 신좌익 운동가들이 참여한 반정부, 반미운동과 그에 따른 대규모 시위운동을 안보투쟁(安保闘争) 혹은 안보소동(安保騒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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