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일본의 성장부터 90년대 일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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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일본의 성장부터 90년대 일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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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화(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고도 경제 성장기(1955'~1973')

1-1. 고도 경제 성장기 개관

실질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1961년부터의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과 그와 비교한 G7, OECD 평균 실질GDP 성장률 추이 (출처 : OECD)

미국의 최전방 중요 거점이 된 일본은 농지개혁이나 노동개혁에 의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비해 국내시장이 넓어진 점, 유자철선(有刺鉄線, barbed wire)이나 드럼통 등 보급물자 생산과 수송에 의한 특수(特需, 특별 수요), 그리고 방대한 주일 미군(재일미군)의 생활소비 등 수요 증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기적적인 속도로 경제가 부흥하고, 더욱이 쇼와 30년대(1955년부터 1965년)에 이은 경이적인 고도경제성장을 이루기에 이른다.

1958년의 도쿄타워(좌측)과 고도성장기에 세워진 빌딩들(우측)

도시 지역에는 고층 빌딩이 늘어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나 교외의 건매주택(建売住宅, 짓고 파는 주택)에 사는 사람이 급증했다.

전차와 디젤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쇼와 30~40년대

일본 전역에서 증기기관차가 사라지고 전차(電車)와 디젤차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964년 10월에 운행개시한 도카이도 신칸센(상단), 도메이 고속도로(하단 좌측), 메이신 고속도로(하단 우측)

주요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신칸센(도카이도 신칸센)과 고속도로(도메이 고속도로, 메이신 고속도로)가 완성됐다.

혼슈 횡단 운하 구상도. 이세만으로 뚫을지, 오사카만으로 뚫을지에 대해서 아직도 논의중이다. (출처 : ameblo.jp)

욧카이치시 시장(四日市市長) 히라타 스케노리(平田 佐矩, 1895~1965)나 자민당 국회의원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 1890~1964) 등에 의해 토카이 지방(東海地方)과 동해를 잇는 일본 횡단 운하(日本横断運河) 건설도 계획되었다.(이는 현재도 계획상에만 존재한다..)

1945년대부터 유래했던 가정에 꼭 있어야 할 3종의 신기(흑백TV, 세탁기, 냉장고) (출처 : sancha.keizai.biz)

또한 거의 모든 가정에 TV,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 전화가 보급되면서 자가용도 드물지 않게 됐다. 백화점이나 호텔에 가거나 특급열차를 타면 냉방 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레토르트 카레 (출처 : @retoro_mode)

빵이나 고기 케이크 같은 양식이나 양과자(서양식 과자)도 평소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평균수명도 세계 수준을 따라잡게 됐고, 대학 진학률도 격증했다. 그 대신 대도시 지역에서는 인구과밀, 농촌 지역에서는 인구과소라는 현상이 생겨 공해와 교통전쟁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1-2. 전후 경제사의 흐름과 요약

시기 명칭 특징
1954.12~1957.06 진무 경기(神武景気) 고도경제성장의 시작이자 호황
1957.07~1958.06 나베조코 불황(냄비 밑바닥 불황, なべ底不況)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불황
1958.07~1961.12 이와토 경기(岩戸景気) 호황
1961~1971 소득 배증 계획(所得倍増計画) 국민총생산을 26억엔까지 증배시키기 위한 경제계획
1962.11~1964.10 올림픽 경기(オリンピック景気) 올림픽으로 인한 호황
1964.11~1965.10 증권불황(証券不況) 중공업의 부진과 증권사의 경영 악화로 인한 불황
1965.11~1970.07 이자나기 경기(いざなぎ景気) 진무 경기와 이와토 경기를 웃도는 호황
1970.03~1970.09 일본 만국 박람회(日本万国博覧会)
(=1970년 세계 박람회)
일본의 빠른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행사
1971 닉슨 충격(Nixon shock) 미국 닉슨 대통령이 일으킨 경제 충격
1972 일본열도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
-> 열도개조경기(列島改造景気)
대형 공공사업과 인플레이션(물가상승)

1-2-1. 경제대국으로의 성장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중반까지(약 20년 이상) 매년 약 10% 국민총생산(GNP)이 증가했으며,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시행된 국민소득 배증계획이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되어 그 동안 잠깐의 증권불황도 있었지만 이자나기 경기로 역대 진무 경기와 이와토 경기를 웃도는 대호황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을 유지했다. 참고로 이 때 중화학공업 제품 중심으로 성장했다.

 

1-2-2. 완만한 경제성장

1971년 8월, 미국이 더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해 지금까지의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준 닉슨쇼크(1971.08)가 일어났고, 1973년, 아랍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 정책으로 국제 성유 가격이 급상승해 전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었던 제1차 석유 파동(1973.10~1974.03)이 일어났다.

 

이로 인한 대혼란은 일본에도 영향을 줬는데, 일본은 곧 자국 산업을 기술집약적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재편한 뒤 1970년대 말부터 다시 완만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이러한 성장은 1980년대 말에는 세계 1위인 미국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는데, 당시 소니의 전자제품이나 도요타, 닛산의 자동차, 캐논과 니콘의 카메라의 미국 수출도 이에 큰 영향을 줬다.

 

 

 

 

1-3. 가전제품 붐(가전 붐)와 1억 중산층 사회

쇼와 20년대에 유명했던 가정에 꼭 있어야 할 3종의 신기(흑백TV, 세탁기, 냉장고) (출처 : sancha.keizai.biz)

쇼와 20년대(1945년~1954년)에는 흔히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라고 불리던 일반 가정의 주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된 '흑백 TV,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그 외에 밥솥, 청소기도 인기를 끌었다.

신삼종의 신기 혹은 3C라고 불리던 컬러 TV, 에어컨, 자동차 (출처 : rekishi-memo.net)

고도경제성장기(1955년~1973년)에는 신삼종의 신기(新三種の神器)라고 불리던 '컬러 TV, 에어컨, 자동차'가 3C라고 불리던 동경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여기서 3C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영어 앞글자를 따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즉 3C는 color TV(컬러 TV), cooler(에어컨), car(자동차)를 말한다.

(위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레코드 플레이어, 전기밥솥, 토스터, 전기 코타츠

그 외 삼종의 신기 외에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었건 가전에는 레코드 플레이어, 전기밥솥, 토스터(토스트기), 전기 코타츠 등도 널리 쓰이게 된다.

 

이 당시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빈부격차가 적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인의 90%는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했다는 일억총중류(一億總中流)라는 국민의식과 평등한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내수가 성장의 주요 엔진으로 작용했으며, 3종의 신기가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1-4. 쇼와 겐로쿠 문화(昭和元禄文化)

겐로쿠 시대에  화가 오가타 고린이 그린 제비붓꽃병풍(燕子花図)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겐로쿠 문화(元禄文化)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겐로쿠 문화(元禄文化)는 에도 시대 중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산업이 발전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잔 도시의 조닌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를 말하는데, 서민의 생활, 심정, 사상 등이 담긴 출판물이나 극 등이 크게 발달했다.

 

이제 쇼와 시대로 돌아와보자.

쇼와 시대에 이런 다양한 서민의 생활상을 담은 출판물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데서 쇼와 겐로쿠 문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문화를 종종 쇼와 겐로쿠(昭和元禄)라고 부르며, 주간지나 월간지의 창간이 두드러졌다.

(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테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후지코 후지오 콤비, 하세가와 마치코, 미즈키 시게루, 아카츠카 후지오

<철완 아톰>, <불새>, <블랙 잭>, <붓다>, <신비한 메르모>, <유니코>, <제트소년 마르스> 등을 쓴  테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1989), <가면라이더 시리즈>, <사이보그 009>, <슈퍼전대 시리즈>, <젤다의 전설(만화)> 등을 쓴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 章太郎, 1938~1998), <도라에몽>, <키테레츠 대백과>, <침푸이>, <퍼맨>, <포코냥>, <울트라B>,  <괴물군>, <웃는 세일즈맨>, <닌자 핫토리군>, <오바케의 Q타로>,  등을 제작한 만화가 콤비 후지코 후지오(藤子 不二雄), <사자에상>, <심술쟁이 할머니> 등을 쓴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 町子, 1920~1992), <게게게의 키타로>, <캇파의 산페이>, <악마군>, <전원 옥쇄하라!>, <도카이 도요츠야 괴담>, <코믹 쇼와 역사 전8권>, <농농할멈과 나 전2권>, <일본요괴대전> 등을 쓴 미즈키 시게루(水木 しげる, 1922~2015), <오소마츠 군>, <비밀의 앗코짱>, <천재 바카본>, <맹렬 아타로>, <폭풍을 넘어서> 등을 쓴 아카츠카 후지오(赤塚 不二夫, 1935~2008) 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만화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80년대에는 일본에서 발행된 서적 및 잡지류 중 30% 차지
애니메이션이 발달할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전쟁
 → 이때 쌓인 경험과 기술이 패전 후 애니메이션 발달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모모타로 바다독수리(桃太郎の海鷲)>(1943)

(좌측부터) 쿠로사와 아키라, 츠부라야 에이지

<들개>, <꿈>, <스가타 산시로>, <라쇼몽>,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등으로 유명한 쿠로사와 아키라(黒澤 明, 1910~1998), <고지라 시리즈>, <울트라 시리즈>를 감독한 츠부라야 에이지(円谷 英二, 1901~1970) 등이 만든 일본영화(邦画) 등 쇼와 문화와 대중문화가 생겨났다.

일본영화의 부상
1912년, 닛까스(日活) 설립
전화에 살아남은 쇼치쿠(松竹), 도호(東宝) 등의 주요 영화사의 설비

GHQ가 일본 국민들에게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영화관의 재건 장려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등의 명감독 등장

(좌측부터) 가수였던 미소라 히바리와 후지야마 이치로, 배우였던 이시하라 유지로, 아츠미 키요시

류코카(流行歌, 유행가)가 보급되어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1937~1989)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 一郎, 1911~1993)와 같은 가수나 이시하라 유지로(石原 裕次郎, 1934~1987)나 아츠미 키요시(渥美 清, 1928~1996)와 같은 배우스타가 되어 연예계(예능계)에서 활약했다.

 

만화, 영화와 함께 TV방송도 보급되었다.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에는 프로야구 V9시대(요미우리 자이언츠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프로야구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시대)였으며, 오즈모는 쇼와 30년대부터 쇼와 50년대에 걸쳐 흥했고, 역도산(力道山, 1924~1963)이 프로레슬링에서 대활약하는 등 격투기가 인기를 끌었다.

거인(야구), 대붕(스모), 달걀구이(효자 식재료)는 쇼와 시대의 유행어였다.

이는 당시 스포츠 유행어였던 쿄진・타이호우・타마고야키(巨人・大鵬・卵焼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쇼와 시대 3대 유행어 한국어 뜻 의미
쿄진(巨人) 거인 일본 프로 야구(NPB)의 거인군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読売ジャイアンツ)
타이호우(大鵬) 대붕 오즈모(大相撲)의 요코즈나(横綱)였던 타이호우 코우키(大鵬 幸喜, 1940~2013)
타마고야키(卵焼き) 달걀구이 물가가 급등하던 시기에 가격 변동이 거의 없어 흔히 먹을 수 있는 달걀로 만든 요리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도카이도 신칸센, 메이진 고속도로, 일본 만국 박람회, 1964년 도쿄 올림픽

그 외 1964년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업했고, 1963년에는 메이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이 1970년에는 오사카에서 일본 만국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후 중동 전쟁이 가져온 오일 쇼크로 이런 파란만장한 성장은 끝나게 된다.

 

 

2. 안정 성장기와 그에 따른 거품 경제

2-1. 안정적인 경제 성장기에 접어들다.

고도경제성장에 의해 일본은 과잉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생활은 유사 이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 되었다. 두 차례 오일쇼크(1973~1974, 1979~1981)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불황은 단기간에 끝났고 소재산업(상품의 제조에 사용되는 원재료 또는 중간 생산물과 관련된 산업) 등 일부 중간재나 원자재 산업은 몰락했지만 에너지 절약화를 추진하면서 첨단산업서비스업이 성장해 안정성장으로 순조롭게 이행할 수 있었다.

1960년대부터 2017년까지 일본의 GDP 순위(출처 : WawamuStats)
연도 일본의 GDP 세계 순위(1960~2017)
1960년~1961년 5위
1962년~1966년 4위
1967년~1969년 2위
1970~1971년 3위
1972년~2010년 2위
2011~2017년 3위


서구 국가들이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가운데 자동차와 전자제품의 생산을 격증시키고 해외수출을 확대해 무역흑자는 탄탄대로를 걸었으며 마침내 일본 경제는 쇼와 40년대
(1965년~1974년) 소련, 서독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편의점, 워크맨, 노래방

1980년에는 전후 불과 30여 년 만에 GNP 차원에서는 미국 경제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게 되어 국민의 생활수준은 1억 총중류로 불렸다. 그동안 편의점, 워크맨(ウォークマン, 소니의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노래방(カラオケ)이 보급되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과도한 수출로 미일 무역 마찰이 문제가 됐다.

일본의 인구 증가는 전후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 전후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1947~1949년생)의 결혼이 증가한 영향으로 그들이 자식을 낳아 제2차 베이비 붐(1971~1974년생)이 발생한 것이 일본 인구구조의 전환점이 되었다. 출생자 수가 일시적으로 증가한 직후인 1975년 이후 특히 시라케 세대(しらけ世代, 1950~1960년대생) 여성의 미혼율 상승으로 출산율이 2명을 밑돌았다.

2010년까지의 일본국 출생수와 합계출산율 (출처 : 후생노동성)

쇼와 50년대(1975년~1984년)부터 일본국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이행해 간다.

 

2-2. 공공사업을 통한 케인즈 정책 실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이 합심해 혁신통일(革新統一)을 이뤘다. 사진은 오사카부 쿠로다 혁신 정부가 당선된 당시 모습니다. (출처 : jcp-osaka.jp)

도시 지역의 인구 유입과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이어지면서 농촌 인구 과소와 도시 인구 과밀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에는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혁신 세력이 대두되어 사회당과 공산당의 혁신 통일을 위한 협정이 체결되었고(혁신통일(革新統一, 1960's~1970's), 도쿄도의 미노베 료키치(美濃部 亮吉, 1904~1984)를 비롯하여 교토부, 오사카부, 가나가와현 등 주요 지방 자치체에서 속속 혁신자치체(革新自治体, 혁신 세력을 수장으로 하는 지방자치제)가 생겨났다.

메이지 이전부터 헤이세이 시대까지의 농촌 정비 과정 (출처 : aric.or.jp)

이런 가운데 보수세력(자유민주당)은 3대 도시권(수도권, 긴키권, 주쿄권)과 태평양벨트 공업지역에서 심화된 과밀과 농촌지역에서 심화된 과소 인구문제와 지역격차 해결과 혁신세력에 맞서기 위해 도시지역 인프라 정비를 서두르면서, 농촌지역에도 논밭 정비와 같은 공공사업 투자를 증가시켜 농촌 보수층의 지지를 얻는 이익유도 정책을 펼쳤다.

1961년 성립된 국민개보험은 1977년에 도입된 한국의 국민건강보험과 유사한 복지제도다. (출처 : med.or.jp)

사회보장면에서도 1961년에 국민개보험(国民皆保険, 한국의 국민건강보험과 유사)이 실현되고 1973년에는 노인의료 자기부담 무료화가 실현되어 본격적인 복지국가 실현에 대한 기운이 높아졌다. 이렇게 GDP의 약 10%를 차지할 정도로 부풀려진 공공사업 투자와 고령화에 수반해 증가한 사회보장 투자는 재정 악화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2-3. 파벌정치와 보혁의 대립

사토 에이사쿠의 후계를 두고 대립했던 삼각대복중 (출처 : wikipedia)

1972년 7월에는 <일본 열도 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을 주창한 타나카 카쿠에이 내각(田中角栄内閣, 1972.07~1974.12)이 성립되었다. 록히드 사건(ロッキード事件)을 거치면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佐藤 栄作, 1901~1975)의 후계를 두고 대립했던 삼각대복중(三角大福中)의 자유민주당 내 파벌 싸움 시대가 되었다.

[보혁백중(보혁백중국회, 백중국회)란?]

'보혁백중(保革伯仲)'이나 '보혁백중국회(保革伯仲国会)'이라고도 불리는 백중국회(伯仲国会)국회의 의석이 여여당에서 백중한(능력이 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보혁백중국회(保革伯仲国会)에서 중도정당(공명당, 민사당)과 혁신정당(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이 득세하는 가운데 타나카 카쿠에이(田中 角栄, 1918~1993)가 야미쇼군(闇将軍, 겉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조직의 권력을 쥔 자)으로 군림했다.

신자유클럽(좌측)과 사회민주연합(우측)과 같이 다양한 정당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다당화가 진행되었다.

1976년 이후에는 자유민주당 출신 정치개혁파가 분리된 신자유클럽(新自由クラブ, 1976~1986)이나 일본사회당에서 구조개혁파가 분리된 사회민주연합(社会民主連合, 1978~1994) 등의 의원수가 소수인 신당들이 여럿 창당되었다.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의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의 보수/혁신의 양대 정당제 시대부터,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부터 쇼와 50년대(1975년~1984년)에 걸쳐 중도 정당이나 도시형 신당이 세력을 늘려 다당화가 진행되었다.

불신임안이 통과해버리는 해프닝으로 해산된 오히라 내각 (출처 : ANN)

1980년 5월 19일에 중의원이 해산한 해프닝 해산(ハプニング解散)에 의한 중참동일선거(衆参同日選挙,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투표일이 같은 날인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대승해 사공공투(共共闘,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의 공동 투쟁)가 소멸한 적도 있어 보수 세력의 반격이 현저해진다.

'적보대'라고 지칭한 세력이 일으킨 적보대 사건 발생지 및 발생 현황 (출처 : 마이니치신문)

쇼와 50년대(1975년~1984년)에 들어 정치적 사상면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문제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결국 적보대 사건(赤報隊事件, 1987~1990)과 같은 테러사건도 일어났다.

 

2-4. 교육 문제

교내 이지메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계기를 제공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의 피해자 (출처 : @black_black001)

교육면에서는 수험 경쟁(입시 시험), 편차치 교육(학력 편차치 교육), 학력사회, 관리교육(管理教育, 일본의 군대식 교육)이 진행되어 1986년 2월에 일어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中野富士見中学いじめ自殺事件, 1986.02.01)으로 주목받은 이지메(いじめ)로 인한 자살 문제, 소년 범죄, 비행 등의 교육 문제가 매스컴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한편, 경제계의 바람으로 고등전문학교 설치와 같은 교육 개혁과 주입식 교육에서 개성 중시 교육으로의 전환과 유토리 교육(ゆとり教育, 일본식 전인 교육)의 필요성이 성행했다. 그 외, 닌텐도의 비디오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와 같은 게임이 탄생해 학생들의 잠깐의 휴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2-5. 신자유주의로의 전환과 버블 시대

스즈키 젠코 내각(鈴木善幸内閣, 1980.07~1981.11)부터 나카소네 내각(中曽根内閣, 1982.11~1987.11) 시절까지 행정 개혁 목소리가 외쳐져 제2차 임시행정조사회(第二次臨時行政調査会, 1981~1983)가 설치되었다. 나카소네 내각의 행정개혁노선을 시작으로, 노인의료 무료화 제도를 폐지하는 등 복지 축소가 이뤄졌다.

삼공사 민영화

과거 일본의 대표적인 공기업 삼공사(三公社)가 민영화되었으며, 소비세 도입 시도도 있었으나, 복지국가노선이 재검토되어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틀게된다. 영국의 대처주의(Thatcherism),미국의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동구권(공산권)의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나 개혁개방(改革开放),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약진과 같은 세계 경제의 대전환기 속에서 일본 경제는 <플라자 합의(1985)>를 발단으로 한 엔화 가치가 2배나 상승한 엔고(円高)로 수출 부진이 우려되자 그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이루어졌는데, 내수 확대가 계속되는 버블 경기로의 돌입을 의미했다.

참고 : 일본은행의 저금리 정책]

일본은행은 경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1985년 1월 5%였던 정책금리를 1987년 2월까지 역대 최저 수준인 2.5%로 인하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와 같은 저금리 환경에서 기업들은 돈을 빌려 사업 규모를 확장하는 동시에 재테크에 치중하는 것과 같은 투기 열풍으로 주가와 부동산가격이 상승했다. 이는 담보가치 상승 및 기업의 차입 여력 확대로 이어져 다시 자산가격이 오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거품이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경영 효율보다는 사업 규모 확대에 주력하는 외형 중시의 기업 경영 행태가 만연하게 됐다. 자산가격이 상승하자 가계도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빠르게 늘려 나갔다. 그러나 결국 1989년 5월 이후 일본 정책 당국은 급격한 금융 긴축을 단행해 1990년 3월부터 닛케이주가,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된다.

그런 한편, 일본은행의 저금리정책(1987)은 통화 공급의 증가를 초래해 매년 9~12% 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문제도 낳게 된다.

1986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집행되어 쇼와 60년대(1985년~1989년)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진행되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구직자 우위 시장(就職売り手市場)이자 버블 세대로 불렸다. 호경기 속에서 쇼와 시대는 헤이세이로 바뀌어 냉전의 종결을 맞이한다.

 

3. 전후체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국제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국가(자유주의 진영)에 속했고, <미일안전보장조약(1951)>에 근거한 동맹국으로서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 냉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정치체제, 외교관계, 경제구조, 가족제도가 태평양전쟁(1941~1945)이 종결되면서 크게 변화해 역사학적으로는 전쟁 전에는 근대에, 전후에는 현대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전쟁 전 국가체제는 <대일본제국헌법>하의 덴노 주권체제 시대였다. 전후는 <일본국헌법>과 냉전하에 있었고, 국민주권체제와 미일안보조약체제의 시대가 되었다.

 

참고로 이 전후(戦後)라는 말은 1956년, 경제기획청의 <경제백서(経済白書)>가 "더 이상 전후(戦後)가 아니다"라고 말해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다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전전(戦前)과 전후(戦後)의 연속성도 적지 않고 오히려 전시체제 시기와 고도 경제성장기에 따른 변화도 크다. 그 중 전후의 고도 경제 성장에 따라 많은 전통적인 일본 문화가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쇼와 시대 후기에는 하이컬처(High Culture)의 교양주의적 권위도 완만하게 해체되어 상업적인 쇼와 문화나 대중문화가 융성을 극한다.

 

4. 헤이세이 초기와 1990년대

4-1. 헤이세이 시대의 개막

쇼와 덴노와 아키히토(明仁)

1989년 1월 7일,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아키히토(明仁, 1933~)가 55세의 나이로 125대 덴노로 즉위했다.


안이 평안해지고, 밖이 성하게 된다.


- <사기><오제본기><제순>

 


땅이 다스려져야, 하늘(의 일)이 이루어진다.

- <서경><대우모>

그 날 바로 황위계승의 의식을 집행하고, 다음날인 1월 8일, <원호법(元号法)>에 따라 '헤이세이(平成)'로 개원되었다.

 

4-2. 1990년대

4-2-1. 세계사(1989~1990)

일본 안에서는 쇼와 시대 말기부터 부동산과 증권에 대한 투기열로 거품 경기(バブル景気)가 일어났고 미일 무역 갈등으로 미일구조협의(SII)가 시작됐다. 세계사적으로 큰 사건들이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개원된 1989년시작된다.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혁명, 텐안먼 사태, 몰타 회담 등 냉전이 종식되면서 일어난 다각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1989.11.09). 이후 동유럽에서는 차례차례 혁명이 일어나(1989년 혁명)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차례 쓰러졌고, 동아시아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톈안먼 사태(1989.04.15~1989.06.04)가 일어났다. 몰타 회담(Malta Summit, 1989.12.02~12.03)에서 미소 정상이 냉전 종식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4년간 지속된 냉전은 종식됐다.

 

1990년에는 걸프 전쟁(1990.08~1991.02)이 발발해 수표장(checkbook)을 들고다니며 경제 지원, 투자를 하고 다니는 외교 방식인 수표외교(checkbook diplomacy)를 비판받은 일본은 첫 자위대 해외파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냉전 맹주국 소련이 붕괴하고 일본에서는 거품경제가 붕괴됐다.

걸프전 발발, 소련 붕괴, 버블 붕괴로 미국화(Americanization)와 글로벌 자본주의가 세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미국 일극체제 시대가 도래한다.

 

4-2-2. 버블경제의 종언(1991~1993)과 정치적 변동

• 경제안정 위해 이자율 인상과 은행대출 억제(1990) → 자산가치의 폭락으로 이어짐
• 국민총생산이 마이너스로 돌아섬
• ‘잃어버린 10년’: 90년대 내내 실질성장률 대략 1~2%의 디플레이션의 시대
• 90년대 초반부터 경제성장 더디지만 그후 비슷한 경제규모 유지

거품 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 일본은 미국에서도 위협론이 나올 정도였지만 버블 붕괴로 사태는 급변한다.

헤이세이 3년(1991년)부터 헤이세이 13년(2001년)까지 실질GDP성장률 최대 3을 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출처 : 산케이신문)

일본 사회는 실질성장률이 대략 1~2%밖에 되지 않았던 디플레이션의 시대였던 잃어버린 10년(失われた10年, 1991.03~2001.12)으로 불렸던 불황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단카이 주니어 세대(団塊ジュニア世代, 1971~1974년생) 학생들은 취업 빙하기를 맞았다.

 

 경제성장기에 일본 정부와 기업이 쌓은 종신고용, 연공서열, 여성의 조기퇴직, 호송선단 방식(민관 관여적 경제 운용 방식)의 샐러리맨 주류사회(기업사회)가 붕괴되면서 내수 위축과 디플레이션이 시작된다.

호소카와 내각 (출처 : 내각관방 내각관보실)

일본 정치는 정계개편을 통한 신당 창당이 활발해지면서 1993년 비자민 비공산 연립정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호소카와 내각(細川内閣, 1993.08~1994.04)이 들어서면서 55년 체제가 붕괴되었다.

자사사연립으로 탄생한 무라야마 내각(村山内閣, 1994.06~1995.08) (출처 : jomo-news.co.jp)

냉전시대에 적대했던 기성 정당인 자민당과 사회당이 정권 유지를 위해 1994년, 자사 연립정권(自社さ連立政権, 자유민주당+일본사회당(사회민주당)+신당사키사케)을 수립했다. 이는 각 정당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이 사라지고 총보수화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성장이 생활수준의 점진적 향상을 가져오면서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이른바 '금권정치'가 진행되었고, 이는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대기업, 관료, 정당 간의 유착관계가 만들어지는 폐해까지 연결되었다. 그 외 세습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등 굉장히 정치계는 보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4-2-3. 시민운동의 확대

1995년에는 대지진과 대테러가 일어나며,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침체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결과 일본인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렸고, 시민운동 또한 확산된다. 이 시민운동은 일본의 보수화 견제하는 하나의 축으로 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고베 대지진이라고 많이 알려진 한신-이와지 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 (출처 : weathernews.jp)

새해를 맞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兵庫県南部地震)으로 인한 한신-이와지 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이 발생한다. 이 지진은 규모 7.3에 진도 7의 대지진이었으며, 그로 인해 6,300여 명이 사망하고, 1995년 기준 1,970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 당시 사진과 영상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가 도쿄의 지하철에서 저지른 지하철 사린 사건(地下鉄サリン事件, 1995.03.20)이 일어났는데, 이 사린 가스 테러 사건으로 약 6,300여 명이 다쳤으며, 14명이 사망하게 된다.

무라야마 담화문과 이를 발표한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그 외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문>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 <무라야마 담화문>

일단 당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도의적 책임만 인정'했다는 의견이 많았음과 동시에 그럼에도 '일본의 식민지 관련 첫 정부 공식 사과'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봤다.

 

 

1997년 11월 24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노자와 쇼헤이(野澤正平, 1938~)는 야마이치증권 파산을 고하고 있다. (출처 : huffingtonpost.jp)

정치만 고착화 된 것은 아니었다. 버블 붕괴로 한 때는 일본 최대의 증권 회사 중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山一證券)을 비롯한 대형 금융기관이 줄줄이 파산하며 기존 기득권이었던 경제인들도 하나하나 무너져 내려갔다.

 

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우경화를 만들어냈는데, 1999년 8월에 공포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国旗及び国歌に関する法律)>에서 잘 나타난다.

제1조 (국기)
1 국기는 일장기(日章旗)로 한다.
2 일장기의 제식은 별기 제1과 같다.

제2조 (국가)
1 국가는 키미가요(君が代)로 한다.
2 키미가요의 가사 및 악곡은 별기 제2와 같다.

부칙
1 (시행기일)
이 법률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2 (상선규칙의 폐지)
상선규칙(메이지 3년 태정관 공고 제57호)는 폐지한다.

3 (일장기의 제식의 특례)
일장기의 제식에 대해서는 당분간 별기제1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치수의 비율에 대하여 세로를 가로의 10분의 7로 하고, 일장기의 중심 위치에 대하여 깃발의 중심에서 깃대 쪽으로 가로 길이의 100분의 1편적인 위치로 할 수 있다.

-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国旗及び国歌に関する法律)> 中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장기(히노마루)'와 '키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한다는 법이 통과가 된 것이다... 그 외 <일본국헌법> 제9조 개정을 둘러싼 논란도 일고 있는데, 이러한 우경화 현상은 거품경제 붕괴 후의 장기불황 아래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주의적 조류였으며, 이는 곧 목표를 상실한 국민 앞에 새로운 일본의 청사진으로 제시된 군사대국화를 보여줄 수 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은 그렇게 21세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일본은 또 나아간다. 일본이 어디로 갈지 우리는 모르지만, 일본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딜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나아갈 것이다. 이 시리즈는 많은 부분을 압축했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살짝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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