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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도 막부가 열리다.
1-1. 에도(江戸)는 어떤 곳이야?
에도(江戸)는 1603년부터 1868년까지 에도 막부(江戸幕府, 1603~1868)가 위치한 수도(도시)로, 현재 일본국의 도쿄(東京)의 구칭으로 여겨지며, 정확한 위치는 일본국 도쿄도구부(東京都区部)의 중앙에 위치한다.
처음 토쿠가와 이야에스가 이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이제 조금씩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하고 있던 시골 깡촌이었다고 전해진다. 완전한 깡촌이라기 보단 준도시에서 큰 시골 사이의 모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한 지방의 성읍을 거대 도시로 대개조한 자가 바로 토쿠가와 이야에스라고 전한다.
1590년, 고호조씨(後北条氏)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1590.02~07)로 멸망하자, 그 고호조씨의 옛 땅에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봉해졌다. 이 때 그가 거점으로 삼은 곳은 오래된 수도 가마쿠라(鎌倉)도 아니고, 고호조씨의 중심지였던 오다와라(小田原)도 아닌 무로마치 막부 시절인 1457년에 지어진 에도성(江戸城)이었다.
그는 에도성 본성을 조금 확장하면서 죠카마치(城下町) 건설 또한 추진해 칸다야마(神田山)를 조금 깎고,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를 번성케 매립해 마을을 넓히고 가신과 마치의 주민(町民)의 집과 대지를 배치했다.
애초에 이 도시는 계획적 군사도시였다. 1612년에는 에도 정할(江戸町割)을 통해 마을의 구분을 나눴으며, 1623년에는 무가가 사는 땅에 죠닌(町人, 정인)이 사는 것을 금지하며 무사와 서민의 거주지를 구분지었다. 그 땅에는 1635년에 내려진 <칸레이령>으로 산킨코우타이가 시작되며 지금의 기숙사라고도 볼 수 있는 나가야(長屋) 등의 다이묘와 그 가족을 위한 무가 저택이 건립되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이 몰려들었고, 에도는 소비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57년 3월에는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가 일어나 에도의 6~70%가 불에 탔으며 사망자는 10만 명이 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던 아픈 역사가 있었지만, 이후에도 시가지 확장이나 화재 대피용으로 건설된 다리도 많이 지어지며 도시가 재편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8세기 초 약 100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에도의 마을(町)은 크게 에도 막부 쇼군이 거처하던 에도성(江戸城) 남서쪽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지대가 높은 마을인 야마노테(山の手)와 에도성 동쪽의 스미다가와(隅田川)를 비롯한 수많은 하천이나 수로에 인접한 지대나 낮은 말은 시타마치(下町)로 크게 나뉜다.
초창기에는 무가 거주지 야마노테와 서민 거주지 시타마치가 7:3의 비율로 야마노테쪽으로 편중된 도시 구조였으나, 메이레키 대화재 등 다양한 사건 사고로 인해 도시가 재편되고, 18세기 초에 이미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된 이 곳에서의 야마노테와 시타마치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졌다. 야마노테에 죠닌마치(町人町)가 생긴다던가(현재의 치요다구 일대), 반대로 무가의 저택이 시타마치 지역에 세워진다던가 하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1-2 도시의 발달과 조닌, 무사의 궁핍화
병농분리와 산킨코우타이로 인해 일본 전역에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무사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상공업도 발전했으며, 제도적 한계로 경제적 부를 확보하지 못했던 무사가 연공 수입을 늘리려고 쌀을 대량 생산하자 오히려 쌀 가격이 감소되는 결과를 맞이해 대부분의 무사들은 만성적인 재정 위기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도 무사계급 중에서 피지배계급인 조닌의 채무자가 되는 사태도 일어나게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곡물 가격 하락과 물가 상승은 기존의 계급 질서에 균열을 만들었고, 실제로 물가 변동에 적응할 수 있었던 조닌이 당시의 경제 성장으로부터 이득을 치하는 경우가 많아져 에도 시대의 번영과 문화를 주도한 주체는 조닌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 음식도 탄생했는데, 일상적인 음식을 대부분 구입에 의존해야 하는 사정에 따라 외식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패스트푸드로서의 스시(寿司)나 소바(蕎麦)도 이 때 등장했으며,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튀김과 차도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 이런 음식들을 파는 노상 야타이(屋台)도 등장한다.
에도 시대의 생활과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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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
인공물적 오락 | 카부키(歌舞伎) 에도라쿠고(江戸落語, 에도 만담) 코우단(講談, 부채를 가지고 하는 만담) 산케이(参詣, 신불 참배) 니시키에(錦絵, 우키요에 판화 중 하나) 우키요에(浮世絵, 일본의 그림 양식 중 하나) 키뵤우시(黄表紙, 일본식 만화의 하나) 하이카이(俳諧, 일본 문화 형식 중 하나) |
자연물적 오락 | 하나미(花見, 벚꽃놀이) 츠키미(月見, 달보러 가기) 모미지가리(紅葉狩り, 단풍구경) 유키미(雪見, 눈보러 가기) 하나비(花火, 불꽃놀이) 후로(風呂, 목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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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
키모노(着物) | 후리소데(振袖) 유카타(浴衣) |
하키모노(履物, 풋웨어) | 게타(下駄) - 아시다(足駄) 등 조우리(草履) 셋타(雪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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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
스시(寿司) | 에도마에즈시(江戸前寿司) 니기리즈시(握り寿司) 노리마키(海苔巻き) |
면/국/냄비 요리 | 소바(蕎麦) 챠즈케(茶漬け) 낫토우지루(納豆汁) 야나가와나베(柳川鍋) 도죠우나베(どぜう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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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류 | 하쿠마이(白米, 백미) | |
튀김요리 | 텐푸라(天ぷら) 아게모노(揚げ物) 톤카츠(豚カ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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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류 | 도라야키(どら焼き) 이마가와야키(今川焼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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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음식, 절임음식, 말린음식 | 츠쿠다니(佃煮) 타쿠앙즈케(沢庵漬け, 단무지) 낫토우(納豆) 신코우(新香) 메자시(目刺) |
이렇게 다양한 즐길거리,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만들어낸 죠닌이 주도한 에도 문화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많은 문화들을 만들어냈다.
1-3. 에도 막부의 새로운 체제와 제도
1-3-1 막번체제(幕藩体制)와 계급제 사회
막번체제(幕藩体制) 혹은 막번제(幕藩制)는 막부(幕府/쇼군)과 번(藩/다이묘)라는 봉건적 주종관계를 기점으로 받아들인 역사학상 개념이자 근세 일본 사회 체제 방식이다. 전전(戦前)에는 좁은 의미로 에도 시대의 정치체 자체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쓰였으나 전후(戦後)에는 역사학이 진전되며 근세 일본 사회체제 전체의 특색을 보여주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에도 막부를 모든 무사의 정점으로 최고의 통치기관으로 하면서도 한(藩, 번)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쌀 등을 현물로 납입하게 해 연공으로 하는 석고제(石高制)를 그 기초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다이묘를 심판다이묘(親藩大名, 친번대명),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 보대대명), 토자마다이묘(外様大名)로 나눠 능력이 아닌 혈통이 중시되는 관료제를 만들었고, 산킨코우타이(参勤交代, 참근교대)나 무사 서유의 영지, 저택 등을 몰수하고 무사 계급을 박탈하는 카이에키(改易, 개역)를 통해 이를 통제했다. 또 직분의 구분에 따라 무사를 '고정된 봉급 지급, 성(苗字), 타치하키(帯刀, 칼을 허리에 차는 행위),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민중 참수권)'과 같은 일부 권리를 가진 계급으로 규정했다.
석고제(石高制)에 대해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병농분리(兵農分離)가 이루어져 태합검지(太閤検地)에 의해 서서히 형성되었고, 이어지는 에도 막부 성립 후 1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3~1616), 2대 쇼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 1579~1632), 3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 家光, 1604~1651) 시대에 쇄국(鎖国)이나, 영주가 행사하는 영지 지배권인 치쿄우(知行, 지행), 연공이나 노역을 무라(村) 단위로 책임을 지게 하는 무라우케 제도(村請制度) 등이 확립되었고, 나아가 <겐나령(元和令)> , <칸레이령(寛永令)> 등의 법령이 합쳐진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나 조정에 대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절과 신사에 대한 <제사니의신주법도(諸社禰宜神主法度)>, <제종사원법도(諸宗寺院法度)>, <사원제법도(寺院諸法度)> 등의 통제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세의 유동적 계층 이동은 가로막히게 되고, 무사를 필두로 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가 확립된다. 거기에 에도 막부 이전부터 행해진 병농분리(兵農分離)로 지배층에 해당하는 무사계급은 향리를 떠나 조카마치(城下町)에 거주하며 주군으로부터 봉록을 받아 일상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에도 시대에는 상인자본의 성장과 농촌으로의 상품경제 침투, 그에 따른 신분제의 변질 등, 촌락공동체의 동요는 잇키(一揆)나 관아나 부잣집을 때려(打ち) 부수는(壊し)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를 초래했고, 막부나 번은 막부 정치 개혁과 번 정치 개혁을 통해 재편을 시도하기도 했다.
막말에는 여러 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로 막부는 쇄국정책을 고쳐 다시 개국하고, 조정 권위도 신장하여 공무합체(公武合体) 노선이 추진된다. 에도 막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王政復古), 에도 개성(江戸開城)에 의해 해체되고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옛 번에 의한 통치는 유지되지만 중앙집권적 정책 아래에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폐번치헌(廃藩置県)에 의해 막번 체제는 완전히 종결된다.
1-3-2. 테라우케 제도(寺請制度)
테라우케 제도(寺請制度)는 에도 막부가 종교 통제의 일환으로 마련한 제도 중 하나로, 테라우케 증문(寺請証文)을 받은 자를 백성에게 의무를 붙여 크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을 사원에 증명하는 제도를 말한다. 필연적으로 백성들은 테라우케(寺請)를 받는 사원의 단가(檀家, 절에 시주하는 집)가 된다.
사찰은 단도(檀徒, 단가의 사람들)가 신도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거나, 그 단도가 도망가거나 실종된 것을 알았을 경우, 그 자에 대한 테라우케 증문을 발급 거부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발급 거부가 되면 사실상의 단도에서의 제명이 되는 것으로 사원에서 관리하는 장부에도 삭제되는데, 그렇게 되면 노숙자가 되너가 히닌(非人, 잡역부)이 되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1-4.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1600.10)에서 승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우대신(右大臣)과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취임하며 에도 막부가 시작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산업, 교육 진흥을 포함한 다양한 시책에 힘쓰는 동시에 오사카의 진(大坂の陣, 1614.11~1615.05)을 통해 토요토미씨(豊臣氏)를 참패시켜 내부의 적도 없애나갔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 1637.12~1638.04)도 진압함으로써 헤이안 시대 이후 700년 가까이 지속된 정국 불안은 종식됐다. 그렇게 이후 200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 안정 정권의 기반을 확립하며 '겐나엔부(元和偃武, 겐나 엄무)'라 불리는 평화 상태가 일본에 도래했다.
1-5. 무단통치(武断政治, 1603~1651)
에도 시대의 무단통치는 에도 막부 1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3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미츠 때까지 막부에서 행해진 정치적 태도를 말한다. 토쿠가와 이에미츠 때까지는 다이묘나 하타모토(旗本)의 영지, 녹봉, 저택 등을 몰수하고 무사 신분을 박탈하는 카이에키(改易, 개역)나 다이묘나 하타모토 등의 무사의 영지, 성, 저택의 일부를 소멸시키는 겐포우(減封, 감봉)를 받는 다이묘가가 많아 로우닌(浪人, 낭인, 떠돌이 무사)가 늘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 결과 3대의 쇼군에 의해 강력한 통치체제가 형성된다.
카이에키(改易, 개역) : 무사 소유의 영지, 녹봉, 저택 등의 몰수 및 무사 계급 박탈 죠호우(除封, 제봉) : 무사 계급 박탈 겐포우(減封, 감봉) : 무사 소유의 영지, 성, 저택 등의 일부 삭감 |
분포우(分封, 분봉) : 봉지를 나눠 내려주는 것 |
1612년, 에도 막부는 <금교령(禁教令)>을 내려 크리스트교 포교를 금지하며 크리스트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다.
1615년, 막부는 <겐나령(元和令)>를 발표해 다이묘들의 권한를 한정했다. 특히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으로 각 영주는 큰 성 하나만 남기고 다른 성은 다 부숴야 했다. 또한 다이묘간의 혼인은 쇼군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으며,
1629년, 크리스트교 탄압의 일환으로 막부는 '밟는 그림'이라는 뜻의 후미에(踏み絵)를 실시하는데, 이는 흔히 '키리시탄 사냥'이라고 부르는 크리스트교 탄압이 본격화된 제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예수나 성모 마리아 그림을 말하는데, 이 그림을 목판이나 금속판에 새겨서 바닥에 두고, 그림을 밟을 수 있는가를 테스트 한 것이다...
만일 후미에를 밟지 못했다면.... 화형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 대부분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1635년, <칸레이령(寛永令)>을 내려 전국 지방의 다이묘가 2~3년에 1번 꼴로 에도에서 지내도록 의무화해 지방 다이묘들의 과중한 재정적 부담을 지움으로써 다이묘의 반역 행위를 사전 차단하려 했던 산킨코우타이(参勤交代, 참근교대)를 제도화 했으며, 500석 이상의 큰 배(大船)의 건조를 금지하는 <대선건조의 금(大船建造の禁)>을 명시했고, 호우코우카마이(奉公構)를 통해 이후에 죄를 지은 다이묘가 다른 무가에 봉공(奉公, 몸바쳐 봉사함)하는 것을 못하게 막았다.
[산킨코우타이] 에도 막부가 과중한 재정적 부담을 지움으로써 지방 다이묘의 반역행위 사전 차단하기 위해 모든 다이묘들이 2년에 1번 꼴로 수도인 에도(江戸)에서 지내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이 제도를 통해 다이묘들은 영지와 에도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해야 했다. 이로써 도시와 교통수단이 발전되고 상업 확산이 자극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국의 일본인들에게 공통된 삶의 양식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
1636년,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 지역의 한 작은 반도의 끝부분의 흙을 퍼내 운하를 뚫어 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 섬이 서양 국가와의 교류를 위해 지은 '나가는 섬'이라는 뜻의 데지마(出島, 1636~19세기)다. 이 섬이 지어지자마자 포르투갈과 무역을 했으며, 이후 크리스트교와 농민이 일으킨 난이 끝나 포르투갈인을 추방했는데, 그리고 몇년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와 19세기까지 이 섬에서 교역하게 된다.
외국과의 무역 시기 | 무역국 |
1636~1639 | 포르투갈 |
1641~1859 | 네덜란드 |
1637년 12월, 에도 막부가 크리스트교를 계속 탄압하자 이에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잇키인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란(島原・天草の乱, 1637.12~1638.04)이 일어난다. 시마바라번(島原藩)의 2대 번주 마츠구라 카츠이에(松倉 勝家, 1597~1638)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과도한 연공(세금) 부과나 크리스트교 탄압을 이어 나간 것이 원인이었다. 특히 연공을 내지 못하는 농민이나 개종을 거부한 크리스트교 신자들에게 고문과 처형을 가해서 사람들의 분노를 드높이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농민과 크리스트교 신자들이 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은 1년 반 뒤에 겨우겨우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 내 크리스트교 포교의 선두자였던 포르투갈인들은 일본에서 추방되며 약 230년간의 쇄국이 시작된다.
1638년, 규슈 지역에서 일어난 우역(牛疫)을 시작으로, 규슈, 서일본 일대에 가축의 떼죽음이 발생했고, 1640년에는 홋카이도의 에조고마가타케(蝦夷駒ヶ岳)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 그 낙진으로 인해 동북부 일본 지역에서 흉작이 지속되었다.
1641년에는 에도, 주코쿠 지방, 시코쿠 지방 등에서 가뭄이 일어나고, 가을에 폭우가 내렸으며, 막부의 주조 실수로 돈의 가치가 급락하기에 이른다. 이후 1642년부터는 대기근의 영향으로 생활고, 인신매매, 식인(인육 섭취), 민란 등이 일어나 강압적인 통치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칸에이 대기근(寛永の大飢饉, 1640~1643))
1639년, 히라도(平戸)에 위치한 홀란드 상관(オランダ商館)의 상관장이 에도에 방문해 포르투갈과의 관계 단절을 막부 관료들에게 호소하면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해 일본이 요구하는 수입품을 확실히 제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미 당시에 네덜란드는 여러 지역에서 포르투갈을 격파하며 아시아에서의 입지를 확대해 나갔고, 거기다 포르투갈이 사실 일본과의 전쟁 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막부를 설득해 데지마 독점권을 얻게 되었다.
1-6. 문치정치(文治政治, 1651~1716)
1-6-1. 이에츠나 시기(1651~1680)
1651년 토쿠가와 이에미츠가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4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츠나(徳川 家綱, 1641~1680)를 납치해 막부 정치를 비판하고 로우닌 구제를 내세우는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같이 일에 가담했던 다른 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만다케이안의 변(慶安の変. 1651.04~1651.07). 그리고 고위 간부 습격 계획도 있었으나 또한 발각되어 실패한 사건(죠우오우의 변(承応の変, 1652.10))도 일어나며, 막부의 관료는 무단정치에서 다른 정책 방침 전환을 강요받게 되었다.
결국, 쇼군 토쿠가와 이에츠나는 문치주의(文治政治)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1651년에는 로우닌의 발생의 원인인 다이묘에 대한 개역(改易)을 줄이기 위해 다이묘의 적자가 사망한 경우 자신의 뒤를 이을 양자를 들이지 못하게 했던 <말기양자의 금(末期養子の禁)>을 완화, 폐지했다.
1657년 3월에는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에도성 일부가 소실되어 재건해야 했고, 사도아이카와 금산(佐渡相川金山)의 금채굴량이 감소되었으며, 물가 대비 쌀값이 하락하며 막부의 재정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쇼군-다이묘 관계를 개선해 나갔는데, 1663년에는 <무가제법도>를 개정한 <칸분령(寛文令)>을 내려 주군이 사망했을 때 가신들이 따라 죽는 순사(殉死)를 금지시키고, 다이묘에게서 인질을 잡아두는 다이묘 증인제도(大名証人制度)를 폐지했다. 이로써 전국시대 때부터 전해온 풍습을 없애고 쇼군과 다이묘, 다이묘와 가신의 주종관계는 개인간의 관계에서 주인의 집에 복족하는 관계로 전환된다. 그러는 한편 쇼군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1664년에는 관문인지(寛文印知)를 실시한다. 이후에도 쇼군이 대로들과 함께 상의해 정책이나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 방식도 정착시킨다.
메이레키 대화재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복구 하기 위해 에도와 사카타(酒田)를 잇는 히가시마와리 해운(東廻海運)과 사카타와 오사카를 잇는 니시마와리 해운(西廻海運)을 개척하게 하는 등 전국 유통정책과 경제정책의 발전을 촉구했다.
1-6-2. 츠나요시 시기(1680~1709)
1680년, 토쿠가와 이에미츠가 정실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타테바야시번(館林藩)의 번주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 綱吉, 1646~1709)가 뒤를 이었다. 토쿠가와 이에미츠는 권력의 중앙집권화과 재정문제, 기강 확립에 주력하고 이를 위해 유학을 융성하게 하여 덕치에 의한 정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유학(儒学)을 널리 퍼트려서 명분을 무사의 윤리 의식으로 심어주기 위한 무사도의 틀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1710년 발표한 <호우에이령(宝永令)>에서 순일본어 문체와 한문 훈독체를 혼용시킨 화한혼교문(和漢混交文)을 일본식 문체(和文)로 정하고, 유교의 인정(仁政) 사상(덕치주의)를 접목해 문치주의의 이념을 명료화했던 것과 주군에 대한 충과 조상과 아비에 대한 효를 기반을 작성한 것에서 알 수 있다.
1684년에는 <복기령(服忌令)>을 내려 친족이 사망해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는 기간을 정했으며, 1687년에는 '살아 있는 것을 가엽게 여기라'는 내용을 주제로 담은 <쇼우루이아와레미의 령(生類憐れみの令)>을 발표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며 문치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런 사업을 하면서도 절과 자신의 조상에게도 많은 재정을 썼기에 막부의 재정이 위태로워졌다.
그래서 1695년부터 화폐개주(貨幣改鋳)를 시작해 화폐를 대량으로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나마 재정이 회복되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 물가 상승만 일어나, 실물 경제를 담당했던 화폐 주조자, 상인들의 이익과 힘이 커져갔으며, 결과적으로 공무원 급여가 민간 기업에게서 나올 정도로 막부와 무가들의 권한이 크게 떨어지고 상인이 어깨를 펴게 된다.
1-6-3. 쵸우토쿠의 치(正徳の治, 1709~1716) - 이에노부 시기(1709~1712)
참고로 이에노부 시기와 이에츠구 시기를 합쳐 쵸우토쿠의 치(正徳の治, 1709~1716)라고 부른다.
1709년, 5대 쇼군 토쿠가와 츠나요시가 적통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고, 그와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 토쿠가와 이에노부(徳川 家宣, 1662~1712)가 6대 쇼군으로 즉위한다. 당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생류 와아레미 령>을 철폐해 민심을 회복하게 되었지만, 전 쇼군의 화폐개주사업을 이어받아 또 잠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버린다... 1712년에,
상인의 갑작스런 큰 성장을 견재하기 위해 감정소(勘定所)의 업무를 감독, 감사하는 감정금미역(勘定吟味役)를 재설치해서 그들을 견재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다.
그러는 한편, 1711년에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예우를 간추리면서도 국가 대 신하가 아닌 국가 대 국가로의 사절로 바꿔버렸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국서의 받는이를 일본국대군전하(日本国大君殿下)에서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왕자를 부르던 대군(大君)이라는 칭호에서 조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는 의미로 국왕(国王)이라는 이름을 써넣으며 국가적 자존심을 높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6-3. 쵸우토쿠의 치(正徳の治, 1709~1716) - 이에츠구 시기(1713~1716)
1713년, 토쿠가와 이에츠구(徳川 家継, 1709~1716)가 아들로써 7대 쇼군으로 즉위한다. 그 당시 실권을 지고 있던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 1657~1725)는 쇼군을 보좌하면서 이전 쇼군과는 정반대의 시책을 펼쳤다. 우선, 디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쇼우토쿠 개주(正徳改鋳)를 행해 화폐 발행량을 감소시켜 경기를 얼어붙게 했다. 두번째로 나가사키 무역에 대해 대폭적인 수입 초과임을 비추어, <해박호시신례(海舶互市新例)>를 발표해 나가사키 무역을 제한했다.
문치주의의 개막을 알린 토쿠가와 이에츠나 무렵부터 일어난 에도 막부의 재정난으로 문치정치 시대 동안 악화일로를 걸었다. 에도 막부의 재원은 쌀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쌀값이 다른 물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락해가는 상황을 방치했기에, 결국 이후에 쿄우호우 개혁(享保の改革, 1716~1735/1745)로 회복되기 전까지 계속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7. 이후의 약력
1-7-1. 쿄우호우 개혁(1716~1735/1745)
8대 쇼군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 1648~1751)이 주도한 쿄우호우 개혁(享保の改革, 1716~1735/1745)으로 선래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문교정책(文教政策) 변경, 법전 정비를 통한 사법 개혁, 에도 시 행정 개혁, 소방 조직 설치, 비크리스토교 서적 수입, 다이묘에게의 매매권 지급 등 파격적인 정책으로 이후 많은 개혁들에게 좋은 영향을 열어줬다.
1-7-2. 타누마 시대(田沼時代, 1767~1786)
이후 1767년 소바요우닌(側用人)이 되고, 1769년부터는 로우쥬우(老中, 노중)가 된 타누마 오키츠구(田沼 意次, 1719~1788)가 1786년까지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그가 정권을 확보했던 기간을 타누마 시대(田沼時代, 1767~1786)라고 한다. 이 때는 전통적인 긴축재정책을 버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상업 자본 이용, 연공 수익 이외의 재정 수입 증가 등을 통한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부패가 심각해 뇌물 정치의 대명사로도 유명해졌던 시대다...
당시 그는 카부나카마(株仲間, 영업상의 각종 권리(株)를 지키는 조합(仲間)) 장려, 도우자(銅座, 동 교환, 주소를 행한 장소) 등에 대한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에조치(蝦夷地, 에조의 땅) 개발 계획, 타와라모노(俵物, 나가사키 무역에서 청에 수출한 핵심 물품 3종) 전매, 시모우사노쿠니(下総国)의 인바누마(印旛沼), 테가누마(手賀沼) 간척 착수 등 기존의 화폐 개주에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상품 생산과 유통에 넓고 얉게 과세해 금융으로부터 이익을 이끌어 내는 등 대담한 재정 정책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런 시책들은 결론적으로 상인과 막부 권력 사이의 연결로 이어지게 되고, 비리가 터질 수 밖에 없었다. 독점이 늘어나며 일반 민중들이나 영세업자들의 생활 기반이 약해져갔고, 권력층의 단기 투기판이 형성되거나 뇌물이 횡행하고 막부와 여러 번들의 이익 관계가 충돌하며, 서민들은 또 부담이 늘어갔기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1782년부터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1782~1788)으로 인해 많은 민란인 잇키나 특정 건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가 일어나고, 타누마 오키츠구를 중용한 10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하루(徳川 家治, 1737~1786)의 사망 등을 계기로, 고산케(御三家, 토쿠가와쇼군가의 3가문), 문벌 후다이다이묘층등이 활발하게 반타누마적 활동을 벌여 결국 그가 실각하게 되면서 타누마 시대는 끝이 난다.
1-7-3. 칸세이 개혁(寛政の改革, 1787~1793)
타누마 오키츠구의 로우쥬우(老中, 노중) 자리를 이어받은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 定信, 1759~1829)는 막부의 재정난과 도덕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보수적인 조치를 치하게 된다. 이 때는 서양과의 무역 제한, 농업 장려, 농민의 도시이주 엄격 제한, 주자학 장려, 출판 검열, 쇼군 가신들의 빛 삭감 및 탕감 정책, 지출 엄격 제한과 같은 긴축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인 긴축정책은 쇼군과의 대립, 지나친 긴축정책으로 인해 금방 끝나버린다.
한편 이후 <어계개언(馭戒慨言)>이라는 책이 출간되며 국학(国学)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생겼는데, 이를 통해 존왕양이 등 고대의 덴노 중심 질서와 동벌(일본 동쪽을 정벌한 과정), 서벌(대륙을 정복했다는 일화)을 추종하는 국학 운동이 널리 퍼지게 된다.
1-7-4. 텐포 대기근(天保の大飢饉)과 텐포 개혁(天保の改革)
1833년부터 1839년까지 또 대기근이 일어나는데, 이를 텐포 대기근(天保の大飢饉)이라고 한다. 많은 홍수와 한파가 특히 혼슈 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심각한 자연 재해나 아사도 많이 일어났지만, 오오시오헤이하치로우의 난(大塩平八郎の乱, 1837.03)처럼 막부 통치에 불만을 품어 일어난 반란도 늘었다.
이에 로우쥬우(老中, 노중)였던 미즈노 타다쿠니(水野 忠邦, 1794~1851)는 막부 권력 강화를 위해 텐포 개혁(天保の改革, 1841~1843)이라 불리는 일련의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했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1842년, 중국이 아편전쟁(1840~1842)에 패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기존 외국선에 대한 강경책이었던 <이국선 타불령(異国船打払令)>을 외국선에게 식음료와 연료를 줄 수 있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발령하며 유연적 노선으로 전환한다. 그러면서도 서양식 포술(砲術)을 도입시켜 근대적인 군사적 태세를 갖추도록 하기도 하고, 중화적 질서를 벗어 던지고 세계를 5대양 6대주으로 나눈 근대적 지리관이 들어간 세계 지리서 <해국도지(海国図志)>가 널리 팔렸으며, 또 중국의 몰락이라는 충격 때문에 외세에 대한 불안도 늘어갔다.
이런 가운데 사쓰마번이나 조슈번 등 웅번(雄藩, 세력이 강한 번)으로 불리던 유력 번들은 재정 개혁에 성공해 막말의 정국 속에서 강한 발언권도 가지게 된다.
경제면에서, 지주나 도매상 중에는 공장을 두어 분업과 협업을 행하는 공장제 수공업 생산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대량 생산은 오사카 주변과 오와리(尾張)의 면직물업, 북간토지방의 견직물업 등에서 크게 성공적인 결과를 내게 된다.
한편 이 시기 1844년 2월부터 기존의 태음태양력인 관정력(寛政暦)을 폐하고 새로운 태음태양력 천보력(天保暦)으로 개력해 이후 태양력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게 될 때 까지 일본의 마지막 태음태양력이 쓰이게 되었다. 관련된 내용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950)을 참고바란다.
1-7-5.막말(幕末, 1853~1868)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전대 사령관이었던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가 함선을 타고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 시위가 일어났다(쿠로후네 사건(黒船来航, 1853)). 그렇게 서양 세력이 일본의 문을 두드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후 다시 돌아온 페리 함대에 의해 1854년 3월, 가나가와에서 미국이 일본 관세 자주권과 영사 재판권을 획득하게 된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条約)>을 맺으면서 시모다, 하코다테 등의 항구를 열고 통상할 것과 미국을 최혜국 대우로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개항하게 된다.
그 이후 1858년(안세이 5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5개국과 연이어서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들을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이라고 부른다.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 | ||
조약명 | 상대국 | 조인일(서명일) |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 아메리카 합중국 | 1858.07.29 |
<일란수호통상조약(日蘭修好通商条約)> | 네덜란드 왕국 | 1858.08.18 |
<일로수호통상조약(日露修好通商条約)> | 러시아 제국 | 1858.08.19 |
<일영수호통상조약(日英修好通商条約)> | 대영제국 | 1858.08.26 |
<일불수호통상조약(日仏修好通商条約)> | 프랑스 제2제국 | 1858.10.09 |
이렇게 개항한 일본은 요코하마(85% 이상의 수출입이 요코하마에서 일어났음), 나가사키, 하코다테에서 미, 러, 영, 프, 네덜란드 5개국과 자유 무역을 하게 되었는데, 일본측은 생사(生糸), 차를 수출했는데 너무 많이 수출되어 일본 자국내 물자가 부족해지고 생사와 차의 가격이 늘어났다. 한편, 서양 국가는 굉장히 저렴한 대량생산된 면직물이나 모직물을 팔아 차익을 얻었다. 그리고 일본 내 은값 대비 금값이 서구보다 낮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금화가 해외로 유실되기도 한다. 그렇게 개항으로 인한 경제적 변동은 하층 농민과 도시민의 몰락을 부채질해 갔으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고 외국을 격퇴해버리자는 쇄국주의적인 양이론(攘夷論)이 확산되어갔다.
1585년부터 1859년까지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 1846~1866)를 제 14대 쇼군으로 옹립한 에도막부의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 1815~1860), 호나베 아키카츠(間部 詮勝, 1804~1884) 등이 그 옹립을 반대한 자신의 반대파인 존왕양이파와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1837~1913) 히토츠바시파(一橋派) 100여명을 대량 숙청한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숙청 사건에 앙심을 품은 자들에 의해 1860년 3월에 일어난 사쿠라다몬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이 일어나며 쇼군 후계 문제로 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난과 전쟁을 걸쳐 결국 1867년 1월, 메이지 덴노(明治天皇, 1852~1912)가 황위를 계승했는데, 이 시기에 맞춰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 1836~1867)는 교토로 가는 배에서 덴노를 위한 신정부를 어떻게 구상할지에 대해 8가지의 방침을 정했다.
선중팔책(船中八策) |
1.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새 정령을 조정에서 세워야 한다. 2. 상하의정국을 설치하고 의원을 두어 만기를 시기에 맞게 공의로 결정해야 한다. 3. 유능한 공경제후와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삼아 관직을 내리고 종래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해야 한다. 4.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공의를 모으고 새롭고 지당한 규약을 세워야 한다. 5. 옛 율령을 폐지하고, 새롭고 무궁한 대전을 제정해야 한다. 6. 해군을 확장해야 한다. 7. 어친병을 설치하여 제도를 수비하게 한다. 8. 금은의 시세를 외국과 균형을 맞추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
1867년 11월, '큰(大) 정치를(政) 다시 돌려(還) 받든다(奉)'는 뜻의 대정봉환으로 공식적으로 메이지 조정이 국가 통치권을 반납받게 되고 이를 덴노가 세상에 널리 공표하게 된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국가 통치 상황에서 권한만 넘겨 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행정 사무는 아직도 막부 쪽에서 진행되었다. 이에 반감을 느낀 도막운동(倒幕運動, 막부타도운동) 세력은 1868년 1월 말에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1868.01)를 일으키며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01~1869.06)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결국 하코다테 전쟁(箱館戦争, 1868.12~1869.06)에서 메이지 신정부가 승리하며 종결된다. 이로써 7세기 이상 지속된 무사의 시대가 명실상부하게 끝났고, 패한 무사들은 카조쿠(華族, 화족)나 시조쿠(士族, 사족)과 같은 칭호를 획득했지만 특권이나 녹봉은 완전히 잃게 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막부들이 일으킨 작은 반란들(시조쿠 반란(士族反乱))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일반 국민으로 흡수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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