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가 동래부를 다스렸던 곳, 동래부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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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가 동래부를 다스렸던 곳, 동래부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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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한 동래부 동헌

 
동헌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동래는 일본과 최접경지로서 한반도 제일의 관방이자 전략요충지로 중시된 만큼 일찍부터 읍성과 관아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시되어 태조 때부터 진을 두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12년(1547)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 6년(1655)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것을 독진(獨鎭)으로 독립시키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개축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를 겪고, 부사 정현덕의 주도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읍성과 관아를 대대적으로 증·개축하였다. 그러나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충신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왔으며, 2015년 고마청을, 2018년 완대헌을 각각 복원하였다.

동래부 동헌 일원은 조선시대 부산(동래)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제일 관방의 위상을 함축하는 관아시설일 뿐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개혁성론에 따라 근대적 읍성의 축조가 최초로 구현되는 등 조선시대 관방역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 이청(吏廳) : 조선시대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들이 근무하는 관아
* 무청(武廳) :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처리하던 관아
* 향청(鄕廳) :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
* 경주진관(慶州鎭管) :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휘하 육군부대인 경주진의 관할

현재의 원형과는 조금 다르게 복원된 동래부 동헌의 조감도입니다.

항공사진으로 본 동래부 동헌으로 모든 건물이 있진 않습니다. (출처 : 카카오맵)

충신당(忠信堂) : 아헌(衙軒). 동래부 동헌의 중심 건물로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
연심당(燕深堂) : 부사의 관사(官舍) 또는 6방 관속 등 이임(吏任) 계열 관원들의 대기소로 추정
내삼문(內三門) : 동헌의 안쪽 대문
독경당(篤敬堂) : 부사의 휴식 공간 또는 무인(武任) 계열 관원들의 대기소로 추정
찬주헌(贊籌軒) : 부사의 경호를 맡았던 비장(裨將)의 처소
망미루(望美樓) : 동헌 앞에 세운 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 (東萊府 東軒 外大門) : 동헌의 바깥 대문
고마청(雇馬廳) : 민간에서 징발한 말을 관리하던 곳
완대헌(緩帶軒) : 부사의 휴식 공간
약사청(藥師廳) :약방(藥房), 약국
정원루(靖遠樓) : 완대헌의 서쪽에 있던 누각. 일제강점기에는 군청 회의실로 사용
공수청(公須廳) : 동래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곳
행랑(行廊) : 물건 창고. 관속·사령들이 살던 곳
문화재 지정 현황
- 동래부 동헌 충신당 :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제 제1호(1972.6.26.)
- 망미루 :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제 제4호(1972.6.26.)
- 동래부 동헌 외대문 :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제 제5호(1972.6.26.)

현재는 복원된 동래부 내삼문(內三門)을 통해 동래부 동헌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입장 시간과 미개방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개방시간
하절기(4월~9월) 09:00 ~ 18:00
동절기(10월~3월) 09:00 ~ 18:00
미개방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신정, 설날·추석 연휴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충신당(忠信堂)입니다. 동래부 동헌의 중심 건물로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죠.

오른편에는 널뛰기와 투호놀이와 같은 민속 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옛날 태형, 주리틀기와 같은 고문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왼편에는 또 다른 관아 건물이 있구요.

동래부 동헌 충신당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7)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제시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혹은 동래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면 7칸, 측면 4컨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좌우에 방이 있고 대청을 두어 수령은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군청 등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천장, 마루 등이 개조되었다.

현재 부산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동헌 건물로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

내부에는 동래부사가 앉아 있고, 그 좌우로 동래부와 관련된 여러 사진과 기록이 있으며, 옷 등을 입을 수 있는 체험공간도 있습니다.

최초의 동래부 동헌은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하네요!

여기에는 역대 동래부사들 중 14분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고경명(高敬命, 1590.12.~1591.6.)
동래부사 시절 일본에 갔다 부산포로 돌아온 통신사들이 나눈 이야기를 종합하여 난이 발생하면 순국할 각오를 하고, 조정에서 서인들이 제거될 때 사직 후 고향 광주에 은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을 모아 왕이 있던 평안도로 올라가던 중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송상현(宋象賢, 1591.8.~1592.4.)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假我途 :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라고 함에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이라 답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끝까지 동래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윤훤(尹喧, 1605.12.~1607.1.)
동래부사 시절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래읍성 남문 안에 그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후 송공사는 1624년(인조 2) 현재의 충렬사(忠烈祠)로 사액을 받았으며, 관내 대부분의 명승·고적과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이춘원(李春元, 1607.7.~1608.2.)
1597년 정유재란 때 광양현감으로서 남원에서 왜적과 싸워 위기에 빠진 군사들을 구원하였다. 동래부사 시절에는 백성을 잘 다스리는 한편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겸호대, 동대, 온정(溫井), 정과정 등 여러 명승과 고적을 보호하고 이곳에 제목을 붙여 시를 지어 널리 알렸으며,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동래지역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안눌(李安訥, 1608.2.~1609.7.)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로 시문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으며, <맹하유감(孟夏有感)>을 비롯한 해운대, 객사, 범어사 등 관련 많은 시를 남겼다. 송공사에서 송상현이 순절한 날에 휘진제를 올리도록 한 후 농주산 전망제단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현재까지 송공단의 단제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공신녹권에 실려 있는 동래 출신 66명 중 공적이 뛰어난 24공신을 선정하였다.
정양필(鄭良弼, 1635.11.~1638.4.)
동래부사 시절 임진왜란 때 불탄 동래부 동헌의 중심건물인 충신당과 외대문을 새로 건립하였다. 이후 1655년(효종 6) 외대문에는 동래부가 경상좌도 병마절도영 휘하 경주진에서 독립된 군사권을 갖는 관청임을 알리는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이라는 현판이 달리게 되었다.
민정중(閔鼎重, 1658.8.~1659.3.)
7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동래부사로 재임하였으나, 부산지역의 임진 사적의 민몰(泯沒)을 걱정하여 사료를 수집·정리한 <임진유문(壬辰遺聞)>을 남겼다. 이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동래성 전투,다대포진 전투의 항쟁사 뿐만 아니라 공신, 멸사, 백성의 실태를 알 수 있다. 숙종 때 남인과의 당쟁에서 서인으로 배척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권이진(權以鎭, 1708.11.~1711.4.)
옛 충렬사 터에 별도로 사당을 세워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등과 함께 순절한 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기록화인 <동래부 순절도>를 제작하게 하고 화기(畫記)를 남겨 그림의 제작 경위와 해설 등을 붙였다.
정언섭(鄭彦燮, 1730.8. ~ 1733.1.)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여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져 부분 보수되던 동래읍성을 훨씬 크게 쌓은 것이 현재 성의 원형이 되었다. 남문 일원에 성을 쌓으면서 발굴된 임진왜란 동래읍성 희생자 유해를 거두어 여섯 무덤으로 만들고, 직접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묘비를 세운 것이 현재의 임진동래의총이며, 또한 교육에도 힘써 '시술재(時述齋)'를 건립하였다.
박사창(朴師昌, 1739.8.~1741.1.)
왜인들의 작폐(作弊)를 막기 위해 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하여 동래부의 군사시설과 조직을 정비하고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었으며, 초량객사 등의 시설도 갖추었다. 부산지방 향토사 연구에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로 활용되는 <동래부지(東萊府誌)>를 편찬하였다.
조엄(趙曮, 1757.7.~1759.1.)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로 순절한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지 못함을 보고 그 공적을 찾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1763년 조선통신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왔으며, 그 재배법과 저장법을 익혀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다.
강필리(姜必履, 1764.8.~1766.11.)
동래 온천의 낡은 집을 고쳐 9칸짜리로 짓고 남탕·여탕으로 구분하였다. 온정을 지키는 집과 대문을 만들어 백성들의 건강과 위생을 돌보고, 수령칠사를 밝게 처리하여 고을의 부흥에 애썼다. 조엄이 보낸 고구마 종자를 받아 재배에 성공하고, 그 재배법과 저장법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감저보(甘藷譜)>를 지었다.
정현덕(鄭顯德, 1867.6.~1874.1.)
6년 7개월로 가장 오랜 기간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대일외교의 실무책임자로서 위정척사 정책을 폈다. 수차례 일본의 국교 교섭 요청을 거부하여 일본에서 정한론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으며,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동래읍성을 고쳐 쌓고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에서 밀려나면서 파면되었고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지석영(池錫永, 1895.1.~1896.8.)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하였다.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종두의 두묘제조법을 배워 종두를 적극 실시하고, 일본 공사관의 의관으로부터 서양의학을 지도 받는 등 근대의학의 선구자이다. 동래부사로 약 1개월 재임 후 동래부관찰사가 되었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이 크다.

그리고 19~20세기에 찍힌 동래부의 여러 곳의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세병교는 이런 돌다리였단 것도 알 수 있구요. 동래성의 남문과 세병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동래읍성 암문에 걸려 있던 현판 은일루(隱一樓), 서문에 걸려 있던 현판 심성루(心成樓)도 볼 수 있구요.

동래시장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동래부 객사의 외대문인 식파루(息波樓), 동래부 동헌의 외대문이었던 동래독진대아문, 망미루라고도 불리는 동래도호아문, 일제 시절 온천장으로 옮겨진 망미루 등의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동래읍성 남문의 안쪽문에 걸려 있던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과 동문에 걸려 있던 지희루(志喜樓)라는 현판도 볼 수 있습니다.

충신당의 왼쪽에는 동래부사의 휴식 공간 혹은 무인(武任) 계열 관원들의 대기소로 추정되는 독경당(篤敬堂)이 있습니다.

동래부사가 이렇게 쉬었을 것이라고 묘사한 모습도 보이구요. 임진왜란 당시 모습을 재현한 피규어들도 있습니다.

독경당에서 왼쪽으로 몸을 꺾으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부사의 경호를 맡았던 비장(裨將)의 처소인 찬주헌(贊籌軒)입니다.

이곳에서 등을 조금 돌리면 동래독진대아문이라고도 부르는 동래문 동헌 외대문과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그 뒷편으로 가면 망미루가 보입니다.

망미루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
이 누각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높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놓여 있다. 팔작(八作)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며, 두공(枓栱) 양식은 2익공(二翼工)이다. 마루는 귀틀마루이며,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처마는 부연(浮椽)이 붙은 겹처마이다. 이 누각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문루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본래 이 누각은 동래부 동헌 앞에 세워졌는데, 1930년경 금강공원 주변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12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망미루의 뒷편으로 올라가면

민간에서 징발한 말을 관리하던 고마청(雇馬廳)이 있습니다.

옆에는 말을 기르는데 필요한 것들을 넣어두거나, 사무를 보던 곳인 것 같고, 바로 앞쪽엔 이렇게 마구간에 말들이 있었나봅니다.

고마청에서 좁고 정리된 사잇길로 지나면 부사의 휴식 공간인 완대헌(緩帶軒)이 나옵니다.

완대헌 전경입니다.

완대헌의 오른편에는 약방(藥房)이자 약국인 약사청(藥師廳)이 있었는데요. 복원 중인 것인지 안내판이나 현판은 없었습니다.

약사청을 둘러 뒤로 돌아가면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요.

저건 그냥 화장실입니다. 방문객이 이용할 수 있는 그런 화장실이에요ㅎㅎ..

약사청 바로 앞, 그리고 충신당의 오른편에는 부사의 관사(官舍) 또는 6방 관속 등 이임(吏任) 계열 관원들의 대기소로 추정되는 연심당(燕深堂)이 있습니다. 

이 연심당의 마당쪽에서 다양한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 옆에는 이렇게 4개의 비석이 있어요.

맨 왼쪽에는 '이원진 청덕선정비(李元鎭淸德善政碑)'가 있습니다.

청덕선정비 앞면 청덕선정비 뒷면
부사(府使) 이공원진(李公元鎭)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을유(乙酉) 10월 일
도감(都監) 문계창(文啓昌)
    색(色) 송성생(宋星生)
    공(工) 김광원(金光元
좌수(座首) 문계후(文啓後)
    별감(別監) 송계상(宋繼商)
                      박우계(朴友桂)

 

이원진 청덕선정비 오른쪽엔 '황호 청덕선정비(黃㦿淸德善政碑)'가 있습니다.

청덕선정비 앞면 청덕선정비 뒷면
부사(府使) 황공호(黃公㦿)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병술(丙戌) 10월 일
좌수(座首) 문계후(文啓後)
별감(別監) 박우계(朴友桂)·송계상(宋繼商)
대동(大同) 김ㅇ성(金ㅇ聲)
ㅇㅇ ㅇㅇㅇ

황호 청덕선정비 왼편엔 '조봉진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영세불망비 앞면 영세불망비 뒷면
 府使曹公鳳振永世不忘碑 粤在丙子    公節南莅恩遍窮蔀威慴異類
南橋北路利沙萬人薟丁無闕履畝惟均永
蠲墓陳澤及枯骨不忘遺愛爰竪短碣
崇禎紀元後四己亥七月日各靣立
      座首孫星馹吏房李之淳
      都監金漢柱有司劉景昌色李之亨
부사 조공봉진 영세불망비
지난 병자(1816년?) 공의 절개가 남쪽에 임해 은혜가 궁한 사람의 집에 두루퍼져 위엄이 다른 류를 습복하니 남교와 북로에 이르는 모래같은 만인을 이롭게 하고 일꾼들과 함께 이무(履畝)가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같아 길이 밝아 묘진(墓陳)의 못과 마른 뼈를 잊지 않고 남겨 이에 단갈(短碣)을 세운다.
숭정기원후4기해(1839년) 7월 일 각 면(靣)이 세움
 좌수 손성일(孫星馹) 이방 이지순(李之淳)
 도감 김한주(金漢柱) 유사(有司) 유경창(劉景昌) 색(色) 이지형(李之亨)

이번 번역은 한문을 잘 하시는 지식인 우주신이신 '꽃다운 넋'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윤필은 청덕선정비(尹弼殷淸德善政碑)'가 있습니다.

청덕선정비의 앞면 청덕선정비의 뒷면
부윤(府尹) 윤공필은(尹公弼殷)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광무 4년(光武四年, 1900년) 8월 일
상재(桑梓)의 영화로운 은혜 입어(桑梓荷榮)
큰비와 같은 보답을 생각하였네(擬酬鴻霈)

마음은 얼음과 황벽(黃蘗)처럼 청렴하시고(心淸氷)
정사는 대갖옷띠처럼 (느슨하고 편하게) 하셨네(政簡裘帶)

아녀자와 젖먹이들 은혜를 노래하고(誦恩婦孺)
노인들[耆艾]은 공적을 기록하네(紀績耆艾)

이웃 마을 다투어 축하드리니(鄰邦競賀)
(그 모습을) 그려 영원히 전하리라(永傳圖繪)
읍내면(邑內面) 각동민인(各洞民人) 등 세움

이렇게 조선 동래부에서 현 부산 지역을 관할했던 동래부사와 다른 관리들이 근무했던 곳이자 동래 역사 탐방의 꽃인 동래부 동헌 답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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