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공원 안의 임진동래의총(+이사가버린 고려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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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 안의 임진동래의총(+이사가버린 고려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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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동래의총

 

 

 

 

 

금강공원 안내도다. 입구에서 쭉 올라가서 좌측으로 가면 케이블카를 탈 수 있고, 우측으로 가면 산책하며 여러 볼거리, 즐길거리를 마주할 수 있다.

케이블카 타는 방향의 반대편(우측 편)의 큰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한자로 '임진동래의총'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찍은 첫번째 문 입구. 입구에는 이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임진동래의총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3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7-67(온천동)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궐기하여 동래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곳이다.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전사한 많은 사람들의 유골이 포환(砲丸), 화살촉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충절의 유해를 거두어 동래부의 남쪽에 있던 삼성대(三姓臺)의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비를 세웠다. 비의 글은 부사 정언섭이 썼으며, 비의 높이는 103cm, 넓이 45cm이다.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뒷면에는 10행으로 적은 육총(六塚)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또 국가에서는 제사 비용의 마련을 위해 제전(祭田)을 주고, 향교에 맡겨 매년 추석에 유생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순절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일제시대에 토지개간으로 복천동 뒷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경내) 부근으로 이장하였고, 그 후 비석을 옮겨 세웠다. 1974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으로 옮겨 왔다. 지금은 성의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 동래구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동래성 전투에서 사망한 군관민들의 유해를 모은 무덤이자 제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는 6개의 무덤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큰 하나의 무덤으로 모셔져 있고, 원래는 동래부 남쪽의 삼성대 부근에 세웠다가 지금 여기로 모셔왔다고 한다.

첫 번째 문을 들어갔다. 저 멀리 큰 문이 하나 더 보인다. 저리로 가야 한다. 좌측에 보이는 절은 금정사이며, 우측에는 여러 비석들이 있다.

동래의 17명의 부사, 1명의 부윤, 그 외 직책과 인명을 확인할 수 없는 1명의 선덕이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청덕선정비(청선비), 선정불망비,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어떻게 찍어도 정말 고풍스럽게 잘 찍힌다ㅎ

임진동래의총 정화기념비

임진왜란 때 바다를 건너 몰려온 왜의 대군을 맞아 이곳 성민은 나라의 관문이요 향토인 동래성을 지키기 위하여 분연히 궐기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모든 성민이 무참히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때 순사(殉死)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의사들의 유해를 더두어 모신 곳이 이 무덤이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퇴락하였던 동래읍성을 고쳐 지을 때 임란 당시 격전지였던 남문의 좌우 터에서 부서진 창과 화살촉 그리고 적의 포탄과 함께 순사한 이의 많은 유골이 출토되었다.
그 중 형골이 완연한 22구의 유해와 무수한 잔해를 거두어 베와 종이로 싼 후 상자에 넣고 부의 남쪽 삼성대 서편 구릉지에 육총으로 모시고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제전을 마련하여 매년 추석에 유생으로 제사케 하였으며 순사일에는 관에서 장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788년 이경일이 부사로 있을 때 고을에서 샘을 파다가 유골이 나옴으로 이 또한 거두어 육총의 곁에 묻으니 칠총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일제말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칠총이 헐리게 되었으며 유해는 동래 복천동 뒷산 영보단 부근에 옮겨져 작고 초라하게 합분되었다.
1974년 옹색한 옛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수차례 손을 보았으나 이같은 여건으로는 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얼을 기리기에 미흡하어 경역과 시설을 새롭게 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비록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라하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던진 의로운 선조들의 무덤이니 옷길을 여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긴다.

비의 역사가 요약되어 있고, 지금 이곳으로 옮긴 연유를 살짝 밝히고 있는 임진동래의총 정화기념비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 등, 임진왜란 순국자 유해를 삼성대 서편 구릉지에 육총으로 모심
임진전망유해지총이라는 비석 세움
1788년 동래부사 이경일 등, 고을에서 샘을 파다가 유해 발견 후 임진전망유해지총에 무덤 하나를 더 만들어 모심
일제강점기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칠총을 허물고 유해는 영보단 부근에 합분해 옮김
1974년 옹색한 옛터에서 현재의 금강공원으로 옮겨 모심

실제로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이름 있는 장수와 의병 75분은 신원을 파악해 지금까지 충렬사에 모셔져 있지만, 양민들의 순절에 대해선 기록만 있을 뿐 제대로 뜻을 모아 제사를 지내온 것은 아니었으나 1731년이 되어서야 동래부사 정언섭이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격전지 남문터(동래경찰서 부근)를 파면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제사를 올리다가 일제에 의해 어떠한 제사나 참배도 강제폐지 되었으나 해방 후 동래기영회 등에서 영보단비 제사를 지내며 간략히 추모식을 거행하며 명복을 빌어왔다. 그러다 향토사학자등과 동래기영회에서 이 지역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부산시가 금강공원 금정사 왼쪽 기슭에 합장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두번째 문을 지나면 임진동래의총에 다가갈 수 있다.

두 번째 문을 들어가면 이런 모습이 나온다.

가운데에는 충혼(忠魂)을 모시는 충혼각(忠魂閣)이 있다. 각의 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殉國成仁節 秋風猶帶悲 忠魂來格依 香閣塚前在
순국하여 인(仁)을 이룬 절개여 가을바람이 오히려 슬픔을 띄고 있도다. 충혼(忠魂)들이여 여기와서 안식토록 하소서 향각(香閣)은 무덤 앞에 세웠으니

충혼각의 좌측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아 이 여섯무덤은 곧 임진년에 왜적과 싸우다 돌아간 이의 장지다. 임진년은 지금부터 1백40여년전 일인데도 화살촉이 아직 녹아 없어지지 않고 부러진 창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으며 적의 포탄파편이 해골 사이에 박혀있다. 이 얼마나 슬픈일인가. 여기 이 유해가 나온성의 남쪽경계는 천곡(泉谷)선생(송상현)이 순절한 자리다.

신해년(辛亥年, 영조7년, 1731년) 조정의 명을 받아 옛 성터를 넓히려니 여기 이 유해가 나왔었다. 이 유해는 임진왜란으로 천곡선생과 함께 성을 지키며 적과 싸우다 전사한 분들이다. 그러나 성명을 밝힐 수 없는 일이 안타깝고 충렬사의 제향을 함께 받지 못하는 일이 더욱 애석하다. 여기 묻힌 분들 가운데 그 형체가 완연한 분은 12구에 지나지 않았고 그 잔해 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이는 이루 다 셀수 없었다.

그런 유해를 거두어 상자에 모셔 동래부 남쪽 삼성대의 서쪽 산기슭인 여기에 옮겨 묻었다. 이 무덤은 그러한 유래속의 충신 의사의 장지이다.

고을사람은 밟지도 헐지도 말고 농주산(弄珠山, 동래경찰서자리에 있었던 산) 4월 제사때는 이 무덤에 따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 동래부사 정언섭씀, 감관(監官)은 정원교(鄭元僑) 임신해 7월 세움.

임진전망유해지총비의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면 저 멀리 큰 무덤이 하나 보인다.

여기에서 잠시 나라 위해 싸운 백성들을 위해 묵념했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자기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런 조용한 묘로 전해지고 있다.

 

2. 고려오층석탑

고려오층석탑이 위치했던 차밭골로

그다음 찾아간 곳은 고려오층석탑이다.

금강공원에서 고려오층석탑이 있었던 장소까지 가는 길

금강공원 입구에서 조금 내려오면

이런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길로 내려가주자.

조금 더 내려가면 온천치안센터가 나오고 쭉쭉 더 내려가주면

이런 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빠져 쭉 가보자. 참고로 차도 이 길은 무조건 우회전해야 한다.

그럼 이런 곳이 나온다. 바로 여기가 고려오층석탑이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곳이다.

지금은 이렇게 나무가 뒤덮인 관리되지 않는 집터가 되었다.

실제로 2종주거 300평의 땅으로 판매되고 있는 곳이다. 이 뒤쪽의 아파트에서도 덤불 때문에 이 안이 보이지 않았고, 옆 건물 주차장에서도 그 안이 마른 수풀로 뒤덮여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일단 문화재청에선 이 석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5층 석탑이다.

원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대청동에 있었던 일본인의 별장 정원에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온천동 금강공원 부근 개인의 정원에 있다.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춘 전형적인 고려시대 5층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5층 탑신의 옥개석(屋蓋石)이 없어지고, 탑의 위쪽 상륜부(相輪部)만 이상한 형태로 뒤에 보충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는 다소 어색한 느낌을 준다.

탑신의 각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으나, 옥개석의 옥개 받침이 2층까지는 4단으로 반전(反轉)되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전체적으로 고려 석탑이 주는 높고 가파른 느낌을 주고 있다. 아울러 큰 석재를 사용하여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고려시대 석탑이 가지는 특징인 특색이 나타나고, 탑의 층수나 옥개석이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3층 양식을 벗어나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화재 지정 해제일 : 2015년 7월 1일

왜 갑자기 잘 있는 문화재가 지정 해제되었을까? 2015년 7월 1일에 부산광역시 문화관광국 문화예술과에서 발표한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지정해제 고시(2015-237)>에 따르면 해당 문화재가 경기도 지역으로 이건함에 따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일제강점기의 대청동 일본인 별장 정원에 있었고, 이후 온천동 금강공원 인근 개인 정원에 있었다가 다시 또 경기도 쪽으로 옮겨져 간 것이다... 시에 등록이 되어있는 문화재를 이렇게 개인이 옮기는 경우는 간혹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고, 문화재들은 현대에 많은 교통 혼란이나 문제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미 지정된 문화재는 원래의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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