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옮겨졌던 그 자리, 동래 (구)망미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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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옮겨졌던 그 자리, 동래 (구)망미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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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루터 [望美樓址]
동래부 동헌 앞에 세운 문루로서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망미루(望美樓)가 있던 곳.
2014년 12월 원래 자리 주변인 동래부 동헌 일곽 내에 이전·복원

2011년 5월 카카오맵에 찍힌 사진을 보면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있다.

동래도호부(1547~1592) 동래현(1592~1599) 동래도호부(1599~1895)

원래 1547년, 동래 지역은 동래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의 책임으로 1592년 동래현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난 1599년 다시 국방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래도호부로 승격했고, 1895년, 23부제 수행으로 동래부가 될 때까지 약 300여년 가까이 현재의 부산 및 동래 지역의 행정구역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은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이 문루를 세웠다.

이 때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도 같이 걸어, 이 망미루는 관청의 중요한 건물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삼키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동래부 동헌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이 문은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원래 있었던 곳에서부터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 입구 교차로 위치로 옮겨졌다가 2014년 12월에 원래 있었던 자리의 주변으로 옮겨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문루를 보고 드나들었는데, 이 망미루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문루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동래시장 쪽에 살던 우리 아버지도 이 문을 기억하셨으니 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엔 이 문은 오랫동안 여기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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