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렬사 가는 법
4호선 충렬사역에 내려서 1번출구로 나오면 충렬탑이 보이고 이 탑을 돌아가면 긴 입구를 걸어 드디어 정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2. 충렬탑~입구
충렬사 1번출구 쪽에서 본 충렬탑입니다. 칼을 빼든 장군, 깃발을 들고 나팔을 든 병졸, 화살을 나눠주는 여성 등 당시 이 땅에서 외침을 막았던 부산 사람들의 사투를 보는 듯 했어요.
충렬탑을 정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많은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지키려고 희생하신 것에 정말 감사함을 느꼈어요.
충렬사의 차도 입구입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주차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걸어오셨다면 양쪽의 긴 보도로 걸어가시면 됩니다.
관람 시간 | 하절기(4~9월) | 09:00~21:00 * 18:00~21:00 : 충렬사 광장, 휴식동산까지만 관람 가능 |
동절기(10~3월) | 09:00~20:00 * 18:00~20:00 : 충렬사 광장, 휴식동산까지만 관람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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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 무료 | |
관람 시 유의사항 | 본전 참배 후 관람할 것 슬리퍼 차림, 자전거, 동물 동반 출입 불가 술, 음식물 반입 불가, 가무 불가 흡연 금지 |
관람료는 무료이며, 하절기(4~9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동절기(10~3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관람 가능한데, 오후 6시 이후에는 본전 참배는 불가능하고, 충렬사 광장과 휴식동산까지만 관람 가능합니다!
몇 걸음 더 걸어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우측에 열린 곳으로 드나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충렬사 앞에는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충렬사(忠烈祠)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 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세워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에는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장군을 추배하고 임진왜란 때 송상현 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5,804m²(28,980평)의 경역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올린다. |
3. 충렬사 광장
정문으로 들어와 본전이 가운데로 오게 찍은 사진입니다. 엄숙하면서도 신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 우측으로 돌아 가봤습니다. 의자들과 여러 나무들이 있었어요.
전통혼례장입니다. 별도 예약에서 혼례식을 여는 것 같습니다.
전통혼례식 바로 왼쪽엔 '송상현 공명언비'가 있습니다. 비의 앞에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라는 명언이 새겨져 있죠.
4. 충렬사 충렬문을 지나서
우선 이 첫번째 문인 충렬문(忠烈門)을 올라가면,
소줄당(昭崒堂) : 밝고 넒은 집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과 그 학행(學行)을 후세의 사표(師表, 본보기)로 삼기 위해 1652년(효종 3년)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이라는 당호(堂號)는 한유(韓愈, 768~824)의 <이제송(夷齊頌)>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昭乎日月 不足爲明, 崒乎泰山 不足爲高)'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란(임진왜란) 선열들의 충절은 일월(日月)보다도 밝고, 태산(泰山)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
使君忠節冠千齡 송부사의 충절은 천년에 뛰어 났는데, 古廟秋風木葉零 옛 사당에 가을 바람이 불어 낙엽이 지는구나 |
精返雲天添列宿 넋은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고, 氣成河嶽護生靈 장한 기개는 산이 되고 강이 되어 이 나라 백성을 호위하도다 |
深羞徹地何年雪 깊은 부끄러움은 땅에 사무치는데 (이를) 어느 해나 씻을고, 怒髮衝冠一夜星 밤새도록 잠 못 이루어 성난 머리카락이 관을 찌르는구나 |
우측에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안에는 당시 동래부사나 부산첨사 등이 사용했던 문서, 장구 등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를 기념한 그림들이 크게 걸려 있으니, 한 번 보러 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4. 충렬사 본전으로
이제 두번째 문으로 올라가면 본전입니다.
본전에 올라가는 계단을 가기전 오른쪽으로 가면 충렬사 정화기념비가 있습니다.
충렬사 정화기념비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왔던 일천오백구십이년 사월 십삼일은 우리 한민족으로서 천추에 잊지 못할 통한의 날이 된다. 고려조때에 몽고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때에는 청군이 침략해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 외침보다 몇갑절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의 빈곤 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방이 부실해 있었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먼저 왜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까지 싸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도 절감한 동래부사 송상헌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도 저마다 맡은 부서에서 용전분투 끝에 옥쇄했다. 일신의 아픔이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서 통감하지 않았고서야 어찌 군관민 남녀노소 모두가 한덩어리지어 목숨글 바칠 수 있었으며 칠년 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봉기가 이분들의 순절한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였겠는가 적의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를 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 앞엔 태산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익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홍모같이 가벼운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나라의 안보 사상이 미약한 곳에 나라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진데 이곳에 충렬사를 세워 순절 선열들을 추모해 왔음은 다름 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었더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직할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확당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이 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 정신으로 받들어 총화 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 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 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열의 영령에 부끄럼이 없게 그 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써 갚고 후손을 만대 반석 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할 것이다. 일천구백칠십팔년 오월(1978년 5월) 이주홍 짓고 배재석 쓰다 |
이 기념비에는 충렬사 정화사업을 기념하여 제작한 비로 호국선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열각(義烈閣) : 의녀와 열녀의 집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의녀(義女)들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성전투에서 왜적과 기왓장으로 싸웠던 무명의 두 의녀와 당시의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부산첨사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 애향(愛香) 두 열녀(烈女) 등 모두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충렬사 신위가 모셔진 본전 계단을 다 오르기 전 좌측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순국했던 2명의 의녀와 2명의 열녀, 총 4분의 여성의 위패를 모시는 의열각이 있습니다. 여기선 순국선열의 묵념 안내 멘트에 따라 잠시 그들을 기리는 묵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본전(本殿) 임진왜란 당시 부산 지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부산 지역에서 전사한 선열 23명과 동래부, 부산진, 다대진 및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위패 4위, 의병 62명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의 본당이다. |
충렬사 본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하신 89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죠.
옆에는 참배를 했다는 사실을 예참(參禮)에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본전(本殿) : 89신위(神位) 수위(首位) : 3신위(神位)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 부산첨사 정발(鄭發 1553~1592),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배위(配位) : 16신위(神位) 서편 : 부산진ㆍ다대진 무명용사, 녹도만호 정운,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병조참판 윤흥제(尹興梯), 호조정랑 양조한, 군자감판관 송봉수, 예빈시주부 송백(宋伯) 동편 : 동래부전투, 부산포해전, 무명용사,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부사맹 이정헌, 호조좌랑 문덕겸, 중부참봉 신여로, 군자감판관 김희수, 중부참봉 김 상 종위(從位) : 70신위 서편 : 임진동래 24별전공신, 동래부충복 철수ㆍ매동, 합사선열 13위(1991.9.10) 동편 : 수영25의용인, 부산진충복 용월, 합사선열 3위(1996. 9. 10), 합사선열 1위(2003.4.24), 합사선열 1위(2007.6.19) |
가운데 수위전에는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 3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그 양쪽의 배위전에는 총 16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요. 마지막 종위전에는 70분의 위패가 모셔져, 본전에 총 8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5. 왼쪽의 산책로에서 입구까지
이제 본전 참배까지 끝냈다면, 좌측의 산책로로 내려갈 수 있어요.
내려가다보면 이런 발지압 산책로도 나오네요. 산책로에서 더 내려가면 비석이 있습니다.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 임진왜란 당시 동래 지방 출신으로 창의모병(倡義募兵, 의병)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역전토적(力戰討賊, 전쟁에 힘쓰고 도적을 토벌함)에 전공(戰功)이 혁혁한 24별전공신의 공적비로 1988년 5월 14일 제막(除幕, 막을 걷음)하였다. |
그 조금 뒤쪽 등산로 입구에는 충의단 24공신위 매안감고비가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장관청과 동래읍성지, 그리고 동장대까지 걸어갈 수 있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이 망월산은 매년 11월부터 5월까지 통제한다네요.. 실제로 올라갈 수 있는 건 6월부터 10월 4개월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산책로를 내려가면 이렇게 호수가 나옵니다. 호수 왼쪽 뒤에는 화장실과 휴게소가 있습니다.
연못 물 나오는 입구는 겨울이라 그런가 얼어붙었네요ㅎㅎ
살얼음이 껴있던 겨울이었습니다. 물고기들도 추워서 그런가 옹기종기 보여 있드라구요.
여기가 정문 바로 옆입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여기서부터 군관청과 동래읍성지를 지나 동장대까지 갈 수 있어요. 6~10월까지만ㅠ 어쨌든 그 곳을 넘어서 인생문을 지나 흔히 동래읍성이라고도 불리는 동래사적공원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나와서 이렇게 쭉 돌고 점심 먹고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ㅎ
임진왜란 때 부산을 지켰던 사람들을 모신 이 충렬사는 부산의 임진왜란 기념 성지라고 가히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 시절 이 땅을 위해 희생하셨던 분들의 후손들은 몇 번의 시련이 있긴 했지만 지금 그래도 한국말을 지키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기념하러 잠깐 산책가보시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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