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 동헌 외대문터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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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동헌 외대문터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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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래부 동헌 외대문터

동래부 동헌 입구 바로 건너편에 동래부 동헌 외대문터가 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터
조선 후기 동래부가 경상좌병영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독진(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부 동헌의 외대문(外大門)이 있었던 곳. 현재는 동래부 동헌 안으로 이건(移建)되어 있다.

1655년,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는 현판을 기존에 세웠다고 여겨지는 3칸 문에 걸며 지금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 금강공원에 있었던 동래독진대아문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
:
인접국과의 교역에서 연향했던 선위사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
:
진변의 병마절제사의 영

이 문의 왼편엔 '대일외교 때 일본사신을 접대하던 관아'라는 뜻의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라고 적혀있으며, 오른편엔 '진변의 병마절제영'이라는 뜻의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이라고 적혀 있다.
 
원래는 동래부사청(東萊府使廳) 동헌(東軒)에 있었는데, 20세기 초 시가지 정리로 인해 금강공원 안에 세워졌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5일, 원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동래부 동헌 경내에 세워지게 되었다.

간혹 이 비석 바로 뒤의 문을 동래부 동헌 외대문(동래독진대아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독진대아문은 비석이 있는 곳에서 동쪽 밑으로 내려가면 보이는 막혀있는 큰 문이다!

출처 : 카카오맵

로드뷰 상에서 본 동래부 동헌 외대문터 비석과 복원된 동래독진대아문의 위치다.
 

2. 동래부 동헌 외대문

꽤 웅장하지 않은가? 옛날엔 여기에 사천왕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고 하니 더 엄숙하고 장엄했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봐도 관아로서의 위엄이 느껴지는 문인데, 당시 조선 시대 사람들이 봤을 땐 어떤 느낌이었을까?

동래부 동헌 외대문 안내판 설명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

이 문은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사적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조선 후기에 동래부는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국방과 외교상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다른 고을에 비해 관아의 수도 많았고, 규모도 컸다. 이 문의 첫 건립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동래부 동헌을 건립할 때 함께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870년(고종 7)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건한 것이다. 솟을삼문 중앙에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 쓴 현판이 중앙에 걸려 있다. 이것은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에 있던 경주 진관(慶州鎭管) 소속에서 독립하여 동래 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아래 좌우의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뜻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때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 문은 우리 고장에 남아 있는 전형적인 관아 대문이다. 규모는 작으나 3문형식의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지붕은 솟을대문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천정의 밑에 홍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원래 외삼문(外三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동래부 동헌의 대문은 망미루 뒷쪽에 있었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8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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