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시장의 북쪽에 송공단이 있다. 이 부근에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기를 와봤다면 다른 곳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동래시장 뒤편에 보이는 전통식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송공단이다.
이 문의 좌측에는 이렇게 인근 역사적 볼거리(복천동고분군, 복천박물관, 동래부 동헌, 동래장관청) 가는 길을 소개해주는 안내판도 있다.
송공단의 정문. 송공단(宋公壇)은 송공(宋公)을 기리는 제단(壇)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송공(宋公)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宋象賢,1551~1592)을 말한다. 즉, 여긴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리는 제단이다. 좌측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송공단(宋公壇)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 이 단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 1694~1742)이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안 정원루(靖遠樓)에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 공을 비롯한 순국선열을 모시고 제사지내기 위해 그 터에 세운 제단(祭壇)이다. 이 단은 17세기 초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 송공단은 동서남북의 4단으로 만들어 매년 음력 4월 15일 동래부에서 제사를 올렸다. 1766년(영조 42)에는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등을 모셔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이후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은 윤공단(尹公壇)에서, 부산진에서 순절한 분은 정공단(鄭公壇)에서 각각 따로 모심에 따라 단을 고쳤다. 송공단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다시 많이 고쳐졌으므로 <충렬사지(忠烈祠志)>에 따라 2005년 현재와 같이 고쳤다. 1930년쯤부터는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지냈고, 최근에는 음력 4월 15일에는 동래기영회에서, 음력 9월 9일에는 동래시장번영회에서 각각 제사를 대신하여 추념식(追念式)만 거행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송상현 공의 충절에 감탄한 일본 장수가 송상현 부사를 죽인 일본 병사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죽였다고 한다. |
원래 이곳은 당시 동래부 객관 내에 있던 누각 중 하나인 (구) 정원루(靖遠樓, 1446~1592)가 있었던 자리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
1731년, 동래부 남쪽의 농주산쪽에 여러 무덤을 두고 임진왜란 때의 희생을 기리는 제사를 하고 있었다(이와 관련해서는 임진동래의총(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16)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러다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이 곳에서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여러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구)정원루 터에 지금의 재단을 만든 것이다. 이후 다대진성 전투(1592.05.23~05.24)에서 순국한 선열들을 다대포 지역의 윤공단에, 부산진 전투(1592.05.23~05.24)에서 순국한 선열들은 좌천동 지역에 정공단을 세워 따로 모시면서 (구)정원루 터에 동래성 전투(1592.05.25)에서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 등을 모시게 되었다.
우측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을 바라봤다. 저 건물은 관리 건물인 것 같다.
우측에는 이렇게 비석 2개가 세워져 있다.
저 멀리 있는 큰 비석은 바로 송공단비(宋公壇碑)다. 이 송공단비는 송공단의 연혁과 의의를 밝히고 있다. 아래는 비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비의 앞면 |
임진왜란을 상기할 때 충분(忠奮)이 치솟아 처연(淒然)한 감회(感懷)를 금할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200년 평화와 역대(歷代)의 숭문(崇文, 문을 숭상함)으로 문약(文弱, 글만 받들고 실전과는 떨어져 나약함)이 성풍(成風)하고 당론(黨論)이 분열하여 국방이 경시되고 변비(邊備, 국경의 경비)가 소홀하였는데 저 풍신수길(豐臣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임악(稔惡)을 방자(放恣)히 하여 조총으로 무장한 경예(鯨鯢, 고래의 짝)를 몰아 창졸간에 강토를 침범하니 한 때 천지가 회명(晦暝, 컴컴하게 어두움)하고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이 민몰(泯沒, 형적이 아주 없어짐)하여 음운(陰雲)이 일월을 가리고 변풍(變風)이 강산을 휩쓸었다. 삼도(三都)가 함몰되고 팔도(八道)를 유린하여 봉채(蜂蠆, 벌과 전갈)의 독과 효경(梟獍)의 악(惡)을 극하니 저 충무공(忠武公)의 위공(偉功)과 의병의 항전과 명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거의 비색(否塞, 운새가 꽉 막힘)한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진(釜鎭, 부산진)이 없으면 내부(萊府, 동래부)가 없고 내부(萊府)가 없으면 영남(嶺南)이 없으며, 영남(嶺南)이 없으면 국가가 위태하다는 것을 정발(鄭撥) 첨사(僉使)나 송상현(宋象賢) 부사(府使)가 공감한 바이라 청야(靑野)의 계(計)(청야전술)와 농성(籠城)의 책(策)으로 결전에 당하여 양 3일간에 시산혈하(屍山血河,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만듬)를 이루고 끝내 흠운(歆運)의 절(節)을 택하여 원술(元述)의 회(悔)를 남기지 않음은 적(賊, 도적)을 차지(此地, 이 땅)에서 섬멸코자함이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월훈고성(月暈孤城, 외로운 성의 달무리)으로 어찌 이곽(李郭)의 충을 다할 수 있으리오. 헛되이 순원(巡遠)의 한(恨)을 남길 따름이었다. 그러나 몸은 비록 순절하여도 그 흑의(黑衣)의 용맹과 관복(官服)의 충의는 길이 민심을 용동(聳動)하여 홍모(鴻毛, 기러기의 털)의 일신(一身)으로 태산(泰山)의 의리를 성취케하고 또한 적담(賊膽, 도적의 쓸개)을 최절(摧折, 억눌러 제어함)하여 저로 하여금 경모(敬慕, 존경과 사모)의 정(情)과 모화(慕化)의 뜻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사생(死生)을 초월한 거룩한 순국정신은 만고(萬古)에 길이 빛나리라. 당시의 사적은 내외의 사서와 <충렬지(忠烈志)> 등에 상세하여 생략하거니와 강상(綱常)을 부수(扶樹, 도와 세움)하고 절의(節義)를 권장함은 언제나 치국(治國)의 대본(大本, 중요한 근본)이요, 휴척(休戚, 안락과 근심)의 매인바라. 경란(經亂)후 휼정(恤政)으로 잔민(殘民)을 안집(安集)하고 작상(爵賞, 벼슬을 새로 주거나 높여 주어 표창함)으로 공훈(功勲)에 보답하며 봉제(奉祭, 제사를 봉함)로 충혼(忠魂)을 달램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이나 정유재란이 끝날 때 까지는 이곳이 적(賊)의 소굴이 되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다가 난후(亂後) 13년만에 비로소 부사(府使) 윤훤(尹暄)이 성내에 송공사(宋公祠)를 세워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였고 다시 16년을 지난 광해군(光海君) 원년에 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성함일(城䧟日, 성의 함락일)에 만성유민(滿城遺民)이 설전곡제(設奠哭祭, 제사터를 세우고 울며 제사를 지냄)함을 보고 송공사(宋公祠)에도 휘신제(諱辰祭, 제삿날의 제사)를 거행할 것을 하체(下帖, 지방관이 체문을 내림)하였다. 다음해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가 정첨사(鄭僉使, 정발)를 송공사에 합사(合祀)케 하였고 인조(仁祖) 2년(1624)에는 조가(朝家, 조정)에서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 임금이 이름을 건물에 지어줌)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액루(隘陋, 비좁고 누추함)하여 선열의 타령지(妥靈地, 위패를 잘 모시고 섬기는 땅)로 부적(不適, 부적당)하므로 다시 임진주갑년(壬辰周甲年)인 효종 3년(1652)에 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충렬사(忠烈祠)를 성동(城東, 성의 동쪽)의 안락원(安樂原)에 옮기고 서원(書院)의 선액(宣額, 임금이 이름을 건물에 지어줌)을 받아 송공(宋公, 송상현)을 전향(專享, 하나의 신위만 향사함)하고 정공(鄭公, 정발)을 배(配)하였다. 그 뒤 58년을 지나 영조 45년(1769) 기축(1769)에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성내의 구사(舊祠)에 별사(別祠)를 두고 송공(송상현)과 함께 순절한 양산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공(公)과 동래교수(東萊敎授) 노개방(盧蓋邦) 공(公)에 교생(校生) 문덕겸(文德謙)을 배하여 제(祭)하고 신장(神將) |
비의 앞면에서 좌측 옆면 |
김희수(金希壽), 송봉수(宋鳳壽),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 호장(戶長) 송백(宋伯), 부민(府民) 김상(金祥) 등 5인을 동무(東廡, 문묘 안에서의 위패를 모신 동쪽 행각)에 병사(竝祀, 함께 모심)하였는데 뒤에 정공(정발)은 무인이고, 노공(盧公, 노개방)은 문유(文儒, 문인)라하여 정공(정발)을 별사(別祠)로 옮기고 노공을 서원으로 옮겼다가 정조 19년 을묘(1795)에는 부사 최명상(崔命相)의 보장(報狀, 상부 관아에 알리는 공문)으로 동절사인(同節士人)을 빈주역행(賓主逆行)하여 분사(分祠)함은 불합리한 일이라 하니 조명(朝命, 조정의 명령)으로 분사(分祠)를 철훼(撤毁)하고 신주(神主)를 서원으로 합사하였는데 이 때에 양무(兩廡, 동무와 서무)의 위차(位次, 신위의 순서)도 확정되고 춘추의 향사도 의절(儀節, 예절)이 구비되어 충혼을 봉제(奉祭, 제를 받듬)하는 조가(朝家, 조정)의 은전(恩典, 나라에서 내리는 혜택에 관한 특전)이 이에서 구현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향사는 예전(禮典)에 따라 거행함이니 난중(亂中) 적시하(積屍下, 쌓인 시체 아래)에서 구사일생으로 전망휘신(戰亡諱辰, 전사한 자의 제삿날)에 곡장곡친(哭長哭親)하는 추모의 정을 달래지 못하였다. 단제(壇祭, 단에서 지내는 제)의 원위(原委, 근본과 말단)를 상고하건데 송공사(宋公祠)의 휘신제(諱辰祭)가 곧 그 남상(濫觴, 시초)이 될 것이나 충렬사(忠烈祠)가 안락원(安樂原)으로 옮겨감에 이 추모의 휘신제는 성민(城民)의 요청과 민풍(民風)의 진작(振作, 떨쳐 일으킴)을 감안(勘案)하여 따로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상(上)에 전망제단(戰亡祭壇)을 신설하고 송정양공(宋鄭兩公, 송상현과 정발)의 전망기제(戰亡忌祭, 전사한 날에 지내는 제사)를 여기에서 군례(軍禮, 군대 예식)로 거행케하여 춘추향사(春秋享祀)와 휘신단제(諱辰壇祭)를 나누게 된 것이 단제(壇祭)의 처음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충렬사와 별사(別祠)와 서원에서 차제(次第, 차례)로 추가향사(追加享祀)한 제위(祭位, 제사를 받드는 신위)에 따라 단제(壇祭에서도 순차로 일체행제(一體行祭)하게 되니 춘추의 향사는 사림(士林)에 의하여 서원에서 행하고 휘신의 기제(忌祭,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성중(성안) 부로(父老,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들에 의하여 농주산 전망제단에서 행하게 된 것이다. 농주산제단은 북동서 3단(三壇)으로 설(設)하고, 북정단(北正壇)에는 송(宋), 정(鄭), 조(趙), 노(盧) 4공을 모시고 동서단에는 전망제인(戰亡諸人, 전사한 많은 사람들)과 무명국상자(無名國傷者, 이름 없는 나라 위해 싸우다 쓰러진 자들)를 배식(配食, 배향)시켰다. 제전(祭典)은 중군(中軍)이 구군복(具軍服)하고 헌관(獻官)이 되어 |
비의 뒷면 |
기치(旗幟)를 배열(排列)하고 군악(軍樂)을 잡히며 부사의 축문(祝文)을 읽고 군례(軍禮)로 행하였다. 영조 18년(1742) 임술(1742) 부사 김석일(金錫一)이 객사(客舍) 동편인 (구) 정원루지(靖遠樓趾, 정원루터)가 제공(諸公, 많은 공들)의 순절가(殉節家, 순절한 집)라하여 이곳에 새로 동서남북 사단(四壇)을 설(設)하고 단명(壇名, 단 이름)을 송공단(宋公壇)이라 하여 농주산(弄珠山) 전망제단을 옮겨오니 상단(上壇)에는 송(宋, 송상현), 정(鄭, 정발), 조(趙, 조영규), 노(盧, 노개방) 4공을 모시고 동단(東壇)에는 교생(校生) 문덕겸(文德謙)과 신장(神將) 김희수(金希壽), 송봉수(宋鳳壽),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 등을 배하고, 서단(西壇)에는 노공부인(盧公夫人, 노개방의 부인)과 금섬(金蟾, 송상현의 애첩), 애향(愛香, 정발의 첩) 등을 배하였으며, 남단(南壇)에는 호장(戶長) 송백(宋伯)과 부민(府民) 김상(金祥)과 이촌녀(二村女) 및 기타 전망제인(戰亡諸人, 전사한 사람들)을 배하여 제전(祭典)에 군례를 폐(廢)하고 상전(常典, 상규)을 좇게하니 이것이 현재의 송공단이 된다. 영조 36년(1760) 경진(1760)에 부사 홍명한(洪名漢)은 사림의 공의(公義)를 따라 부산성(釜山城,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사맹(司猛, 부사맹) 이정헌(李庭憲) 공(公)을 배단(配壇)하였고, 동(仝, 영조) 42년(1766) 병술(1766)에는 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 공(公)과 교생 양조한(梁潮漢)을 추향(追享)하고 단(壇)을 크게 개축하여 정단(正壇)을 좌우로 나누고 동서로 5단(五壇)을 설(設)하여 송(宋) 정(鄭) 2공을 좌우 정단(正壇)에 분(分)하였으며, 동1단에는 조양산(趙梁山, 조영규), 노교수(盧敎授, 노개방) 이사맹(李司猛, 이정헌), 윤다대(尹多大, 윤흥신)를 서1단에는 문(文, 문덕겸), 양(梁, 양조한) 두 교생과 김(金, 김희수), 송(宋, 송봉수) 두 신장(神將)을, 동2단에는 노공부인과 금섬, 애향 및 이촌녀를 서2단에는 신겸인(申傔人, 신여로), 송호장(宋戶長, 송백), 부민(府民) 김상(金祥)을, 서3단에는 사난제민(死難諸民人, 난으로 사망한 백성들)으로 하였다. 동(仝, 영조) 43년(1767) 정해(1767)에 정공단과 윤공단이 각기(各其) 순절지에 신설됨으로 부사 엄린(嚴璘)이 정(鄭, 정발), 이(李, 이정헌), 윤(尹, 윤흥신) 제공(諸公, 모든 공)과 정공첩(鄭公妾) 애향을 본단(本壇)으로 돌리고 노공부인 이씨(李氏)를 제(除)하여 정단(正壇)에는 송공(宋公, 송상현)만을 모시고 동1단에는 조(趙, 조영규), 노(盧, 노개방) 2공을 배하고 제2제단은 철회(撤毀)하였으며 서3단은 그대로 하되 약간 동으로 옮기고 서단 서쪽에 다시 2단을 별설(別設, 따로 세움)하여 1단에 김상(金祥)과 이촌녀(二村女)를 1단에 동시사난부녀(同時死難婦女)를 제(祭)하고 서단과 별단 사이에 소장(小墙, 작은 담)을 세워 내외를 구분하였으며 또 관노(官奴, 관아의 노비) 철수(鐵壽)와 매동(邁同)의 효충비(效忠碑)를 단측 일우(一隅, 한 모퉁이)에 세워 관노로 하여금 행제(行祭, 제사를 지냄)케하니 단제(壇祭)의 위차(位次)도 때라 다소의 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로 산하(山河, 산과 강)가 실주(失主, 주인을 잃음)하여 단묘(壇廟, 제단과 사당)의 향화(香火, 향불)마저 어려워지매 기영회(耆英會, 동래기영회)에서 단제(壇祭)를 주관하여 선열의 제향을 계속 엄수(嚴修, 엄숙히 지냄)하게되니 그동안 객사(客舍)가 학교로 되었다가 헐리고 묘문(廟門, 사당의 문)이 폐쇄되기도 하였으나 북으로 후문을 내어 단제(壇祭)를 봉행(奉行)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어 사령(舍靈, 집의 영)의 생기를 돌렸으나 해방후의 혼란과 6.25 사변 등 다난한 국사(國事, 나랏일)와 급격한 사조(思潮) 변천(變遷, 변하여 바뀜)으로 인하여 단묘(壇廟)의 개신(改新, 고쳐 새롭게 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열의 유적을 보전하고 거룩한 순국정신을 계승함은 후생(後生, 후예)이 마땅히 할 일이라 이에 시비(市費, 시의 경비)와 국비보조금으로 단설(壇設), 문장(門墻), 묘우(廟宇), 조경(造景) 등을 환연(渙然)히 개신(改新)하니 다시 백사부역(白砂浮域, 흰 모래가 떠다니는 지역)에 단묘(壇廟)가 정제(整齊)하고 분필절사(芬苾節祀, 제사)에 충혼이 흠향하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전망(戰亡) |
비의 앞면에서 우측 옆면 |
추모의 단제정신(壇祭精神, 단에 제사를 지내는 정신)을 계승하여 단역(壇域)의 보수정화를 염원한 기영회(耆英會, 동래기영회) 첨위(僉位, 여러분)의 지성(至誠)과 이안눌 부사의 하체(下帖, 체문을 내림) 유의(遺意, 남긴 뜻)를 따라 구원(九原, 구천)의 충혼을 위로하고 시민의 강상(綱常, 지켜야 할 도리)을 진작(振作)하려는 박시장(朴市場)의 성의(盛意, 성대한 뜻)로 이루어짐이라. 선열의 순국정신은 이로 인하여 다시 빛나게 되었다. 이백만시민과 자손 만대에 이 사연을 전하고자 이에 단제(壇祭)의 내력과 보수(補修)의 대략을 적어 이를 정민(貞珉, 곧은 옥돌)에 현각(顯刻)한다. 동아대학교 교수/부산시문화재위원회 문학박사 정중환(丁仲換) 삼가 기록함(謹記) 동래서예원 원장 박명찬(朴明讚) 삼가 씀(謹書) 재단법인 동래기영회 이사장 김인호(金仁浩) 삼가 교정함(謹校) 부산직할시장 박영수(朴英秀) 삼가 세움(謹立) |
우측의 송공단비를 봤다면 이렇게 본단으로 갈 수 있는 문이 보인다.
문 우측에 송공단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문을 통해 송공단의 본단에 들어갈 수 있다.
문을 들어와 좌측으로 보면 이런 돌길이 나있다.
그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가운데로 쭉 가면 또 다른 비석들을 볼 수 있다.
문에 들어서고 오른쪽의 풍경이다. 저 멀찍히 비석 한개가 눈에 띈다.
송공단의 가장 중앙에는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忠烈公宋象賢殉節碑)가 모셔져 있다.
송상현은 1591년 8월에 동래로 내려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백성을 보살폈으나 1592년 일본군의 공격을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그는 일본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에도 백성들을 성 안으로 불러 모아 그들과 같이 결전을 벌이다가 순국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송상현의 목을 벤 일본군의 병은 송상현의 절개를 높이 산 적장 다이라 시게마스(平 調益)에게 죽임을 당한다. 적장이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의 우측에 2개의 비석이 있는데, 좌측부터 조공 영규 순난비(趙公英奎殉難碑), 노공 개방 순난비(盧公蓋邦殉難碑)가 모셔져 있다.
조영규(趙英奎, ?~1592)는 임진왜란 당시 양산군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부사 송상현과 함께 결전을 했던 인물이며,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 교수였던 노개방(盧蓋邦, 1563~1592) 또한 소식을 듣고 달려와 동래향교에 있다가 정원루(현재의 송공단)로 옮겨진 성현의 위패를 지키며 끝까지 항거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의 좌측 가장 높은 단에는 4개의 비석이 있다.
이 4개의 비석은 좌측부터 문공 덕겸 순난비(文公德謙殉難碑), 양공 조한 순난비(梁公潮漢殉難碑), 송공 봉수 순난비(宋公鳳壽殉難碑), 김공 희수 순난비(金公希壽殉難碑)라고 적혀 있다.
노개방 아래에서 공부한 문덕겸(文德謙, ?~1592)과 동래향교에서 학생들 교육을 도왔던 양조한(梁潮漢, ?~1592)은 모두 동래향교에서 노개방의 아래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향교에 있던 성현들의 위패를 정원루로 옮겨 곧 돌아온 교수 노개방과 함께 성현의 위폐를 지키다 순절한다.
임진왜란 당시 군자감판관이었던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장군 또한 전투를 끝까지 전두지휘하다 순국한다.
이 단 옆에 두번째로 낮은 단에는 3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가장 낮은 단에 1개가 세워져 있다. 가장 좌측 단이 낮은 곳에서부터 동시사난민인위(同時死亂民人位), 신공 여로 순난비(申公汝櫓殉難碑), 송공 백 순난비(宋公伯殉難碑), 김공 상 순난비(金公祥殉難碑)의 순서로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의 겸인(개인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던 신여로(申汝櫓, ?~1592)는 송상현의 은혜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사 송상현에게 돌아가 같이 죽었던 인물이다.
당시 동래부 향리였던 송백(宋伯, ?~1592) 또한 끝까지 부사 송상현을 지키다가 순국했던 인물이다.
별단도 두 층으로 구성되는데 가장 높은 층에는 3개의 비석이 그 보다 낮은 곳에는 1개의 비석이 모셔져 있다.
좌측부터 동시사난부녀(同時死難婦女位), 금섬 순난비(金蟾殉難碑), 의녀위(義女位) 2기순으로 세워져 있다.
송상현의 첩이자 기녀였던 금섬(金蟾, ?~1592)은 자신의 여종 금춘(今春, ?~1592)와 함께 송상현을 지키려 갔으나 이미 그는 사망했고,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오히려 그런 적 앞에서 당당하게 적을 꾸짖다 죽음에 이른 인물이다.
본단과 별단이 아닌 가장 우측 나무 옆에는 고관노철수매동효충비(古官奴鐵壽邁同效忠碑)가 세워져 있다.
관노비였던 철수(鐵壽, ?~1592)와 매동(邁同, ?~1592)은 적에게 사로잡혔지만 부사 송상현의 명을 기억해 결국 부사 송상현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냈던 인물들이라 그들의 효충을 기리고자 이 비석을 지었다.
송공단을 둘러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1592년 음력 4월, 이 땅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쓰러졌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국가를 지키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두렵지 않았을까? 도망의 유혹을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아마 그들이 이 동래땅에서 일본군에게 항전한 것은 단순히 동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절대항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난데없이 처음 보는 무기들을 들고 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기겁했을까? 그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진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나였다면 공포스러웠을 것 같다. 결사항전을 했지만 동래성은 처참히 무너졌고, 많은 사람들이 순국했다. 이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머리 속을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감사의 조의를 하게 되었고, 동래의 다른 곳을 방문할 때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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