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만세거리와 여러 표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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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만세거리와 여러 표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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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시장과 동래부 동헌으로 가는 큰 오거리에 위치한 '만세거리' 표지석에 나온 루트를 기준으로 대략적인 동래장터 3·1 운동의 루트를 지도에 표시해봤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그 길을 따라 가봤죠.

제일 처음은 수안역 쪽 대로에서 동래시장 방향의 길로 들어가면 '동래읍성 남문터 표지석'이 보입니다.
 
1919년 3월 18일,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펼치려다 밀고로 일부가 잡혀갔는데, 이 때  검거를 피한 학생들이 오후 6시경 동래읍성 서문에서 모여 이곳 남문까지 시위를 하고 흩어졌다고 합니다.
 
다음 날 1919년 3월 19일 아침, 학생들은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고, 오후 5시쯤에 동래읍성 남문 근처에서 시위를 개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총, 칼도 없는 들고 있던 건 태극기 밖에 없었을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끝내고 시작한 이곳에서 말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한의원 하나가 보입니다. 그 주차장 입구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보이네요.

군관청터
조선시대 동래부 청사 건물 중 군관들의 집무소터.  동래부의 군방(軍防)을 담당 하던 중추기관이었으며 현재는 충렬사 경역 내로 이건되어 있음

군관청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충렬사 경내의 마안산 기슭으로 옮겨져 있죠.

조금 더 가다보면 동래 출신 12분의 독립운동가와 학생운동가들의 업적과 동래장터 3.1 운동 과정을 기록한 기념비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만세거리
서울은행 동래지점(남문터)-동래시장-동래구청-시민도서관 동래분관(일성관)
1919년 3월 동래고보(현 동래고)와 범어사의 학림, 명정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호응하여 일제(日帝)에 항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거리.

동래를 빛낸 독립운동가 박차정(朴次貞)
1910년~1944년
부산 동래
중국 방면
건국훈장 독립장(1995년)
이곳은 동래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거나 큰 공을 세운 분들의 업적을 후손 및 관람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전하여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아직 앳된 고등학생부터 힘없는 여성까지, 독립을 위해 희생하시거나 힘쓰신 분들 턱택으로 지금 우리가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많은 동래 출신 독립운동가가 계시지만 공간이 부족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이나 애국장을 받으신 분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공적내용
- 3·1 독립운동 당시 경남 함양·산청 등에서 연락 책임자로 활동 후 일본헌병의 추격을 피해 중국 북경으로 망명
- 1919년 4월 초기 임시정부 교통부 위원, 국무원 차장 등으로 임명
- 1930년경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활동
김갑(金甲)
1889년~1933년
부산 동래
임시정부
건국훈장 독립장(1986년)
-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 회원으로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이바지
- 1924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 가입 후 활동
- 1930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조직 후 단장으로 임명되어 항일무장투쟁 참여

이봉우(李鳳雨)
1873년~1921년
부산 동래
만주 방면
건국훈장 독립장(1980년)
김규직(金圭直)
1909년~1929년
부산 동래
학생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6년)
* 공적내용
- 1908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부터 명동중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에 이바지
-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박은식, 이승만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 발표
- 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군비확장에 기여
* 공적내용
- 1927년 부산제2상업학교(옛 부산상고, 현 개성고교) 재학 중 비밀독서회인 흑조회를 조직하여 '흑조(黑朝)'라는 월간지를 통해 항일민족정신 고취
- 1928년 7월 밀양소년회관에서 개최된 경남소년연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서기로 선출되어 활동, 1929년 옥중에서 순국
구수암(具壽巖)
1901년~1920년
부산 동래
3.1 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2년)
김도엽(金度燁)
1899년~1937년
부산 동래
3.1 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2년)
* 공적내용
-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 및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과 태극기 제작
- 기장 장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함께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
* 공적내용
-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 인쇄
-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 自由民族)'이라고 피로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기장 장날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4개의 비석에 독립을 바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려있습니다.

이봉우(李鳳雨)
1873년~1921년
부산 동래
만주 방면
건국훈장 독립장(1980년)
김규직(金圭直)
1909년~1929년
부산 동래
학생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6년)
* 공적내용
- 1908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부터 명동중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에 이바지
-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박은식, 이승만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 발표
- 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군비확장에 기여
* 공적내용
- 1927년 부산제2상업학교(옛 부산상고, 현 개성고교) 재학 중 비밀독서회인 흑조회를 조직하여 '흑조(黑朝)'라는 월간지를 통해 항일민족정신 고취
- 1928년 7월 밀양소년회관에서 개최된 경남소년연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서기로 선출되어 활동, 1929년 옥중에서 순국
구수암(具壽巖)
1901년~1920년
부산 동래
3.1 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2년)
김도엽(金度燁)
1899년~1937년
부산 동래
3.1 운동
건국훈장 애국장(1992년)
* 공적내용
-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 및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과 태극기 제작
- 기장 장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함께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
* 공적내용
-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 인쇄
-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 自由民族)'이라고 피로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기장 장날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

박차정(朴次貞)
1910년~1944년
부산 동래
중국 방면
건국훈장 독립장(1995년)
동래 3.1 독립운동 일지
* 공적내용
- 3·1 독립운동 당시 경남 함양·산청 등에서 연락 책임자로 활동 후 일본헌병의 추격을 피해 중국 북경으로 망명
- 1919년 4월 초기 임시정부 교통부 위원, 국무원 차장 등으로 임명
- 1930년경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활동
* 1919년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는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교) 학생인 김귀룡, 고영건, 엄진영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 봉기(蜂起) 약속
*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동래 장날에 맞추어 동래군청(현 동래부 동헌) 앞 망미루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는 부산에서 일반 대중이 참여한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
* 1919년 3월 18일 밤 불교계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동래시장과 동래읍성 남문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고, 이튿날 오후 5시경에도 같은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래경찰서로 돌진하는 등 거센 만세운동 전개

김갑(金甲)
1889년~1933년
부산 동래
임시정부
건국훈장 독립장(1986년)
-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 회원으로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이바지
- 1924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 가입 후 활동
- 1930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조직 후 단장으로 임명되어 항일무장투쟁 참여

그 기념비 중간쯤에서 뒤돌면 또 다른 작은 표지석이 있는데요!

동래고등학교 옛터
여기는 1898년 9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동래고등학교 전신인 공립동래부학교 터였다

- 동래고등학교 총동창회

동래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세운 동래고등학교의 전신인 공립동래부학교가 있던 곳을 알려주는 표지석입니다. 그럼 잠깐 동래고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동래부학교(1898.09.~1904.02) 삼락학교(1906.03~1907.11)
개양학교(1904.03?~1907.11)
사립 동명학교(1907.11~1916.10)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1916.10~1922.04)
관립 동래고등보통학교(1922.04~1925.04)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1925.04~1938.04)
공립 동래중학교(1938.04~1950.08)
관립 동래고등보통학교(1950.08~1951.09)
동래중학교(1951.09~) 동래고등학교(1951.09~)
* 현재 동래고등학교 동문은 1922년 관립동래고등보통학교 개칭 이후 졸업생부터 인정함

동래부학교-개양학교/삼락학교-사립 동명학교-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이어지는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학교는 이곳에서 명맥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이 때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시절 동래장터 3.1운동을 시작했던 역사도 있죠.
 
이후 학교 건물은 1923년 4월 2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공한 동래구 칠산동의 부지(현 동래고등학교 부지)로 신축 이전하였고, 1925년 4월 1일에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렇게 그 학교는 지금까지 현재의 위치에서 동래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만세거리 기념비 뒷편에는 '동래만세거리'라는 글자와 3.1운동 재현 사진들이 있습니다.

동래만세거리 기념비를 뒤로하고 조금 더 걸으면 망미루터가 나옵니다. 처음 조선시대에 망미루가 세워졌던 곳이죠. 여기서 3월 13일 오후 3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망미루에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안치안센터도 보입니다. 보통의 치안센터 기능도 담당하지만, 동래관광안내소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조선시대 장병들과 백성들의 동상도 있고, 치안센터 건물 자체도 어떤 성벽을 연상케하는 듯하네요! 동래부의 역사성을 잘 반영한 것 같아요~

동래시장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 큰 길로 꺾었습니다.

동래시장의 또 다른 입구쪽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지내거나 외부에서 온 관원들의 숙소로 쓰였던 동래부 객사의 터가 있던 곳입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저 공사중인 쪽이 동래구청입니다.

오른쪽으로 꺾어서 (구)일성관이자 (구)시민도서관 동래분관이었던 복산동 행정복지센터 쪽으로 가면 끝입니다.

큰 교차로를 건너가면

동래 일성관(東萊一誠館)이 있었던 복산동 행정복지센터가 보입니다.

그 뒷편에는 이렇게 일성관이 자리했음을 보여주는 동래기영회에서 세운 기념비 하나가 있습니다.

비가 내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니 아래 비문을 필사한 자료를 참고해주세요!

일성관(一誠館)의 유래
동래는 항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란 당시 동래읍민들이 송상현부사의 뒤를 따라 성을 지키다 장렬한 순국을 한 증표로 남아 있는 동래의총과 더불어 그 정신을 이어받은 청년 학생들이 웅거하여 최후까지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항쟁을 거듭하던 이 일성관 또한 빛나는 역사의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이곳에는 서 서당이 있었는데 1919년 동래청년회가 인수 하여 쓰다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자 1926년 6월 그 서당을 헐고 우리 고장의 문화계몽운동과 청년사회단체 집회소도 겸할 수 있는 근대식 회관을 짓기로 뜻을 모았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방해와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공사 진행이 여의치 않았었가. 이에 청년들은 모금운동을 널리 펴고 윤병항 같은 이는 자기 집과 전답을 팔아 보태는 등 눈물겨운 성금으로써 드디어 착공 3년 4개월만인 1933년 10월에 낙성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감격적인 낙성식도 일본경찰의 강제 중지로 군중이 격분하여 봉기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또 회관 사용 금지조치까지 내렸으니 실로 망국의 서러움이 하늘에 사무쳤던 그 내력을 어찌다 말할 수 있으리오.
이 건물은 그러한 깊은 유서와 숭고한 정신이 어려 있으니 오늘날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 건물이 우리 고장의 도서관으로 값지게 쓰이고 있어 선각자들의 뜻이 헛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 사연을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

1986년 12월
재단법인 동래기영회

한 때 이곳이 일성관 이후 도서관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었던 걸까요?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 변천 내용 중에서 (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자료 조사 결과, 이곳에 1968년 11월 20일부터 1996년까지 시민도서관 동래분관이 있었다고 하네요.

2008년 10월, 일성관-시민도서관 동래분원 부지에는 복산동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카카오맵)

이후에는 지금까지 복산동 행정복지센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래읍성 남문터부터 (구)일성관(현 복산동 행정복지센터)까지 이어지는 동래만세거리를 거닐었습니다.

 

지금부터 104년전인 1919년 3월 13일, 18일, 19일에 일어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 운동 당시 학생들이 바랬던 독립과 자유... 저는 그걸 잘 이어나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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