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부터 10월까지만 갈 수 있다는 동래 동장대와 군관청 답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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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부터 10월까지만 갈 수 있다는 동래 동장대와 군관청 답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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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동장대를 방문했습니다!! 저번에 갔을 땐 문이 닫혀 있어서 다시 돌아왔지만, 이번엔 열려 있어 방문해봤습니다.

산불조심 입산통제 동장대 산책로 이용 안내
기간 : 매년 11.1 ~ 다음해 5.31

충렬사관리사무소 소장
개방시간 : 09:00~17:00
                  * 마지막 입장시간 : 16:30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우천 시, 우천 후 출입통제
취사 및 음주·흡연금지
자기 쓰레기 되가져가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용규칙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부산광역시 충렬사관리사무소

만약 가시려고 한다면, 6~8월의 한여름보단 9~10월쯤 조금 선선해질 때 가시길 바랍니다. 7월 3일에 갔는데, 너무 더웠고, 땀도 많이 났어요ㅠㅠ

입구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뒤돌면 보이는 안내판입니다. 동장대 진입로는 동래구 칠산로60번가길23에 있다고 적혀 있네요.

들어가서 성벽이 있는 윗 계단으로 올라가서 쭉 가면 또 갈림길이 나옵니다.

조금 올라온 시점에서 입구쪽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옆의 성벽들이 보이네요~

갈림길에서 쭉가도 되고, 위로 올라가도 됩니다.

가파르지만 나무가 많아 햇빛을 가려주는 오르막길로 조금 올라가 동장대 오른편으로 다가가거나, 조금 멀지만 완만한 볕이 잘 드는 흙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동장대 정면으로 가거나 원하는 길로 가면 됩니다~ 

저는 올라갔습니다. 저 멀리 동장대 우편이 보이네요~

풍경이 좋습니다. 옆의 안내판에는 북장대에도 있었던 '동래읍성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래 읍성지(東萊 邑城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甕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무느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女墻)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동장대(東將臺)라고 적혀있네요. 동(東)쪽에 있는 장대(將臺)라는 뜻입니다.

가까이서 찍어봤습니다.

계단을 다올라가기 전 신발을 벋고 올라가야 합니다.

동장대 내부에서 바깥을 바라봤습니다. 낙민동과 연산동 쪽 아파트가 보이네요.

안에는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도 보입니다. 이 산이 망월산이라서 이 이름이 붙은 건지, 달이 잘 보이는 곳이라 여길 망월대라고 부르다가 이 산이 망월산이 된 건진 모르지만, 저 한자가 '망월(望月)'이 맞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동장대 들어가 왼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항공 사진 속 저 넓은 공터 같은 곳이죠.

 

이 돌계단을 내려간다음 뒤돌아보면 이런 곳이 나옵니다.

저 작은 성벽들은 동래읍성의 성벽이 아니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동래왜성터입니다.

증산(甑山)은 동래부 동쪽 2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인(倭人)이 성을 쌓고 수비했는데, 지금[영조 16년(1740년)]은 반이나 허물어졌다. 성 위에는 장대(將臺, 동장대)가 있으며 아래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다.

-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

<동래부지>를 보면 17세기에는 이 망월산을 증산(甑山)이라 부른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절반 정도의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장대 또한 17세기에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성황신을 섬기던 성황사(城隍祠)도 이 산 아래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성황사 터'에 대한 글에선 '성황사 터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증산 아래에 있었다.'라고 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지> 기록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의 성황사는 현의 동쪽 2리[약 0.79㎞]에 있었다[在縣東二里]."
<동래부지>에는 "증산(甑山)은 동래부에서 동쪽 2리 떨어져 있으며, 위에 장대(將臺)가 있고, 아래에 성황사가 있다"

동래부의 행정 중심인 동래부 동헌을 기준으로 동래읍성 동장대까지의 거리가 대략 692.3m, 즉 약 0.69m로, 2리 조금 안됩니다.

그리고 그 동래부 동헌 기준으로 약 2리에 달하는 0.79km의 범위를 그려보면, 망월산이 걸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이 산자락 아래 어딘가에 성황사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성황사 터'에 대한 글에선 '성황사 터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증산 아래에 있었다.'라는 기록은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일단 지금 '증산'이라 부르는 증산왜성까지 거리가 2리(약 0.79km)가 훨씬 넘으니까요! 어쨌든 저 성벽은 '동래왜성'이고, 이 '증산'이라고도 불렸던 망월산 위에는 동장대가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성황사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다시 뒤돌아서 입구쪽으로 걸어가 봅시다!

나무 벤치들이 많은 곳을 뒤로하고 쭉 내려가봤습니다.

돌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면 됩니다. 아 돌계단 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좁고 긴 돌길이 나오는데요. 이 두 길이 연결됩니다.

이런 느낌입니다. 전 군관청 갔다가 다시 돌아서 그 오르막을 올라왔는데 완전 등산길이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쪽에 화장실이 쭉 가면 군관청이 나옵니다.

군관청의 모습이 점점 보이네요. 그리고 입구도 보입니다.

군관청(軍官廳)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0(충렬사)]
이 건물은 조선시대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軍官)들의 집무소였다.

동래부는 일본과 인접한 국방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1655년(효종 6)에 동래 독진(獨鎭)이 설치되었다. 그 뒤 양산군과 기장현의 군사도 통합·지휘하게 되자 군병의 수가 늘어났으며, 그들의 집무소인 무청(武廳)도 늘어났을 것이다.

장관청(將官廳)과 함께 군방(軍防)을 담당하는 중추기관으로 세워진 것이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675년(숙종 원년)에 동래부사
어진익(魚震翼)이 중창하였고, 이후 숙종 연간(1674~1720)에 두 차례(1680년의 조세환(趙世煥), 1706년의 황일하(黃一夏)) 고쳤으며, 1982년 해체ㄷ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812년(순조 12)에 동래부사 조정철(趙貞喆)이 다시 증축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관아 건물로서의 기능을 잃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해방 이후 주변의 도시화로 고층 건물들에 가리게 되어 좁은 공간에 다시 보수하더라도 보존과 활용이 어려워지자, 1982년 충렬사 경내로 옮겼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부연(附椽, 며느리서까래)이 없는 홑처마로 된 팔작(八作)지붕의 단층집이다. 장관청과 함께 부산지방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관아 건축 가운데 무청(武廳)으로서 희소가치가 큰 건물이다. 원래 수안동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훼손되고 활용이 곤란하자 1982년 충렬사 경내로 옮겼다.

17세기에 세워진 동래 장관청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군관청은 원래는 동래 만세 거리 인근에 있었다가, 1983년 보존과 활용을 위해 현재의 충렬사 경내로 옮겨졌습니다.

이건사적비(移建事蹟碑)
이 건물은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540-2번지에 있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군관들의 집무소였으나 일제시대 원형을 일부 변경하여 가정주택으로 사용하던 것을 1983년 건물 소유자 고촌(古村) 김도근(金稌根)씨가 원형을 살려 현위치에 이건 복원하였다.
1983년 7월 일

1983년 당시 건물주 고촌(古村) 김도근(金稌根)씨가 현재의 충렬사 경내에 원형을 살려 복원했다고 하네요. 이를 기리기 위해 1983년 7월,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이건사적비도 세웁니다.

군관청 정문이에요

저 안쪽에 군관청(軍官廳)이라고 적힌 현판이 보입니다.

이제 군관청을 뒤로하고 다시 내려갑니다. 가는 길에 작은 쉼터도 있네요.

다 가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내려가면 충렬사가 나오고요.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동장대 쉼터로 이어집니다.

충렬사 쪽에서 올라오셨다면 이런 안내판을 보게 될 겁니다. 저 세갈래 길은 오른쪽 지도에서 붉게 표시한 부분입니다.

세갈래길에서 동장대 쉼터 방향으로 올라가봤습니다.

계속 올라가다가 정돈된 돌계단도 올라가면

저쪽에 보이는 산성은 동래왜성의 흔적으로 보여집니다.

이 길이 돌아가는 오르막이기 때문에 멀고 힘듭니다ㅎㅎ

쭉 가다보면 저기 쉼터가 보이죠?

여기가 바로!

입구와 관리소 부근에 있던 동장대 쉼터입니다.

다시 내려와서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쭉쭉 내려갑시다.

이런 돌계단을 만나면 쭉 내려가면 됩니다. 오른쪽 사진 중간에 옆으로 빠지는 듯한 계단이 보이는데 저긴 그냥 밭이었습니다. 문도 잠겨있어요.

드디어 충렬사 경내로 들어왔습니다!!!

충렬사쪽에서 보면 이런 곳이죠. 윗 사진은 전에 충렬사 답사를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저땐 단순 등산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동장대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네요ㅎ 이렇게 꼭 가고 싶었던 동장대를 다녀왔습니다. 정말 기쁘고 보람차더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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