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산국과 신라의 흔적, 배산성지와 배산집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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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산국과 신라의 흔적, 배산성지와 배산집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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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상 인근 배산성지 안내

배산을 등산하다 보면 나지막한 성벽들이 보이는데요. 이 성벽이 바로 배산성 성벽입니다. 이 배산 전체가 배산성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배산집수지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2개의 안내판이 있습니다.

배산성지(盃山城址)

부산시 자연유산
 배산성은 고대부터 부산의 중심지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배산성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수영구 망미동의 동래 고읍성과,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동래구 명륜동의 동래 읍성과 더불어 부산 지역 행정 중심지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연유산으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애초에 배산성은 배산의 7부 능선을 둘러싼 이중 토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2017년~2018년 두 차례의 정밀한 발굴 조사를 통해 토성이 아닌 석성으로 밝혀졌다. 1호 집수지[물을 모아두는 장소] 아래에 있는 높이 4m 규모의 성벽은 네모난 돌로 품(品)자형 쌓기를 하였는데, 성 바깥벽 기초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기단보축(基壇補築)을 덧댄 것을 보면 전형적인 신라식 석축 산성[돌을 쌓아 만든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리된 곳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위로 갈수록 약간씩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쌓았는데 이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성행했던 성벽 쌓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잔뫼정 인근에서 발굴된 둥근 모양의 계단식 집수지 두 군데 중 지름 13m, 깊이 4.6m의 2호 집수지는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집수지 안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 사용했던 생활용 토기와 수백 점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세금으로 받은 곡물의 관리 장부로 추정되는 '乙亥年(을해년. 555년·615년·675년 중 하나)'이라는 글자가 적힌 목간(木簡)*과 대나무 밭, 나무 기둥 등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집수지 부근의 서쪽 경사면에서는 6m 높이의 축대가 발견되었는데 안쪽 평지에서 산성의 공공건물로 추정되는, 길이 13m 이상의 대형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 목간(木簡) : 종이를 대신하여 나무판에 적은 문서

집수지, 건물터, 성벽등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이번엔 안내판의 QR 코드를 읽으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배산성지는 연제구 연산동에 위치한 배산(盃山)의 중턱과 정상부에 있는 옛 성터로, 이 지역의 옛 지명인 거칠산국(居漆山國)시대의 유적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열전(居道列傳)」에 보면 신라 제4대 탈해왕 때 거도(居道)라는 장수가 거칠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하였다.

-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그래서 그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거도(居道) 그 민족(族)과 성(姓)(에 관한 기록을) 잃어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때(57~80)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는데, 그 때 우시산국(于尸山國),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이웃 경계에 끼어 있어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居道)는 변경관리(邊官)로서 아울러 삼키려는 뜻을 은근히 품고 있었다.  매년 1번 장토의 들(張吐之野)에 군마(群馬)를 모아 병사들을 시켜 말을 타고 달리며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익히 본 일이라서 신라(新羅)의 일상적인 행사라고 여기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거도는) 병마(兵馬)를 일으켜 그를 불의(不意)에 공격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 <삼국사기><열전 제4><거도(居道)>

1세기 중후반, 탈해 이사금이 사로국(신라)에 재위하고 있을 시절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간(干)이란 벼슬을 하고,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합합니다. 이때 그가 지휘하던 병사들을 1년에 한 번씩 다 모아 말타기를 집중적으로 시키며 두 나라를 속였고, 말타기 훈련을 통해 숙지한 정보와 전투력을 바탕으로 어느 날 두 나라를 침공해 깨트려버렸다고 하네요.

양주(良州)는 문무왕 5년(文武王五年, 665년) 인덕 2년(麟德二年, 665년)에 상주(上州)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한 곳으로 신문왕 7년(神文王七年, 687년)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260보(步)였다. 경덕왕(景德王)이 양주(良州)로 개칭했다. 지금(고려)의 양주(梁州)이다. 속한 현(縣)은 1개다. 헌양현(巘陽縣)은 원래 거지화현(居知火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양주의) 동래군(東萊郡)은 원래 거칠산군(居柒山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부른다. 속한 현은 2개다. 동평현(東平縣)은 원래 대증현(大甑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부른다. 기장현(機張縣)은 원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부른다.


- <삼국사기><잡지 제3><신라 양주(新羅 良州)>
삽량주->양주 거칠산군->동래군 대증현->동평현
갑화량곡현->기장현
... ...
... ...
... ...

1세기 중후반, 사로국은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얻게 되었고, 이후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으로 격하됩니다. 시간이 지나 그 땅은 8세기 경덕왕에 의해 동래군으로 개칭되었고, 그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헌학적 근거 말고도 다양한 증거들을 종합해서 학자들은 동래의 중심지였던 이곳이 과거 '거칠산국-신라'로 이어지는 부산 행정 중심의 성일 것이라 여는 것이죠.

 

2. 배산집수지와 배산성지 발굴터들

배산 정상에서 배산집수지로 내려가면

집수지(集水址)
 이 집수지는 2기 모두 둥근 형태로, 3단의 계단식 호안석축(護岸石築)을 두르고 있다. 기장산성, 거제 둔덕기성, 남해 대국산성, 남해 임진성 등 7세기에 신라가 남해안 일원에 축조한 산성에서 확인되는 집수지 구조와 거의 비슷하다.

최상부 제3단 호안석축을 기준으로 1호 집수지는 직경 9.5m, 깊이 3.2m이며, 2호 집수지는 직경 13m, 깊이 4.6m이다. 2호 집수지는 영남 지역 에서 확인된 신라산성 집수지 중 최대 규모이며, 국내에서는 충북 청주 양성산성 원형 집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2017년 배산성지 발굴 조사를 통해 이 집수지 2기가 발견되었다.

1호 집수지에서는 전국 최초로 대나무로 엮은 발(돗자리와 유사)이 출토되었고, 2호 집수시설 내부에서는 부산 최초로 목간**이 출토되었다. 특히 목간에 쓰인 「을해년年(555년, 615년, 675년 중 하나)」 이라는 간지*** 연도는 배산성이 운영된 시기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배산성을 중심으로 한 부산 지역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 호안석축(護岸石築) : 집수지 붕괴 방지를 위해 쌓은 석축 구조물
** 목간(木簡) : 문자를 적기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조각
*** 간지(干支):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조합해 육십갑자로 나타낸 시간 단위

오른쪽에 보이는 곳은 풀이 덮혀버린 집수지는 배산성지 2호 집수지입니다. 여기서 부산 최초로 목간이 출토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국내에서 2번째로 큰 집수지면서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집수지라고 합니다.

그 왼쪽에 작지만 물이 고여있는 부분은 배산성지 1호 집수지입니다. 여긴 국내 최초로 대나무발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1호 집수지와 2호 집수지 사이의 단순히 풀숲처럼 보이는 이곳에서도 연제구청에서 세운 '문화재 보호'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에서 4차 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집수지에서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작은 샛길이 나오는데요. 그 샛길로 쭉 가면 파란색 천막으로 덮인 곳을 볼 수 있습니다. 2차 조사 대형 건물터와 축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이 바로 밑에 보이는 성벽이 바로 배산성지의 성벽입니다.

아래쪽에서 보니 꽤 크고 높습니다! 이곳은 3차 조사를 했던 북쪽 성벽으로 보입니다!

배산성지의 흔적과 배산집수지의 위치가 표시된 등산 이정표와 안내판도 보입니다.

배산성지[盃山城址]
부산시 자연유산, 1972.6.26. 지정
 배산성은 부산의 중심지에 있으며 조망이 탁월하고 주변에 연산동 고분군, 동래 고읍성 등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는 주요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영남 최대 규모의 계단식 원형 집수지*와 '乙亥年(을해년)'글자가 적힌 목간(진평왕 37년(615년) 또는 문무왕 15년(67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대형 건물터, 성벽 등이 확인되었다.

 크기나 입지, 그 밖의 발굴 조사 성과로 볼 때 배산성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 부산의 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집수지(集水地) : 흐르는 물 또는 빗물을 저장하는 지역
** 관문(關門) : 국경이나 방어 요새에 세운 성문

집수지(集水地)
1호 집수지(내부 직경9.5m, 깊이3.2m)/2호 집수지(내부 직경13m, 깊이4.6m)

배산성 안에 있는 집수 시설은 성 안에 살던 사람들의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던 시설로, 2017년 발굴 조사에서 지름 16~18m, 깊이 4~5m의 원형 집수지 2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2호 집수지는 신라에서 축조한 원형 집수지 중 가장 크다. 1호 집수지와 2호 집수지 내부에서는 대나무 발과 목간, 그리고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 제작된 각종 생활용 토기와 대형 기와 수백 점이 출토되었다.

건물지
건물지 / 석축(추정 축대)

2018년 발굴 조사를 통해 1호 집수지 서쪽 평지에서 길이 약 13m 크기의 대형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건물지 앞에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약 6m 높이의 축대를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지 내부에서 대팻날과 못, 문고리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주거나 창고 용도로 사용된 건물지로 추정된다.

성벽
북쪽 성벽 동편 구간 / 북쪽 성벽 서편 구간

배산성의 성벽은 전형적인 신라식 석축산성이다. 사각형으로 깎은 돌을 가로 방향으로 쌓아 줄눈을 맞춘 '품(品)'자형 외벽과, 외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단보축(基壇補築)***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삼국 시대 축조 방식인 직사각형의 돌을 수직으로 쌓은 서쪽 성벽에 비해 동쪽 성벽은 통일 신라 시대 축조 방식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쌓았다. 삼국 시대에 수직쌓기로 만든 성벽이 통일 신라 시대에 와서 무너지자 당시의 축조 방식인 계단쌓기로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에서 통일 신라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 고대 성곽의 축조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기단보축(基壇補築) : 성벽 붕괴를 막기 위해 하단에 추가로 돌을 쌓은 것으로 신라시대에 성을 쌓던 방식이다. 

맨 아래에 이 배산성지에서 목간, 대나무발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큰 북쪽 성벽을 훑어보고 내려왔습니다. 아주 오래전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이 성벽은 이후 몇 세기가 지나 이렇게 돌들의 흔적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지금 봐도 그 크기에 압도될 정도였는데, 당시 이 성을 허물러 왔던 적군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런 역사적인 상상을 하면서 유적지 사이로 난 길로 하산했습니다. 배산성지를 둘러보며 이런 나지막한 산에도 산성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 크기도 이후 생겨날 다양한 산성들에 지지 않을 만큼 크고 웅장했었던 것에 놀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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