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서양 세력의 출몰부터 메이지 덴노의 부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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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서양 세력의 출몰부터 메이지 덴노의 부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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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 세력의 출몰

1-1. 18세기

1771년, 헝가리인 모리스 베뇨브스키(Móric Benyovszky, 1746~1786)가 캄차카(Камчатка)에서 탈주해 난카이도(南海道)의 아와노쿠니(阿波国)에 내항해 네덜란드 상관장을 통해 러시아 제국(1721~1917)이 에조치(蝦夷地, 홋카이도 지역)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가짜 정보를 전달한 것이 에도 막부 후기의 첫 서양 세력에 대한 목격이었다.

 

18세기 후반, 일본과의 교역을 처음 요구한 러시아인은 러시아 제국의 상인인 파베르 세르게이비치 레베데브-라스토츠킨(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Лебедев-Ласточкин,?~?)이었는데, 몇 번의 실패 끝에 1778년 그의 부하 드미트리 샤발린(ドミトリー・シャバリン,?~?)과 시베리아 귀족으로써 일본어학교에 다녔던 이반 안찌삔(Иван Антипин, イワン・アンチーピン, ?~?)이 에조치의 앗케시(厚岸)로 내항해 마츠마에번(松前藩)과 접촉에 성공했다.

1779년 예카테리나 2세의 글을 가지고 일본 에조치의 앗케시로 내항한 샤발린과 안찌빈 일행

1779년에는 에조치의 앗케시에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 1729~1796)의 글을 들고 있던 샤발린과 안찌빈을 비롯한 러시아인 방문단이 일본에 내방하기도 했다.

 

1791년, 경세론자 하야시 시헤이(林 子平, 1738~1793)는 헝가리인 모리스 베뇨브스키 등이 남긴 편지와 서양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러시아의 일본 침략 의도와 하이치 잠식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감을 갖고 해상 방위를 탄탄히 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 16권에 달하는 <해국병담(海国兵談)>을 출간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군사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가 쓴 목판과 책들은 몰수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은 후에 실제로 책에 쓰인 에도 지역 해군 방비를 실현하는 등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제국 해군의 수뇌부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참고로 같은 해 5월 레이디 워싱턴호(Lady Washington)가 중국에서 팔고 남은 생모피을 쇄국 중인 일본에서 팔아치우려 했으나 모피의 가치가 당시 일본에 없었던 것과 막부의 비밀리 소탕 계획을 알게 되면서 교역을 포기하고 퇴거했다. 이 내항은 일본에 내항한 최초의 미국 선박으로 기억된다.

 

1-2. 19세기 초중반(1801년부터 1853년 흑선내항 직전까지)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을 지낸 아담 키릴로비치 라크스만 (하코다테시 중앙 도서관)

1792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 아담 키릴로비치 라크스만(Адам Кириллович Лаксман, 1766~1806)이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해왔다. 노중(老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 定信, 1759~1829)는 러시아와 한정적 통상을 고려해 나가사키 입항 허가증인 신파이(信牌, 신패)를 교부했다. 그러나 라크스만은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

이후 1804년, 이 신패를 들고 나가사키로 입항한 러시아 제국 외교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Реза́нов, 1764~1807)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실각했기 때문에 통상 협상은 불발되고, 레자노프는 감금되어 있다시피 있게 된다. 이에 분노한 레자노프는 에이치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분카 로구(文化露寇,1806~1807)라 불리는 사건이다.

분카 로구(文化露寇,1806~1807)
1804.09 외교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는 신파이(信牌)를 들고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
-> 에도 막부에게 교섭을 요구했으나 막부는 거절
1806.10 러시아 사절, 카라후토(樺太)의 마츠마에번 거류지 습격
1807.05~1807.06 샤나 사건(シャナ事件) : 러시아 사절의 이투루프(Итуруп) 섬 주둔 막부군 공격
1808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의 허락 없는 군사 행동을 알아채고 급히 철수를 명령

러일관계는 긴장 속에 빠졌는데, 곧 러시아 제국의 관심이 흑해로 쏠리면서 긴장은 완화되었다.

페이튼 호의&nbsp; 함장 플리트우드 펠로

한편, 1808년 10월, 당시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중이던 영국의 한 선박이 쇄국을 유지하던 일본의 나가사키항에서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페이튼호 사건(フェートン号事件, Phaeton Incident, 1808.10)). 전쟁으로 바타비아 연방이 프랑스의 위성국인 홀란드 왕국으로 변모했고, 명의상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 또한 프랑스의 것이 되었다. 당연히 프랑스의 적국이자 해상 무역을 장악하던 중이었던 영국은 데지마의 구 네덜란드 선박을 나포하려고 상관 직원들을 납치했다. 결국 무사히 이들을 풀어주고 되돌아갔지만, 에도 막부는 그 배 하나를 막을 병력이 없었던 것에 대해 나가사키항과 데지마에 큰 책임을 물었다.

 

1824년 5월, 미토번(水戸藩)의 오오츠(大津)의 한 해변에서 영국인 12명이 상륙했는데 그 지역 관리들에 의해 잡혀가 심문당하곤 배로 돌려보내진 오오츠하마 사건(大津浜事件, 1824.05)이 일어났다. 조사 결과 선원 중 괴혈병 환자가 있어 신선한 채소와 물을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1824년 8월, 영국 포경선이 사쓰마번의 타카라지마(宝島)에 들어가 한 도민에게 소를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그 지역 관리들이 거부했는데 그 배에서 20~30명의 영국인이 소 3마리를 약탈해간 타카라지마 사건(宝島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 중 영국인과 지역 관리들이 한 언덕에서 싸움을 벌여 영국이 1명이 사살되었는데, 그 언덕을 지금도 이기리스 언덕(イギリス坂)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페이튼호 사건, 오오츠하마 사건, 타카라지마 사건과 같은 이국선으로부터의 위협이 늘어나가 이국선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라는 <이국선 타불령(異国船打払令, 1824~1837)>이 제정된다.

 

1837년 7월, 마카오에서 보호하고 있던 일본인 표류민을 태운 미국의 비무장한 상선 모리슨호(Morrison)에게 <이국선 타불령(異国船打払令)>에 따라 발포했다. 이로 인해 무조건 발포 원칙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고, 결국 아편전쟁이 중국의 패배로 끝난 1842년에 기존 외국선에 대한 강경책이었던 <이국선 타불령(異国船打払令)>을 조난당한 외국선에게 식음료와 연료를 줄 수 있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발표한다.

미국 국무장관 존 C. 캘훈(좌측)과 제임스 비들(우측)

1844년 7월 아편전쟁 이후 청과 <왕샤 조약(望厦条約)>을 맺은 자신감으로 가진 미국은 일본으로 시선을 향했다.

1846년 7월, 미국 국무장관 존 C. 캘훈(John C. Calhoun, 1782~1850)의 명을 받아 제5대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James Biddle, 1783~1848)이 통상을 요구하려고 우라가(浦賀)로 내항했다. 비들의 내항은 일본측 반응을 확인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막부가 이를 거부하자 즉시 퇴거했다. 이렇게

데이비드 가이싱어 (출처 : wikitree)

1849년 4월, 제 7대 동인도 함대 사령관 데이비드 가이싱어(David Geisinger, 1790~1860)은 청 광둥의 네덜란드 영사로부터 미국 포경선 선원 18명이 일본 나가사키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부하 제임스 글린(1800~1871)에게 나가사키항으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들은 주의깊으면서도 단호한 협상을 진행했는데, 생포된 선원들을 요구하면서 미국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내비쳤다. 막부는 애초에 그들을 곧 네덜란드배를 통해  미국으로 송환시킬 예정이라고 했지만, 데이비드 가이싱어는 미국 정부에 일본을 외교협상을 통해 개국시킬 것, 또 필요하다면 '강한 정도'를 보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제안은 후에 매슈 C. 페리의 일본 개국의 길의 초석을 닦게 되었다.

 

1-3. 아편전쟁이 일어나다.

제1차 아편전쟁 지도 (출처 : 조선일보)

 

영국의 아편 무역으로 가속화된 청의 경제 기반 약화와 부패해진 관료제 상황 속에서 청은 임칙서(林則徐, 1785~1850)를 호광총독으로 파견해 아편을 강력히 단속하라는 명을 수행한다. 그의 대응에 뿔이 난 영국은 1839년 10월에 청과의 전쟁을 결의했고, 1840년 4월의 전쟁 수행 예산 투표에서 또 한번 결의가 되며, 제1차 아편 전쟁(1840~1842)이 시작된다.

<난징 조약 서명 및 날인> (출처 : 브라운 대학교 도서관)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청이 패전하면서 1842년 <난징 조약(南京条約)>을 맺는 치욕을 얻게 된다.

<난징 조약>의 주요 내용
1. 홍콩항 할양
2. 배상금 2,100달러를 4년 분할로 지불
3. 광저우, 푸저우, 샤먼(廈門), 닝보, 상하이의 5개 항구 개항
4. 공행(公行, 광둥에 설치된 외국과의 무역 독점 기관) 폐지에 따른 무역 완전 자유화

청의 패전과 <난징조약(1842)>은 나가사키에 입항해 있던 네덜란드와 청의 상선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서양의 군사력이 동양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 드디어 명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찍이 강국이었을 청의 패배는 더욱 그 앞으로의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서양의 목표가 될 위기감 섞인 우려가 있으며, 조속한 국가 체제의 변혁이 급선무라고 여겨져 일본을 일깨우게 된다. 중국 국내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던  위원(魏源, 1794~1857)의 <해국도지(海國圖志)>도 곧 일본에 전해졌고, 군비 개혁이 시급해지면서 군사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 요시다 쇼우인(吉田 松陰, 1830~1859)이 학교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설립하거나 사쿠마 쇼우잔(佐久間 象山, 1811~1864)이 학교 쇼잔 서원(象山書院)을 설립하며 후학을 양성하거나 난학이 유행하는 등 막말의 중요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개혁의 기운이 일게 된다.

1843년에는 쇼우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 1790~1868)에 있던 유학자 사이토우 치쿠도우(斎藤 竹堂, 1815~1852)는 청나라의 대비가 없었던 것과 서양 열강의 병력의 두려움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아편시말(鴉片始末)>이라는 소책자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동안 외국의 선박은 발견 즉시 포격하겠다는 <이국선 타불령(異国船打払令)>을 내리는 등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에도 막부도 이 전쟁 결과에 경악했다. 몇년전에 있었던 모리슨호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기에 1842년에는 방침을 전환해 이국선에 연료나 물과 같은 편의를 도모하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새로 내놓는 등 구미 열강에 대한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막부의 대외적 입장에서의 변화는 개국의 큰 요인이 되어 이후 이어질 페리 내항,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의 근대화로 이어지게 된다.

 

1-3. 흑선내항과 개항

1-3-1. 얼릭에 대한 일본 개국 지령과 해임

1851년 5월, 미국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800~1874)는 일본 개국과 통상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9대 동인도 함대 사령관 대장 존 H. 얼릭(John H. Aulick, ?~1873)에게 일본 파견 특사로서 그 임무를 부여했고, 같은 해 6월 증기선을 타고 출발했다. 그러나 얼릭은 함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대장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1852년 2월, 제 10대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가 그 임무를 이어받게 된다.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전대 사령관이었던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가 함선을 타고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 시위가 일어났다(쿠로후네 사건(黒船来航, 1853)). 그렇게 서양 세력이 일본의 문을 두드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후 다시 돌아온 페리 함대에 의해 1854년 3월, 가나가와에서 미국이 일본 관세 자주권과 영사 재판권을 획득하게 된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条約)>을 맺으면서 시모다, 하코다테 등의 항구를 열고 통상할 것과 미국을 최혜국 대우로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개항하게 된다.

 

1-3-2. 페리의 일본 방문 계획(정보 탐색 및 수집)

페리 제독은 일본 개국 임무가 부여되기 전인 1851년 1월에 일본 원정을 위한 독자적인 계획을 20대 해군장관 윌리엄 알렉산더 그레이엄(William Alexander Graham, 1804~1875)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페리의 일본 원정 계획 중 핵심 내용
1. 임무 완수를 위해서는 4척의 군함이 필요하고, 그 중 3척은 대형 증기 군함이어야 한다.
2. 일본인은 책으로 증기선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눈으로 봄으로써 근대 국가의 군사력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인에 대한 것처럼, 일본인에 대해서도 '공포에 호소하는 것이 우호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다.
4. 네덜란드가 방해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나가사키에서의 교섭은 피해야 한다.

다만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인지 이에 대해 당시 해군장관 윌리엄 그레이엄은 어떤 답도 하지 않았던 걸로 여겨진다.

 

1-3-3. 페리의 1차 일본 내항

<별단풍설서> (출처 : kufs.ac.jp)

1852년 7월, 일본은 미국이 내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네덜란드 상관장으로부터 <별단풍설서(別段風説書)>를 전달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 책에는 '미국이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함대를 파견한다'는 내용과 '중국 주변에 있는 미국 군함 5척과 미국에서 파견될 예정인 4척의 함대와 함께 사령관이 얼릭에서 페리로 대체된 것', '함대는 육전용 병사와 무기를 탑재하고 있다는 소문', '출항은 1852년 4월 하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사실상 미국의 계획이 거의 다 들어났다고 볼 수 있다.

페리 제독의 일본 개국을 위해 갔던 항해도 (출처 : stampaday.wordpress.com)

이후 1852년 11월부로 페리 제독은 21대 해군장관 존 P. 케네디(John P. Kennedy, 1795~1870)로부터 '일본 개항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그가 세웠던 계획이 차차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총 4대의 배를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페리가 류큐 왕국에 내항했을 당시의 그림 (출처 : 오키나와 관광컨벤션국)

1853년 5월 26일, 페리 제독은 류큐 왕국의 나하(那覇) 앞바다에 정박했다. 그는 처음엔 슈리 성(首里城)에 방문하고 싶다고 살짝 떠봤는데, 류큐 왕국측이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시내를 행진하며 슈리 성까지 진군했다. 그러다 성문 앞에서 문지기의 제지를 받고 무장해제한 장교 몇 명과 함께 입성한다. 그들은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뒤 차와 과자,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고, 답례로 왕국의 고위 관리들을 서스퀘하나(Susquehanna)로 초대해 프랑스식 요리를 대접했다.

쿠로후네가 일본 앞바다에 나타나다!!! (좌측 : USS 서스퀘하나의 실제 모습/우측 : 일본인들이 묘사한 쿠로후네)

이후 페리 제독은 동쪽으로 올라갔고, 1853년 7월 8일, 도쿄 인근의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정박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외국선(이국선)과 다르게 검은색으로 칠한 선체에 외륜, 증기기관도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나오는 모습이었는데, 큰 충격인지 '검은 배'라는 뜻의 쿠로후네(黒船)라고 불렀다.

쿠로후네 사건을 보고받은 당시 에도 막부 12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요시. 그는 이 사건 이후로 심부전으로 곧 죽고 만다.

그래서 당시 우라가 봉행(浦賀奉行)이 부하들을 보내 의중을 파악했는데, 그들은 개국을 요구하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알렸다. 그런데 이를 최고위 관리에게 직접 전해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북상해 직접 쇼군에게 친서를 전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고위 관리가 직접 친서를 받아 쇼군에게 전달했지만, 당시 12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요시(徳川 家慶, 1793~1853)은 아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은 1년 뒤에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알리겠다고 전했고, 페리 제독은 에도 앞바다까지 가서 약간의 위협을 행한 뒤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사건 직후 쇼군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또 다른 쇼군도 병약해 국정을 책임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쇼군을 보좌하는 노중(老中)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으며, 국내에서는 외국을 배척하자는 양이론(攘夷論)이 대두되고 있었기에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고위 관리들은 각 다이묘, 하타모토(旗本), 심지어 서민들에게까지 앞으로 어떻게 정책을 펼치면 좋겠냐고 물어보게 되었고, 해결책을 찾진 못했다. 이는 결국 막부의 권위를 떨어트리게 된다.

에도 앞바다에 설치된 포대인 다이바(台場) (출처 : ビバ!江戸)

그러는 한편, 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대비해 포격용 다이바(台場, 에도 시대의 해상 방어 포대)를 조영할 것을 명령했고, 결국 시나가와 앞바다에 11개소의 다이바가 조영된다.

에도 막부가 직접 건조한 군함, 호오마루(鳳凰丸)

또 대선건조의 금(大船建造の禁)을 해제시켜 각 번에 군함 건조를 장려했으며, 막부도 군함 건조에 나서 호오마루(鳳凰丸)라고 불리는 서양식 대형 군함을 만들었다. 

 

1-3-4. 페리의 2차 일본 내항

1854년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페리 제독은 9척의 함선을 이끌고 류큐를 거쳐 다시 우라가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일본 쇼군 토쿠가와 이에요시가 사망한 뒤에 나타난 국정 혼란의 틈을 타 재입항한 것이다... 미국은 위협적인 배를 가지고 왔지만 함포를 발포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렇게 협상이 시작되었고 약 1개월간의 협상 끝에 7월 1일, <가나가와조약>이라고도 부르는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에도 막부는 미국의 개국 요구를 수용했다.

이후 1854년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에 도착해 <미류수호조약(유미수호조약)>을 맺었는데, 이로써 미국은 일본과 류큐의 문을 연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세의 위협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창출되었고, 개국을 둘러싼 일본 내 정치적 갈등도 발생한다.

 

2. 존황양이론(존왕양이론)의 대두와 덴노의 정치적 부상

존왕양이(尊王攘夷) 혹은 존황양이(尊皇攘夷)자국 군주를 존경하며 외적을 물리치려는 사상이다. 에도 시대 말기(막말)의 미토학(水戸学)이나 외세의 위협에 맞서 일본의 전통 회복을 꾀하는 국학(国学)의 영향을 받아 유신기에 널리 떠받들여진 정치적 슬로건으로 쓰인다. '왕(王)을 존경하고(尊), 오랑캐(夷)를 물리친다(攘)'라는 한자 뜻만 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존왕양이(존황양이)국가 존재의 근거로서 왕을 섬긴다는 존왕론(존왕사상)과 외부의 침탈자에 대항하는 양이론(양이사상)이 결합된 사상이다.

 

중국의 춘추시대 때 주 왕조의 천자(天子)를 존경하고, 그 천자가 다르시는 지역 내로 침입한 이적(夷狄, 오랑캐)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패자(覇者, 무력으로 재패한 사람)가 사용한 표어였는데 일본의 국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사상은 막말에 미토번(水戸藩)의 번교(藩校) 코도칸(弘道館)의 교육 이념을 나타낸 양이파 다이묘의 대표격인 토쿠가와 나리아키(徳川 斉昭, 1800~1860)가 쓴 <코도칸기(弘道館記)>에 기록된 것이 (막말을 기준으로) 시초로, 적어도 막말에 유포된 존황양이(존왕양이)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 책을 쓴 후지다 미즈번의 무사 토코(藤田 東湖, 1806~1855)는 <코도칸기>의 해설서인 <코도칸기술의(弘道館記述義)>에서 존황양이론(존왕양이론)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사상에 감화된 유력 다이묘와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존왕양이론자가 되었으며, 막부의 개국으로 덴노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이에 양이론자들이 증가했다. 그러나 훗날 대다수는 외국 배척론을 버리고 개국론자로 전향하게 된다. 또한 덴노를 모시는 사람들은 반막부파였으나 덴노 자신은 공무합체와 같이 어느정도 막부에 협력하기도 했다.

 

3. 공무합체

3-1. 히토츠바시파에 의한 막부와 웅변 협조

1853년, 미국의 매슈 C. 페리 제독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내항해 군함으로 무력 시위를 하면서 개국을 요구했으며, 또 다이묘들의 반항으로 끝나버린 텐포 개혁(天保の改革, 1841~1843)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던 고위 관료들은 사쓰미번과 같은 웅번(雄藩)들과의 협조를 중시한다는 방침을 취했다. 이에 막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러 다이묘부터 서민에게까지 의중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론이 대세였지만 점차 거듭된 막부의 요청과 자문을 통해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통상 정도까진 허락한다는 통상용인론이 주류가 된다.

통상조약 체결 문제와 병행해서 막부 내에서는 쇼군 후계자 문제로 정쟁이 일어났다. 에치젠번(越前藩), 사쓰마번 등 유력 다이묘는 그들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1837~1913)를 옹립하려는 운동을 일으켰고, 이에 일부 고위 관료들도 가담했다. 이들을 히토츠바시파(一橋派)라고 한다.

 

한편, 막부의 권위 재흥을 목표로하던 보수파 히코네번(彦根藩)은 당시 키슈번(紀州藩)의 번주였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 1846~1866)을 지지했다. 이들을 난키파(南紀派)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덴노이자 부드러운 양이론자였던 코메이 덴노(孝明天皇, 1831~1867)는 난키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쇼군으로 토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고, 히토츠바시파는 실각한다.

 

3-2. 이이 정권(井伊政権)과 무오의 밀칙(戊午の密勅)

1858년 5월,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 1815~1860)가 대로(大老)에 취임하고 곧 이전 쇼군의 후계를 토쿠가와 이에모치를 정하며 그가 에도막부 14대 쇼군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이 기세를 몰아 히토츠바시파를 실각시켰다. 히토프바시파 다이묘들은 이이 나오스케가 덴노의 칙을 어겼다며 비판하지만, 오히려 은거, 근신 처분을 받게 된다.

안세이 5개국 조약 (출처 : World Imaging)

미국과의 통상조약 조인 후 막부는 1858년 중후반, 프랑스, 영국 등 5개국과 잇달아 조약을 맺었다(안세이 5개국 조약).

무오의 밀칙 (출처 : JUNK-WORD.COM)

이들 이이 나오스케의 정책에 불복하는 코메이 덴노는 미토번(水戸藩)을 비롯하여 고산케(御三家), 고산쿄(御三卿) 등에 대해 무오의 밀칙(戊午の密勅, 1858.09)을 내렸다. 이 가운데 코메이 덴노는 막부의 최고 수뇌부, 도자마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들의 협조에 의한 '공무어합체(公武御合体)'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만일의 경우에 출병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밀칙이 각 번에 회송되었으나 후의 탄압 시에도 사쓰마번과 조슈 번을 포함하여 각 번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이를 전 미토번주였던 토쿠가와 나리아키 무리의 음모로 본 이이 나오스케는 그들의 반대파에 대한 대탄압을 실시해 즉각적인 양이를 요구하는 코메이 덴노를 굴복시켰다(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이이 나오스케는의 억지같은 정치 수법은 다양한 방면에서 반감을 사게 되었고, 1860년에 미토번과 사쓰마번의 로우시(浪士, 낭인이 된 무사)들 의해 암살당한다(사쿠라다 문외의 변).

 

3-3. 급진 존왕양이파와 공무합체파의 대립

이이 나오스케 암살 뒤 노중(老中)의 대표는 안도 노부마사(安藤 信正, 1820~1871)가 취임한다. 그는 이이 나오스케의 강경노선을 부정하고 온건책을 취했는데, 그는 코메이 덴노의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和宮親子内親王, 1846~1877) 쇼군 토쿠가와 이에모치의 혼인시키면서 조정과 막부의 연합인 공무합체(公武合体)를 통해 권위를 회복하고 대외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덴노는 시종(侍従)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1825~1883)의 건의를 받아들여 막부가 장래에 양이(攘夷)를 추진할 것이라 기대하고 혼인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정략결혼은 오히려 공무합체를 반대하는 반막부세력인 존왕양이파를 자극했고, 사카시타몬 밖의 변(坂下門外の変, 1862.02)으로 그 결혼을 추진한 안도 노부마사가 크게 다치게 되고 결국 여러 문제가 알려져 노중 자리에서 실각한다.

분큐 개혁으로 에도 시대의 핵심 3직에 모두 히토츠바시파가 자리잡는다.

그럼에도 막부가 공무합체를 추진하는 가운데 웅번들은 은 자기 번의 정치적 발언력을 높이기 위해 공무(조정과 막부)간의 주선에 나섰다. 카즈노미차 치카코 내친왕이 쇼군에게 시집간 이후인 1862년 4월, 사쓰마번은 옛 히토츠바시파 다이묘와의 협조 노선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번주의 아버지이자 최고 실력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츠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올라왔다. 토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에 앉히는데 성공한다(분큐 개혁).

그 외에도 테라다야 소동(寺田屋騒動, 1862.05)을 일으켜 급진파 존왕양이파와 싸움할 준비가 되었다는 걸 분명히 밝혔다.

 

1862년에 조슈번을 중심으로 파약양이(破約攘夷)가 대두되면서 조슈번은 존왕양이운동의 맹주가 되었다.

코메이 덴노를 가장 높이 올려 그 밑으로 조슈번, 사쓰마번, 토사번의 급진 존왕양이파가 공무합체파 쿠게(公家, 공가)를 제압하고, 조정을 움직여 1863년 쇼군 토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양이 실행을 확약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공무합체파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노선이 다르다고 여긴 사쓰마번은 아이즈번과 결탁해 존양파 쿠게, 조슈번 등을 조정에서 없애버렸고(8월 18일의 정변), 이후 조정의 명령에 의해 쇼군후견직, 교토 수호직 외에 여러 사람들이 참여에 의한 참예회의(参預会議)가 성립되었었다. 이로써 웅번 제후들의 정치참여 제도화가 실현된다.

 

3-3. 참예회의의 붕괴와 토막파(討幕派)의 형성

1864년 1월에서 3월까지 개최된 참예회의는 사쓰마번의 배제를 노린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에 의해 단기간에 해체되었고, 웅번의 참가를 수반한 공무합체의 기회는 상실된다.

 

1864년 4월, 조정에 온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는 조정으로부터 제정을 일체 위임한다는 칙서를 받았고, 막부는 그 칙서를 전국에 배포했다. 이후 조정을 장악해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1837~1913),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 容保, 1836~1893),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 定敬, 1847~1908)의 3명에 의한 이치카이소 정권(一会桑政権, 1864~1866)이 들어서며 막부 중심의 공무합체를 잠시 이루게 된다.

 

이후에도 힘 제대로 쓰지 못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동맹을 맺고(삿쵸 동맹), 무력으로 막부를 토벌할 것을 결의한다.

한편, 에치젠번이나 토사번은 막부를 전제로 한 공무합체 노선의 막다른 골목에서 내전을 피해 조정 하에서의 제후 회동에 의한 공의(公議) 실현을 목표로 했다(공의정체론). 이후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는 토사번의 주장을 받아들여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실시하고, 다이묘연합정권(토쿠가와 중심의 봉건연방제) 수립을 통한 도쿠가와 종가의 실권 확보를 목표로 했다.

 

4. 막부 권력의 위기

페리의 1차 내항으로 서민에게까지 정치를 물어보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폐쇄적이던 막부가 정치를 개방하며 막부의 권력이 약해진다. 이때 대두된 것이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인데, 이는 의회제도를 도입해 막부와 의회가 합의해서 정치를 행하자는 사상이다.

 

한편, 페리의 2차 내항을 계기로 <미일화친조약>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승인되고, 1585년부터 1859년까지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 1846~1866)를 제 14대 쇼군으로 옹립한 에도막부의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 1815~1860), 호나베 아키카츠(間部 詮勝, 1804~1884) 등이 그 옹립을 반대한 자신의 반대파인 존왕양이파와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1837~1913) 히토츠바시파(一橋派) 100여명을 대량 숙청한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 일어났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

그리고 그 숙청 사건에 앙심을 품은 자들에 의해 1860년 3월에 일어난 사쿠라다몬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이 일어나며 쇼군 후계 문제로 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당시 막부 세력에서 밑에 있었던 도자마 다이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덴노를 위시로 한 세력이 되어 급부상하게 된다.

 

5. 삿쵸 동맹(薩長同盟, 1866.03~)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원래 입장이 달랐다.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은 원래 막부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던 서남부 변방의 번이었으나 교토를 중심으로 한 막부 말기의 정치계에서 웅번(雄藩, 세력이 큰 번)으로서 큰 영향력을 가졌었다. 사쓰마번은 조정(公)과 막부(武)의 일치 협력인 공무합체(公武合体)에 대한 입장에서 막부의 개국 노선을 지지하면서 막정 개혁을 요구한 반면, 조슈번은 급진적인 파약양이론(破約攘夷論, 조약을 파기하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는 주장)을 받들어 반막부적 자세를 강화하는 등 양측은 쉽게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마무기를 지나가는 사마즈 히사미츠 행렬

1862년 8월, 상하이에 있던 영국 상인과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상인들이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본의 도카이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당시 사쓰마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茂久, 1840~1897)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島津 久光, 1817~1887)가 에도로 가서 공무합체 운동을 요구했다가 교토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시 이런 큰 행렬이 지날 땐 양 옆으로 길을 비켜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해야 했는데, 영국인 4명은 행렬 속에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가, 행렬 속 사무라이들에게 습격을 당해 영국인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바로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 1862.08.21)인데, 당시 일본 내 존왕양이 운동 등 막부와 조정의 권력 분쟁 문제와 일본 외국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결국 에도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사쓰에이 전쟁 중 영국 함대와 사쓰마번의 포대 사이에 일어난 전투

이후 이 사건에 대한 보상 문제로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 1863.08)이 발발하는데, 결국 에도 막부가 나마무기 사건의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며 종료되었다. 이 전쟁으로 사쓰마번은 함포 성능의 높이에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양이에서 개국으로의 입장을 바꾸곤, 영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게 된다.

1863년 5월, 에도 막부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모든 번들에게 양이(오랑캐를 물리침)를 명령한다.

칸몬해엽의 위

많은 번들은 서양 세력의 강한 것을 알고 있어서 서양의 함대를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는데, 막부에게 양이를 지시한 조정의 양이파의 대표격이었던 조슈번이 곧장 시모노세키의 칸몬 해협에 병사와 포대, 함선을 두어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상선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에 분노한 미국, 프랑스가 1863년 6월부터 대규모 공격을 해왔기에 결국 큰 피해를 입고 조정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양이파는 당황하게 된다. (시모노세키 전쟁 1차 전투(1863.06))

 

1863년 8월,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영국으로부터 많은 최신 기술과 무기를 공급받은 사쓰마번은 아이즈번(会津藩)과 협력해 조슈번 세력을 교토 정계에서 추방해버렸다(8월 18일의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 1863.09)).

4개국 연합함대에게 점거된 조슈번의 포대

안팎으로 쳐맞은 조슈번은 정신을 못차리고 또 다시 해안 봉쇄를 했는데, 이에 영국의 요청으로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합세한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교토에 대부분의 병령을 보냈던 조슈번은 어쩔 수 없이 남은 병력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였고, 결국 패배한다(시모노세키 전쟁 2차 전투(1864.07)).

이 전투에서 연합군측은 배상금 3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이건 막부가 시킨 짓이라면서 막부에게 덤탱이를 씌워버려 배상금 문제는 넘어갈 수 있었다. 막부는 막부가 직접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배상을 해줬다...

 

1864년 8월에는 막부군을 필두로 해 수도(교토)로 출병한 조슈번군과 그에 대항한 사쓰마번군이 전투를 벌였는데, 이에 패배하고 도망간다(금문의 변(禁門の変), 1864.08). 이렇게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확실한 적대 관계가 된다.

금문의 변으로 조정의 적이된 조슈 번은 금문의 변 직후부터 시작된 막부의 1차 조슈 정벌(長州征討, 1864.08~1865.01) 등으로 궁지에 빠지게 된다. 한편, 사쓰마번도 막부 정치에 제대로 입김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 1830~1878)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 隆盛, 1828~1877) 등을 중심으로 막부에 대한 강경론이 고조되어 갔다.

토사번..네가 고생많았다...

이 앙금은 토사번(土佐藩)이 사쓰마번의 명의로 조슈번에게 군함과 소총을 전달하고, 한편 조슈번의 명의로 사쓰마번으로 쌀을 답례로 보내게 함으로써 1866년 1월 초 회담이 비밀리에 시작된다.

<6개조>
1.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2천여 명의 병사를 속히 보내 지금의 교토에 있는 군대와 합류하고, 나니와(浪華, 오사카 지역)에도 천 (명) 정도는 두어, 교토와 오사카 두 곳을 서로 굳게 방비할 것.

2. 전쟁이 일어나 우리가 승리하여 기세가 올랐을 때, 그 조정에 반드시 사면 건의를 드릴 것.

3. 만일 패색이 짙어져도 일 년에서 반 년 사이에 괴멸당할 일은 기필코 없도록 할 것.

4. 이에 따라 막부군이 동쪽으로 돌아갈 시에는, 반드시 조정에 아뢰어 직접 원죄(엔자이)를 사면 받을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모아 진력할 것.

5. 병졸이나 상국(上国) 이상, 하시카이소(橋会桑, 이치카이소 정권) 등도 작금의 시기에 황송하옵게도 조정을 옹립해 모셔야 하며, 정의를 다투는 일에 앞장서 길을 가로 막을 때에는 결국 결전 이외에 없을 것.

6. 원죄를 사면받고 양측이 힘을 합쳐, 황국의 안위를 위해 서로 황위를 빛내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성심을 다해 진력할 것.

이 자체가 원문으로 전해내려오는 내용인데 밑줄친 부분의 대상이 밀약이기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대상은 조적으로 낙인찍인 조슈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순 있다. 어느 한 쪽이 공격받으면 서로 지원 약속이 밀약을 바탕으로 사쓰마번은 제2차 조슈 정벌 때 출병을 거부해 이 밀약이 유효함을 나타내며 조슈번은 이에 기쁨을 표현했다. 이 밀약은 그 유명한 토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 1836~1867) 등에 의해 맺어지게 된다.

 

1866년 7월, 막부는 또 한번 조슈 정벌을 벌이지만, 이미 삿초 동맹을 맺은 사쓰마번은 이에 참가하지 않았고, 결국 막부군은 조슈번을 정벌하지 못하고 후퇴하게된다.

그리고 메이지 정권이 들어설 쯤인 1867년 11월, 사쓰마번주 시마즈 타다요시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막부 토벌을 시작할 때, 조슈번 세자 모리 모토노리(毛利 広封, 1839~1896)와 회견해 출병 협정을 맺은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두 번이 동맹을 맺게 된다.

 

6. 대정봉환 이후(에도 막부의 몰락)

1868년 1월, 교토의 고고쇼(小御所)에서 고고쇼회의(小御所会議)가 열렸다. 이는 '총재(総裁), 의정(議定), 참여(参与)'의 3개 직에 의한 신정부 최초의 회의가 되었다. 회의의 목적은 왕정복고의 호령과 합쳐 정권을 반납한 토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해 내대신(内大臣) 사관(辞官, 사퇴)과 구 막부 직할령 납지(納地, 땅 반납), 즉 사관납지(辞官納地)였다. 토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관납지를 성급하게 압박함으로써 일부러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토쿠가와 종가의 무력화나 무력 토막의 빌미로 삼으려는 토막파의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회의는 결과적으로 결의 내용을 토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전달하고 그가 이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결정되었다.

보신전쟁 진행도 (출처 : Hoodinski)

그러나 쇼군이 신정부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공의정체파나 토쿠가와씨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에 반발했고, 여기에 사쓰마번, 조슈번, 토사법, 사가번 등이 교토 어소를 받들면서 에도 막부를 공격한다. 그렇게 시작된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01~1869.05)이 일어났다.

신정부측의 사이고 타카모리(좌측)과 막부측의 카츠 카이슈(勝海舟, 우측)

승기를 잡던 일본 신정부군과 덴노는 1868년 3월부터 4월까지 에도성에 입성했는데,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에도성 무혈 개성(江戸城無血開城)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게 계속 승리를 이어가던 일본 신정부군의 승리로 보신 전쟁과 에도 막부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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