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겐코의 난부터 겐무의 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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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겐코의 난부터 겐무의 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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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겐코의 난(元弘の乱)부터 겐무의 난(建武の乱)까지

1-1. 겐코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겐코우(元弘)
1331(겐코우 원년)~1334(겐코우 4년)

가마쿠라 시대 중반이던 1246년경, 고사가 덴노(後嵯峨天皇, 1220~1272)의 양위 후에 황통은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이카쿠지통(大覚寺統)과 지묘인통(持明院統)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의 중개로 인해, 다이카쿠지통과 지묘인통이 번갈아 황위에 오르는 양통질립(両統迭立)이 결정되었다.

양통질립(両統迭立) [료-토-테츠리츠]

가마쿠라 시대 후기, 고사가 덴노의 뒤에 지묘인통(고후카쿠사덴노의 혈통)과 다이카쿠지통(카메야마 덴노의 혈통)의 두 황통에서 번걸아 황위에 오른 것

1331년,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1288~1339)는 전국의 무사에게 막부 토벌(討幕)을 명하는 문서를 내렸고, 그렇게 겐코의 난(元弘の乱, 1331.06~1333.07)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 1308~1335)이나 카와치(河内)의 무사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 ?~1336) 등의 소수가 고다이고를 위해 싸웠을 뿐이었지만, 이윽고 아시카가 타가우지나 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 1301~1338) 등도 가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와 그 실질적 지배자였던 호조(北条) 토쿠슈가(得宗家)는 멸망한다.

 

1-2. 겐무 신정(建武の新政, 1333~1336)

일본국 덴노의 가문으로 '국화'를 상징한 키쿠몬(菊紋)

켄무(建武)
1334(켄무 원년)~1338(켄무 5년)

1333년 7월,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라 불리는 고다이고 덴노에 의한 친정(親政, 명시적 지배자가 친히 행하는 정치)이 시작된다. 처음 고다이고 덴노는 자신의 휘인 타카하루(尊治)에서 '尊'을 따 타카우지(尊氏)라는 이름을 주기도 할 정도로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총애했다. 고다이고 덴노가 실시하는 법제 개혁이나 인재 정책은 기본노선으로 뛰어난 면도 있었지만, 겐코의 난 이후 일어난 혼란으로 인해 법체계의 정비나 효율적인 실시가 따라잡지 못해 정국의 불안정은 계속되어가고, 또 은상(恩賞)을 내려주는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행에 대해서 찬반으로 나뉘어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나카센다이의 난. 푸른색은 토키유키군의 경로, 붉은색은 타카우지군의 경로

1335년 7월, 호조 토키유키(北条 時行, ?~1353) 등 호조씨 잔당이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 1335.07)을 일으키자 그 토벌을 끝내버린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은상을 덴노의 허락도 없이 자체적으로 나눠줬다. 그러자 겐무 정권의 은상 정책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의 무사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독자적 은상 지급 행위를 겐무 신정으로부터의 배반으로 간주한 고다이고 덴노는 1336년 1월, 닛타 요시사다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 顕家, 1318~1338)에게 아시카가 타가우지 토벌을 명하는데, 이렇게 겐무의 난(建武の乱, 1336.1~1336.11)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겐무 신정은 겐무의 난(建武の乱, 1336.01~1336.11)으로 무너지게 된다.

 

1-3. 겐무의 난(建武の乱)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독자적 은상 지급 행위를 겐무 신정으로부터의 배반으로 간주한 고다이고 덴노는 1336년 1월, 닛타 요시사다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 顕家, 1318~1338)에게 아시카가 타가우지 토벌을 명하는데, 이렇게 겐무의 난(建武の乱, 1336.1~1336.11)이 시작된다.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 이 전투에서 결론적으론 아시카가씨가 승리한다.

닛타군은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箱根・竹ノ下の戦い, 1336.01)에서 패배했고,1336년 1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헤이안쿄로 입경한다. 그가 입경하기 전날 고다이고 덴노는 두려움에 떨며 히에이산(比叡山)으로 도망쳤다. 입경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이제 다시 조정을 주무르려고 했으나, 곧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등장으로 무산된다. 이 싸움에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북쪽의 탄바노쿠니(丹波国)로 쫓겨난다(제1차 교토 합전, 1336.01).

 

1336년 2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탄바노쿠니에서 전력을 가다듬고 다시 헤이안쿄로 쳐들어가기 위해 셋츠노쿠니(摂津国)의 이나가와(猪名川) 부근에 도착했는데, 이 아시카다 타카우지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에서 진격해온 닛타 요시사다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야간 기습으로 아시카가 타카우지측의 전열은 모두 무너져버려 그의 패배로 싸움은 끝나고 만다(테시마가와라 합전(豊島河原合戦, 1336.03)).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아시카가씨는 서쪽으로 도망가 규슈에 도착한다. 그런데도 패배한 아시카가씨를 따르려는 무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이미 겐무 정권의 천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규슈로 쫓아낸 뒤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산에서 수도로 내려왔다.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르는 무사가 많은 것을 보고 있던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헤이안쿄로 돌아온 고다이고 덴노에게 상황이 겐무 정권쪽에 유리한 지금 아시카다 타카우지와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고다이고 덴노나 아부만 하던 다른 쿠게(公家, 공가) 세력은 그가 올린 간언을 보지도 않고, 그를 겁쟁이라고 놀리며 웃음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그 시각 규슈에 있던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그 지역의 무사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다타라하마 전투

그렇게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 1336.04)가 시작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수세에 밀렸던 아시카가씨가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해 규슈 대부분이 아시카가 타카우치의 영역이 되었고,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이긴 아시카가씨는 상경한다.

그는 다시 헤이안쿄로 상경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 덴노와 그 수뇌부는 경악한다. 초조해진 조정은 닛타 요시사다를 총대장으로 임명해 규슈로 도망간 아시카가 타카우지 토벌을 명한다.

 

닛타 요시사다는 급히 군대를 편성해 아시카가 타카우치 토벌을 위해 헤이안쿄를 출발해 서쪽으로 향했는데, 하리마노쿠니(播磨国)의 시라하타 성(白旗城)에 틀어박힌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 則村, 1277~1350)가 걸림돌이 된다. 아카마츠 노리무라의 시라하타 성 수비가 단단해서 닛타군은 하리마노쿠니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성을 돌아 아시카가 타카우치를 쫓자니 후방에서 추격당할 우려도 있으므로 정말 진퇴양난이었다.

닛타군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규슈를 떠난 아시카가 타카우치는 서국의 무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며 점점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곧 아시카가 타카우치는 빈고노쿠니(備後国) 토모노우라(鞆浦)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아시카가 타카우치는 코곤 덴노(光厳上皇, 1313~1364)로부터 닛타 요시사다 토벌 명령을 받게 된다. 이는 아시카가 타카우치가 단순히 그동안의 고다이고 덴노(다이카쿠지통)에서 지묘인통으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묘인통에게 그 지위가 보장되어 조정의 적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뒤집히는 것을 의미했으며, 다른 말로 아시카가 타카우치가 덴노군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분쟁은 아시카가 타카우치 vs 조정에서 조정 vs 조정의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시코쿠에서 다른 씨족과 합류해 육로는 그의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 直義, 1307~1352)에게 맡기고, 아시카가 타카우치는 바닷길로 나아가 양방향에서 헤이안쿄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카씨와 아카마츠 노리무라가 합세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겨 후퇴했다. 이에 질세라 아카마츠 노리무라는 도망가는 닛타군을 추격해 산산조각내버린다...

많은 병사를 잃은 닛타군은 1336년 7월까지 효고(兵庫)까지 진출하면서 조정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다시 한번 덴노가 히에이산에 올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시카가씨를 헤이안쿄로 유인해 그 즉시 문을 닫아버리고 총공격을 하겠다고 건의했지만, 오히려 고다이고 덴노는 덴노의 권위를 넘어서려 한다며 그 요청을 무시하고 오히려 쿠스노키 마사시게에게 닛타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쿠라이의 결별(桜井の別れ)

그는 이 명령을 받으면서 덴노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닛타군을 도우러 효고로 달려갔다.

헤이안쿄를 떠나 서쪽으로 향하는 쿠스노키군은 서국가도(西国街道)의 슈쿠에키(宿駅, 역참) 중 하나인 사쿠라이에키(桜井駅)에 다다랐을 무렵, 그의 11살 먹은 아들 쿠스노키 마사츠라(楠木 正行, ?~1348)에게 고향인 카와치노쿠니(河内国)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버지가 결국 죽게되는 싸움을 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들 쿠스노키 마사츠라는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군인으로써 따르겠다고 간청했지만, 아버지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고다이고 덴노를 섬겨 언젠가 아시카가 타카우치를 토벌하라고 말하곤, 과거 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키쿠스이노몬(菊水の紋)이 들어간 단도를 마지막 선물로 건네며 이번 생에는 여기서 이별하자고 말했다...

 

사쿠라이의 결별을 거쳐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한 쿠스노키군은 1336년 7월, 닛타군이 기다리는 효고에 도착해 합류한다.

한편, 아시카가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진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미나토가와 전투(湊川の戦い, 1336.07)가 벌여졌고, 이 싸움에선 쿠스노키 마사시게 등 유력 장수들이 사망했고 결과적으로 아시카가씨가 승리하게 된다. 살아남은 닛타 요시사다는 남은 6000기의 병력을 모아 헤이안쿄로 돌아와 삼종의 신기를 챙겨 고다이고  덴노와 히에이산으로 철수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치는 고다이고 덴노가 없는 헤이안쿄로 들어가 코곤 덴노를 치천의 군으로 옹립한 후 이후 1336년 8월, 코묘 덴노(光明天皇, 1322~1380)를 덴노로 옹립했다. 같은 해 10월, 산에 있던 고다이고 덴노는 아시카가 다카우치에게 투항하며 덴노의 자리에서 내려와 헤이안쿄의 카산노인(花山院)에 유폐되었고, 같은 해 11월 코묘 덴노에게 삼종의 신기를 내놓음으로써 1336년 11월에 겐무 신정이 끝난다. 여기서 끝났으면 한편의 서사시로 끝났겠지만, 12월에 큰 일이 일어나고 만다.

고다이고 덴노의 요시노 조정 성립

1336년 12월, 고다이고 덴노는 헤이안쿄를 탈출해 요시노(吉野)로 도망쳐 요시노 조정(吉野朝廷, 후의 남조)을 성립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이 코묘 덴노에게 건넨 삼종의 신기는 가짜였으며 자신이 정통 덴노라고 선언했다... 이에 당시 코묘 덴노를 중심으로 한 교토 조정(京都朝廷, 후의 북조)와 요시노 조정(후의 남조)가 대립하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시작된다. 결론만 말하자면, 1392년, <메이토쿠의 화약(明徳の和約)>에 의한 남북조합일(南北朝合一)까지 약 60년간 이렇게 남조와 북조의 항쟁이 계속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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