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로마치 막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는 일본 사상 2번째 무가 정권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 1305~1358)이 현재의 교토에 창시한 막부다. '무로마치'라는 이름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満, 1358~1408)이 옮긴 하나노고슈(花の御所)가 있던 지명이 무로마치(室町)였던 것에서 유래했다. 또한 이전 가마쿠라 막부와 다르게 아시카가씨가 쭉 쇼군직을 유지했기 때문에 간혹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라고도 부른다.
1-1.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1-1. 겐무 신정과 겐무의 난(엔겐의 난)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직후,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개시한 고다이고 덴노는 뛰어난 정치적 재능으로 여러 선진적 법령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후일 무로마치 막부나 남조의 정책과 법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같은 유력 무사를 끌어들여 정권을 확고히 했지만, 호조씨 잔당의 반란(나카센다이의 난) 진압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에게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독자적으로 보상을 내려줬다. 결국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조정에 대한 반역으로 여기고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토벌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겐무의 난 혹은 엔겐의 난이 시작된다.
1336년 7월, 규슈에서 동쪽으로 온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미나토가와 전투(湊川の戦い)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 ?~1336)를 격파한다.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1288~1339)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도망갔으나, 쿠스노기 마사시게와 함께 삼목일초(三木一草)로 불리는 다른 장군들도 이미 전사했거나 미나토가와 전투 이후에 잇달아 전사하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336년 8월 입경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코곤 덴노(光厳上皇, 1313~1364)를 치천의 군으로 옹립하고, 코곤 덴노의 동생 코묘 덴노(光明天皇, 1322~1380)를 덴노로 즉위시킨다. 화친이 성립함에 따라 10월 귀경한 고다이고 덴노는 유폐되고 11월에 코묘 덴노에게 삼종의 신기를 양도했다. 그렇게 겐무의 신정이 끝나게 된다.
1-2. 남북조 시대의 시작
이후 법학자 제엔(是円, ?~?)과 그의 동생 신에(真恵, ?~?) 등에게 자문해 1336년 12월, 새로운 무가정권의 시정방침을 정한 <켄무시키모쿠(建武式目,켄무 식목)>을 제정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실질적으로 성립된다. 북조(北朝)로부터 권대납언(権大納言)에 임명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가마쿠라 대납업(鎌倉大納言)으로 불리며, 가마쿠라 쇼군(鎌倉将軍)이라고도 부르는 카마쿠라도노(鎌倉殿)의 계승자로 여겨졌다.
1336년, 12월 21일, 고다이고 덴노가 야마토국 요시노로 탈출해 남조 조정을 열었는데, 이렇게 남북 두 황조가 병립하는 상태가 시작된다. (남북조시대 글 참고(https://mspproject2023.tistory.com/894)
한편, 1338년 8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북조 덴노로부터 정이대장군(夷大将軍)으로 임명받게 되었고, 이로써 명실상부한 막부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 直義, 1307~1352)와 함께 양장군(両将軍)이라는 이두정치를 행했다.
남조측은 쿠스노키 마사시게,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 顕家, 1318~1338), 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 1301~1338) 등 무장이 잇따라 패사하고, 1339년에는 고다이고 덴노까지 사망하게 된다. 그 후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 親房, 1293~1354)가 남조를 이끌게 되었지만, 각지 무사들의 지원과 신뢰도 그리 좋지 않아 그 세력의 범위는 점점 줄어갔다.
1348년, 시죠우나와테 전투(四條畷の戦い, 1348.02)에서 막부군에게 대패했고, 이 전투로 인해 남조는 몰락하게 된다. 그 싸움을 주도했던 막부측 코우노 모로나오(高 師直, ?~1351)는 요시노 행궁에 불까지 지르며, 남조는 나라의 작은 아노우(賀名生)에 숨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남조는 멸망할 위기에 처하지만 무로마치 내부의 다툼(칸노의 소란(観応の擾乱, 1350~1352))으로 인해 잠시 북조와 손을 잡았고, 또 10년간은 북조를 지배권 하에 두기도 하는 등 다시 재기할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 또한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승리로 끝나며, 남조는 다시 힘을 잃게 된다.
결국, 1392년 11월, 남조와 북조는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을 맺게 되었고, 남조는 북조에게 삼종의 신기를 물려주며 남북조는 북조를 중심으로 다시 통일되며 남북조시대는 끝이 났다.
1-3.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힘의 변화
1367년,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 義詮, 1330~1367)가 사망하고, 10살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쇼군이 되었다. 이 무렵까지 반막부파의 하타케야마 쿠니키요(畠山 国清, ?~?), 오오우치 히로요(大内 弘世, 1325~1380),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 1306~1368), 야마나 토키우지(山名 時氏, ?~1371) 등이 막부에 항복했고, 규슈에서는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이자 정서장군(征西将軍)이었던 카네요시 친왕(懐良親王, ?~1381)이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책봉받아 더욱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지만, 중앙의 남조파는 저항력을 거의 잃고 있었다.
이 때 쇼군을 보좌하는 칸레이(管領, 관령)이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 頼之, 1329~1392)였는데, 그는 규슈로 장군을 파견하거나, 중앙의 새로운 선종 세력인 난젠지(南禅寺)와 구 불교 세력인 히에이 산의 대립 문제를 잘 대응해나갔고, 장원, 공령의 연공의 절반에 대한 징수권을 슈교에게 허가하는 반제(半済)를 실시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막부 권력의 안정화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1379년, 코랴쿠의 정변(康暦の政変)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칸레이에서 실각하고, 시바 요시유키(斯波 義将, 1350~1410)가 취임하게 된다.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봉공중)이라 불리는 쇼군 직할 군사력을 갖추고 유력 슈고다이묘인 야마나씨나 오오우치씨를 도발해 메이토쿠의 난(明徳の乱, 1391)과 오닌의 난(応永の乱, 1399)을 일으켜 그들을 토벌해 쇼군의 권력을 굳히는 한편, 1392년에 <메이토쿠 화약>을 맺으며 남북조를 합일시켜 덴노에 육박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급사하고 나서 즉위한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 義持, 1386~1428)는 사바 요시유기의 보좌를 받아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스스로를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고 부른 추호(追号, 시호)를 없애버리고, 명과의 감합무역(勘合貿易, 감합(勘合)으로 무역대상이 맞는지 맞춰보며 하는 무역)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등 이전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행했던 정책을 부정하고, 막부의 정책을 보수적으로 고친다. 이는 귀족적 색채가 짙어진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무사들의 불만에 부응한 것이었다.
1423년,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足利 義量, 1407~1425)에게 쇼군직을 물려주지만, 아시카가 요시카즈는 과음 때문에 2년도 안되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다시 쇼군 대행을 잠시 했지만 그는 결국 그의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1428년에 사망한다.
결국 6대 쇼군은 추첨을 통해 차기 쇼군이 누가 되면 좋을지에 대해 신의 뜻이 담긴 제비뽑기를 통해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 1394~1441)가 당선된다. 그는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드높이고, 쇼군 친정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지방에서는 민중 봉기인 츠지잇키(土一揆)나 후남조의 남조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중앙에서는 막부의 권력이 약해지고, 다이묘 합의제로 돌아와 상대적으로 쇼군의 권력도 저하되는 등 상황이 좋진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 다이묘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쇼군의 지위를 드높여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고, 몇몇 슈고다이묘들은 후계 다툼에 적극 간섭해 쇼군 권력 강화에 힘쓰기도 했다.
결국 그의 권력 집중화와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들에게 반발심이 들게 되었으며, 1441년 7월, 카키의 난(嘉吉の乱)으로 아시카가 요시모리는 암살당하며, 쇼군의 힘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7대 쇼군이 잠시 즉위했으나 요절했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 義政, 1436~1490) 그 뒤를 이어 8대 쇼군으로 즉위한다. 아시카가 요시모리 이후 어린 쇼군들이 즉위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를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유력 다이묘들의 합의로 막부의 정치가 이루어진다. 그가 재위하고 있었을 때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결국 후계자를 제대로 지정하지 못했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처음엔 아이를 보지 못해서 그의 이복동생 아시카가 요시미(足利 義視, 1439~1491)에게 쇼군직을 물려준다고 했으나, 16살이었던 정실 히노 토미코에게서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나자 그를 중간에 쇼군으로 삼아버렸다...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 요시미 세력은 1466년 9월 아시카가 요시마사아의 측근이었던, 이세 사다치카(伊勢 貞親, 1417~1473)와 키케이 신즈이(季瓊 真蘂, 1401~1469)를 추방시켜 버렸고(분쇼우의 정변(文正の政変)), 이 정변으로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제대로 정치를 펼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질세라 남은 여러 다이묘들은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일으켰다.
1-4.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퇴임으로 벌어진 후계 계승 분쟁으로 시작된 오닌의 난은 하타케야마씨(畠山氏)와 시바씨(斯波氏)와 같은 유력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과 연결되어 막부는 히노 토미코와 그의 아들이자 9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하는 동군(東軍)과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형제 아시카가 요시미를 지지하는 서군(西軍)을 필두로 지방 영주들까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약 11년 동안의 전란 속에서 결국 서군이 해체되어 히노 토미코측의 동군(東軍)이 승리했으나, 주요 전장이 된 헤이안쿄 지역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황폐해졌다. 또한 히노 토미코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 또한 1489년 병으로 요절하며, 결국 차기 쇼군 자리는 경쟁자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의 아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 난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 권력이 붕괴되어 전국적인 정권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신분과 사회의 격변이 가속화되었다. 이 말은 곧 누구나 능력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한 하극상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많은 군사 세력들이 힘을 얻고 무너지며 새로운 무사층이 가장 강력한 사회지배층으로 확립된 반면, 이런 상황에서 칼을 쓰지 않는 쿠게(公家, 공가)는 몰락하게 된다. 무사층 중에서는 슈고는 막부와 쇼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지역 관리(공권력 행사)를 하기도 했는데, 영주화를 강화한 슈고다이묘들은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무력으로 슈고다이묘를 타도 후 그 권력을 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헤이안쿄(교토)는 내전으로 많은 역사서와 기록들이 불타 없어졌다.
그 외 군수품을 납품하는 직군이 크게 성공했으며, 의외로 화폐 경제도 잘 돌아갔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라 그런가 역병도 꽤 돌았고, 일부 부자들은 슈고나 일반 백성들에게 금전을 빌려주거나 쌀투기를 해 시세 차익을 얻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그 당시 헤이안쿄의 서민들은 정말 큰 지옥을 겪었을 것이다. 눈만 뜨면 옆집에서 불이 난다거나, 무사들이 쳐들어와 곡식을 빼앗아간다거나 가족을 죽인다던가 하는 끔찍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찰, 공가나 무가의 저택들이 있던 상경(上京)과 상공업자들이 주로 살던 하경(下京) 모두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중 하경(下京) 지역은 그 피해가 비교적 덜 했는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민층이 대두되며 교토 지역의 상업 발흥을 가져오게 되는 모순적인 영향도 생겨났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축성과 광산 개발이 활발해져 건축술과 경제 부분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전술면에서는 무가에서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졸이 되는 아시가루(足軽)가 크게 활약했는데, 이는 곧 전투가 일기토와 같은 개인전에서 총과 창을 활용한 집단전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시대적으로는 이후에 있을 메이오의 정변(明応の政変, 1493.04)과 함께 전국시대(戦国時代)를 열어버린 열쇠가 되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1-5. 센코쿠 시대로의 돌입
1-5-1. 쵸교-엔토쿠의 난(1487~1491)
오닌의 난(1467~1477)으로 쇼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고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 또한 쇠퇴해으나, 군사적 실권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은거한 뒤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 義尚, 1465~1489)은 사사본소령(寺社本所領, 비무가령(공가령, 사사령)의 장원과 소령)과 봉공중(奉公衆)의 소령(所領)을 힘으로 빼앗은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 ?~1520)을 토벌하기 위해 슈고다이묘나 봉공중의 군대를 이끌고 쇼군이 직접 정벌하러 갔다(쵸교-엔토쿠의 난(長享・延徳の乱, 1487~1491)).
1489년, 아시카가 요시히사는 롯카쿠 타카요리를 완벽히 패배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터에서 젊은 나이에 병사하며 막부의 토벌군은 철수한다.
그 뒤를 이은 10대 쇼군은 다름아닌 아시카가 요시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 義稙, 1466~1523)이었는데 그는 9대 쇼군의 임무를 이어 2차로 군대를 꾸려 롯카쿠군을 제압하러 갔다. 이때만 해도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무가의 동량(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 결국 1491년 12월, 롯카쿠군을 완패시키고 헤이안쿄로 돌아왔다.
1-5-2. 메이오의 정변(明応の政変, 1493.04)
하지만 롯카쿠쿤을 정벌 한 뒤인 1493년,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 政長, 1442~1493)와 협력해 카와치(河内) 지역의 하타케야마 요시토요(畠山 義豊, 1469~1499) 토벌을 진행시키면서 아시카가 요시타네와 쇼군가의 운명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아시카가 요시타네와 대립하던 관령(管領)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 政元, 1466~1507)는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어머니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 1440~1496)와 이세 사다무네(伊勢 貞宗, 1444~1509)와 모의해 요시타네군이 헤이안쿄를 떠난 틈에 군사를 일으켜 호리공방(堀越公方)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 政知, 1435~1491)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즈네(足利 義澄, 1481~1511)을 쇼군 자리에 옹립해버렸다(메이오의 정변). 이 때 아시카가 요시즈네를 따르던 다이묘들을 요시즈네계(義澄系)라고 부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어도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없었던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는 현재의 오사카시 히라노구에 위치한 쇼우가쿠지(正覚寺)에서 자결했으며,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포박되어 우에하라 모토히데(上原 元秀, ~1493)의 야시키(屋敷, 무가 저택)에 유폐되었다. 참고로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나중에 도망가버린다.
그러나 몇몇 다이묘 중에서는 이 정변을 인정하지 않고,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정당한 무로마치 쇼군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 다이묘들을 요시타네계(義材系)라고 부른다. 이렇게 다이묘는 요시즈네계와 요시타네계로 분열되어 서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1-5-3. 에이쇼우의 착란(永正の錯乱, 1507)과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복귀
신하가 쇼군을 폐위시킨 메이오의 정변(1493.04)으로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호소카와 경조가(細川京兆家)에 의한 관령직 독점 및 세습이 시작되었고, 이에 더해 쇼군의 폐립권(왕을 폐하고 다른 왕을 옹립하는 권한)을 수중에 넣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나 자신의 후계자를 둘러싼 집안 내분으로 암살당했다.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 澄元, 1489~1520)와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国, 1484~1531)가 호소카와 경조가의 가독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에이쇼우의 착란(永正の錯乱, 1507).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오오우치 요시오키(大内 義興, 1477~1529)와 함께 주고쿠 지방의 나가토(長門)에서 상경했는데, 호소카와 타카쿠니가 맞아주면서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다시 쇼군 자리로 복귀한다. 하지만 오오우치 요시오키가 고향에서 난이 일어나 이를 제압하러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오오우치씨의 군사력을 잃은 타카쿠니측은 스미모토군과 미요시 유키나가(三好 之長, 1458~1520)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동북쪽의 오우미노쿠니(近江国) 사카모토(坂本)까지 후퇴하고 만다. 이를 본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곧 스미모토측에 붙어버린다...이런 간신 쇼군(?!?!)
그러나 곧 롯카쿠 사다요리(六角 定頼, 1495~1552)의 지원을 받은 타카쿠니측은 다시 헤이안쿄로 진군해 유키나가군을 격파했다(토우지인 전투(等持院の戦い, 1520.05)).
그 후, 타카쿠니측의 추격을 받은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시고쿠의 아와노쿠니(阿波国)까지 쫓겨났고, 그 자리에서 병사한다. 1521년, 호소카와 타카쿠니는 망명지에서 사망한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남긴 아시카가씨의 아이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 1511~1550)를 12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또 폐위시켰다.
1-5-4. 다이모츠쿠즈레(大物崩れ, 1531.07) 그리고 이름 뿐인 무로마치 쇼군
최종적으로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가 타카쿠니군을 쓰러뜨리고(다이모츠쿠즈레(大物崩れ, 1531.07)),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화의를 맺고 그 관령(管領)이 됨으로써 20년 이상에 걸친 내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메이오의 정변으로시작된 일련의 내분으로 중앙 정권으로서의 무로마치 막부의 기능은 완전히 붕괴되어 교토 인근을 다스릴 만한 작은 지방 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쇼군은 간신히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에 대한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형식적인 존재로만 명백을 유지하게 된다.
1-5-5.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호소카와 정권을 무너뜨리다. 그리고 크리스트교가 전래되다.
하지만,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정권 획득 마지막 단계였던 1532년, 공신이었던 미요시 모토나가(三好 元長, 1501~1532)를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 1508~1549)와 이바라키 나가타카(茨木 長隆, ?~?)와 결탁해 죽음으로 내몬 것이 나중에 큰 역효과를 낳게 된다.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 1522~1564)와 그의 형제들이 아버지를 죽인 미요시 마사나가를 토벌해 버리자(에구치 전투(江口の戦い, 1549.06)), 그들의 기세를 두려워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수도를 버리고 오우미노쿠니로 도망쳐 호소카와 정권(細川政権, 1493~1549)은 붕괴된다.
1546년, 미요시 나가요시는 상경해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1565)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13대 쇼군으로 앉혔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후임직에 호소카와 타카쿠니의 양아들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1513~1564)를 옹립하면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직권을 빼앗아 상반중(相伴衆)의 일원으로서 막부 정치의 전권을 장악했다.
허나 그 후, 동생 소고우 카즈마사(十河一存, 1532~1561)나 미요시 짓큐우(三好 実休, ?~1562), 아들 미요시 요시오키(三好 義興, 1542~1563)이 잇따라 사망하며 집안에 큰 불행이 찾아왔고,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 高政, ?~1576)나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1521~1598) 등 반미요시 세력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미요시 정권(三好政権, 1549~1568)도 불안정해졌다. 결국 늙어서 병을 앓던 미요시 나가요시는 1564년, 실의에 빠져 사망하게 된다.
예수회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으로 서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에스파냐 왕국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믈라카에서 알게 된 야지로(弥次郎)라는 일본인에 의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되며 흥미롭게 느낀 것이 일본의 크리스트교 선교의 서막이었다.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땅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최초의 크리스트교 선교를 시작한다.
그는 상류층에 접근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서민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했다.
이 때 크리스트교를 믿기 시작한 상류층의 다이묘들을 키리시탄 다이묘(切支丹大名, キリシタン大名)라고 부른다.
1-5-6. 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1565.06)과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즉위 그러나...
이 상황을 본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간토 간령(関東管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30~1578)을 비롯한 친쇼군 센고쿠다이묘의 지원을 받으며 쇼군의 권위를 재건하는데 힘썼지만, 그 순간 미요시 정권의 실력자였던 미요시 삼인방(三好三人衆)이 고쇼(御所, 궁궐)를 습격해 많은 막부의 신하들과 함께 사망하게 된다(에이로쿠의 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사망하고 한 동안 쇼군 자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1582), 하타케야마 아키타카(畠山 秋高, 1545~1573), 타케다 요시즈미(武田 義統, 1526~1567) 등을 중심으로 기나이 지역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오랫동안 비게 된다. 그러다 1568년 2월에 14대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 1538~1568)가 즉위해 파괴된 막부의 질서를 되돌리는데 주력했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1597)와 그의 조력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공세로 무너져 버려 도망치다가 사망한다...
1-6. 아츠지모모야마 시대
1-6-1. 오다 정권(1573~1585)
사망한 쇼군 자리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른다. 그러나 이전의 쇼군 막부를 중심으로 질서를 재건하려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좌한 오다 노부나가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를 견재한다. 그러나 힘이 커져버린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그를 수도에서 쫓아내버렸다. 그렇게 오다 정권(1573~1585)가 세워진다.
이 오다 정권은 결국 1582년 6월에 벌어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1582.06)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게 되며 끝이 난다. 이 변은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상이 세워졌음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었다.
1-6-2.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장과 토요토미 정권(1573~1585)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가문이 분열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시기에도 힘을 키워나갔다. 사실 혼노지의 변도 처음엔 오다 노부나가가 커져버린 토요토미측을 토벌하라고 지시한데서 시작한 변이었을 정도로 이미 당시에도 지방의 한 정권의 모양이 형성된 상태였다.
1582년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검지(太閤検地, 1582~1598)를 실시해 전국의 영지에 있는 밭을 측량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1598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태합검지 중 1594년에 <검지조목(検地条目)>을 작성한 뒤로 시작된 검지를 연호를 따서 분로쿠 검지(文禄検地, 1594~1598)이라 한다. 태합검지를 통해 작성된 <검지장(検地帳)>에 기록된 농민은 타카모치 백성(高持百姓)이라고 부르며 경작권을 인정해줬다.
158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는 오사카 성을 축성함과 동시에 헤이안쿄를 장악하며 키나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585년에는 관백(関白)으로, 1586년에는 태정대신에 취임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3~1616)까지 복종시켜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덴노로부터 토요토미(豊臣)라는 우지를 하사받아 토요토미 정권(1585~1603)으로 써일본을 이끌어 나갔다.
1587년에는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내려 그리스도교 선교와 남만무역을 금지한 뒤 본보기로 26명의 순교자를 처형시켰고, 1588년에는 <해적정지령(海賊停止令)>을 내려 해적단의 활동을 금지하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도수령(刀狩令, 1588)> 제1조 백성이 카타나(刀, 큰 칼)이나 와키자시(脇差, 작은 호신용 칼), 활, 창, 철포(소총) 등의 무기를 가지는 것을 굳게 금지한다. 쓸데 없는 무기를 가지고 연공(年貢)을 태만히 하거나, 잇키(一揆, 민중 봉기)를 일으켜 역인(役人, 관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 제2조 거둬들인 무기는 지금 만들고 있는 호코지 대불(方広寺大仏)의 못이나 꺾쇠(鎹)로 한다. 그러면 백성은 내세까지 구원받을 것이다. 제3조 백성은 농기구만을 가지고 경작에 힘쓰면 자손 대대로 무사히 지낼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기에 무기를 빼앗는 것이다. 고맙게 생각하고 경작에 힘쓰라. 또한 몰수된 무기류는 호코지 대불의 재료로 삼는 것이라 훤전(퍼뜨림)되었다. |
158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코지 대불 제작을 빌미로 칼사냥(刀狩)이라는 명령을 내려 일반 백성이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무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정책을 펼쳤다.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타와라 정벌(小田原征伐, 1590.02~07)로 고호조씨(後北条氏)를 멸족시키며 전국통일을 위한 군사적 움직임을 종료시킨다. 이는 곧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듬해 1591년에는 쿠노헤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1591.03~09)를 진압하고, 쿠에노 마사자네(九戸政実, 1536~1591)을 진압해 오슈 처분(奥州仕置)을 진행해 오슈 지역도 안정화시켰다.
1591년, 그는 <신분통제령(身分統制令)>을 내려 병농분리를 추진했다. 시로와리(城割り)로 성의 구역을 나눠 죠카마치(城下町, 성하정)에 상인들이 거주하게 했다.
<요시카와 문서(吉川文書)> 중 <인소령> 부분 |
긴급히 알린다. 하나, 해당 관백님에 복종하는 66개 쿠니에게 사람을 쓰는 것(人掃)을 분부하신 것. 하나, 집의 수, 사람 수, 남녀, 늙고 젊음(老若) 모두 일촌(一村) 단위로 기록할 것. 첨부, 봉공인(奉公人, 고용인)은 봉공인, 도시 사람(町人)은 도시 사람, 백성(百姓)은 백성, 한 곳에 쓸 것. 덴쇼 19년(1591년) 3월 6일 |
(최근 연구에 따르면) 1592년, 조선 침공을 위해 호구조사를 하는 <인소령(人掃令)>이 내려진다. 이로써 일본 전국에 호구조사를 명해 일촌 단위의 가정 수, 인원 수, 성별, 나이, 직업 등을 명기한 서류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목적 자체는 조선 침략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병농분리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한국인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명, 천축(인도) 정벌을 위해'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즉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1592.05~1593.08 | 1597.08~1598.12 | |
한국측 명칭 | 임진왜란(壬辰倭亂) | 정유재란(丁酉再亂) |
일본측 명칭 |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 케이쵸의 역(慶長の役) |
중국측 명칭 | 만력 조선의 역(萬曆朝鮮之役) |
16세기 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일본군의 조선 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과 일본이 국력을 걸고 싸웠으며, 명나라라는 동아시아의 질서 중심 또한 참가했던 대전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왜란과는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게 된다.
조선 | 조선은 지고만 있던 전쟁에서 전투 감각을 다시 일깨워 반격에 나섰다. 이후 정유재란에서도 많은 일본군을 막아낸 자신감으로 이후 북벌에 더 힘쓰게 된다. 또한 명청교체기가 다가와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다가 명을 중요시하는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당하고, 그 자리는 인조가 앉게 된다(인조반정). 조선은 일본과 함께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명 | 조선에 많은 원조를 하면서도 만력제 자신의 사치로 인해 중화민족의 운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이후 정치하지 않는 황제 곁에는 환관들이 붙어 국정까지 농단하게 된다. 결국 부패한 명은 다가오는 강국 청을 이기지 못하고 패망한다. |
여진족 | 조선군의 공격으로 결집해 대규모의 국가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결국 명과 맞대결을 하며 '후금->청'이라는 앞으로 동아시아를 주름잡을 거대 비한족계 제국의 성립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일본 |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가 생전부터 경계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던 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파가 나뉘어 전투(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르게 되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해 새로운 막부를 건설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과 함께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이 자기를 생산해 일본산 자기가 유명해지게 된다. |
류큐 왕국 | 당시 명나라의 책봉국이면서도 독립국이였던 류큐 왕국은 일본의 명령에 따라 식량과 광물 보급에 가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나라에게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에 직접 알려 명이 준비할 시간을 벌게 해줬다. 전쟁이 끝난 뒤엔 일본국 사쓰마번의 류쿠 침공(1609.03~04)에 패배해 공식적으로 명과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다. |
포르투갈령 인도 | 일본의 덴쇼 소년사절단이 유럽에 갔다 포트투갈령 인도(1505~1961)의 고아주에 들렀을 때, 부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한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회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와 함께 일본국으로 돌아왔다. 답신을 받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그에게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 일보의 신도는 사실 하나인데, 그것은 일본 신도로 귀결된다'며, '인도 원정 가능성'을 시사했고,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그에게 선교의 자유를 받아내려고 그가 조선을 침공한다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
에스파냐령 필리핀 | 루손 섬에서 교역을 하던 일본인 상인에게 필리핀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조선과 류큐는 일본에 조공을 하고 있으니 너희 필리핀도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라'라는 내용의 항복 권유 국서를 마닐라로 보냈다. 이에 당시 필리핀 총독은 '무명의 일개 상인이 가져온 국서는 믿을 수 없으며, 그 상인이 누구인지 확인해주면 추후 다시 답신을 하겠다. 우리 에스파냐는 강대국으로써 일본 또한 강대국임을 인정하며 추후 통상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을 써서 일부 선물과 같이 다시 보냈다. 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꽤 흡족해 했다고 한다. |
타이완 | 1593년에 사신을 파견해 일본에 복속하라며 사신을 보냈는데, 막상 가보니 소수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정치 체계가 갖추어 진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
전쟁에 파견나간 다이묘들은 거의 서국 다이묘(西国大名)였는데, 과도한 병역을 부과받은 이들은 피폐해지고 가신단(家臣団)으로 분열되거나 영지에서 내란이 일어난 다이묘들도 생겨나며 토요토미 정권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전쟁 중에도 과도한 조세 부담과 강제 징병 등으로 민간에서도 많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 난다.
결국 이 전쟁으로 힘을 비축한 건 동국 지역의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군 복귀를 명령하며 사망한다. 그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 1593~1615)는 가독(家督)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으로 오사카 성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는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奉行)의 도움으로 국정을 이어갈 뻔 했는데, 오대로 중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의 영향력을 펼치면서 토요토미 정권 내 갈등이 깊어져 갔다.
1600년 10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560~1600) 등이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하여'라는 대의를 명목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어 군사를 일으키며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1600.10)가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끌던 동군(東軍)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결국, 이 싸움에서 서군(西軍)측에 섰던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1558~1600),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1600)은 참수 당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무사시노쿠니(武蔵国)의 에도(江戸)에 막부를 열었다. 이후, 1614년 11월부터 계속된 오사카의 진(大坂の陣, 1615.11~1615.05)에서 결국 1615년 5월에 토요토미씨(豊臣氏)를 멸족시키고 일본 전국을 지배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이렇게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초석을 닦은 뒤에도 에도 막부를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는 후에 막번 체제(幕藩体制)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264년간 일본 열도를 에도 막부가 다스리게 되었다. 또 이후 토쿠가와 일족은 일본에 있는 주요 광산과 대도시 직할 등 일본 전국의 1/4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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