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가 잘 되고 마을이 번영하길 빌었던 동래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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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잘 되고 마을이 번영하길 빌었던 동래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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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래 사직단

사직역 4번 출구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사직대건성당 옆에 있는 동래사직단을 찾아갈 수 있다.

올라가는 길에 '사직단 가는 길'이라는 삐뚤빼뚤한 안내판과 사직단과 관련된 다양한 그림, 이야기들이 벽에 새겨져 있다.

협성맨션 쪽에서 바라본 사직단의 모습이다. 멀리서도 붉은 문이 보인다. 저 붉은 문을 유문(壝門)이라고 부른다.

사직단 정면에서 찍은 전경이다.

사직단 입구를 중점으로 찍은 사진!
 
사직단의 입구에 들어서서 왼편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래 사직단 터

이곳은 조선시대 동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단은 약 3천 년 이상 전 중국에서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社 : 토지신)와 직(稷 :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농신(農神)에게 제사 지내는 풍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사와 직에 대한 제사는 늦어도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395년(조선 태조 4)에 이르면 전국 주요 지역에 사직단을 세우고, 중앙의 종묘(宗廟)와 함께 중요시하였다. 동래 사직단은 조선 세종 때 처음 세워진 후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직단은 1640년 동래부사 정호서(丁好恕)가 다시 세웠고, 1672년에는 동래부사 이하(李夏)가 다시 만들었다. 이 사직단은 1709년에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동래부의 서쪽 5리에 옮겼다. 1709년에 옮긴 사직단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동래 사직단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우리 민족 말살정책으로 원형이 파괴되고, 터만 남아있다가 1950년대 중반 도시화과정에서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오른편에는 사직단의 구조도와 함께 이런 설명문이 적혀 있다.

동래 사직단

부산광역시 동래구 아시아드대로 164번길 32(사직동)

사직단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토지신 사(社)와 곡식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단이다. 사와 직에 대한 제사는 중국에서는 3,000년 이상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늦어도 삼국시대부터이지만 각 지방마다 사직단이 세워진 것은 조선 세종 때로 알려져 있다.
동래 사직단은 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640년에 다시 세워졌고, 1709년 현재 자리의 동북쪽 약 60m 지점에 옮겨졌다가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제사를 모두 금지함에 따라 없어졌다. 동래 사직단은 그 소중한 가치를 되찾고, 부산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며, 복원을 염원하는 주민여론에 부응하고, 문화관광자원 등으로 활용을 위해 복원되었다. 복원장소는 일제강점기 없어진 사직단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 주변에 심은 소나무 숲이 있던 곳이다. 2021년 1월에 복원된 사직단 한 변의 길이는 6.5m, 높이는 0.78m이고, 사방에는 3단 계단을 두었으며, 단의 바깥 주위로는 유(壝, 제단 담장)와 유문(壝門, 유와 유 사이의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신실(神室)은 1칸, 재실(齊室)은 4칸에 각각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사직단의 유문(壝門)에 들어와 제단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농경 민족이었던 한민족은 중국의 화족과 비슷하게 이런 제단을 만들어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것 같다.

여기는 신실(神室)이다. 여기에는 동래사직제를 지낼 때 모셔오는 신위(神位)가 있다.

신실에서 재실로 내려가는 계단쪽에서 바라본 사직단

신실의 좌측 계단으로 내려가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인 재실(齊室)이 있다.

재실 뒤에는 주산신위(主山神位)라는 돌로 만든 신위가 있다.

비의 정면에서 좌측면 비의 뒷면 비의 정면에서 우측면
주산당(主山堂) 내 양씨(梁氏), 김녕 김씨(金寧 金氏) 공덕비(功德碑)를 사직단(社稷壇) 복원으로 인하여 이안(移安)하다. 여고 주산당은 여고부락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매년 제향을 지낸 당산터로써 2019년 사직단복원사업을 위하여 부지를 양도하였으며 1934년 2월 4일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한 김녕 김씨 성술공의 공덕비와 이조말엽 부락민에게 전 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를 이곳에 매안하고 여고부락민들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주산당 제단을 세운다.

단기 4354년(서기 2021년) 1월 27일
주산당보존회(主山堂保存會)
(여고농우회(余古農友會))
단기 4354년(서기 2021년) 1월 27일

주산당보존회(主山堂保存會)
(여고농우회(余古農友會) 1동)

현재의 사직역 동쪽, 사직단을 중심으로 있었던 여고(余古) 마을(현재 여고로 일대)이 있었다.
지금의 사직단 자리에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오래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인 할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2019년 여고 주산당 터를 기증한 김녕 김씨 성술공 공덕비와 양공 공덕비를 이 아래 묻고, 석제 주산신위를 세웠다.
 
여기까지 봤으면 사직단과 주산신위까지 다 봤기 때문에 원래 사직단이 있던 곳으로 가보자.

2. 옛 사직단 터

사직단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가서 사거리가 나오면 세갈림길이 나올 때 까지 1분 정도 걸어가면 신동아맨션과 그 앞의 나들가게 코사마트가 보인다.

여기 '노른자부동산'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에 그 흔적이 있다.

마트 앞쪽 육각형의 쇠판이 바로 그 흔적이다!

사직단 터라고 적힌 판이 바닥에 있다. 원래는 이 쪽에 사직단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18세기에 이전할 때 현재의 사직단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어왔던 동래구 사직동에는 농사와 마을의 번영을 위해 농사의 신 사와 직에게 제를 지내왔다. 그리고 그 단의 이름은 지금도 동의 이름으로 쓰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옛 사람들의 미래의 번영을 위한 노력의 흔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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