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역 5,7번 출구로 나와 1차선 골목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꺾으면 정공단이 나온다.
정공단을 중심으로 정공단로가 세워져 있다.
정공단 입구 서남쪽에서 정공단을 바라본 모습이다. 정공단(鄭公壇)은 이름 그대로 정공(鄭公)을 모신 제단(壇)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정공(鄭公)은 부산진 첨절제사를 지내다가 부산진성에서 최후를 맞이한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을 말한다. 정공단을 오르기 전 부산포 개항가도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공단 문화재명 : 정공단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 (좌천동) 지정번호 : 시지정기념물 제10호 지정일시 : 1972.06.26 임진왜란의 첫 접전지는 부산이며 부산진성을 지키던 정발장군은 첫 접전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장군과 같은 충용(忠勇)의 장군이 열사람만 되었더라도 우리가 받았던 피해와 고통은 그 지경이 아니었을 것이라 한다. 충장공 정발장군의 충령(忠靈)을 모신 사당이 정공단이며 좌천 1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해마다 부산진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4일이면 여기에 제단을 마련하여 장군의 충용을 추모하고 있다. 정공단은 임진년(1592년)부터 54년후인 1646년 2월 절도사 이광국이 국명을 받아 부산성 남문터에 세웠으며 역대 부산첨사는 해마다 음력 4월 14일 국비로 제사를 받들었으나,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1895) 이후 국비지원은 중단되고 지방민의 정성으로 받들어 지고 있다. |
여기서 이상한 부분은 '1646년 2월 절도사 이광국이 세웠다'라는 부분이다. 일단 이광국(李光國, ?~1779)은 1764년부터 1766년까지 부산첨사로 있었다. 부산첨사 이전에 절도사로 있었다고 해도, 1646년과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실 아래의 '1788년에 부산첨사 이광국이 세웠다'라는 부분과 모순된다.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기록인 듯 하니 이 부분을 잘 염두해두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정공단의 입구다. 사진이 조금 기울어져서 아쉽다ㅠ 일단 급히 보정은 했지만 다음부터 사진을 찍을 땐 똑바로 찍도록 연습하겠다.
입구 왼쪽에 또 다른 안내판이 있다.
정공단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정공단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釜山鎭城)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슴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영조 42년(1766)에 부산첨사(釜山僉使) 이광국이 부산진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기리려고 그들이 순국한 장소인 이곳, 옛 부산진성(釜山鎭城) 남문터에 제단을 쌓았다. 이후 부산첨사들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 장군의 비, 서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幕僚)였던 이정헌의 비, 동쪽에는 정발 장군의 첩인 열녀 애향의 비가 있다. 남쪽에는 여러 군민들을 모시는 비석이 있고 남쪽 계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의 단이 있다. 1895년 첨절제사(僉節制使) 제도가 폐자되었는데 그 뒤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된 향사계(鄕祀契)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1907년에 손종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돈을 하사하여 향사를 계속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민족혼을 일깨운다는 이유로 일본은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도 강제로 빼앗았다. 광복 후에는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었고 옛 비석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48년에 제단을 새로 만들면서 뒤쪽으로 별단을 쌓아 옛 비석을 두었고, 2009년에 옛 비석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9년에 옛 비석을 땅에 묻고 제단을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향(祭享,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주관한다. |
충장공 정발 전망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4호 이 비석은 영조 37년(1761)에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려고 영가대(永嘉臺)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전차선로를 만들면서 영가대를 헐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충장공정발전망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과정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좌측면에는 비석을 세운 날, 우측면에는 박재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에 부산진 전투에서 순국한 부산진 첨사 정발의 업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든 사람의 신분과 비석을 만든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부산 지역과 부산진이 국방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듯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수(螭首: 비석의 머릿돌)는 조각 기법이 뛰어나 조각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
그리고 이 충장공 정발 전망비의 뒤쪽으로 첨사, 경찰관, 수상국(水相國)를 지낸 각기 다른 10명을 기리는 비석들이 놓여있다. 우측부터 하나씩 차례로 보자.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첨사(僉使) 홍공태두(洪公泰斗)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병술(丙戌, 1766) 6월 일 삼진(三鎭)의 장사(將士)가 세움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첨사(僉使) 조세망(趙世望)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정유(丁酉) 4월 일 세움 |
각청(各廳) 세움 감역(監役) 신지관(辛之寬) 유세희(柳世輝) 김익중(金益重)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행경찰관(行警察官) 박공기종(朴公琪淙)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항구를 맡으시어 마음을 기울이고 건물을 고쳐 주고 은혜를 고루 펼쳤다 공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조각돌이 말해 주리라 |
광서 19년(1893년) 9월 일 순사청에서 세우다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첨사(僉使) 안공광찬(安公光贊)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기묘(己卯) 10월 일 진속(鎭屬) 세움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첨사(僉使) 박공기종(朴公琪淙) 영세송덕비(永世頌德碑) 부임하여 곡식을 운반해서 남김없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진(鎭)의 업무 점점 회복되고 거리의 노래 더욱 새로워졌네 |
세재(歲在) 을미(乙未, 1895) 3월 일 교리(校吏) 군민(軍民) 등이 세움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수상국(水相國) 장인식(張寅植)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변방을 구휼하여 방비를 고르게 하였고 강한 자 누르고 약한 자 부축하였으니 은혜는 산처럼 무거워라 그 덕을 돌에 새겨 오래도록 남긴 |
정사(丁巳) 7월 일 개운진(開雲鎭) 군졸(軍卒) 세움 |
비의 앞면 |
첨사(僉使) 조공광렬(趙公光烈) ㅁㅁ불망비(ㅁㅁ不忘碑) |
비의 앞면 |
첨사(僉使) 이공원룡(李公源龍)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갑진(甲辰) 8월 일 세움 |
비의 앞면 |
첨사(僉使) 홍공이징(洪公以徵) 애졸선정비(愛卒善政碑) |
비의 앞면 | 비의 뒷면 |
첨사(僉使) 노공흡(盧公恰) 선정거사비(善政去思碑) | ㅁ자년(ㅁ子) 여름 세움 |
이렇게 현 부산진 지역에서 다양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을 기념하는 비석 10기가 정공단의 첫번째 문을 들어서고 바로 우측에 세워져있다.
입구의 좌측에는 동구정씨종친회(東區鄭氏宗親會),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社團法人鄭公壇保存會), 부산진 향우회(釜山鎭鄕友會)에서 쓰는 관리 건물이 있다.
정공단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정공단 본단에 들어왔다. 본단에는 5개의 비석이 보인다.
본단의 왼편 가장 낮은 단에는 정발장군의 충복 용월을 기리는 충복용월비(忠僕龍月碑)가 세워져 있고, 왼편에서 그 다음으로 높은 단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전망제공비(戰亡諸公碑)가 세워져 있다.
우측 두번째로 낮은 단에는 부산첨사 정발의 애첩 애향(愛香)을 기리는 열녀애향비(烈女愛香碑)가 세워져있다.
가장 높은 단의 좌측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증좌승지를 지내던 이정헌을 기리는 증좌승지이정헌비(贈左承旨李庭憲碑)가 세워져 있고, 그 단의 바로 정중앙에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에서 최후까지 싸웠던 정발 장군을 기리는 충장공정발장군비(忠壯公鄭撥將軍碑)가 세워져 있다.
충장공정발장군비 바로 뒷편의 작은 언덕에는 오래된 단을 매안(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그 뒤의 언덕은 그 신주들이 묻혀있을 것이다.
구단매안감고비(舊壇埋安感古碑) 충장 정공발 장군 전망 유지(忠壯鄭公撥戰亡遺址) 증좌승지이정헌비(贈左承旨李庭憲碑) 전망제공비(戰亡諸公碑) 열녀애향비(烈女愛香碑) 충복용월비(忠僕龍月碑) |
1592년 5월 23일부터 24일까지 펼쳐졌던 한반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첫번째 전투였던 부산진 전투. 군관민 합쳐셔 약 1:6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부산첨사 정발과 그 휘하 사람들과 백성들은 지금의 증산공원 아래에 있던 부산진성에서 일본군들을 막다가 순국하게 된다. 이런 그들의 피와 땀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17세기에 (구) 부산진성 인근에 제단을 세워 부산첨사 정발 장군과 그를 도왔던 여러 사람들, 부산진성 전투에서 사망한 많은 백성들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 > 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장원에 도전해볼까? 회동수원지로 갈 수 있는 황산도 금정장원길 (0) | 2023.03.06 |
---|---|
금정구 동북쪽의 물을 관리하는 범어사 정수장(+범어사 만두 포장 맛집 추천!) (0) | 2023.03.05 |
광화문.금호아시아나본관앞 정류장 부근의 훈련도감터 (0) | 2023.03.04 |
우장춘기념관 앞의 자유천 (0) | 2023.03.04 |
동래읍성 인생문과 열녀 월성 박씨 정려비 (0) | 2023.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