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제구와 동래구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다리, 이섭교. 그리고 이섭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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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연제구와 동래구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다리, 이섭교. 그리고 이섭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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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교비를 세운 '김진한'에 대해선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823)을 참고해주세요~

 

윤산에 세워진 기근의 구원자이자 이섭교 설립자 김진한 망고불망비

주변에 있는 구월산 당산(윤산 당산,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825)도 한 번 들려보세요~ 부산 윤산의 구월산 할매를 모시는 구월산 당산 부산 금정구의 윤산 섯골행복마을 벚꽃언덕쪽 등산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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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 낙민동 연제구 연산1동을 이어주는 다리 중 이섭교라는 보행자 전용 다리가 있다. 그 중 낙민동쪽 낙민파출소 바로 앞에 큰 비석 한개가 있다.

한자로 이섭교(利涉橋)라고 적혀있는 이 비석이 바로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33호인 이섭교비(利涉橋碑)다.

비의 앞면 비의 뒷면
물이 깊으면 그냥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고 건너는 것을 사람들 모두가 힘들어 하였으니 이것이 이 다리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나무판으로 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썩어 버렸다. 그래서 해마다 예전 방법을 써서 고쳐 만들었으니 실로 백성들에게는 큰 병폐가 되었다. 일찍이 이 다리를 넓히는 역사를 하는 것이 다 옳다고 하였으나 생각만 있었지 시행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갑술(甲戌)년(1694, 숙종 20) 겨울에 부(府) 안의 몇 사람이 개연(慨然)히 앞사람들의 뜻을 이어 화주(化主)를 불러 모으고 재물을 모금하니 돌을 옮기는 부역은 주민들이 스스로 달려와서 다음 해 봄에 그 일을 마쳤다.
이는 실로 지난날에 하려다 끝내지 못한 뜻을 뒤에 와서 하루도 안 되어 완공한 것이다. 김진한(金振漢)이 이 일을 시작하고 신만재(辛萬齋)가 이 일을 완성한 사람이다. 이른바 강물이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고 나루가 넘쳐도 수레바퀴는 젖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다리에 오르는 자는 의당 그 공을 찬미하고 칭송할 것이며 천억 년이 지나도 길이 감사의 말이 있을 것이다
유학 김진해 기서, 부사 이공, 좌수 신만재, 별감 문승창·이명노, 대시주 장차선·강희망·정만종, 가선 홍인한·장길사, 통정 김수정, 가선 이개불·김건이동·정특봉·박시성·이영직·장차수·최구가금·노유문, 통정 김옥득·김만세·□□명, 사과 백지원·백응종·백업중·백□지·정충좌·문계영·백태석·신분남·승문인·강치가·박이적·송시웅, 도□수 □□□·박정□, 부□수 김세원·백□·경영·만돌이·해청·김권남·진휘·응주·응묵·김벽순, 화주 □□·□□·□□·□□, 공양 □□·□□·보□·공언·공민·연화·청은·설청·성념·택림·민해·영조·각헌·전형·공담·단준·운혜·김처익. 숭정 후 을해년(1695, 숙종 21) 3월 일, 별좌 승 상유

우측에 작은 안내 석판과 큰 안내판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 있다.

이섭교터(利涉橋址)

이 터는 세 개의 아치형으로 연결된 축조기술이 뛰어난 석교(石橋)가 있던 자리로 조선시대 동래부사청(東萊府使廳)과 좌수영(左水營) 왕래시 건너야 했던 다리가 있었던 곳.
이섭교비(利涉橋碑)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33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반송로 130-9(낙민동) 앞

이섭교비는 숙종 20년(1694)에 완공된 이섭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섭교는 지금의 온천천에 설치한 돌다리로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과 좌수영(左水營)을 오고갈 때 건너야 했으며, 3개의 무지개 모양(虹霓)의 다리를 연결해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비는 높이 235cm, 폭 105cm이며 머릿돌을 따로 두지 않고, 상부는 반달형으로 가공한 몸돌과 받침돌로 구성된다. 비문에 따르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아 편히 건너다니게 되었지만, 나무가 쉽게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1694년 겨울에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다리 건설에 드는 돈을 모아 1695년 봄에 백성들이 도와서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다리를 놓는 일은 '김진한(金振漢)이 앞장 서 시작하여 신만재(辛萬齋)가 이룩하였다.'고 그 공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동래부사 이희룡(李喜龍)이 동래 7면(面, 마을) 69계(契, 모임)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고 한다. 다리를 놓는 일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성명, 그리고 협력한 각 마을의 모임에 대한 기록이 있어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석은 1930년 무렵 금강공원 안에 옮겨졌다가 2012년 10월에 원래 위치로 추정되는 현재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옛날의 이섭교비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석교 당시 이섭교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동래 지역과 수영 지역을 오갔다고 한다.

온천천으로 내려와 새로운 이섭교를 바라봤다. 백성들이 '건너는 것(涉)을 이롭게(利)' 하기 위해 만든 이섭교로 당시 부민들을 생각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이 다리는 이전의 석교보다 더 단단하고 하중을 잘 견디는 보행자용 다리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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