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던 온천을 고치다, 온정개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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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던 온천을 고치다, 온정개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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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개건비가 들어서 있는 곳의 문인 온정용문(溫井龍門)이 보인다. 문의 우측에는 이 곳의 관리자인 사단법인 동래온천번영회(社團法人 東萊溫泉繁榮會)의 명판이 적혀있다. 그리고 문의 양쪽에는 용(龍) 그림도 그려져 있어, 용을 신성시 하는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우측에 설치된 안내판 내용에도 적혀 있듯 이곳에서는 실제로 용왕신(龍王神)을 용각(龍閣)에서 모시고 있으며, 제사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온정개건비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강로 124번길 23-17(온천동)

이 비석은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온정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766년(영조 42)에 세웠는데, 송광적(宋光迪, 1690~1775)이 썼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의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산천조 온정란에 보면, 동래온천은 신라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천의 물이 계란을 익힐 만큼 뜨거웠으며,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아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비는 높이 144cm, 폭 61cm이다. 비문에 따르면, 1691년(숙종 17)에 고쳐 세운 온정은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었는데, 그 후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힌 것을 새로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가 다시 고쳐 짓고, 남탕과 여탕을 구획한 9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이 온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한다.
온정개건비가 있는 자리는 1960년대까지만해도 부산시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리던 곳이다. 이곳에는 온정개건비와 함께  용왕신(龍王神)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 제사를 지내는 용각(龍閣)이 있다.

일단 '동래온천'이 처음 기록되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살펴보자.

절의 오래된 기록(寺中古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신라(新羅) 진골(眞骨) 제31대 신문왕(神文王)대의 영순 2년 계미(683년)[원문에는 '원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에 재상(宰相)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곧 동래현(東萊縣)인데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의 온정(溫井)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오면서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 머물러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매를 풀어 꿩 사냥을 했는데, 꿩이 날아올라 금악(金岳)을 넘어가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가다가 굴정현(屈井縣) 관청 북쪽 우물(北井)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고 꿩은 우물 속에 있었는데, 우물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었다. 매도 또한 측은히 여기는 듯 감히 꿩을 낚아채려 하지 않았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았더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서울(경주)로 돌아와 왕에게 (이를)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는 영취사(靈鷲寺)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제4 영취사(靈鷲寺)

신라시대에 이미 장산국(내산국)의 온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며, 이 지역이 고려 시대에 동래현이었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어. 현재의 동래를 중심으로 한 부산 지역 일부에 온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정용문(溫井龍門)을 지나면 양쪽에 비석이 보이고, 그 뒤로 용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운데에는 이렇게 용왕신을 모시는 용각이 있다.

좌측에는 온정개건비.

그 유명한 온정개건비 양옆에 두 개의 안내판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좌측 안내판은 비문 해석을 적은 것이고, 우측 안내판에는 이 비가 어떤 비인지 설명하고 있다.

온정개건비 좌측 안내판 온정개건비 우측 안내판
직무(칠사(七事))를 밝히고 온갖 쇠폐한 것을 일으켰는데, 이에 온정을 다스려 감관(監官)에게 명령하여 고쳐짓도록 하였다. 비스듬한 동쪽 옛터에 유좌(酉坐)를 고쳐 임좌(壬坐)를 앉히고 성안의 재목을 모두 운반해 와서 7월 상현(上弦)에 개기(開基 터닦기)하고 8월 24일에 입주(立柱, 기둥 세우기)하고 9월 7일 상량(上樑, 마룻대 올리기)을 하였다. 모두 9칸인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고 상쾌하고 화려하기가 마치 꿩이 날듯이 으리으리하였다. 지키는 집을 짓고 대문을 세우고 안에는 비석을 세웠다. 아아, 강공(姜公, 강필립)이 아니면 이 온정이 없었을 것이요 감관이 아니면 이 옥사(屋舍, 집)가 없었을 것이다.
명(銘)을 지으니 이러하다.
"공께서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들이 힘입어 살게되고 공께서 온정을 수리하니 사람들의 질병이 없어졌다. 천만년이 되도록 입으로 또 비석으로 전하리라."

온정개건비는 온정(온천)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은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영조 42년(1766)에 세웠고, 비석의 글은 송광적(宋光迪, 1690~1775)이 썼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는 높이 144cm, 폭 61cm이며, 머릿돌을 따로 두지 않고, 몸돌과 받침돌로 구성된다. 또한 비 앞에 돌로 만든 욕조가 남아있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의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1740년에 쓰여진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 온정란에는 '온천의 물이 계란을 익힐 만큼 뜨거웠으며,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아 신라의 왕이 여러 번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17년(1691)에 고쳐 세운 온정은 '돌로 두 개 탕을 만들었고, 이후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힌 것을 동래부사 강필리가 다시 고쳐 짓고, 남탕과 여탕을 구획한 9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쳤다고 하며, 현재 비석이 있는 자리는 1960년대까지만해도 부산시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리던 곳이다. 이곳에는 용왕신(龍王神)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 제사를 지내는 용각(龍閣)이 함께 남아있다.

안내판에 나온 '비 앞의 돌로 만든 욕조'의 모습이다. 옛날엔 여기서 뜨거운 온천물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용각의 우측에는 동래온천 용각재건비가 세워져 있다.

동래온천 용각재건비는 기존의 일본신사식 용각을 고쳐 한국식 용각으로 복원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처음부터 이러한 용각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려준다.

비의 좌측 옆면
<삼국유사 권3 영취사(靈鷲寺)조>에 '신문왕(神文王) 3년(서기 685년)에 재상(宰相)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 온정(溫井)에 목욕하고 돌아갔다'는 기사(記事)가 문헌상의 최초기록이라 하겠으나 이곳에 온정수(溫井水)가 용출(湧出)한 것은 대개 1500년 전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산천조>에는 '온정(溫井)은 현의 북쪽(縣北) 리에 있는대 열도(熱度, 뜨거운 정도)가 계란을 익힐 수 있어 대병자(帶病者, 병자들의 무리)가 입욕하면 곧 고칠 수 있었다. 신라 때 왕이 여러번 이 곳에 행차하였으며 벽돌로 사우(四隅, 사방)을 가리고 수혈(水穴, 물구멍)에는 동주(桐柱, 오동나무 기둥)를 세웠든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하여 신라·고려·조선조를 통해서 이 온정수(溫井水)가 면면(綿綿)히 용출되고 왕·공·귀족(王公貴族)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약수(藥水)로 이용(利用)
비의 뒷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효능(効能, 효험을 나타내는 능력)을 신공(神功, 신의 공)으로 생각하고 수중지왕(水中之王)인 용왕신(龍王神)의 은고(恩顧)에 감사하는 뜻에서 이곳에 용각(龍閣)을 세워 향사(享祀)함이 약 천 년 전부터라고 하며 그 제의(祭儀)에는 처녀를 공희(供犧, 공양으로 바치는 희생)하였다한다. 연구세심(年久歲深, 오랜 세월)에 그 동안 용각의 존폐복활(存廢復活, 존재하고 폐하고 복원하고 존재함)이 20차(次)나 계속되다가 한일합병(韓日合倂, 1910) 이후에는 일인(日人, 일본인)들이 본래의 용각을 유폐하고 현위치에서 동북간(東北間, 동쪽과 북쪽 사이) 14미(米, 미터) 상거(相距, 거리가 떨어짐)한 지점에 삼합(三合) 규모의 일본신사식 용각을 남향으로 건립하고 36년간 탕신제(湯神祭)를 지내오다가 1945년 조국해방과 더불어 신사식 용각을 일부 개조하여 46년 동안 용각제(龍閣祭)를 모셔오다가 옛모습의 용각을 복원하여야한다는 온천동민(溫泉洞民)의 숙원이 간절하여 이에 사단법인(社團法人) 동래온천번영회(東萊溫泉繁榮會)의 발기로 남향의 신사식 용각을 헐고 금정산(金井山)을 배경으로 한 동향의 용각을 복원하여 명실상부한 용각제를 봉행(奉行)하고 아울러 부산시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결심하에 1990년 8월 발의(發議), 1991년 11월 20일 착공, 1992년 5월 준공을 보게 되엇다.

사단법인 동래온천번영회 이사장, 고문, 부이사장, 총무이사, 이사, 감사, 온천1동장 등 44명(관계인명 생략)

 

비의 우측 옆면
서기 1992년(임신) 6월 30일 삼가 세움(謹竪)

용각에서 온정용문을 바라본 모습. 이 모든 곳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보게 될 풍경이다. 신라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샘솟던 동래 온천은 다양한 책과 여러 기념물들로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휴식을 보내게 해주었고, 해주고 있고, 앞으로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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