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천박물관내에 위치한 영보단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들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부산사를 보여주는 복천박물관 내에 영보단비라는 작은 비석이 있다. 동래복천동고분군 야외전시관을 들렸다 복천박물관으로 가는 다리를 건널 때 비석 하나가 보이는데 그 비석이 바로 영보단비다.
2. 동래 사람들의 항일투쟁을 엿볼 수 있는 영보단비
동래복천동고분군 야외전시관을 들렸다 복천박물관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돌로 쌓은 벽에 영보단비 해설판이 붙어있고, 그 위에 영보단비가 있다.
영보단비(永報壇碑) 1915년 1909년 중앙정부에서 호적대장을 거두어들이려 하자 주민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마안산 기슭에 동래지역 13개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불태우고 이 위에 단을 쌓아서 영보단(永報壇)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모여 동래기영회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벌였으며 1915년 일제침탈로부터 우리의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여 영보단(永報壇)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
비석의 앞면 | |
永報壇 | 영보단 |
비석의 앞면에는 이 비석의 이름이자, 그 비석이 었었던 자리에 있었던 영보단(永報壇)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즉, 영보단(永報壇)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비석의 뒷면 | |
乙卯 四月 日 君民共立 | 을묘 사월 일 군민 공립 (을묘년 사월 ㅇ일 군민이 함께 세움) |
뒷면에는 건립 일자와 건립 주체가 적혀있는데, 여기서 이 비석이 을묘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동래라는 지명의 변천을 살펴보자.
신라 동래군(757~935) | |
고려 경상도 동래군(935~1018) | |
고려 경상진주도 동래현(1106~1171) | |
고려 진합주도 동래현(1171~1186) | |
고려 경상주도 동래현(1186~1204) | |
고려 상진안동도 동래현(1204~1219) | |
고려 경상진안도 동래현(1219~1314) | |
고려 경상도 동래현(1314~1392) | |
조선 경상도 동래현(1392~1407) | |
조선 경상좌도 동래현(1407~1519) | |
조선 경상도 동래현(1519~1547) | |
조선 경상도 동래도호부(1547~1592) | |
조선 경상좌도 동래현(1592~1593) | |
조선 경상도 동래현(1593~1595) | |
조선 경상좌도 동래현(1595~1596) | |
조선 경상도 동래현(1596~1599) | |
조선 경상도 동래부(1599~1895) | |
조선 동래부(1895~1896) | |
조선 경상도 동래부(1896~1897) | |
대한제국 경상도 동래부(1897~1910) | |
일본제국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1910~1914) | |
일본제국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1914~1945) | |
대한민국 경상남도 동래군(1945~1957) | |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1957~1963) | 대한민국 경상남도 동래군(1957~1973) (후에 기장군으로 변경) |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동래구(1963~1995) |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래구(1995~) |
그럼 '동래군민'이 이 비석을 세웠던 을묘년이 대략 언제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동래군이 존재했던 을묘년 |
775년 835년 895년 955년 1015년 1915년 |
이 중 일제에 항거했을 시기는 20세기 초중반이므로 이 비석은 1915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뒷면 | |
乙卯 四月 日 君民共立 | 을묘 사월 일 군민 공립 (1915년(을묘년) 4월 ㅇ일 군민이 함께 세움) |
사건의 발달은 이러하다.
1909년 3월 4일, 일제의 압박을 받던 대한제국은 형식상 <1909년 법률 제8호> 통칭 <민적법>을 공포하고, 4월 1일 시행했다.
이미 1896년 9월, 갑오개혁을 통해 세칙 <호구조사규칙>을 마련하고 시행했지만, 해당 법령은 부역과 징세에 편의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백성(인민)의 모든 가족적 신분 변동을 반영하진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고, 순수한 호적제도로 개혁하기 위해 <민적법>이 제정 및 실시되었다.
<민적법>이 실시되면서 거주단위로 편제되었던 전통적인 호적제도는 폐지되고 가(家)와 그 가(家)에 속한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신분등록제도가 갖추어졌다. 또 호적에서 호주의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와 직업을 기재하는 칸이 완전히 사라지고, 본적(本籍)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본적(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355)을 참고바란다.)
한민족 고유의 친족적 신분관계 | 일제식 친족적 신분관계 |
부모자녀/형제자매/조손 관계 등으로 파악 | 가(家)와 그 가(家)에 속한 개인간의 신분 관계로 파악 |
이 법은 사실상 법률상으로 개인의 신분관계를 명확히 하고 전국의 호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사실상 일제가 조선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은밀한 계산도 깔려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당시 대한제국 중앙정부가 각 지역의 호적대장을 거두어들이려 하자 동래군 주민들이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을 걱정해서 마안산 기슭(현 동래사적공원)에 동래지역 13개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불태우고 이 위에 영보단(永報壇)이라는 단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사람들이 모여 당시 동래부사 등이 가입한 동래 지역의 대표적인 모임이었던 내산기영회(현 동래기영회) 주도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1915년(을묘년) 4월에는 일제 침탈로부터 우리의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며 현재 남아있는 이 영보단비를 건립했다.
동래기영회 명칭 변천 | ||
기영계 (耆英稧, 1846~1876) |
내산기영회 (萊山耆英會, 1876~1963) |
재단법인 동래기영회 (財團法人 東萊耆英會, 1963~) |
이 영보단비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운 동래 지역 조선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그렇기에 동래 사람들의 항일투쟁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큰 비석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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