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인근의 3.1 운동 유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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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범어사 인근의 3.1 운동 유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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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중학교에 있는 삼일운동유공비는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937)을 참고하길 바란다.

 

범어사와 삼일운동유공비 위치 (출처 : 네이버지도)

범어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처음으로 크게 U자로 꺾게되는 모퉁이에 삼일운동유공비가 세워져 있다. 지나가다 그냥 본 기념물인데, 이번 기회에 한 번 찾아가봤다.

우측에는 성보박물관이 있고, 좌측에 이렇게 3.1 운동 유공비가 세워져 있다.

3.1운동 유공비

1919년 범어사 내 불교학교의 학생 41명이 전개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1919년 동래 범어사에는 보통학교 과정인 명정학교(明正學校, 1906.06~1919.03.31)와 고등보통학교 과정(3년)인 지방학림(地方學林, 1915.07.15~1919.03)이 있었다.
이곳 범어사의 3.1 운동은 그들 학생들이 주동이 되고 불교계 지도층이 배후의 비밀 참모가 되어 학생의거로서 일어났다.3월 18일 밤, 이금의, 김해관, 김재호, 박재삼, 신종기, 윤상은, 박영환 외 40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학생들은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의거를 시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행진을 하였다. 3월 19일 아침 윤상은, 허영호, 이영우, 황학동 등은 먼저 허영호가 작성한 '일사(一死, 한 번 죽음)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이 못하다'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비라=전단) 수백 매를 동래 시장통에서 군중들에게 미리 배부하고 이날 저녁에 있을 시위에 대비하였다.
3월 19일의 오후 5시경, 이근우, 양수근, 김영식, 오시권, 황만우 등을 비롯한 수십명의 양교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근방에서부터 시위를 시작하였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잇따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동래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오후 6시경 김해관, 김재호, 최응관을 비롯한 수십명의 다른 학생들도 동래시장에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잇달아 소리높여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침내 왜경의 무자비한 탄압과 주동인물의 검거가 진행되었다.
이때의 거사로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은 폐쇄되고, 그 후 중등 3년 과정의 불교전문학원이 설치되어 8.15광복 전까지 존속하였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금정중학교 내 범어사 학생의거 관련 3.1운동 유공자 42분의 공적을 기리고 이 고장출신 독립유공자와 공훈을 선양하며 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1995년 3월 1일 금정구에서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18일밤부터 3월 19일 늦은 저녁까지 범어사에 있던 불교학생들의 주도로 동래시장에서 동래경찰서까지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옆에 노천커피라는 오래된 카페가 있는 3.1운동 유공비가 보인다.

유공비 전면에서 우측에 적힌 글귀다.

충효와 신의는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의 근본이요, 호국(護國)과 제세(濟世, 세상사람들을 고난에서 건져줌)는 불가(佛家)의 대승사상이다. 같은 문화권에서 구의(舊誼, 옛 정)를 저버리고 이웃나라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아감은 문화민족의 정당한 도리가 아니라 서력동점(西力東漸, 서강이 동쪽을 점령함)의 영향을 받은 제국주의(帝國主義)릐 풍조라 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한많은 고종황제의 인산일(日, 장례일)을 기하여 주권과 자유를 되찾겠다는 독립선언서를 민족대표의이름으로 발표하게 되니 그 메아리 요원(燎原, 불벌)의 거화(炬火, 횃불)처럼 울려 퍼졌다. 우리 고장 범어사에서도 젊은 학도들이 제세의 사명을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悲願, 염원)을 불전에 맹세하며 나라와 자유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으로 3월 18일 동래시장통에서 독립선언문을 선포하고 만세소리를 높게 외치니 운집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복고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으니 그 정기(正氣, 바른 기품) 길이 이 땅에 빛나리라

 

유공자 명단은 다음과 같으며 이 명단 중에는 누락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확인하는데 절차가 있으므로 차후로 미룬다.
강성안 김법린(金法麟) 김봉환(金奉煥) 김상기(金相琦) 김상헌(金祥憲) 김상환(金相煥) 김영규(金永奎)
김영식(金永植) 김재호(金在浩) 김충념(金忠念) 김태준(金泰俊) 김한기(金漢琦) 김해관(金海管)
박영주(朴永珠)
박영환(朴永煥) 박정국(朴楨國) 박창두(朴昌斗)
배석이(裵石伊) 손군호(孫君浩)
손태연(孫泰淵)
신종기(申鍾驥)
안경한(安敬漢) 양수근(梁壽根)
양춘도(楊春到)
 양태문(梁泰汶) 오병준(吳柄俊)
오시권(吳時勸)
오점술(吳點述)
유석규(劉碩規) 윤상은(尹相殷)
이근우(李根雨)
이달실(李達實)
이영우(李永雨)
이재훈 정성언(鄭聖彦)
지용준(池龍俊) 차상명(車相明)
최응관(崔應觀) 허영호(許永鎬)
황만우(黃滿宇) 황학동(黃鶴東) 박재삼(朴在森)
금정구청은 그날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글을 비석에 새겨 이곳에 세운다.
1995년 2월 1일 금정구청장은 짓고
고천(古泉) 배재식(裵在植)은 쓰다.

실제로 이 항일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더 많았겠지만, 그 중 확인되고 연구되어 최종적으로 우선적으로 42분을 이 비에 모셨다. 이후 주도한 학생들과 일부 교사들이 잡혀가고, 학교들은 폐쇄되었는데,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명정학교는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현재 청룡초등학교와 금정중학교로, 범어사 지방학림은 범어사 승가대학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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