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일본사 속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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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일본사 속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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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인과 종교

2013년 일본인 종파 비율 통계(출처 : 제65회 일본통계연감)

일본인 중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크리스트교는 굉장히 소수고 대부분은 신토(신도)나 불교를 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안믿는 사람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2013년 일본인 종교의 믿음 여부 조사 (출처 : 통계수리연구소)

일본인들에게 종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조사를 해보면 항상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비율이 60~70%를 넘어선다. 그래서 일본인을 논할 때 항상 무종교성이 지적되곤 한다. 그럼 과연 많은 일본인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걸까? 
 

2016년 일본인구와 종교신자수 조사 (출처 : 일본문화청)

일본 문화청에서  발간한 2016년 종교 연감에 따르면 전체 종교의 신토(신도) 숫자가 인구의 1.5배가 넘는다는 결과도 있는데, 아니 어떻게 종교인이 실제 인구보다 많을 수 있을까 싶지 않은가? 해당 조사에 따르면 201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신토계(신도계) 종교 단체의 신자 수는 8474만 명, 불교계 단체는 신자수가 8770만 명으로 총 1억 7244만명이었다. 여기에 크리스트교계나 기타 종교의 신자수를 더하면 총 종교 신자수는 1억 8223만명으로 일본의 당시 실제 인구 1억 2600만명을 40%나 웃돌았다... 종교를 안믿는 비율이 6~70%를 웃돌면서도 총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1.5배나 되는 인원이 종교의 신토(신도)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구보다 신자수가 늘어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종교를 믿는 것(信教)에 대한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을 존중해 종교단체에 대한 행저의 관여를 최소화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제20조
신교(信教)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이를 보장한다. 어떠한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또는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② 누구도 종교상의 행위, 축전(祝典), 의식 또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강제되지 않는다.

③ 국가 및 기관은 종교 교육 및 기타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된다.

- <일본국헌법 제20조>

이는 '신자(信者, 신도)'가 무엇인지를 법적으로 명확히 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 단체나 개인이 '신자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고 스스로 정의해 자발적인 협력으로 조사에 임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인의 종교와 관련된 입장이다. 일본에서는 토착 원시종교를 바탕으로 한 신토(神道)와 6세기경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신앙이 어우러져 메이지 정부가 신불분리령을 내리기까지 1천년 넘게 두 종교가 조금씩 섞인 신불습합(神仏習合)의 시대가 이어졌다. 신토에도 불교에도 뚜렷한 입신(入信) 의식은 없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자각이 없는 채 생활 양식이나 계절 행사로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종교 행사가 뿌리내리게 된다.
이에 많은 일본인들은 크리스마스 행사를 즐긴 일주일 뒤 섣달 그믐날에는 절에서 제야의 종을 치고 새해가 밝으면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것에 위화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올리지만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한다던지, 자택에 불단(仏壇)과 카미다나(神棚, 집에 신을 모셔놓은 작은 단)을 모두 갖춘다던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이런 조사에 임하게 되면,

우리 집안은 불교 집안인데, 신사 참배도 하니까, 불교, 신토 둘 다 믿는다고 말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해 불교, 신토 모두 믿는다고 설문지에 체크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2018년 7월 기준으로, 전국의 신사(神社)는 총 8만 1158개, 사원(寺院)은 7만 7256개로, 이는 일본 대형 편의점 3사(세븐일레븐, 훼미리마트, 로손)의 전국 점포 수 5만 1366개보다 많으므로, 신사와 절은 편의점보다 더 가까이 있는 셈이 된다.
 

1-1. 일본사 속의 불교

일본 불교는 대부분 대승불교다.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가마쿠라 불교(鎌倉仏教)가 오늘날의 초석이 되고 있으며, 일본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도수도 많아 일본 불교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불교는 6세기 중엽에 대륙의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래되며 지배층의 종교로 자리잡았다.

나라 시대에는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 불리던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実宗),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倶舎宗), 율종(律宗), 화엄종(華厳宗) 등이 널리 퍼졌다.

헤이안 시대에는 견당사와 함께 당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우는 승려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사이쵸(最澄, ?~822)는 귀국 후 법화경(法華経)과 밀교(密教)를 중심으로 한 천태종(天台宗)을 열었고 쿠카이(空海, 774~835)는 태양을 신격화하여 생겨난 대일여래(大日如来)를 우주의 중심으로 설파하는 밀교를 배우고 귀국 후 진언종(真言宗)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쯤 말법(석가모니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진 암흑 시대)에 들어갔다고 보고 여러 움직임들이 나타났는데, 이중 이 세상에 절망하고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며 아미타여래에 매달리는 정토사상이 널리 퍼지며, 귀족에서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어 이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찰이 전국 규모로 건립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실제로 전란과 역병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졌고, 사람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弥陀仏)'이라는 염불을 계속 외침으로써 아미타여래(阿弥陀如来)에게 구제되어 극락정토(極楽浄土)에서 왕생할 수 있다는 호렌(法然, 1133~1212)의 정토종(浄土宗)이나, 남존여비나 여인부정(女人不浄, 여성은 깨끗하지 않다는 사상)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남녀평등이나 여인왕생을 설파하고, 죄 많은 자신들이기 때문에 여성이나 남성이나 있는 그대로의 생활방식 그대로 정토왕생할 수 있다는 악인정기(悪人正機)를 설파한 신란(親鸞, 1173~1263)의 정토진종(浄土真宗)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후에 니치렌(日蓮, 1222~1282)은 말법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무묘법연화경'(법화경)이라고 날마다 제목을 외움으로써 보살에 이를 수 있고 안녕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여 일련종(日蓮宗)을 열었다.
이들 방향성이 다른 두 사조는 각각 현대사회로까지 이어지는 큰 조류를 형성했고 지금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 중국에서 선종(禅宗)이 전해지면서 임제종(臨済宗)과 조동종(曹洞宗), 황벽종(黄檗宗)과 같은 선종적인 흐름이 생겨났다.

일본불교의 종파

앞서 말했지만 불교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형식으로 토착 종교 신토(神道)에 스며들었는데, 이에 신토의 800만신은 사실 부처의 화신(化身, 아바타)라는 본지수적(本地垂迹)과 같은 사상이 이때 등장했다.
 
에도 시대에는 테라우케 제도(寺請制度)로 일본 백성의 자율성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후에 메이지 시대 때 신불분리령이 떨어지며 이에 대한 분노로 불도와 석가상을 부수거나 훼손하는 폐불훼석(廃仏毀釈)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 불교는 전체적으로 보면 계율이 거의 없고 타 종파와의 표면적인 논쟁도 적다. 또한 법명은 본래는 불제자로 살 것을 맹세한 사람에게 승려가 주는 불제자로서의 이름으로 생전에 받는 것이 본래의 관습이지만 많은 일본인의 경우는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계명(또는 법명)을 얻음으로써 불문(仏門)에 들어가게 된다.
 

1-2. 일본사 속의 크리스트교

1-2-1. 일본사 속의 크리스트교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일본에 처음 크리스트교를 전파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료에 의해 확실히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전국시대가 한창인 1549년 예수회(Societas Iesu, 1540~)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에 의한 포교다.처음에는 거의 자비에르를 필두로한 예수회 선교사들만으로 포교가 개시되었다고 한다.자비에르들은 처음 가고시마에 들어가 포교를 시작했다.

예수회(좌측)와 프란치스코회(우측)

그 후,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1209~) 등도 일본 방문해, 포교를 실시했다.이들은 가톨릭이 대부분이어서 야소교(耶蘇教)나 천주교(天主教)로 불렸다.당시 신흥의 가르침이었던 개신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세력 확장을 일삼던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들은 최신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이들 유럽인들을 기본적으로 환영했고 크리스트교도 비교적 원활하게 퍼져나갔다. 다이묘 중에는 새로운 사상인 크리스트교에 이끌려 입신한 이들도 있어 이들은 키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로 불렸다.

산 펠리페호 사건으로 처형당한 일본 26성인(日本二十六聖人)

그러나 에스파냐 배 산 펠리페호에서 내린 선원이 에스파냐는 선교사를 먼저 파견해 주민들을 길들인 뒤 군대를 보내 점령할 것이라는 말을 해서 다이묘들의 공분을 산 펠리페호 사건(San Felipe incident, 1596) 등 여러 사건을 계기로 권력자들로부터 기피당했고, 이윽고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1587년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이 내려지면서 크리스트교는 금지되었다.
 
이후 에도 시대에 크리스트교가 잠시 해금되었으나, 곧 크리스트교 포교 금지령을 내린 데다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펴면서 선교사뿐 아니라 일반 외국인도 입국할 수 없게 되면서 일본 내 크리스트교는 쇠퇴하였다. 당시 일본인 크리스트교인들은 크리스트교를 포기하거나 숨어서 믿는 카쿠레 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 되어 은밀히 신앙을 전파해 내려갔다. 그러나 우라카미 1번 쿠즈레(浦上一番崩れ, 1790), 우라카미 2번 쿠즈레(浦上二番崩れ, 1842)와 같이 카쿠레 키리시탄에 대한 탄압은 계속 되었다.

카쿠레 키리시탄 탄압의 역사
1657 코오리 쿠즈레(郡崩れ)
1660 분고쿠 쿠즈레(豊後崩れ)
1661 노우비쿠 쿠즈레(濃尾崩れ)
1790 우라카미 1번 쿠즈레(浦上一番崩れ)
1805 아마쿠사 쿠즈레(天草崩れ)
1842 우라카미 2번 쿠즈레(浦上二番崩れ)
1856 우라카미 3번 쿠즈레(浦上三番崩れ)
1867 우라카미 4번 쿠즈레(浦上四番崩れ)
1868 고토우 쿠즈레(五島崩れ)

에도 막부는 유럽 국가 중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만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무역을 계속했다. 네덜란드는 막부의 크리스트교 금교 정책을 존중했기 때문에 막부 말기까지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확산되지는 않았다.

제3찰

하나  키리시탄 사종문(切支丹邪宗門, 크리스트교 사악한 종파)의 의(儀)는 굳게 금지하거니와 약간의 의심스러움이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줄기의 역소(役所, 관청)에 신청해 고한다면 포상을 내릴 것

케이오우(慶應) 4년 3월(1868년 3월) 태정관

- <오방의 게시><제3찰>

메이지 정부도 <오방의 게시(五榜の掲示, 1868.04)> 제3찰에서 볼 수 있듯이 당초 이전의 크리스트교 금교 정책을 계승했지만, 1873년, 서양 국가들의 항의와 비난으로 키리시탄 금제에 대항 항목이 삭제되고, 몇 가지 제한을 두고 크리스트교 포교가 용인되었다. 그렇게 서양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가 일본에 들어 와서 교회(教会)를 열었고, 카쿠레 키리시탄도 이제 공개적으로 신앙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2-1. 크리스트교와 국가주의의 충돌

일본 육군 장병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있다. 국가신토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1889년 2월 발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종교를 믿는 자유가 명문화되었으나, 정부는 '신토(神道)는 종교가 아니라(신토 비종교설), 국가의 제사(곧, 국교)이며, 신민에게 의무가 있다'며 국가신토(国家神道)를 창시했다. 이렇게 근대 천황제에 입각한 국가주의와 국수주의가 침투함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내지와 외지에서 고쿄를 향해 고개 숙여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遥拝)가 일본 국민과 식민지에 의무화되면서 크리스트교 단체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884년 8월에는 교파신토(教派神道)와 불교가 관장 아래에 각 교파나 종파를 조직한 하게 했는데, 크리스트교에 대해서는 종교행정상 '신불도 이외의 종교'로 취급되었을 뿐 법제도 밖에 놓여 있었다. 이는 금교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전통 종교와 그렇지 않은 크리스트교의 취급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서양 국가들과의 조약 개정 협상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등을 15도 정도 굽혀 가볍게 인사하는 회석(会釈), 등을 30도 정도 굽혀 공경의 뜻으로 인사하는 경례(敬礼), 등을 45~90도로 굽혀 경례보다 더 공경의 의미를 표현하며 인사하는 최경례(最敬礼)

1890년, 제일고등중악교의 교원이 된 우치무라 칸조는 1891년 1월에 제일고등중학교 강당에서 거행된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덴노 신필(晨筆, 복사본) 어명(御名, 임금의 이름)에 대해 최경례(最敬礼)를 하지 않아 많은 교사나 학생들에게 비난받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일이 벌어졌다(우치무라 칸조 불경사건(内村鑑三不敬事件, 1891)). 이 때 그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크리스트교 신자라고 모욕하며 크리스트교에 대한 비난도 엄청나게 거세지기 시작한다.

우치무라 칸조

그러나 이후에 외국과의 교섭에서 좋은 결과를 잘 이끌기 위해 이에 정부는 1899년 5월 크리스트교 선교를 정식 공인할 것임을 밝혔는데, 이번에는 '예수교와 동렬로 취급된다'며 불교계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크리스트교는 법적 근거를 가진 교단을 창설하지 못하고 크리스트교 사상가였던 우치무라 칸조(内村 鑑三, 1861~1930)에 의한 무교회주의 제창 등 일본 특유의 크리스트교 신앙의 형태가 생겨났다.
 
1940년에 이르러 교파신토 대상을 규정한 <종교단체법(宗教団体法, 1940~1945)>에서 처음으로 크리스트교를 기독교(基督教)라고 정하면서 기독교의 교단도 그 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가톨릭의 일본천주공교교단(日本天主公教教団)과 개신교의 일본기독교교단(日本基督教団)이 일본 문부대신으로부터 인가받게 된다. 이렇게 현재 일본에서도 종교를 '신토, 불교, 크리스트교'와 '그 이외 종교'로 나눠부르며 크리스트교가 정식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다.
 

1-3. 신토(신도, 神道)

1-3-1. 신도란?

신토

신토(神道) 혹은 신도(神道)일본 민족의 신관념에 기초한 토착 신앙이자 전통 종교를 말한다. 보통 종교의 뒤에는 '교(教)'라고 칭하기 때문에 신도교(神道教)라고 칭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 종교명은 신토(神道)라고 써야 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민속신앙, 자연신앙, 조령신앙(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신앙)을 기반으로 고대 호족층에 의한 중앙 및 지방의 정치체제와 관련해 서서히 성립되었으며, 일본 국가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 입장에서는 끝까지 가져가야 할 종교다.

신도
(
神道)
황실신도(皇室神道)
(=궁정신도(宮廷神道))
고쿄(皇居)와 그 안의 큐츄산덴(宮中三殿)을 중심으로 하는 황실의 신도
신사신도(神社神道)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우지코(氏子, 씨족), 숭경자(崇敬者) 등에 의해 조직된 행해지는 제사의례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
교파신도(教派神道) 신도를 선교하는 교파로 이루어진 신도
국가신도(国家神道) 근대에 국가의 지원아래 행해진 모든 형태의 신도
고신도(古神道)
(=원시신도(原始神道))
일본에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존재했던 신도

처음에는 단순히 고대 일본인들의 물활론(物活論)적 믿음에 바탕을 둔 신앙체계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종교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고대 율령제가 확립되면서 진기(神祇, 신기)라는 개념이 제도화되었는데, 여기서 신(神)은 하늘의 신(天神, 天津神)을 말하며 기(祇)는 땅으로 내려온 땅의 신(神祇, 国津神)을 말한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을 합쳐 천신지기(天神地祇)라고 불렀는데, 이를 축약해 신기(神祇)라고 부르게 된다.
 
이러한 신도는 13세기 말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민족성에 대한 탐구가 커지면서 부흥하게 된다.
 

1-3-2. 카미(神)

신도에서는 기상, 지리, 지형 등의 자연 현상에서 시작해 모든 사실과 현상에 카미(神, 신)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관념을 카미 신앙이라고 하는데 흔히 '팔백만신'이라고도 부르는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로 나타난다. 야오요로즈노카미는 신도에서의 신관념으로, 지극히 많은 신들을 말한다.

카미(神)란 진귀하고 심상치 않게 뛰어난 덕을 지닌 두려운 존재이며, 악하고 기괴한 것이라 할지라도 뛰어나고 두려운 것이면 무엇이든 카미이다.

-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 宣長, 1730~1801)

이들은 이념적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연현상이 은혜와 함께 재해도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미도 거친 혼(荒魂)과 화목한 혼(和魂)의 양면을 가지고 인간에게 선악 쌍방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여겨진다. 즉, 카미는 좋은 수호신이면서도 무서운 공포의 신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신도에서의 카미 종류
자연신(自然神) 문화신(文化神)
태양신(太陽神), 월신(月神), 풍신(風神), 뇌신(雷神), 산신(山神), 해신(海神), 동물신(動物神) 등 거주지신(屋敷神), 씨신(氏神), 토산신(産土神), 역병신(疫病神), 밭신(田の神), 어로신(漁労神), 군신(軍神), 부뚜막신(竈神), 사람신(人神) 등

실제로 신도에서는 사람도 죽어서 카미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신화에 묘사되는 일족의 조상(조령(祖霊)신앙)이나 사회적으로 갑자기 등장한 대단한 인물, 지역사회에 공헌한 인물, 국민이나 나라를 위해 일한 인물, 국가에 반역해 전란을 일으킨 인물, 불우한 만년을 보내 사후 원한을 품은 령(怨霊)이 된 인물(어령(御霊)신앙) 등도 신으로서 신사에 모셔져 많은 사람들의 존중과 공경을 모으기도 한다.
 
원래 카미의 모습은 부유하는 영적인 힘(霊力)으로, 사물에 기대거나 떠나거나 하는 혼(魂)과 다르게 비인격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신상(神像)이 제작되며 점차 카미(神)는 가시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3-2. 신도의 특징

 사후 생명의 운명에 대한 관념이 다른 종교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삶을 중시하는데, 정명정직(浄明正直)이라고 해서 밝고 깨끗하며 바르고 곧게 살 것을 덕목으로 한다. 그리고 개인 윤리에 관한 교의가 부재하다는 특징도 있는데 이 말은 곧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며 선과 악은 공존한다고 본다.

이세신궁에서의 해넘이액막이(年越大祓)

하라에(祓え) 혹은 하라이(祓い)츠미(罪, 허물, 죄), 케가레(穢れ, 부정하고 더러운 것), 재액(災厄)과 같이 깨끗하지 않은 것을 몸과 마음에서 제거하기 위한 신도의 종교행위다. 이는 인간의 잘못된 행위는 외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하라이(祓い)와 같은 정화 의례를 통해 깨끗한 본성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상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외에 독특한 개념이 있는데, 바로 하레(ハレ)와 케(ケ), 그리고 케가레(ケガレ)다.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케(ケ,褻)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이 케가레(ケガレ, 褻枯れ)이며, 이 케가레는 하레(ハレ)라는 제사를 통해 다시 일상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순환 굴레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지금도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간단히만 설명하겠다.
 
신사의 본전(本殿)을 조영하거나 수리할 때에 신체(神体)를 종전과 다른 본전으로 옮기는 천궁(遷宮, 센구)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천궁이 진행될 땐 보통 제례(祭礼)를 같이 한다. 천궁은 보통 예정되로 진행되는 정천궁(正遷宮)과 예정 외에 본전을 새로 짓는 임시천궁(臨時遷宮)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그 밖에 임시천궁과 비슷하지만 새로 지은 본전이 아닌 임시 건물(仮殿)로 잠시 옮기는 카리도노 천궁(仮殿遷宮)도 있다.

정천궁(正遷宮) 예정대로 본전을 새로 짓는 천궁
카리도노 천궁(仮殿遷宮) 천재, 인재로 인해 예정 밖의 본전의 수선, 재건축이 필요할 경우 임시 건물(仮殿)로 옮기는 천궁
임시천궁(臨時遷宮) 예정 외에 본전을 새로 짓는 천궁
천좌(遷座) 본전을 조영, 수리하지 않고 신체를 옮기는 것

 정천궁 중에서 정기적으로 정해진 해(式年)에 하는 천궁을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고 하는데, 이세신궁 식년천궁(伊勢神宮 式年遷宮)이 가장 유명하다. 아래는 이세신궁 식년천궁 과정을 묘사한 영상이니 참고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_ttXjy_IZ6w 

 

1-3-3. 근대 국가신도(国家神道)로의 발전

신기사무과(神祇事務科)
(1868.02.10~1868.02.25)
신기사무국(神祇事務局)
(1868.02.25~1868.06.11)
신기관(神祇官)
(1868.06.11~1871.09.22)
신기성(神祇省)
(1871.09.22~1872.04.21)

대정봉환(1867.11) 후 1868년 1월,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에 의해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대 율령제 시대처럼 신기(神祇)를 제도화하기 위해 신기사무과(神祇事務科)를 설치하고 곧 신기사무국(神祇事務局)으로 개칭한다. 같은 해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 1868)>을 내려 신도와 불교를 분리시켰으며, 다시 신기사무국(神祇事務局)을 신기관(神祇官)으로 삼았다. 이렇게 제정일치 제도가 부활하고 모든 신사(神社)와 그 주인인 신주(神主)를 덴노 아래에 부속시켰다.
 
또한 덴노의 권위 강화를 위해 신격화 과정과 국가신도의 발전이 병행된다. 이로써 최고의 정치권력을 가진 살아 있는 신으로서의 덴노 즉, 사람으로 나타난 신인 현인신(現人神)이 된다. 그 외 제교(祭敎) 분리로 신도를 국가적 제사 체계로 재확립
했으며 신사 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3-4.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보신 전쟁(戊辰戦争, 1868.01~1869.06) 중일 때였다.
1868년 6월 29일, <태정관포고>로 교토(京都)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전사자를 모실 것을 명했다. 그 해 7월 21일,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 熾仁親王)이 전사한 조정군 장교들의 초혼제(招魂祭, 순직한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에도성 니시노마루히로마(西丸広間)에서 행했으며, 다음달인 8월 27일부터 28일까지 교토의 카와히가시 조련장(河東操錬場)에서 신기관(神祇官)의 주최로 전몰자와 순직자를 위령하는 제전(祭典)이 열렸다.

도쿄쇼우콘샤. 이는 후에 야스쿠니 신사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막말부터 유신기의 전몰자를 위령, 현창(顕彰, 밝혀 알리는 것)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이를 배경으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 1825~1869)는 도쿄에 쇼우콘샤(招魂社)를 창건할 것을 건의하자 메이지 덴노는 1869년 7월에 쇼우콘샤 창건을 지시했고, 8월에는 이츠츠지 야스나카(五辻 安仲, 1845~1906)가 칙사로 파견되어 당시 군무관지사(軍務官知事)였던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小松宮 彰仁親王, 1846~1903)을 제사의 우두머리(祭主)로 보신 전쟁 당시 전몰자 3,588주를 합사해 제를 지냈으며, 도쿄 쿠단시타(九段上)에 도쿄쇼우콘사(東京招魂社)로 창건된다. 이후 본전(本殿)은 1872년에 완성된다.
 
1871년, 신사의 등급을 나누는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가 시행된다.

<근대사격제도>에 따른 관국폐사(官幣社)의 격
관폐대사(官幣大社)  
국폐대사(国幣大社)  
관폐중사(官幣中社)  
국폐중사(国幣中社)  
관폐소사(官幣小社)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
국폐소사(国幣小社)  

신사의 등급은 관국폐사(幣社)가 가장 높았는데, 이건 조정에서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쿄쇼우콘사는 군(軍)의 관할이었기에 일반 신사와는 다르게 불안정한 요소가 존재했다. 그래서 군은 이 신사를 정규 신사로 고쳐달라고 주창했고, 고, 이에 메이지 덴노는 1879년, 도쿄쇼우콘사(東京招魂社)를 관폐소사(官幣小社)에 준하는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로 격을 바꿔줬으며, 신사의 이름 또한 '나라(国)를 태평하게(靖) 하는 신사'라는 뜻에서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로 바꾸게 된다.
 
창사 이후 예대제(例大祭, 신사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큰 제사)에는 덴노로부터의 칙사가 파견되어 봉폐가 이루어졌고, 또 새로운 신령을 합사할 때에도 칙사를 파견했으며 덴노나 황후의 행행계(行幸啓, 덴노와 황후의 외출 방문), 황족의 참배나 대신 참배(代参)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등 황실과 국가로부터 신하를 모시는 신사로서는 이례적인 대우를 받아, 합사제에 있어서는 공무원에게 휴일 수여하는 예도 있었다. 또한 제주(祭主)로는 육해군의 무관이 근무하게 하기도 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가 군국주의를 보급하는 역할이 되어갔다는 증거다.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
전쟁/사건명

원 명칭은 야스쿠니 신사에 적힌 이름이고, 괄호 안의 명칭이 통상적인 사건 이름임
합사자 수(주수) 비고
메이지 유신
(보신전쟁)
7751주 메이지 신정부군 측만 모심
세이난 전쟁 6971주 메이지 신정부군 측만 모심
타이완 정벌
(타이완 출병)
1130주  
강화도 사건
(강화도 조약)
2주  
임오사변
(임오군란)
14주  
경성사변
(갑신정변)
6주  
일청전쟁
(청일전쟁)
13619주  
북청사변
(의화단사건)
1256주  
일로전쟁
(러일전쟁)
8,8429주  
제1차 세계대전 4850주  
청산리전투 11주  
사이난 사건
(5.3 참변)
185주  
무샤 사건
(우서 사건)
   
나카무라 대위 사건 19주  
만주사변 17176주  
지나사변
(중일전쟁)
191250주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
2133915주 타이완 징병군 전사자 26000명, 조선인 징병군 전사자 21000명도 모셔져 있음
총합 2466584주  

당시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조선인 징병 사망자 총 47000명을 포함해 총 246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모셔져 있다....
이를 통해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국가 종교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 아래 선별해서 지내는 제사를 둘러싼 문제로 타국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의 유슈칸

유슈칸(遊就館, 유취관)은 1882년에 개관한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설립된 모시는 신(祭神)들의 연고와 관련된 자료를 모은 보물관(宝物館)이다. 설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박물관이 아닌 보물관으로 <박물관법(博物館法)>을 따르지 않는다! 막말 유신기 동란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전몰자, 순국자를 제신(祭神)으로 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시설로 전몰자와 군사관련 자료를 보관,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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