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오키나와현 근대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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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오키나와현 근대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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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과 오키나와(오키나와현의 근대사)

류큐 왕국
(1429~1872)
일본제국 미합중국 일본국
류큐번
(1872~1879)
오키나와현
(1879~1945)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
(1945~1950)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
(1950~1972)
오키나와현
(1972~)

근대에 들어와, 1853년 미국의 매슈 C.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가 이끈 흑선함대가 류큐 왕국에 내항해 슈리성(首里城)을 방문했다. 이후 1854년 <류미수호조약(琉米修好条約, 1854.07)>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수호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한다.

 

한편, 일본 본토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개국함에 따라 1871년 9월에 <청일수호조약(일청수호조약, 日清修好条規, 1871.09)>이 체결되어 일본과 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된다.

오키나와의 고코쿠지(護国寺)에 있는 미야코지마 도민 조난 사건의 피해자를 모신 묘

그러나 얼마 뒤인 1871년 12월, 류큐의 슈리에 조공을 납부하고 돌아가던 다른 류큐 왕국의 섬주민이 조난당해 타이완 섬에 도착했는데 그 지역 원주민이 그들을 살해한 미야코지마 도민 조난 사건(宮古島島民遭難事件, 1871.12.19)이 일어났고, 메이지 정부는 외교 대처를 위해 중앙집권국가 확립을 서둘러 1872년에 류큐 번(琉球藩)을 설치하고 류큐국왕 쇼타이왕(尚泰王, 1843~1901)을 류큐번왕(琉球藩王)으로 봉하고 도쿄에 번저(藩邸, 번주의 저택)을 두었다.

타이완 출병으로 류큐왕국민의 복수(?)를 한 일본

이에 분노한 일본은 제3대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타네오미(副島 種臣, 1828~1905)을 보내 청과 교섭을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1874년 5월에 타이완 출병(台湾出兵, 1874.05~12)을 감행해 일본의 항객에게 위협을 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류큐 왕국이 더 이상 청의 조공국이 아니고 일본제국의 것이라고 못박아버린다. 그렇게 1879년 3월, 메이지 정부는 류큐번을 폐하고 오키나와현(沖縄県)을 설치했으며, 쇼타이왕은 도쿄의 번저로 거처를 옮겨 화족(華族, 귀족층)이 된다. 이렇게 메이지 시대 초기에 류큐 왕국이 일본에 편입되는 일련의 과정을 류큐 처분(琉球処分)이라고 한다.

슈리성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오키나와현은 오키나와전(沖縄戦, 1945.03~1945.09)의 전장이 되었다. 참고로 이 오키나와전은 일본 본토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 중 하나였다.

미군은 4월 1일 아침에 오키나와 본도(沖縄本島)의 요미탄손(読谷村) 해안에 상륙, 순식간에 섬의 북쪽 절반을 제압했고 일본제국군은 미군의 총공격을 받아 남부로 내몰렸고 총사령부가 있던 슈리성도 불에 타 6월 23일 오키나와 수비군 최고지휘관 우시지마 미츠루(牛島 満, 1887~1945) 중장 등이 마부니(摩文仁)에서 자결함으로써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됐다. 약 3개월에 걸친 격전으로 현민(県民)의 25%가 희생되고 그 땅도 황폐해졌다. 현재 마부니는 오키나와 전적 국정공원(沖縄戦跡国定公園)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6월 23일을 위령의 날(慰霊の日)로 정해 오키나와 현의 휴일이 되었다.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쓰였던 미합중국의 성조기

오키나와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SCAPIN-677 지령에 의해 난세이 제도(南西諸島)는 미군정에 속하게 되고, 일본의 시정권은 정지, 행정실제였던 내무성지사 하로서의 오키나와현은 일단 소멸되었다. 그렇게 미합중국에 의한 오키나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류규열도 고등판무관 인장

미군통치 아래에 기지 건설을 위해 취락이나 농지를 대규모로 접수하고 우측통행 도로를 정비했으며, 통화는 B엔(B円)을 사용하다가 미국 달러를 사용하게 했고, 일본 본토로의 건너가기 위해선 여권이 필요하게 되는 등 미국식 방식으로 전후 부흥이 진행되어 갔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1952년에 GHQ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이 주권 회복한 후에도 오키나와는 계속 미군의 통치하에 놓였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기 전인 1950년엔 미군정이 종료되고, 미국 주도로 새롭게 류큐 정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류큐 통치와 부흥에 나선다.

 

1950년대부터 이르러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연달아 발발해 오키나와는 미군의 전선 보급기지로서 중요도를 더해 수많은 미군이 주둔하고, B-52 등의 전략폭격기와 고엽제와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가 다수 배치되어 베트남으로부터는 악마의 섬으로 여겨졌다. 경제는 기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반면, 당시 달러고 엔저(ドル高円安)의 고정환율제의 영향도 있어 물가는 저렴하고 생활은 안정되어 인구는 종전 직후의 약 50만명에서 일본 본토로 반환될 때까지 불과 27년간 약 100만명으로 배증했다.

류큐의 본토 복귀를 주장하던 섬 전체 투쟁

그러나 미군에 의한 강권적이고 차별적인 시정에 도민은 강한 반감을 품고 본토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기지 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어 갔는데, 이를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고 한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만남

1971년 6월 사토 에이사쿠(佐藤 栄作, 1901~1975) 일본 총리와 리처드 M.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 미합중국 대통령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 협정(沖縄返還協定)>이 체결되었고, 이듬해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시정권이 반환되고 일본국 오키나와 현이 부활했다. 그럼에도 일본 내 미군 시설의 70%가 위치할 정도로 미국은 이 곳을 아직도 중요한 곳이라 여기고 있다. 지금은 미군 통치 시대부터 계속된 기지 문제나 불발탄 문제, 미일 지위 협정의 문제는 현의 주요한 정치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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