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국 일본의 50년 전쟁
1894.07~1895.11 | 청일전쟁(일청전쟁(日清戦争)) |
1904.02~1905.09 | 러일전쟁(일로전쟁(日露戦争)) |
1914.07~1918.11 |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戦) |
1918.08~1922.10 |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
1931.09~1932.02 | 만주사변(満洲事変) |
1937.07~1945.08 | 중일전쟁(일중전쟁(日中戦争)) |
1941.12~1945.08 |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 |
일본제국은 식민지 개척을 포함한 영토 확장과 유지를 위해 약 50년간의 준전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걸까?
2. 내셔널리즘의 횡행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국가(nation)라는 이념을 강조하고 그 통일, 독립, 발전을 꾀하는 정치사상이나 운동을 말한다. 여기서 네이션(nation)은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뜻이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nation [네이션] : 국가 1. 나라(country), 특히 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부, 언어, 전통 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규모 집단 2. 동일한 언어, 전통, 역사를 공유하지만 모두가 한 지역에 살지는 않을 수 있는 동일한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 |
일반적인 국가라는 개념보다 '민족적 국민의 공동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관념인 '혈연 문화적'인 민족이 아니고, 국가의 구성원 간의 상호공유적인 공동체적 관점에서의 민족을 말한다. 이러한 '민족적 국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사상이나 운동이 내셔널리즘이다.
nationalism [내셔널리즘] 1. 국가(nation) 전체에 공통된 정신 혹은 열망 2. 애국심(patriotism, 조국에 대한 헌신과 충성) 3. 맹목적 애국심(chauvinism, 과한 애국심) 4. 국민적(national) 발전 혹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열망 5. 타국의 이익이나 모든 국가의 공동의 이익과 별개로서의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는 정책 혹은 원칙(doctrine) 6. 국가(nation) 특유의 관용어(idiom)나 특성(tra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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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 내셔널리즘, 국가주의, 민족주의 |
중국어 | 민족주의(民族主義), 국민주의(國民主義), 국족주의(国族主义), 국수주의(国粹主义) |
일본어 |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 국가주의(国家主義), 국민주의(国民主義), 국수주의(国粋主義), 국익주의(国益主義), 민족주의(民族主義) |
이러한 내셔널리즘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근대화의 동인이 된다고 생각한 일본은 교육과 종교(신도)를 통한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펼쳐나갔는데, 이를 위해 서양을 많이 배웠고, 그 과정에서 체화된 서양 숭배는 아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감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조선을 둘러싼 청과의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청일전쟁이 구심점이 되어 많은 일본인들은 내셔널리스트로 진화하게 된다.
3. 메이지 정부의 대외정책
3-1. 서양에 대해
외교에서는 1871년 11월 12일 에도 막부 때 서양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의 예비 교섭과 서양 선진국의 문물 조사를 목적으로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1825~1883)를 전권대사,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 1830~1878)와 키도 타카요시(木戸 孝允, 1833~1877)를 전권부사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이와쿠라 사절단)을 거양 여러 나라에 파견했다. 사절단의 목적의 하나였던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메이지 정부는 서양 문명의 실태를 언급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3-2. 일본 열도 내 영토 확장
일본은 영토 확장도 꾀했는데, 일단 일본 열도 일대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갔다. 1869년 홋카이도를 시작으로, 오가사와라 제도(1876), 오키나와(1879)를 일본으로 편입시켰다. 참고로 혼슈 동남쪽, 오가사와라 제도 서북쪽의 이즈 제도(伊豆諸島)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의 영토였다.
3-3. 조선에 대해 - 정한론(征韓論)의 발전
그러고 나자 시선이 대륙으로 쏠리게 되었는데, 우선 바로 옆의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중요 과제로 떠올랐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조선에 외교사절을 보냈으나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취했고 흥선대원군 정부는 아무런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 일본측에서는 몇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국서의 형식이 어긋난다거나 조선이 하사한 도장을 쓰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계속 거절한다(서계 문제). <청일수호조약(1871)>을 근거로 한 메이지 정부의 조선을 압박했지만 개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87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른바 정한론 논쟁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서방 국가들의 조선 진출을 경계해 사이고 타카모리(西郷 隆盛, 1828~1877)나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 退助, 1837~1919) 등은 조선의 개국을 외교보다 군사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경적인 <정한론>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결국 1873년 8월, 국무회의에서 사이고 타카모리의 조선 파견 사절 임명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에 의해 파견 중지 조치가 내려지며 사실상 정한론자들은 하야하게 된다(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정한론 반대 세력들이 차례차례 물러났고, 이에 포함(砲艦) 외교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1876)> 체결해 조선을 개항시키게 된다.
4. 제국주의로 기울어지다
4-1. 청일전쟁(1894.07~1895.11)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1882.07)와 갑신정변(1884)를 계기로 일본과 청의 대립이 본격화되었고, 동학 농민 혁명(1894.01~1895.03)을 계기로 1894년 7월에 청일전쟁(1894.07~1895.11)이 발발했다.
당시 국력에서는 재력, 군함, 장비, 장병 수 모두 청나라가 우위에 있었으나 사기(기세)와 훈련 정도에서 우세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下関条約, 1895.04)>에 따라 다음 내용을 청나라에 인정하게 했다.
[시모노세키 조약 주요 내용] |
1. 조선 독립 승인 2. 영토로서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 할양 3. 배상금 2억냥(2억 테일(Tael), 엔화로 3억 1천만 엔) 수여 4. 충칭, 창사, 쑤저우, 항저우의 4개 항구 개항 |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부정되었고, 여기에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였던 책봉체제는 곧 종식되었다.
그러나 랴오둥 반도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3천만 냥을 받고 반환되었기에 국민에게 굴욕감을 주고 보복심이 부추겼지만, 일본도 이 전쟁으로 열강의 반열레 올라 서양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받은 배상금은 1897년 금본위제 시행의 원천이 되어 관영 야하타 제철소(官営八幡製鐵所) 조영 준비 자금이 되는 등 경제적 성장을 부추기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다시금 외국과의 사이에 있는 불평등 조약의 폐기를 공공연히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4-2. 러일전쟁(1904.02~1905.09)
청일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 제국은 청을 압박해 랴오둥 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조차(租借, 땅 빌리기)했다. 또한 시베리아 철도(Транс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와 그 지선인 동청 철도(Китайско-Восточн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를 건설해 남하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의화단 사건(1899.11~1901.09) 이후,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권을 확보해 나갔다. 일본은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1902년 영국과 비밀스럽게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한반도에 대한 이해 관계가 대립한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여전히 육군을 유지할 병력은 있었지만, 해군력의 대부분을 잃고 러시아 자국내에서도 혁명운동(러시아 제1혁명(1905.01~1907.07)이 진행되며 일본과의 강화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도 장기전에는 견딜 수 있는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외상 코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郎, 1855~1911)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1858~1919)에게 중개를 의뢰해 강화로 마음을 굳혔다.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난 러일전쟁은 <포츠머스 조약(ポーツマス条約, Портсму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을 맺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주요 내용] |
1.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에의 정치, 군사, 경제적 우선권을 인정 2. 청 영토 내의 뤼순, 다롄 조차권 및 창춘 이남 철도와 그 부속 권리를 일본에 양도 3. 북위 50도 이남의 타라후토(南樺太, 남 사할린)과 그 부속 제도를 양도 4. 오호츠크 해, 베링 해협의 어업권을 일본에 인정 |
그런데 이 조약에서는 러시아발 배상금 내용은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민중들이 가 일어나 내무대신 관저,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지른 히비야 방화 사건(比谷焼打事件, 1905.09)이 일어났다.
어찌되었든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비서구계에서 서구 열강을 최초로 이긴 전적은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아프리카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이 이탈리아 왕국을 이긴 것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최초는 일본이었고, 세계 강국들도 일본이 백색인종대국에 대한 유색인종소국의 최초의 대승리라고 여겼다. 그렇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경쟁 구도에 탑승하게 된다.
• 근린 제국주의(近隣帝國主義)
5. 전쟁과 산업화
메이지 시대에 특징적인 점이 바로 서양문물의 대량수입으로 인한 산업혁명이었다.
1870년대 중기가 되었을 땐 서양 문명 수입이 본격화되었으며, 1872년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한 철도 개업과 토미오카 제사장(富岡製糸場, Tomioka Silk Mill) 설립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식산흥업의 과정 | |
1851 | 사쓰마 번,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 斉彬, 1809~1858)의 주도로 일본 최초의 근대 서양식 공장군(工場群) 설립 사업인 집성관 사업(集成館事業) 계획에 착수해 식산흥업, 부국강병에 의한 번정개혁을 권장 |
1854.03.31 | 토쿠가와 막부, 개국을 단행 -> 일본 각지의 정치인들은 서양과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의식 |
1854.06.06 | 에도 막부,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 건조 |
1855.01.29 | 사쓰마 번, 서양식 바크식 범선 쇼헤이마루(昇平丸) 건조 |
1855.10.03 | 사쓰마 번, 서양식 증기선 운코마루(雲行丸) 건조 |
1867 | 사쓰마 번, 일본 최초의 방적 공장인 가고시마 방적소(鹿児島紡績所)가 창설됨 |
1868.01.03 | 메이지 정부(<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성립), 210년이나 되는 해외와의 교류·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던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적극적으로 스스로 산업을 살리는 정책을 취함 1872년에는 관영 철도와 기선이 발족하여 국내 교통망이 발달하였다.광산등의 사업을 실시해, 군마현에 토미오카 제사장등의 관영 공장을 개설했다. |
1869.11 | 메이지 정부, 신바시(新橋)-요코하마(横浜)간 철도 건설 결정(관영 철도 건설 시작) |
1870.12.12 | 메이지 정부, 공부성(工部省, 1870~1885) 설치해 사회기반을 정비하고 식산흥업을 추진 |
1871.06.27 | 메이지 정부, <신화조례(新貨条例)> 발표로, 화폐 단위로 엔(圓(円))을 정식 채용 |
1871.12.23 | 메이지 정부,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1873.09.13) |
1872.10.14 | 메이지 정부, 일본 최초의 철도 신바시역(新橋駅) - 요코하마역(横浜駅) 간 철도 정식 개업 |
1872.11.04 | 메이지 정부, 토미오카 제사장(富岡製糸場) 개관(관영 공장 개설 시작) |
1872.12.15 | 메이지 정부, <국립은행조례(国立銀行条例)> 발표 |
1873.07.28 | 메이지 정부, 지조개정(地租改正)을 실시해 토지에 대한 사유소유권을 확립시킴 |
1873.11.10 | 메이지 정부, 내무성(内務省)을 설치해 관영사업을 총괄하기 시작 |
1874~1896 | 메이지 정부, 민간 기업(미즈이 재단, 미쓰비시 재단 등)에게 관영 사업을 불하 |
1876.08.05 | 메이지 정부, 질록처분(秩禄処分, 녹봉 처분)을 실시해 녹봉 급여 전면 폐지 |
1882 | 메이지 정부, 오사카 방적 주식회사(大阪紡績株式会社) 설립 -> 방적업 확립 |
1897.03.29 | 메이지 정부, <화폐법(貨幣法)> 제정 |
1897.06.01 | 메이지 정부, 관영 야하타 제철소(官営八幡製鐵所) 개청 |
1901.02.05 | 메이지 정부, 관영 야하타 제철소 작업 개시 |
특히 일본의 산업화는 청일전쟁에서 받은 배상금이 1897년 금본위제 시행의 원천이 되어 관영 야하타 제철소(官営八幡製鐵所, 1897~1934) 조영 준비 자금이 되는 등 경제적 성장을 부추기게 되었다. 즉,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했다는 말이다. 특히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제철업으로 그로 인해 중공업과 군수업의 발흥과 급속한 발전이 시작되었다.
'부국강병', '식산흥업' 정책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공업화와 근대화를 이루어 주식시장에서의 직접금융에 의한 자금조달을 행하는 근대적인 시장경제가 발달된다. 그외 수출도 많이 했는데 주요 수출품은 견사(絹糸, 명주실), 성냥, 전구 등 경공업 제품이며, 특히 견사(명주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외화획득 산업이 되어 경기가 활성화된다. 또한 철강과 같은 중공업도 시작되었으나 발달하지 않아 수입 초과가 계속되었다.
1911년, 일본은 미국과 새로운 <일미통상항해조약(日米通商航海条約, 1953)>을 체결했고,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외무대신 코무라 쥬타로는 관세자주권의 전면 회복에 성공했고, 이로써 과거 에도막부 집권시 서양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대등한 국가간 조약으로 개선하는 조약 개정의 주요한 부분이 완료되었으며, 일본은 오랜 과제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서방 국가들과 대등한 국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카에이(嘉永) 연간(1848~1854) 이래의 흑선 내항의 충격과 그 후를 목표로 한 서구 열강과 견줄 근대 국가 만들기는 일단 달성된다. 그렇게 일본 국내 산업 보호와 무역 주도권을 획득하게 되며 강국으로 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경기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6.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6-1. 제1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전하다.
동양에서 유일한 대국이었던 일본 제국은 영국의 동맹국으로써 1914년 8월 15일에 독일에게 '자오저우만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일주일의 기간을 줬음에도 독일 제국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일본은 결국 8월 23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든다.
이번 구주(欧州, 유럽)의 대화란(大禍乱)은 일본 국운의 발전에 대한 다이쇼 신시대의 하늘의 도움(天佑)으로서, 일본국은 즉각 거국일치의 단결로 이 하늘의 도움(天佑)을 누릴 수 밖에 없다.
- 이노우에 카오루(井上 馨, 1836~1915)
또한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1838~1922)는 어전회의를 소집하지도 않고 의회 승인이나 군 통수부와의 절충도 하지 않은 채 긴급 각의(긴급 내각 회의)에서 전쟁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기회라 판단해 요청한 36시간 후에는 참전할 것이라 결정해버렸다. 이는 추후 일본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가 된 '정부-군부 관계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전쟁을 통한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로 대부분의 일본인은 참전을 지지했다.
6-2. 제1차 세계 대전 - 아시아-태평양 전구(Asian and Pacific theatre)
당시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본토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라와 인도 제국 등 대영제국 각지에서 군사를 동원했다. 1914년 8월 30일 뉴질랜드는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고(독일령 사모아 점령(Occupation of German Samoa, 1914.08.29~30)), 9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 해륙원정군(ANMEF)이 독일령 뉴기니(Deutsch-Neu-Guinea)의 뉴브리튼섬에 상륙해 섬을 점령하기 시작했다(비타 파카 전투(Battle of Bita Paka, 1914.09.11).
한편 중국 칭다오에 있던 독일 제국의 자오저우만 조차지(膠州湾租借地)는 일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SMS 엠덴(SMS Emden) 등을 주축으로 한 독일제국군 주력 함대가 영국에 패배한 1914년 9월경 일본이 산둥 반도에 상륙해 자오저우만을 목표로 독일제국 육군과 칭다오 전투(青島の戦い, Siege of Tsingtao, 1914.10.31~11.07)를 벌였고, 결국 영국군와 연합한 일본제국군은 해당 지역의 이권과 통치권을 중화민국과의 협상을 통해 얻게 되었으나, 1922년 워싱턴 회의 결과로 중국에 다시 돌려줬다. 이는 당시 열강들이 아시아 지역에 소홀해진 틈을 타서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영향력 확대하게 된 사건으로 여겨진다.
아시아에서 독일 제국을 몰아낸 일본이라는 이미지는 협상국 측에서의 이미지는 좋아졌으며, 강대국들은 일본 제국의 남양 제도 점령을 인정해줬다. 이 기세를 몰아 일본은 10월 3일부터 14일까지 제1남견지대(第一南遣支隊)와 제2남견지대(第二南遣支隊)에 속하는 순양전함 쿠라마(鞍馬)와 쓰쿠파(筑波), 장갑순양함 아사마(浅間), 경순양함 야하기(矢矧), 준노급전함(準弩級戦艦) 사쓰마(薩摩), 카토리(香取)로 남양 제도 중 적도 이북의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를 점령했다. 이들 섬의 영유권은 일단 전후에 결정한다는 합의가 있어 일본 국민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19년 이 섬들은 일본이 차지하게 된다.
전승국인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출병, 중국에서의 반일 운동, 내셔널리즘의 대두와 그에 대한 일본군 출병 확대라는 혼란 끝에 1930년대 전반에는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関東軍) 주도로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또 여러 차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뿌리내리는 듯했던 민주주의(다이쇼 데모크라시, 보통선거)가 불과 15년 만에 끊어지면서 군국주의가 진행되게 되었다.
7.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사회, 문화 각방면에 걸처 민주주의 발전 및 자유주의적 운동, 풍조와 사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시노부 세이자부로(信夫 清三郎, 1909~1992)가 1954년에 편찬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사(大正デモクラシー史)>에서 처음 쓰였다.
7-1.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배경
러일 전쟁(1904.02~1905.09) 종결 후, 국제적 긴장관계는 완화되어 1905년 8월에는 중국의 쑨원(孙文, 1866~1925)이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中国同盟会, 1905.08~1912.01)가 결성되는 등 일본 내에서 민주주의적 자유의 획득을 목표로 한 운동이 본격화되어 갔다.
한편, 아시아에서 몇 안 되는 독립국이자 유일하게 5대국에 드는 선진공업국이면서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성장을 이룬 일본은 국민에게 정치적, 시민적 자유를 자각시키고, 다양한 과제를 내건 자주집단이 설립되어 자유와 권리의 획득,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 배경이 완성되어 갔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 (1911.08~1912.12) |
제3차 가츠라 내각 (1912.12~1913.02) |
제1차 야마모토 내각 (1913.02~1914.04) |
이런 배경 속에 조슈 번벌 출신으로 육군의 영향력이 막강한 제3차 가츠라 내각(第3次桂内閣, 1912.12~1913.02)이 성립됐다. 그러나 이 가쓰라 내각에 대해 국민 여론의 비판이 높아졌고, 또 중의원에서도 의원 오자키 유키오(尾崎 行雄., 1858~1954)와 이누카이 츠요시(犬養 毅, 1855~1932) 등이 번벌 정치(藩閥政治)라며 가츠라 내각을 비판하고 1912년, 「벌족 타파·헌정 옹호」를 내건 제1차 호헌 운동이 전개되어
가츠라 내각은 조직된 지 불과 53일 만에 내각 총사퇴하게 된다. (다이쇼 정변(大正政変, 1913.02)).
이어 설립된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 1900~1940)를 여당으로 하는 제1차 야마모토 내각(第1次山本内閣, 1913.02~1914.04)은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폐지 등 육해군의 내각 발언력을 약화시키는 개혁에 착수했으나 해군 고위 관부의 뇌물공여 사건(지멘스 사건(シーメンス事件))의 영향으로 또다시 국민의 비판을 불러 1914년, 내각 총사퇴를 해야 했다.
7-2.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흐름
7-2-1. 민본주의와 덴노 기관설
1913년, 이시다 토모지(石田 友治, 1881~1942) 등에 의해 언론잡지 <제3제국(第三帝国)>이 간행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요시노 사쿠조(吉野 作造, 1878~1933)에 의해 민본주의에 의한 정치가 제창된 것을 배경으로 점차 보선운동(普選運動, 보통선거운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1912년 3월 미노베 타츠키치(美濃部 達吉, 1873~1948)는 <헌법강화(憲法講話)>를 저술하여 덴노 기관설(덴노가 국가 기관 중 하나라는 이론)을 제창했으며, 그래서 정당 내각제를 지지했다.
7-2-2. 1918년 쌀 소동
제1차 야마모토 내각 (1913.02~1914.04) |
제2차 오쿠마 내각 (1914.04~1916.10) |
테라우치 내각 (1916.10~1918.09) |
하라 내각 (1918.09~1921.11) |
1917년 러시아 혁명(Революция 1917 года в России, 1917.03~1923)에서 시작되어 동맹국인 영국과 미국의 요청에 따라 테라우치 내각(寺内内閣, 1916.10~1918.09)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인 1918년 7월 12일 시베리아 출병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에 수요 확대를 예상한 상인들의 쌀 매점매석이 발생해 쌀값이 급등했다.
그런 가운데 토야마 현(富山県)에서 발생한 생활고 때문에 일어난 쌀 도매상(問屋)과 주민들의 소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쌀 소동) 쌀 도매상 우치코와시(파괴)와 야키우치(방화) 등이 두 달 새 빈번히 발발했다.
7-2-3. 일본 최초로 본격적인 정당 내각이 들어서다.
테라우치 내각 (1916.10~1918.09) |
하라 내각 (1918.09~1921.11) |
타카하시 내각 (1921.11~1922.06) |
카토 토모사부로 내각 (1922.06~1923.09) |
전쟁으로 인한 쌀과 관련돤 격차가 확대되었고, 신문사에 대한 언론 탄압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쌀소동은 9월 21일 테라우치 내각의 총사퇴로 일단 진정되었고, 마침내 '평민재상'으로 불리던 하라 타카시(原 敬, 1856~1921)에 의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이 9월 27일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이 쌀소동으로 정당 정치가 부상하게 된다.
7-2-4. 제2차 호헌 운동
타카하시 내각 (1921.11~1922.06) |
카토 토모사부로 내각 (1922.06~1923.09) |
제2차 야마모토 내각 (1923.09~1924.01) |
키요우라 내각 (1924.04~1924.06) |
카토 타카아키 내각 (1924.06~1926.01) |
1923년 12월 27일에 발생한 난바 다이스케(難波 大助, 1899~1924)에 의한 섭정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덴노) 저격사건(토라노몬 사건(虎ノ門事件))으로 당시 제2차 야마모토 내각(1923.09~1924.06)은 총사퇴에 내몰려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던 키요우라 케이고(清浦 奎吾, 1850~1942)의 키요우라 내각(1924.04~1924.06)이 발족했다. 그러나 키요우라 내각은 거의 모든 각료가 귀족원 의원에서 선출된 초연주의(어떤 일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업무 처리를 하는 주의)적 내각으로 국민들 사이에서 다시 헌정 옹호를 요구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 1900~1940), 헌정회(憲政会, 1916~1927), 혁신구락부(革新倶楽部, 1922~1925)의 호헌 3파(護憲三派)로 구성된 카토 타카아키 내각(1924.06~1926.01)이 성립해 <보통선거법(普通選挙法, 1925)>이 제정됐고 재산(납세액)에 의해 제한되는 제한선거에서 만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면서 아시아 최초의 남자 보통선거가 실현됐다.
그러나 전쟁 발발에 따른 경제적 혼란이 있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탄생함으로 국민 일부에게 적화(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공산주의 혁명의 발생과 천황제 및 국가 신토의 동요를 우려한 정부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925)>을 제정하고 공산주의적 운동(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7-2-5. 평민사와 코토쿠 슈스이(幸徳 秋水)
1903년 11월 러일 전쟁 개전을 지지 대로동지회(対露同志会, 1903~1904) 등의 활동이나 <칠박사 의견서(七博士意見書)>와 같은 문서, 또 이들을 지지하는 여론의 힘을 보고 그동안 비전론(非戦論)을 주장해오던 <요로즈 조보(萬朝報, 1802~1940)>가 입장을 개전론(開戦論)으로 전환하자,
이에 이의를 제창한 소속 기자 코토쿠 슈스이(幸徳 秋水, 1871~1911)과 사카이 토시히코(堺 利彦, 1871~1933)가 비전론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요로즈 조보> 발행사인 조보사(朝報社)를 퇴사하고, 다시금 비전론을 호소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보급하기 위해 평민사(平民社, 1903~1910)를 설립하고 주간지 <평민신문(平民新聞)>을 발행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신문사였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 보급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협회(社会主義協会. 1900~1904)와 함께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조직의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1904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네셔널(Second International, 1889~1916) 제6차대회에 참가한 카타야마 센(片山 潜, 1859~1933)과 러시아 대표 레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Георгий Валентинович Плеханов, 1856~1918)의 악수 사진을 널리 퍼트리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렇게 일본내 사회주의의 중심세력으로 평민사는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인 1905년 10월, 정부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그 이후에도 2차례의 재건 움직임이 있었지만, 다 실패하고 1910년 3월에 완전히 해산되었으며, 관련자들은 메이지 덴노를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코토쿠 슈스이 등이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힌 코토쿠 사건(幸徳事件)으로 대부분이 흩어졌다.
8. 제1차 세계대전(1914.07~1918.11) 이후의 불황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원로 이노우에 카오루는 그 기회를 하늘의 도움(天佑)이라 여기고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했다. 일본 본토나 식민지가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 유럽에도 파병한 장병의 많은 헌신으로 전승국의 일원이 됐다.
세계 대전 발발 직후에는 전쟁의 세계적 규모로의 확대로 인한 혼란이 휘몰아쳤고, 그래서 한때 공황 직전에까지 빠졌지만, 이윽고 전화(戦火)에 흔들렸던 유럽의 열강 각국을 대신해 일본과 미국의 두 신흥국이 물자의 생산 거점으로서 무역을 가속화시켰고, 일본 경제는 전래없던 호경기가 되어 크게 경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세계적으로 품귀현상이 빚어진 영향으로 섬유(방적산업, 어망제조산업) 등 경공업과 조선업,제철업과 같은 중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후진적인 미발달 산업이었던 화학공업도 최대 수입처인 독일과의 교전으로 자국에 의한 생산이 필요해 단번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이런 가운데 다수의 벼락부자가 출현한다. 또한 정부 재정도 러일전쟁 이후 계속된 재정난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일본상품 불매운동이나 전후 유럽경제의 회복으로 세계시장에서의 일본 상품 판매가 부진해져 과도한 설비투자와 남는 재고가 원인이 되어 반동적으로 불황이 일어났다. 더욱이 전시 중단됐던 금 수출금지 해제(금해금(金解禁))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일본은행(日本銀行)에 대량의 금이 체류하면서 금본위제에 따른 통화조정 기능을 상실했다. 더욱이 칸토 대지진(関東大地震)으로 게이힌 공업지대(京浜工業地帯)가 괴멸되고 긴급수입에 의한 재고 증가, 진재어음(震災手形, 지진재해 어음)과 진재어음의 부실채권화 문제가 발생 하면서 경기회복의 전망이 전혀 서지 않은 채 쇼와 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 1927.03~), 대공황(1929~1939)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전쟁은 경제위기로 인한 일본인의 불만 해결 가능한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되며 전운이 또 감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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