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은 원래 망미동에 있었다! 동래고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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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동래읍성은 원래 망미동에 있었다! 동래고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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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동래읍성은 처음부터 동래구 마안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말 왜구들의 습격으로 현재의 마안산 지역으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도 현재 수영구의 망미1동 행정복지센터와 부산울산 지방병무청이 있던 구릉지에 이미 8세기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을 현재는 (구) 동래읍성이라는 의미로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이라고 부른다.

위 지에 보이는 부산울산지방병무청과 망미1동 행정복지센터 일대의 구릉지에 동래고읍성이 있었다. 지금은 돌로 만든 부분은 사라지고, 흙으로 덮인 부분만 북쪽의 망미배산로를 따라 쭉 이어져 있을 뿐이다. 과거엔 땅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건물들과 시설들을 설치해 덮혀 버렸다.

동래고읍성과 망미배산로

망미배산로 쪽엔 언덕이 보이는데, 바로 이 언덕이 (구) 동래읍성(동래고읍성)의 토성(土城) 북벽(北壁)이다. 좌측에 보이는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면

이런 작은 공원이 나온다. 운동하시거나 산책하시는 어르신들이 간혹 들르시는 듯 하다. 

이 작은 공원에서 오른쪽을 보면 이런 흙벽이 있다. 바로 아까 밑에서 봤던 그 동래고읍성 흙벽이다.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

이곳은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의 토성(土城) 북벽(北壁)의 지하에 보존된 지역이다.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은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약 135m 정도 잔존 토성벽(土城壁, 토성의 벽)이 확인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관아건물(官衙建物)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地)와 담장지를 비롯해여 배수로(排水路), 온돌유구(溫突遺構, 온돌 잔존물) 및 고려시대(高麗時代) 건물지(建物地) 및 토기개와(土器蓋瓦, 토기기와로 덮음) 매납갱군(埋納坑群, 어떤 목적으로 무언가를 묻은 구덩이의 무리), 성내를 남-북으로 지나는 대형(大型) 배수로(排水路)와 제방(堤防)이 설치된 동-서향의 구하도(舊河道, 옛 하수도), 우물 등 다수의 성 내부 시설물이 조사되었다.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에 동래군(東萊郡)이 설치되면서 축성(築城)된 동래군(東萊郡)의 치소(治所,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로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부터 고려말(高麗末)에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동래읍성(東萊邑城)이 축성(築城)될 때까지 동래지역(東萊地域)의 치소(治所)이자 남해안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대일관계(對日關係)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성(城)이었다.

 

이 흙벽은 옆의 부산울산 지방병무청 주차장까지 연결된다..

부산울산지방병무청 주차장 뒷편에는 이렇게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들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현재의 부산울산지방병무청 본관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온전히 보전된 2기만 옮겼다. 우물을 옮긴 곳 뒷편까지 흙벽이 이어진 것이 보인다. 생각보다 당시 (구) 동래읍성은 컸을지도 모른다.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

부산광역시 수영구 연수로 301


동래고읍성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동래군(東萊郡)으로 이름을 고칠 때의 중심 치소(治所)로 당시 동남해안 일대에 자주 출몰한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려말(高麗末)에 현재의 동래(東萊) 지역으로 치소(治所)를 옮길 때까지 사용하였던 읍성(邑城)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읍성(古邑城)은 해운포(海雲浦)에 있으며 동남은 석축(石築) 서북은 토축(土築)인데 둘레가 4,430척(尺)"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흙을 겹겹이 쌓아 올린 판축토성(版築土城)이 확인되었으며, 성을 처음으로 쌓은 시기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로추정된다.
또한, 현 병무청 본관 건물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4기(基)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보존상태가 양호한 2기(基)를 현재의 자리(병무청 주차장)에 이전(移轉) 복원(復原)하였다.

우물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까지 봤다면 8세기부터 고려 말 혹은 조선 초까지 존재했던 동래고읍성에 대한 탐방을 마칠 수 있다. 여길 오기전까지도 동래읍성이 처음부터 현재의 동래 지역에 있었던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동래의 중심이던 동래읍성도 14~15세기까지는 현재의 수영구 망미동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또 부산의 역사가 새롭게 보였다.

 

망미동은 오래전부터 주거지역으로 쓰였던 곳이고, 한 떄 통합병원이라고도 불렸던 국군부산병원도 현재의 부산울산지방병무청 자리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부산울산지방병무청이 자리해 부산의 병역 행정 활동의 중심지로 활약했었다. 이렇게 민간 주거와 군사 행정의 중심으로 있던 이 자리가 과거에도 군사 행정과 백성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줬던 성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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