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래읍성 북장대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쪽에서 서쪽 북장대로 나아가다보면 이런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북장대가 나온다!
동래 읍성지(東萊 邑城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甕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무느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女墻)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
이곳이 북장대! 군관이 군사를 지휘하면서 성 밖을 감시하던 전망대였다. 현재는 동래읍성지로 더 유명한 마안산의 정상에 있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서장대,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인생문을 지나 동장대가 나온다.
마안산 정상에 설치된 작은 하트모양 사진코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가곤 했다. 그리고 이 북장대 전망대에선 기장의 장산부터 광안대교, 초읍의 금정봉까지 부산의 대표적인 시가지와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쪽 봉우리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바로 서장대다. 저긴 연중 6~10월사이에만 들어갈 수 있어, 방문가능 일시와 시간을 꼭 찾아보고 가길 바란다.
북장대에서 바라본 부산. 해가 지고 있어서 햇빛까지 담겨버렸다ㅎㅎ...
그렇게 마안산 정상에 위치한 북장대에서 서쪽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동래읍성 북문과 동래읍성 역사관, 장영실 과학동산이 나온다. 그리고 그 북문쪽에는 동래읍성을 다시 지은 것을 기념한 내주축성비가 세워져 있다.
2. 내주축성비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이 비는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에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된 비는 높이 422cm, 폭 108cm로 다른 축성비에 비해 큰 편에 속한다. 머릿돌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받침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몸돌의 앞면에는 성을 쌓은 것에 관한 사실, 뒷면에는 그 일에 참여한 책임자 등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1731년 1월에는 성터 측량, 4월에는 성벽, 5월에는 성문, 7월에는 성문의 누각을 각각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본래 남문 밖에 세워졌다가 몇 차례 옮겨진 후 2012년 10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동래읍성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건축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하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
이름 그대로 내주(萊州) 즉, 동래부(東萊府)에 성(城)을 쌓은(築) 것에 대한 비(碑)인 내주축성비는 안내문에 적혀있듯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 성터를 새로이 복원한 것을 기념한 비석이었다.
그 위상에 걸맞게 처음에는 신축 동래읍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와 도로 확장 때문에 이섭교비와 함께 금강공원에 옮겨져 보존되었다가, 2012년, 효율적 보존 관리와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원래 있던 위치가 아닌 동래읍성 북문 앞으로 이전 복원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적힌 비문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비의 앞면 |
승훈랑(承訓郞) 행황산도찰방(行黃山道察訪) 김광악(金光岳) 기록. 유학(幼學) 송광제(宋光濟) . 통훈대부행현풍(通訓大夫行玄風) 현감(縣監) 유우기(兪宇基) 전자함(篆). 상(上) 9년 계축(1733, 영조 9) 겨울, 광악(光岳)은 승정원의 당후(堂后)에 있게 되어 경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중신이 상(上, 임금) 앞에서 평양(平陽)에 성을 쌓는 일을 계획하며 ‘만약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성(東萊城)을 쌓았던 일과 같이 그 고을 신하가 스스로 하도록 청을 들어 준다면 국름(國廩, 국고)를 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아도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광악(光岳)은 그것을 일기에 적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산(黃山)의 승(丞, 역승(驛丞))이 되었을 때 동래 사람(萊人)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래 사람은 정공(鄭公)의 치적에 훌륭한 것이 많다고 칭송하였다. 동래의 선비 중에 송광순(宋光洵)이 성을 쌓을 때의 사적을 기록한 책 두 권을 가져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는데 대여섯 번이나 청하여 포기하지 않으므로 나는 결국 사양할 수 없었다. 그 도면과 기록을 살펴보니 동래는 임진(壬辰, 1592)에 성이 함락된 후부터 140여 년 사이에 그 주변의 옛터가 무너져 백성들의 집이 되어 한 조각의 울타리를 친 설비도 없게 되었다. 공이 처음 이곳에 와서 변방의 설비가 어설픈 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장마(陰雨)에 대비하여 보수하는 계획은 시절이 태평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여 개연히 보수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바깥사람 모르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나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드디어 계획을 확정하고 장계(狀啓)를 띄우니 당시의 관찰사 조공(趙公)[조현명(趙顯命)]과 뜻이 잘 맞아 그것을 도와주었다. 신해(辛亥, 1731년) 정월 정묘에 성터를 측량하고 일을 분담하여 각 패장(牌將)에게 맡기니 기기와 물자 및 인력은 오래전부터 비축해 두었던 것이라 한 가지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이에 바람 만난 불처럼 명령을 내리니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땅을 파니 뼈(骸) 쌓여 있었고, 옆에 화살촉(箭鏃)이 있었으니 임진왜란(壬亂戰) (때) 전사한 병사들이었다. 종이와 베로 염을 하여 관에 넣어 제사를 지내고 묻어 주었다. 그 후에 발견된 해골(骸骨)은 모두 이렇게 해 주었다. 날마다 일하는 곳을 돌며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작업을 살펴 벌할 것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상줄 것은 반드시 상을 주었고 술과 음식을 먹이고 돈과 베를 아낌없이 주었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이 다투어 힘을 내고 기뻐 뛰어다니며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 4월 성이 완성되고 5월에 성문이 완성되었으며 7월에는 문루가 완성되니 공사를 시작한 지 백여 일 만에 견고하게 우뚝 솟은 성이 마치 귀신(神)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둘레(周回)가 2,280보(步)로서 8리(里)(=약 3.14㎞) 정도 되고 높이가 수십 자(尺)가 되었으며 길이(袤)는 전보다 길어졌고 돌도 모두 새 것을 썼다. 일꾼(役丁) 5만 2,000명, 쌀(米穀) 4,500섬, 베(布) 1,550필, 돈(錢) 1만 3,000냥을 썼는데 모두 공(公, 정언섭)이 낸 것이니 정말로 백성에게 걷은 것도 아니고 국고를 축낸 것도 아니다. 공사를 다 마치자 장수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 주었으며, 네 곳의 장교들에게 각기 문루에 술자리를 두고 음악을 베풀게(연주하게) 하여 마음껏 놀게 하였다. 8월 기유에 잔치를 열어 낙성하니 관찰사(觀察使) 조현명(趙公顯)과 좌병사(左兵使) 이공(李公, 이복휴(李復休)), (그리고) 여러 고을 수재(守宰, 수령)과 각 진(鎭)에서 모두 와서 모였다. 얼마 후 또 성을 지키는 데 양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따로 미조(租米, 조) 4,000여 섬을 준비하여 창사(倉舍, 창고)를 설치하고 ‘수성창(守成倉)’이라 이름을 붙이고 군대가 필요할 때 쓰게 하였다. 부지런하고 민첩한 무인 5명에게 그 일을 맡기고 급료를 주었으며 특별히 수첩 군관(守堞軍官) 200명을 뽑아 부역을 덜어 주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시설이 견고하고 오래가지만 그래도 무비(武備, 무장 대비)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해서 읍의 서쪽 몇 리 되는 곳에 서재[齋]를 세워 ‘시술재(時述齋)’라 이름을 붙이고 읍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니 가르침에 요령이 있었고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공과 같은 이는 근본이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책을 덮고 탄식하며 말한다. 지혜로써 계획을 시작하였고 용단으로 일을 결정하였으며 은혜로써 무리를 모았고 검약하게 재물을 모아 나라 일에 썼으니 몸은 한때 수고로운 일을 맡았지만 나라 위해 천백 년의 굳은 방비를 도모한 것이다. 무비(武備)를 갖추고 나서 문교(文敎)로 근본을 돌려놓았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었다. 지난날 연석(筵席, 경연 자리)에서 이야기된 것은 그중 한두 가지 뿐이었다. 손순(孫順)이 성상(聖上, 임금)의 포상을 받을 때, (임금이) ‘나[予]는 이제 남쪽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 어찌 우이(偶爾, 우연)이겠는가? 그 후에 안절호서(按節湖西, 호서 절도사)로 나아갔고 승정원을 거쳐 동도(東都)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이유가 있다. 숭정 기원 후(崇禎紀元後) 92년 을묘(1735년) 10월 일 세움. 건륭(乾隆) 을유(1765년) 가을 농주산(弄珠山)에서 옮겨 세움. 감관(監官) 박사연(朴師演), 좌수(座首), 이중열(李重烈), 색(色) 김응윤(金應潤), 후에 경진(1820년) 가을에 옮 세움. 도감(都監) 정상언(鄭相彦), 좌수(座首) 신태규(辛兌奎), 감관(監官) 장우일(張宇一). |
비의 앞면 |
동래 축성 시 차임(差任, 하리 임명) 사원(使員)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권순성(權順性), 한량(閑良) 김석중(金碩重), 도청(都廳) 출신 최성(崔晟), 유학(幼學) 정지제(鄭之濟), 신구(申璆), 박계□(朴桂□) 책응(責應) 전 첨사(前僉使) 허념(許捻), 사과(司果) 이만한(李萬漢), 출신(出身) 채덕홍(蔡德洪), 출신 함유일(咸有一), 한량 이익태(李益泰), 한량 윤숭은(尹崇殷), 부석도감(浮石都監) 송동원(宋東源), 사과 김상중(金尙重), 좌수(座首) 박취하(朴就夏), 한량 김윤하(金潤河), 별감(別監) 문세남(文世南), 통덕랑(通德郞) 최천주(崔天柱), 비석도감(碑石都監) 박취하(朴就夏), 사과 백상미(白尙米), 감관(監官) 출신 정태희(丁泰希), 한량 황시백(黃時白), 동소장(東所將) 출신 이시첨(李是瞻), 박진영(朴震英), 도패장(都牌將) 겸 동문감(東門監) 문유징(文有徵), 출신 강상망(姜尙望), 남소장(南所將) 유학(幼學) 박민성(朴敏聖), 패장(牌將) 송두성(宋斗星), 도패장 겸 남문감(南門監) 겸사복(兼司僕) 유재흥(劉再興), 출신 김창하(金昌夏), 패장 겸사복 서기찰(徐起札), 출신 송세기(宋世基), 박태성(朴泰星), 사과 최재강(崔載崗), 사과 김기성(金起聲), 출신 이우백(李友栢), 한량 김성중(金聲重) 겸사복 전명채(全命采), 사과 방진관(方鎭觀), 사과 구세강(仇世康), 판관(判官) 최석한(崔錫漢), 문중장(文重章), 겸사복 배치적(裵致績), 송상준(宋尙俊), 출신 피태성(皮泰成), 북소장(北所將) 유학 박취하(朴就夏), 한량 조세량(趙世良), 도패장 겸 북문감(北門監) 사과 이창정(李昌庭), 절충(折衝) 홍천한(洪天漢), 출신 윤성임(尹聖任), 패장 유학 송정렴(宋挺濂), 겸사과(兼司果) 김려휘(金麗輝), 판관 송상일(宋尙逸), 출신 강세망(姜世望), 유학 이인서(李仁瑞), 한량 김윤진(金允珍), 이성렴(李星濂), 정원상(鄭元祥), 정재서(鄭載瑞), 사과 양수동(梁秀東), 한량 박태기(朴泰基), 서소장(西所將) 유학 신□(辛□), 출신 박태삼(朴泰森), 도패장 겸 서문감(西門監) 한량 이덕만(李德蔓), 출신 김중명(金重鳴), 출신 서후봉(徐後逢), 겸암문감절충(兼暗門監折衝) 조세일(趙世逸), 겸사복 윤징은(尹徵殷), 패장 유학 송규채(宋奎彩), 한량 김치영(金致榮), 김만겸(金萬兼), 송재심(宋載心), 문필홍(文必弘), 사과 이익하(李翊夏), 신치영(辛致榮), 김보한(金輔漢), 사과 송치만(宋致萬), 판관 김득한(金得漢), 이지흥(李芝興), 1소장(一所將) 유학 박시한(朴始漢), 판관 양수부(梁秀夫), 한량 강성지(姜聖之 ), 한량 김성일(金星一), 사과 최재곤(崔載崑), 한량 김설봉(金雪峰), 안여석(安如石), 겸사복 정시화(鄭時和), 2소장(二所將) 유학 박명채(朴明彩), 패장 한량 남도정(南道貞), 사과 김재창(金再昌), 한량 홍만택(洪萬澤), 옥명순(玉命順), 김차걸(金次傑), 3소장(三所將) 유학 박문순(朴文純)牌將, 패장 사과 최운한(崔雲漢), 목물감(木物監) 한량 김우삼(金禹三), 무철감(貿鐵監) 겸사복 조관벽(趙寬璧), 절충 안화송(安和松), 반와감(潘瓦監) 김성검(金成劒), 무탄감(貿炭監) 한서선(韓瑞善) 각소색(各所色, 색리) 도색(都色) 강치호(姜致豪), 신중채(辛重彩), 윤희성(尹喜聖), 책응색(責應色) 윤희창(尹喜昌), 이우상(李友相), 최동호(崔東豪), 박치하(朴致夏), 윤희장(尹喜長), 목물색(木物色) 손만채(孫萬彩), 동소색(東所色) 황구태(黃龜泰), 남소색(南所色) 최만장(崔萬長), 서소색( 西所色) 황두억(黃斗億), 북소색(北所色) 추월명(秋月明), 암문색(暗門色) 김익하(金益河), 부석색(浮石色) 신여원(辛汝元), 강흥주(姜興周), 오한경(吳漢敬) |
3. 동래읍성 서장대로 가는 길
북문에서 안내판에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넓은 원형 광장이 보인다. 강아지도 즐겁게 뛰어 다니고 아이들도 잡기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책나온 어르신도 잠깐 앉아 있다 가시기도 하는 풍경 좋고 넓고 깨끗한 광장이었다.
광장을 지나면서 저 멀리 동래복천동고분군과 복천박물관 야외전시관도 보인다. 진짜 풍경 좋다. 마안산 자체도 심하게 가파른 편은 아니라 여기에 봄가을에 산책하러 오기 좋은 것 같다.
4. 동래읍성 서장대
그렇게 정비된 길 따라 쭉쭉 가다 작은 수풀길까지 지나면 서장대의 뒷모습이 보인다.
세 곳의 동래읍성 장대 중 가장 최근인 2010년에 복원된 서장대는 다른 두 곳의 장대와 달리 2층 구조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을 내려오면 옆에 성벽들이 보인다. 그렇게 동래사적공원을 다 내려가면 동래읍성 치성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정확하게 어디가 치성인지는 모르지만, 더 견고한 방어를 위해 성벽 밖에 덧붙여 지은 성들이 동래읍성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로 지은 동래읍성은 한반도 남단을 지키는 입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동래읍성 치성(東萊邑城 雉城) 치성(雉城)은 적의 접근을 일찍 살피고 싸울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양 측면에서 공격하도록 성벽(城壁) 일부를 밖으로 나오게 쌓은 시설이다. 동래읍성은 조선시대 영조(英祖) 때(1724~1776)에 규모를 확장하여 수축(修築)하였다. 공원진입로에 위치하는 치성은 서장대에서 암문 사이에 위치하는 성벽에 덧붙여 축조하였고, 19세기 말 고종(高宗) 때(1864~1910) 동래읍성 수축공사를 하면서 쌓은 것이다. 2011년에 (재)한국문물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확인된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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