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좋고 그래서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동래읍성의 여러 문이 있었던 자리 중 동문터, 남문터, 서문터, 야문터(암문터)를 찾아갔고, 그 탐방기를 쓴다. |
일전에 동장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46)와 인생문(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45)에 대한 글을 썼고, 이후에 서장대와 북문, 북장대에 대한 글을 쓰려고 준비하던 차에, 지금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는, 동문터, 남문터, 서문터, 암문터를 찾아가 봤다. 다른 흔적들은 어느 정도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암문터는 특히 찾기 어려웠다.
1. 동래읍성 남문터 그리고 동문터로 가는 길
수안역 7번출구에서 내려서 쭉 직진 하거나, 부산동래경찰서쪽에서 왔다면 쭉 올라와 건널목을 건너면 동래읍성 남문터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이 부산동래경찰서쪽이어서 내린 뒤 위쪽으로 쭉 올라왔다. 횡단보도 대각선으로 보이는 빨간색으로 색칠한 부분에 동래읍성 남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문터 조선시대 동래부의 방어시설로 축성된 읍성의 4대 성문 중 익성(翼城)을 부설한 규모가 가장 큰 성문터. 문루를 무우루(無憂樓)라 불렀으며 임진왜란 때의 최대 격전지였음. |
동래읍성의 남문은 조선 후기에는 이렇게 2개의 문으로 지어졌으며, 웅장하고 우람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일본과 바로 접했기에 더욱 더 신경써서 멋지게 지은 이 동래읍성 남문은 동래부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참고로 여기 남문터에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세병교가 나온다. 동래부 소속의 군사들이 훈련을 마치거나 어떤 전투를 끝낸 뒤 세병교에서 무기를 씻어내곤 쭉 올라와 남문으로 들어갔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참고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18)
동래읍성 남문터에서 동문쪽으로 가다보면, 이렇게 동래읍성을 묘사한 동래부순절도와 유물 조사 때 찍은 사진들, 그리고 동래읍성의 조선 전후기 별 현황을 묘사한 지도가 소개되어 있다.
아래엔 안내판의 설명문을 옮겨놓았다. 대부분 건축과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동래읍성(東萊邑城) 부산시기념물 제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55번길 12 동래읍성은 마안산 남쪽 산자락에서 온천천으로 이어지는 구릉지 끝단에 위치한 조선시대 동래부의 군사·외교·행정 중심지이다. 동래읍성은 세종 28년(1446)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을 축조한 전기 동래읍성, 임란 이후인 영조 7년(1731)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 1686~1748)이 관찰사와 숙의(熟議)하여 기존의 읍성을 정비하고 보다 큰 성으로 대대적으로 수축한 후기 동래읍성으로 구분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등의 문헌에 의하면 전기 동래읍성은 석축으로 쌓았으며, 성벽 둘레는 총 3,092척, 높이 15척이고, 성내에는 우물이 5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존에 전기 동래읍성과 관련한 문화재조사는 복천동 304번지와 수안동 204번지에서 행해져 각각 북문지 주변 성벽과 해자(垓子, '안내판'에는 垓字라고 쓰여 있지만 오기로 보인다)가 확인된 바 있다. 낙민동 265번지에서는 전기 동래읍성의 동벽 체성부에 해당하는 구간으로, 발굴조사(동양문물연구원, 2015)를 통해 성벽과 수구(水口) 등의 유구와 성벽 하부에서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분청사기, 백자, 기와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성벽의 규모는 잔존길이 16.5m, 폭 6m, 잔존높이 1~1.6m이다. 축조수법을 보면, 먼저 회색의 니질층을 굴착하여 말목지정한 후 할석으로 내부를 채워서 기저부를 조성하고 수평을 맞추어 지대석과 그 위에 기단석을 설치하였다. 낙민동 265번지 유적을 통해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전기 동래읍성의 동벽은 현재 충렬대로 255길에서 남쪽으로 3m 가량 떨어진 남서-북동 방향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체성의 수평 지대석과 기단부 설치, 적심석 배치, 6m 전후의 성벽 폭 등은 조선전기 경상도 연해읍성에서 나타나는 축조수법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2. 동래읍성 동문터
동문터 조선시대 동래부의 방어시설로 조성된 동래읍성의 4대 성문 중 문루(門樓)를 지희루(志喜樓)라 불렀던 성문터. |
동래읍성의 동문터에 지금은 중국집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놀랬던 건 남문터에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문에서 또 북문까지 20분 정도 걸리는데, 이는 현대 기준이고, 과거에는 동장대를 지나 넓게 북문까지 성벽이 이어졌을 것이니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문이라는 소문(小門)이 있었던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동문터 주변 풍경이다. 뒤에 공영주차장이 보인다. 이 부근에 박차정 의사 생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74)도 있으니 한 번 가보는 걸 추천한다.
3. 동래읍성 서문터와 야문터(암문터) 가는 길
서문터 조선시대 동래부의 방어시설로 축성된 읍성의 4대 성문 중 옹성(甕城)을 부설한 성문터. 문루를 심성루(心成樓)라 불렀던 곳임. |
동래읍성 남문터에서 6~7분이면 도착하는 서문터다. 이곳은 지금 충무김밥집이 들어서있다.
서문터 근방의 모습. 식당과 야채 파는 곳들이 많이 모여 있다.
여기는 재수학원 다닐 때 가끔 용돈 받으면 저녁 먹으러 갔던 라멘집이었다. 맛과 양 모두 괜찮았어서 다음에도 한 번 가볼까 한다.
서문터에서 장관청을 지나고 쭉 올라오면 큰 교차로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을 건너 저 멀리 보이는 한옥 지붕이 있는 쪽으로 쭉 들어가면 오른쪽 사진과 같은 곳이 나온다. 여기서 쭉 더 들어가자.
그럼 이렇게 동래로 134번길의 길목에 도달하게 되는데, 위 사진에서 보는 방향에 암문터가 있다. 실제 위치를 찾고 싶은 사람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2'로 검색해서 찾아가면 된다.
4. 동래읍성 야문터(암문터)
그럼 이렇게 동상과 표지석이 보인다. 이쪽에까지 성벽이 쭈욱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문보다는 작은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왼편에는 2017년에 세워진 야문터 지킴이라는 이름의 동상이 있다.
오른편에는 여기가 야문터 혹은 암문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야문터 조선시대 동래부의 방어시설로 축성된 음성의 성문 중 옹성(甕城)을 부설한 성문터. 일명 암문(暗門)이라 불리었으며 4대 성문을 폐문(閉門)한 후 긴요한 일에만 통행이 허락되었던 곳. |
야문터(암문터)는 2017년에 복원되었는데, 복원과 관련된 내용은 이 기사(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71221000045)를 참고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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