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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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범어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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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전도 (출처 : 네이버지도)

범어사의 시작은 바로 이 화행교(化行橋)가 아닐까 싶다. 화행(化行)은 불교에서 승려가 민가를 찾아다니면서 불법(佛法)을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사 승려들은 이 다리를 지나 민가로 간 뒤 불교를 넌지시 전한 것으로 보인다.

범어사 차도 입구에서 범어사 방향으로 찍어봤다.

 

금정총림(金井叢林) 범어사(梵魚寺)

금정총림(金井叢林) 범어사(梵魚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로서 10개의 산내 암자와 200여 개의 산외말사로 이루어진 영남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신라 문무왕 18년(678) 의상(義湘) 대사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이며 화엄경(華嚴經)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 구현과 왜구를 막는 호국사찰(護國寺刹)로 창건되어졌다.
흥덕왕 10년(835)에 크게 중창(重創)되었으며,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묘전(妙全) (和尙)과 그 문도(門徒, 제자)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숙종 29년(1703) 금정산성(金井山城) 축조 후 승군사령부로서 성곽 수비를 맡는 등 지역 방위 체제의 일익(一翼)을 맡았다. 구한말에는 선풍(禪風) 진작을 통한 민족불교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 되었고,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때는 범어사 학림의거(學林義擧)를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1950년대는 동산(東山) 대종사가 주도한 불교 정화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국 근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등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오늘의 종합 수행 도량인 총림(叢林)으로 발전해 왔다.

범어사 입구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돌로 만들어진 인도, 우측에는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등을 돌리면 등나무군락으로 갈 수 있는 작은 길도 만들어져 있다. 만약 범어사를 처음 걸어왔다면 범어사를 다 둘러본 뒤 여기로 걸어가 보는 것도 추천한다.

왼쪽부터 화엄종찰(華嚴宗刹), 선찰본산(禪刹本山) 금정총림(金井叢林) 율찰본산(律刹本山)

범어사 입구의 인도와 차도를 나누는 곳에 위치한 비석이 있다. 여기에는 범어사를 나타내는 4개의 구가 적혀 있다.
범어사는 처음에 의상대사가 화엄종(華嚴宗) 사찰(寺刹)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화엄종찰(華嚴宗刹)이라는 글자가 맨 앞에 적혀 있으며, 그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율찰본산(律刹本山)과 선찰본산(禪刹本山)이라고 적혀 있어 범어사가 선(禪, 참선)과 율(律, 계율)이라는 수행 방법을 오래전부터 행한 중심적인 절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정총림(金井叢林)이라는 구절로 금정산에 있는 총림임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도보로 걸어올라 가면 좌측에 이렇게 많은 비석들과 사리탑이 있다. 그러나 평소에도 문이 잠겨 있기에 갈 순 없는 것 같다.

석등 뒤쪽에는 작은 우물 같은 곳이 있다. 그 옆엔 붉은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가다 보면 아래와 같이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돌도 땅에 박혀 있고,

문성준(文聲駿) 이초홍(李超泓) 강원선(姜元善) 이기영(李基永) 이근우(李根雨)
  우(于)

더 올라가면 범어사(梵魚寺)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세워져 있다. 아래는 안내문 설명이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옛날에는 사찰의 입구에 도량의 경계를 표시하는 깃발이 있었다.
당(幢)이라고 불리는 이 깃발은 나무, 철 등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뜻하는 당간(幢竿)에 달렸으며, 당간은 한 쌍의 돌기둥 즉, 당간지주(幢竿支柱)에 의해 고정되었다. 고려시대 말기 또는 조선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절의 경계를 표시했던 깃발 당과 그 당을 달았던 당간, 그리고 그 당간을 지지하던 당간지주의 모습 예시 (출처 : http://www.hongcheonnewstoday.kr/78106)

지금 범어사에는 당간지주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실제론 그 당간지주에 지지되어 있던 당간, 그리고 그 당간에 걸려있건 깃발 당 혹은 번이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당간지주를 지나 조금 올라오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원효암, 대성암, 금성암, 템플스테이, 범어사 등산로(북문), 해우소(화장실)가 나오며, 쭉 올라가면 범어사 대웅전, 보제루, 천왕문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안내를 해주는 하마비(下馬碑)가 여기에 세워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보면 오른쪽 계단을 통해 (구) 성보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지금은 범어사에서 내려가는 길에 새로 성보박물관을 세웠기에 이 건물은 자주 열지는 않는다고 한다.

성보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탑(좌측)과 성보박물관(우측)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래 오늘까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 국가 및 지방문화재로는 4점, 유형문화재 23점, 문화재자료 16점, 민속자료 1점이 있다. 성보박물관은 이러한 성보(聖寶, (주로 불교의) 성스러운 보물)들을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할 목적으로 2003년에 개관되었다.

개관시간 : 09:00~17:00
점심시간 : 12:00~13: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설, 추석
요금 : 무료

여기서 다시 원래 길로 돌아오면 큰 문 하나가 보인다.

조계문(曹溪門)
보물 제1461호(2006.2.7)

가람(伽藍)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 중의 첫째 문으로 산문(山門)이라고도 하며,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서서 지붕을 받치므로 일주문(一柱門)이라고도 한다. 조계문(曹溪門)은 기둥 2개만으로 지지가 되는 여느 사찰의 일주문들과 달리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 4개를 세워서 3칸을 형성했다. 한국 사찰에서는 그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광해군 6년(1614) 묘전(妙全)화상이 창건한 후 숙종 20년(1694)에 수리했으며, 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교체해서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大雄殿)을 지은 조헌(祖軒) 스님이 도대목(都大木)을 맡았던 까닭에 두 건물의 법식이 거의 동일하며, 조선 중기의 다포식(多包式) 건축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본전으로 진입하기 위한 첫 번째 문인 조계문이다. 이 문을 지날 때 불자라면 법당을 향해서 손을 모으고 반배를 해야 한다고 한다.

구미 수사다 일주문(좌측), 함양 장수사 일주문(가운데), 순천 선암사 일주문(우측) (출처 : 불교저널)

절의 첫번째 문을 대게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문'이라는 뜻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일주문은 위 사진처럼 기둥 2개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범어사의 일주문인 조계문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큰 바위(자연암반) 위에 돌로 기둥 4개를 세워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천왕문(天王門)

가람(伽藍)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 중 둘째 문으로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동서남북 네 방향의 문을 지키는 신중(神衆)인 사천왕(四天王, 동 : 지국천왕(持國天王), 서 : 광목천왕(廣目天王), 남 : 증장천왕(增長天王), 북 :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모셨다. 흔히 3칸 건물로서 좌우 협칸에 각기  2구씩의 천왕상(天王像)을 모시고 가운데 어칸은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한다. 숙종 20년(1694)에 자수(自修) 장로가 창건했으며, 1989년에 중수한 건물이 최근 화재로 불타 없어져서 2012년에 새로 지었다.

일주문을 지나며 모든 번뇌를 하나로 모았다면, 이제 사천왕천을 지키는 사천왕에게 인사를 드린다. 이 문을 지날 때도 불자라면 법당을 향해서 손을 모으고 반배를 해야 한다고 한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좌측)과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우측)

지국천왕은 수미산의 동방의 불법(佛法)을 지키며, 주로 비파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다문천왕은 수미산의 북방의 불법을 지키며, 주로 보탑(寶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좌측)과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우측)

광목천왕은 수미산의 서방의 불법을 지키며, 주로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증장천왕은 수미산의 남방의 불법을 지키며, 주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불이문(不二門)

가람(伽藍)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 중 셋째 문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불이(不二)란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관점을 뜻한다.숙종 20년(1694)에 자수(自修) 장로가 창건했으며, 가운데 어칸 좌우 기둥에는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가 쓴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라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신광의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등어서면서부터 분별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산사(山寺)에 들어서는 마음 자세를 지적한 것이다. 2012년 보제루(普濟樓)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때 철거한 후 다시 지었다.

두가지가 아닌(不二) 진리(하나의 진리)인 해탈(解脫)을 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정리하는 해탈문이다. 절에 따라 불이문이라고도 하며, 범어사는 그렇게 부른다.

보제루(普濟樓)

보제(普濟)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보제루는 많은 대중을 위한 법회용 건물로 사용된다. 흔히 이러한 중정누각(中庭樓閣)은 대웅전(大雄殿) 앞마당 입구의 축대에 걸쳐서 벽체가 없는 2층 별서식(別墅式)으로 짓지만, 이후로는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친 경우가 많다. 이 건물도 숙종 26년(1700) 자수(自修) 장로가 별서식 누각으로 창건했으나 순조 12년(1812) 중건 때 단층으로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벽체가 처지고 일본식으로 일부 변경되었다. 2012년에 전통 법식으로 복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중창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서부터는 본당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보제루의 1층을 걸어 올라가 지나가면 넓은 광장이 나온다. 이 보제루의 2층에서는 법회가 열린다.

종루(鐘樓)

종루(鐘樓)는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교화하기 위해서 소리와 관련된 불전사물(佛殿四物, 지옥의 중생을 위한 범종(梵鐘), 축생을 위한 법고(法鼓), 물고기를 위한 목어(木魚), 날짐승을 위한 운판(雲板))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숙종 26년(1700) 명학(明學) 대사가 보제루를 지으면서 종루를 대웅전 앞마당 왼편으로 옮겨 지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금에 이른다.

보제루 밑의 계단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보이는 종루. 이 종루 아래에는 기념품샵이 자리하고 있다.

종루에서 180도를 돌아 절 안에도 지주 같은 돌기둥들이 여럿 서있었다.

이 작은 문에는 영주선재(瀛洲禪齋)라고 적혀있다. 동해 상에 있다는 영주산(瀛州山)의 신선처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부처를 모시기 위해 참선을 하기 위한 선재(禪齋) 혹은 선원(禪院)이다. 이곳은 수행용 건물이기 때문에 일반 방문객은 출입할 수 없다.

영주선재의 바로 왼편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이 있다.

비로전(毘盧殿)과 미륵전(彌勒殿)

비로전(毘盧殿)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 즉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비로자나는 태양처럼 널리 비추는 분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이다.
미륵전(彌勒殿)은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 미륵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으로 미륵불은 먼 미래에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에서 성불(成佛)하여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부처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사찰 창건 때부터 있었던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숙종 9년(1683) 해민대사(海敏大師)가 중창했고, 경종 원년(1721) 진열(進悅) 스님 등이 중수했다.

비로전의 왼편에는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있다.

부산 범어사 삼층 석탑

보물 제250호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넣고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불교 특유의 조형물을 가리킨다.
부산 범어사 삼층 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기단에 코끼리 눈 모양인 안상(眼象)을 큼직하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의 난간과 맨 아랫부분의 돌은 일제 강점기에 수리하며 추가한 것으로, 이 때문에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비례가 불균형한 편이다. 또한 얇은 지붕돌은 통일 신라 말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비로전과 미륵전을 등지면 이런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 중 9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오랜 세월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웅전 아래의 큰 터의 왼쪽을 보면 범어사 업무나 행사와 관련된 건물도 있다.

이제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 대웅전을 찾아갔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

보물 제434호

대웅전(大雄殿)은 절의 중심 건물이며,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모신 곳이다. 대웅(大雄)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로, 큰 영웅, 곧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가리킨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에는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이, 양옆에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과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 모셔져 있다.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다포 맞배집이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이 새겨진 기와를 보면 광해군 5년(1613) 묘전 화상이 지었고,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숙종 6년(1680) 조헌 스님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웅전의 가운데 문은 스님들이 쓰는 문이기 때문에, 일반 불도나 방문객은 대웅전 양 옆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웅전에서 넓은 마당을 본모습. 보제루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실제로 금강계단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계율을 주는 의식을 하는 곳이다. 그에 따라 이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단 보제루는 곧 계를 설하는 곳이라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한없는 눈과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은 고난에 빠진 중생을 끝없는 자비로 구제한다고 하여 널리 신앙되었다.
광해군 6년(1614)에 묘전(妙全) 화상이 창건했으며, 지금 건물은 화려한 익공식(翼工式) 맞배집으로서 1800년대 건립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의 오른편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의 뒷편에는 범어사에 부임했던 조사(祖師, 종파를 연 사람, 절을 세운 사람)들을 모신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안에는 역대 조사들 중 중요하다고 여겨진 분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생들이 지옥에 가지 않게 구제하고 이승에서 터를 닦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는 지장전(地藏殿)이 대웅전 바로 왼편에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이렇게 큰 돌이 있고, 그 아래 작은 물이 나오는데, 약수터처럼 어르신들께서 지나가며 목을 축이곤 하신다.

팔상독성나한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3호(2006.7.3)

이 건물은 팔상전(八相殿), 독성전(獨聖殿), 나한전(羅漢殿) 세 불전을 연이어 하나의 건물 속에 꾸민 특이한 불전이다.
팔상전(八相殿)은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하고 있으며, 독성전(獨聖殿)은 홀로(獨)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 즉, 독성(獨聖)을 모셨으며,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16나한(十六羅漢)을 모셨다. 원래 팔상전과 나한전은 광해군 6년(1614) 묘전(妙全)화상이별도 건물로 지었으나 광무 10년(1906) 학암(鶴庵) 대사가 두 불전 사이에 독성전을 꾸며서 세 불전이 한 건물에 포함되게 했다. 특히 말세(末世)의 미륵신앙과 관련 있는 독성전의 반원형 문얼굴(문틀)과 선남선녀의 초각, 화려한 솟을빗꽃살문에서 이 지역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엿볼 수 있다.

팔상독성나한전의 오른쪽 뒤편에 위치한 산령각(山靈閣)은 금정산의 산신상(山神像)과 호상(虎像)을 봉안하고 모시고 있다. 잘 알겠지만 토속신앙이 불교로 융화되며 나타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팔상독성나한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내려와 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서지전(西持殿)이라는 곳이 있다. 왼쪽 사진 기준 왼쪽에 있는 기와집이 바로 서지전이다.

팔상독성나한전 왼편의 작은 돌길과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는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약사전에서 팔상독성나한전까지 내려와 또 다른 입구로 가봤다. 위치는 위성사진에 표시해 뒀다.

멀리서 봐서 그렇지 이 문은 크고 웅장했다. 특히 문에 그려진 사천왕의 눈빛은 더 무서웠다. 이 문을 나서 위로 올라가면 범어사 대성암과 범어사 금강암이라는 2개의 암자가 나온다.

여긴 그 큰 문에서 살짝 내려와서 찍은 사진! 까치가 귀엽닿ㅎ

다시 돌아와 미륵전과 종루 사이의 길로 내려가봤다. 이 길은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주차장에는 설법전이 보인다. 이 설법전에서는 다양한 법회가 열리고 있으며, 금강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한 <범어사 금강반야바라밀경변상>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방문해보고 싶다.

범어사 은행나무

지정번호 : 보호수 2-11-16-0-1(1980.12.8)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수령 : 580년
수고 : 25m
나무둘레 : 6.6m

이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후 노승 묘전(妙全) 스님께서 옮겨 심은 것으로 수령이 약 580년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무의 은행이 열지 않아 3백 년 전에 절에서 맞은편에 은행 수나무 한 그루를 심어줘 그 후부터 한 해 약 30여 가마의 은행을 따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90년 땅벌을 쫓기 위해 연기를 피운다는 것이 그만 나무에 불이 붙어 아직까지도 불에 탄 자국이 역력하다. 이 나무는 범어사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며 소원성취를 비는 수호목으로서 범어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장수목이며 사랑과 관심으로 보호해야 할 보호수이다.

설법전을 뒤로하고 돌면 범어사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자라다가 임진왜란이 지나고 나서 옮겨 심어져 약 430여 년간 이 자리에서 자라왔던 은행나무라고 한다. 다만 1990년에 실수로 불이 붙은 뒤, 잎과 열매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가을에 은행이 떨어질 때쯤 한 번 더 보러 갈까 생각 중이다.

 

어릴 때부터 종종 찾아온 범어사였지만, 이렇게 범어사를 제대로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교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번 탐방으로 기본적인 절의 구조를 익힐 수 있었고, 어떤 곳에서 누구를 모시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또 다른 절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를 잘 기억하고, 오랜 세월 한국인들과 함께 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려고 한다. 어쨌든 바람도 선선했고, 마음도 편안해졌던 탐방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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