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대학교 인문관
부산대학교 구 본관 | 인문관의 연혁 |
국가등록문화재 제641호 1동/2,631㎡ 부산대학교 구 본관은 1957년 9월에 착공하여 1959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준공 당시 1층은 문리대(文理大, 문과 및 이과로 구성된 단과대), 2층은 총장실 및 대학본부와 법대(法大), 3층은 상대(商大) 등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법대, 상대 등은 다른 건물로 옮기고 문리대와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그 뒤 자연대도 분리되어 옮기고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구 본관은 2004년부터 2년간 원형 복원을 위한 공사를 거쳐 인문관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인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프랑스에서 귀국한 뒤 1950년대에 설계한 세 개의 대학 건물 중 첫 번째 건물로, 설계 당시 세 가지 조건을 고려하였다. 우선, 구 본관은 금정산을 등지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경관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건물이 외부 공간을 끌어안도록 'ㄴ'자 형태로 설계하였다. 두 번째는 캠퍼스를 통합하는 상징적 구심점이 되도록 설계한 점이다. 둥근 모퉁이를 곡선으로 부드럽게 처리하거나 건물 내부에서 캠퍼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하였다. 건물의 전면부에 있는 넓은 유리창은 강렬한 햇빛을 흡수해 건물 내부에 빛의 향연을 연출하도록 하였고 후면부에 있는 모자이크 창은 복도마다 햇볕의 온기를 불어넣도록 하였다. 세 번째는 건물에서 건물로 손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필로티 구조(건축물의 1층은 기둥만 서는 공간으로 하고 2층 이상에 방을 짓는 방식의 근대 건축 방법)로 설계한 점이다. 이러한 구조를 선택한 것은 이곳을 드나드는 젊은 지성들의 자유로운 발상을 한껏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부산대학교 구 본관은 학교의 지형적 특성, 자연과의 조화, 이용자의 편의성까지 고려한 건물로, 한국 근현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김중업의 초기 건축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 인문관은 본래 부산대학교의 본관 건물로서 초대총장 윤인구의 구상과 후원회장 박선기의 재정적 지원과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의 설계로 건립되었다. 1957년 9월에 착공하여 1959년 10월에 준공을 본 이 건물은 1950년대 불란서(프랑스) 현대건축의 대가 르 꼬르비제(Le Corbusier)에게 사사를 받고 돌아온 김중업이 설계한 최초의 작품으로서 우리나라 초기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한다. 1995년 11월 대학본부가 새로 건립된 현 본관 건물로 이전함에 따라 인문대학의 전용 건물이 되면서 인문관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97년 이후 노후에 따른 안정성의 우려로 재건축이 검토되어 오다가 이 건물의 역사성과 조형적 특성을 감안하여 2002년 11월 대수선을 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2004년 6월부터 대수선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 12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
인문대학의 정문이다. 정문답게 입구엔 '인문대학'과 '인문관(人文館)'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우측 외벽 아래에는 이 부산대학교 인문관이 근대건조물 2012-1호로 지정되었다는 현판도 붙어있다.
인문관 정문쪽 계단은 이렇게 T자(혹은 T자)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중앙 계단의 왼편에는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곳들이 주로 위치해 있고, 오른편에는 강의실이 있다.
정문이 아닌 가운데 큰 입구도 있다. 이쪽으로 쭉 올라가면 또 다른 인문관 뒷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계단을 오르면 인문대 교수연구동, 제2공학관 등으로 향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길의 양옆에는 이렇게 나무와 풀들이 심어져 있다. 특히 왼쪽엔 고현철 교수 추모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2. 고현철 교수 추모 조각상 '부활'
인문대 정문쪽에는 '고 고현철 교수 추모 조각상'을 안내해 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동색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추모 조각상 앞면 | 추모 조각상 뒷면 |
민주화의 불꽃 고 고현철 교수 부활 눈을 닫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야위어가는 햇살입니까. 바람도 흐릿한 바람이 흘러갑니다. 떠도는 말들이 사람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어머니, 스스로 익어가는 것은 참 아름답습니다. 돌아보면, 속을 캐내지도 않은 말로 몇 번씩 부드러운 눈빛을 가두었습니까. 푸른 물결이나 다스리는 섬에 머무르겠습니다. 드문드문 잡풀의 깊은 우물에서 고독한 말들을 퍼올리겠습니다. 어머니, 그것의 큰 뿌리까지 아주 만나서야 눈을 열겠습니다. 가슴 가득 햇빛 내비치는 물이 되어 제가 가는 어디에나 들어가겠습니다. 고현철 시집 <평사리 송사리> 중에서 | 고 고현철 교수 약력 1961년 : 6월 10일, 제주도 성산읍에서 태어났다. 1980년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 : 12월 28일, 학부 시절부터 함께 문학활동을 해 왔던 소경애 여사와 결혼했다. 1990년 : 동인지 <지평> 10집에 6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1991년 : 비평 계간지 <오늘의문예비평>에 <인식의 변화와 균형잡기>를 쓰면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 논문 <한국 현대시의 장르 패로디연구>로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2001년 : 비평집 <비평의 줏대와 잣대>를 출간했다. 2005년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저서 <탈식민주의와 생태주의 시학>으로 독보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다. 2006년 : 부산작가회의 이사를 맡아 지역문학과 문단의 활성화에 힘썼다. 2010년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2011년 :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영화의 질적 수준 제고에 기여했다. 김준오시학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김준오 시학의 계승과 발전에 힘썼다. 2014년 : (사)요산기념사업회 이사를 맡아 부산 지역 문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요산문학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데 힘썼다. 2015년 : 8월 17일, 대학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추모 조각상 앞면에는 그가 쓴 시가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일대기가 간략히 적혀 있다.
추모 조각상 정면 기준 왼편 | 추모 조각상 정면 기준 오른편 |
2016.8.17. 고현철 교수 추모사업회 조각 김정혜 |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직선제로 선출된 부산대학교 총장이 처음의 약속을 번복하더니 최종적으로 총장직선제 포기를 선언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총장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부산대학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대학의 자율성은 없고 대학에서 총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있다는 점이다.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 역할을 부산대학교가 담당해야 하며,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각성이 되고 진정한 대학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가 굳건해 질것이다. -고현철 교수 유서 중에서- |
추모 조각상의 왼편엔 조각과 관련된 정보가, 오른편에는 생전 그가 자신을 희생해 총장직선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유서의 일부가 적혀 있다.
보면 알겠지만, 이미 2010년부터 <국립대 선진화 방안>의 총장 직선제 폐지 시행과 그에 따른 정부의 재정 압박으로 차례차례 국립대들도 총장직선제를 폐지하고 총장간선제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부산대학교만이 완전 총장직선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대학교는 교육부의 재정 압박으로 인한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고, 또 직선제로 뽑은 교수를 정부에서 임명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간선제를 추진하게 된다.
그렇게 2015년 8월 17일 오후 3시경, 고현철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대학본관 4층의 국기게양대에서 총장 직선제 수호를 외치며 투신했고, 결국 사망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대학민주화를 위해 교수가 투신한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이 일은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계까지도 큰 영향을 받았다.
고인(고 고현철 교수)의 희생으로 부산대는 전국 국립대학 중 유일하게 총장 직선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 정신을 지켜낸 표상이 될 수 있도록 그의 정신을 오래도록 기려 나갈 것이다.
- 전호환 제20대 부산대학교 총장
그의 희생은 결국 부산대가 직선제를 유지하는데 큰 힘을 보태주었고, 그렇게 2015년 11월에 직선제로 선거를 치룬 부산대는 전호환 조선해양공학과 교수가 70%대의 득표율로, 2016년 5월 제20대 부산대 총장으로 당선되게 된다. 이는 곧 정부와 교육부의 간선제 추진 움직임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직선제로 선출된 국립대 총장 선출 및 임명이라는 타이틀을 앉게 되었다.
그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추모식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립대 총장 후보자 선출에 있어서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하겠다. 그리고 각종 재정지원 사업을 통해 간선제를 유도하는 방식도 폐지하겠다.'고 말해 고 고현철 교수의 뜻을 널리 펼칠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후 직선제로 치러 2020년 5월부터 정부의 임명을 받아 부산대 총장으로 부임된 차정인 부산대학교 제21대 총장도 그를 기리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 총장 직선제가 왜 필요하냐고요. 직선제는 대학 총장이 민주적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총장선거 과정에서 대학발전 방안을 놓고 경쟁하면서 정책추진 동력이 생겨나고 대학민주주의 기반이 형성됩니다.
(...)
고 교수와 사귀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일 이후에 오래 사귄 사람과 같은 느낌입니다...
- 차정인 부산대학교 제21대 총장
부산대학교의 처음부터 함께해 온 현 인문관. 그리고 그 곳에서 배우고 교수가 되어 대학교와 세상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문관에서 목숨을 내놓은 고 고현철 교수. 인문관을 지었던 사람들과, 그곳에서 가르쳤던 사람들, 그곳에서 배웠던 사람들, 그곳에서 미래를 위해 희생한 교수님. 그들의 이야기를 넌지시 들으며 다시 한 번 인문관을 거닐었을 땐, 지금 지나가며 귓가에 들리는 하하호호 웃는 소리, 길도에서 사그작 사그작하는 연필과 볼펜 소리들. 이 이 모든 세월을 거쳐 얻어진, 그리고 먼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 만들어지는 지금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지금의 소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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