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에서 살다 민족을 위해 떠난 박씨 자매들의 이야기, 박차정 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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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동래에서 살다 민족을 위해 떠난 박씨 자매들의 이야기, 박차정 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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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민역 1번 출구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꺾어 동래고등학교 정문 방향의 큰길로 간 뒤, 두 번째 왼쪽 골목으로 갔다가 바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박차정의사생가를 찾을 수 있어요!

다행히 역에서 내려서부터 이정표와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입구 쪽에서 이렇게 꺾으면 이런 통로가 나와요.

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 생가 안내문 박차정의사 생가 관람안내문
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 생가
일제강점기 여성의 몸으로 국내뿐 아니라 중국 곤륜관 전투에서도 직접 참전하는 등 일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박차정의사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2005년 7월 복원하여 개방하였다.
관람시간 : 화~일요일, 10:00~17:00
점심시간 : 12:00~13:00
휴장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1월 1일, 명절 연휴
문의처 : 박차정의사 생가 (051-)556-0527
              문화시설사업소  (051-)550-6601~4
              문화관광과(해설예약) (051-)550-4082

항일 독립운동가 삼 남매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의 이야기가 적힌 판이 있는 이런 작은 공원이 이어집니다.

항일 독립운동가
박문희(朴文熺) 의사
(1901.10.21.~미상)

서기 1901년(광무 5년) 10월 21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복천동 405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 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蓮, 1883~1971) 사이 3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14년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내성초) 및 1919년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를 졸업하였다. 동래고보 재학 중이던 1918년 1월,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인 부친 박용한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종교활동(1919~1925)
당시 모친 김맹련은 성결교 동래복음전도관(현 온천중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문희는 1919~1922년 성결교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 수학(11회 졸업) 후, 경기 안성성결교회, 경남 통영성결교회, 서울 독립문성결교회 등지에서 개신교 목회자(성결교 전도사)로 1925년까지 시무(始務)하였다. 경성성서학원 동기이던 경북 현풍 출신 이상철(李相澈, 1897~1935)의 주선으로 1924년 이상윤(李相潤)의 장녀 이도금(李道今)과 혼인하였다. 이도금은 당시 미국 북장로교 운영
의 대구 신명여학교(현 신명고)를 졸업한 바 있다.

사회운동(1925~1930) : 청년연맹, 신간회
경남 동래에서 1925년 11월 동래청년연맹 창립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 경남 마산에서 경남청년연맹 조직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사상단체 동래 혁파회(革波會)를 조직, 서무부 위원으로 경제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하였으며, 1927~1928년 일본 니혼 대학(日本大學, 1903~)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였다.
1929년 1월 신간회 동래지회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및 본부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 부산대표로 참가, 중앙상무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의 검속을 받았다. 또한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도모하다가 (12월에)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자 단식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임 되었으나, 동년 12 (23일) 신간회를 탈퇴하였다. 박문희는 신간회 운동이 이념투쟁보다는 온건화를 통한 민중계목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신간회 우경화 경향을 비판하던 강격파의 공격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지원운동(1932~1934) : 의열단
1932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외당숙 김두봉(金枓奉, 1889~1961)을 만났고 이후 난징[南京]에서 여동생 박차정과 매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은 국민당 정부 자금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교를 준비 중이었는데, 김원봉이 국내에서 동교 지원자 선발을 부탁하자 박문희는 1932년 9월 국내(부산)로 돌아와 10월초 입교생 (다섯 명)을 선발하여 중국으로 보냈고, 본인 또한 동년 10월 말 중국(난징)으로 가서 등교에 합류하였다. 1933년 12월 동교 입교생 추가 모집을 위해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1934년 1월 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1기 졸업생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면서 그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수감 및 은둔(1934~1945)
1934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동년 6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 기간 중(1934년 10월) 동생 박문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1936년 6월 만기 출소 후,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경영하면서 사실상 은거생활에 들어갔으며, 1944년 일제의 압박이 거세어지자 경북 달성 소재 과수원에서 칩거하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였다.

정당 및 언론활동(1945~1950) : 한국민주당, 조선공화당, 대중일보
1945년 8월 상경하여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가 1946년 10월 탈당하여 12월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중심의 민중동맹 경성에 참여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외재당숙 김약수(金若水, 1890~1964) 중심의 조선공화당  창당에 참여,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월 부산으로 낙향하여 좌익성향으로 분류되던 일간지 대중신문을 인수하고 대중일보로 개명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대중신문은 김두봉의 외사촌이자 박일형의 장인 김형기(金炯璣, 1896~1950)가 1945년 12월 창간하였으나, 김형기는 사찰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1949년 10월 박문희는 대중신문을 김지태(金智泰, 1908~1982)사장의 부산일보에 합병시키고 사장에서 사임하였다.

1950년 6월 서울에서 체류하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2018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항일 독립운동가
박문호(朴文昊) 의사
(1907.10.16.~1934.10.3.)

서기 1907년(융희 원년) 10월 16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복천동 405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 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蓮, 1883~1971) 사이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18년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내성초) 졸업 즈음,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 부친 박용한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사회운동(1925~1929) : 동래청년동맹
1924년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취업하였으며, 1925년 동래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형 박문희와 당숙 박일형(朴日馨, 일명 박공표(朴孔杓), 1904~?)이 당시 동래지역 청년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일형은 1919년 동래 기장 지역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5년 동래청년연맹 결성을 주도, 1926년 7월 동래청년연맹 상무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 2월 동래청년동맹 결성을 주도, 5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 경남청년연맹 집행위원 및 순회강연대원, 8월 동래노동조합 정치문화부 간사, 1929년 1월 신간회 동래지회 사무재정부 간사, 4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당활동(1929~1931) : 의열단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1929년 3월 동래누룩조합 공금 1,500원을 가지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다. 5월 상하이[上海]에서 인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외당숙 김두봉(金枓奉, 1889~1961)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정해리(鄭海理)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베이징에 있던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박건웅을 소개받았다. 박건웅의 소개로 9월에 화북대학 사회학부에서 수학하면서 11월 김원봉과 박건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가입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베이핑[北平] 지부 선전부 책임자로 있던 1930년 2월, 국내 근우회 활동으로 투옥되어 병보석 중에 있던 여동생 박차정을 중국으로 망명시켰다.

수감(1932~1934)
1931년 10월 베이징 주재 일본공사관의 단속을 피해 톈진[天津]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하던 중, 12월 조선인의 밀고로 톈진 주재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다. 이때는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및 부설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관련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단지 1929년 동래누룩조합 공금 횡령만이 문제가 되어 1932년 6월 나가사키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우라카미[浦上]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3년 9월 만기 출소하였다.
하지만, 출소 1개월만인 1933년 10월 초,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혹은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사건)을 수사하던 일경에게 관련 행적이 드러나게 되어 동래 자택에서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4년 4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9월 초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다.

1934년 10월 3일 부산 동래에서 사망하였으며 동래 청년 단체 주도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2019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선 부산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朴次貞) 의사
(1910.5.8.~1944.5.27.)

서기 1910년(융희 4년) 5월 8일 당시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부(복천동 417번지)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 1883~1918)과 모친 김맹련(金孟蓮, 1883~1971) 사이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박용한은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출신으로, 1918년 1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로 다대포에서 자결하였다. 1925~1929년 당시 호주 장로교가 운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에서 수학(29회 졸업)하였다. 재학 중 교지 <일신>에 게재된 소설 <철야(徹夜))>, 시 <개구리 소래>,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을 통해 식민지 조국 현실을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시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회운동(1924~1930) : 조선소년동맹, 근우회
당숙 박일형(朴日馨)이 당시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있던 가운데, 1924년 5월 박차정은 일신학교 입학 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재학 중에도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 동래지부, 동래노동조합, 신간회 동래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일신학교 졸업 후 1929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상무위원으로서 조사연구부, 선전부, 출판부 등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동년 2월 부산방직 파업사건 주도 혐의로 동래에서 다시 피체(被逮),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항일무장투쟁(1930~1944) : 의열단
병보석 중이던 1930년 2월말 첫째오빠 박문희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 당시 중국에 있던 둘째오빠 박문호의 주선으로 의열단에 합류,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3월 의열단 의백(義伯) 김원봉(金元鳳)과 혼인하였다.
1932년 중국 난징[南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 부녀부주임으로 활동하고, 1936년 지청천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단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선전홍보를 담당하며, 산하 군사조직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던 가운데,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江西省] 쿤륜산[崑崙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重慶]에서 사망하였다.

1946년 2월 김원봉은 환국하여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본가가 있는 경남 밀양 감천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렇게 삼남매의 역사적 행보를 기록한 패널과 바로 위 사진 속의 그들을 기리는 그림과 초상화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박차정의사 생가입니다!문 양쪽에 현판이 있는데, 좌측에는 '박차정 의사 생가'라고 적혀 있으며 우측에는 '박문희 박문호 의사 생가'라고 쓰여 있어요. 문 앞 우측에는 리플릿 배부대가 있어, 작은 문을 열고 읽어 볼거리를 받을 수 있으며, 좌측의 안내판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 생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25
관리자 : (사) 박차정의사 숭모회

1910년 5월 8일 부산 동래에서 출생한 박차정의사는 1929년부터 국내에서 여러 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등 1944년 34세의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한국 여성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활동한 점이 인정되어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상하였으며 의사의 숭고한 넋을 기려 생가를 복원하였다.

그의 집안 풍경입니다.

 

검소하면서도 깔끔해 보이네요.

 

안에는 박차정 의사의 기록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걸려 있던 사진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전에 답사도 갔었 2001년에 금정문화회관 부지에 세운 박차정 의사상(https://mspproject2023.tistory.com/930) 건립 당시 찍은 사진이네요?! 그곳을 갔을 때 동상의 웅장함에 한 번 마음이 울렸고, 또 힘들었을 외국 생활 속에서도 민족을 위해 힘썼던 그의 노력에 또 마음이 울렸었습니다. 그의 약력을 그곳에서 살짝 살펴보고 이곳을 둘러봤는데,  동상에선 그의 영웅적 면모를 느꼈다면, 이 집에선 그의 인간적인 면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집 안에는 박차정 의사와 관련된 기록을 찍어둔 사진과 간략한 설명들이 적혀 있어요.

집 밖의 마루에는 이렇게 시설방문기념 추억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종이 한 장에 2개의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시네요~

저도 기념으로 찍어봤습니다~ 보들보들하면서도 까칠까칠한 종이에 박차정의사의 초상화와 생가가 새겨진 스탬프를 찍었어요!

살짝 걸터 앉아서 입구 쪽을 바라봤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일본인이 조선인을 탄압하는 걸 봤을 박차정은 이 마루에 드나들며 민족을 위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과연 그뿐일까요? 그도 사람이었으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도 했을 거고, 친구와의 갈등을 어떻게 풀 지 고민도 했을 거고, 하여튼 이곳에서 하늘, 나무와 풀, 별과 달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가족과 또 친구와 지인과 또 다양한 시시콜콜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아요..

이 마당의 위치는 지도에서 이렇게 찍혀 있습니다.

문 입구 바로 옆에는 박차정 의사의 캐리커쳐와 그의 일대기, 그리고 그녀와 관련된 기록이 세워져 있어요.

한 번 가야지 가야지하다 오늘 드디어 시간을 내서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박차정 의사 뿐 아니라 그의 오빠들 박문희 의사와 박문호 의사의 흔적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핍박의 상황에서 자매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꿋꿋이 후손들이 더 이상 힘든 삶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해 준 분들께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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