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송상현공 기념광장에 위치한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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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부산 송상현공 기념광장에 위치한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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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광장
송상현광장이 자리한 이곳은 에부터 '모너머 고개'라 불렸다. 지금은 고개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평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이곳을 경계로 부산의 안과 밖이 나뉘었다. 육지와 바다, 동래부와 부산부, 금관가야로부터 이어져 온 꼿꼿한 선비 정신과 바다를 향한 거침없는 개척정신이 이곳을 중심으로 갈리었다. 이곳은 부산의 다양한 정체성이 나뉘는 경계지점이자, 다시 하나로 모여드는 중심이었던 것이다. 1978년 송상현 공의 동상을 이 자리에 모신 것도 이러한 역사성을 감안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곳은 차량통행을 위한 도로로 바뀌었다. 1972년에는 도시 시설 확충을 대비하여 약 100m 폭의 도시계획시설(도로·광장)로 결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산시민들은 이곳이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열망하였다. 이러한 시민적 염원을 부산시가 수렴하여 2010년 8월 이 땅을 광장으로 조성키로 결정하고, 명칭과 설계를 공모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송상현광장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땅의 역사를 후세에게 알려 더 밝은 미래를 이루어가는 공간으로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광장의 조성 내용을 보면 송상현 공과 모너머 고개에 얽힌 역사성을 체험하고 기념하는 역사마당, 시민들의 다이내믹한 활동공간을 담을 수 있는 다이내믹 부산마당, 시민들이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며 삶의 품격을 누릴 수 있는 문화마당으로 조성하였다.

이 광장은 완성형의 광장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진행형 광장이다. 이 광장의 주인은 오로지 시민이다. 시민적 염원에서 시작되어 시민들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광장으로 탄생되었기에, 이제 부산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송항현광장을 미래형 광장으로 가꾸어 나가기를 희망한다.

송상현 광장 북쪽의 큰 횡단보도를 건너면

송상현공 기념광장이 있습니다.

동상 정면 동상 뒷면
충무공송상현선생상 제자(題字) 박정희

헌납 최석원
건립문 김정한
약전(略傳) 김석희
조각 김정숙
글씨 오제봉

건립문을 쓴 분은 동래고등학교 출신의 요산 김정한입니다. 지금도 그를 기리는 요산문학로(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346)가 금정구 남산동에 위치해 있죠. 또한 이 동상 설립 자체가 당시 국가적 사업이었던 지라 동상의 제목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었다고 합니다.

 

요산 김정한과 그의 고향을 돌아보는 요산문학로

1. 요산문학로 전체 거리 2016년말에 문을 연 도시철도 범어사역 1번출구 인근 팔송로 기점에서 시작해 중간에 팔송사거리가 있는 큰 횡단보도를 건너 금샘로와 팔송로가 만나는 지점까지의 750m

mspproject2023.tistory.com

동상의 뒤에는 3개의 비석이 있습니다. 가장 왼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했던 동래인(현 부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가장 오른편에는 그 전쟁 당시 송상현과 다른 관인들이 북쪽을 향해 앉아 요배하며 순절하게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비석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요. 왼편에는 <충렬공송상현선생약전>이 적혀 있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충렬공송상현선생약전
공의 이름은 상현이요, 자는 덕구이며, 호는 천곡이다. 관향은 여산이며, 현감 복흥의 아들로 일천오백 오십일년 정월 여드렛날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경사에 통달하여 열다섯에 승보시에 장원하고 스물에 진사가 되었으며, 문재가 뛰어나 중망을 얻었다.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 저작, 박 사와 승정원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경성 판관으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지평과 예조, 호조, 공 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질정관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 후의 외직으로 은계 도찰 방, 배천군수에 보임되었다가 내직으로 충훈부의 경력, 사헌부위 집의, 사간원의 사간, 사제감의 정, 군 자감의 정을 거쳐 일천오백구십일년 당상관의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동래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덕망과 신의로서 소임을 다하던 공은 일천오백구십이년 사월 십오일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왜적의 대군 앞 에 혼연히 분기하여 항전을 거듭하다 성과 운명을 같이 하니 때에 공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휘하 성민들도 공의 인품과 절의에 감화되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순사하였다. 공은 임지를 지키기 위해 생명 을 던져 그 책임을 다하려 하였으니 그 충절은 애국애족의 귀감이요, 그 얼은 길이 청사에 빛나게 하였 다. 일천오백구십사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일천육백오십칠년에는 환란을 피하지 않고 임금을 섬김은 충이요, 강적을 맞싸워 공을 세움은 열의라 하여 충렬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일천육백팔 십일년에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 총부 도총관을 겸하는 높은 벼슬로 가증되었다. 한편 난이 끝난 후 사우와 단묘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끊이지 않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천구백칠십팔년 삼월 일일

 비석의 오른편에는 <충렬공송상현선생찬>이 적혀 있어, 임진왜란 즈음 조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송상현과 동래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충렬공송상현선생찬
여기 우리는 무한한 긍지를 느끼며 삼백팔십여년전 임진왜란 당시 오만무쌍한 왜적의 무리와의 치열한 서전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탁월한 판단력과 결사적인 투쟁으로 불멸의 공을 세우고 순사한 민족의 위대한 등불 송상현 공의 모습을 정중히 동상으로 모신다.

조선왕조 초기 빈번한 외적의 위협에 대비하여 자주 국방을 꾸준히 꾀해 왔으나 선조대에 이르러 국사를 맡은 사람들이 부질없이 당파싸움에 휘말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일신의 안일만 노릴 때 조정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공명정대 멸사봉공의 숭고한 신념을 고수하던 성공은 드디어 간악한 무리의 미움을 받아 외침의 위협으로 죽음의 땅이라 일컫던 동네의 부사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부임 이듬해인 선조 이십오년 사월 열나흗날 부산을 함락시킨 왜적의 대군은 다음날 아침 단숨에 동래성에 육박했다.

방비의 부족으로 병사수사는 적을 막지 못하고 민중은 갈바를 모르던 위기일발의 순간에 있어서 문관인 송공은 의연히 나서서 후방의 잔략 수행을 위하여 딴호히 성을 사수하기로 했다.

일찌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던 공이시라 남은 군졸들과 의로운 백성들은 흔연히 공을 따랐으니 이들을 이끌고 최후싸지 싸운 공의 모습은 바로 처절 그것이었다.

워낙 중과부적이라 드디어 거리와 성은 의로운 피로 물들고 공의 심장은 밀어닥치는 적의 칼에 고동을 멎었다. 

부산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어봤을, '송상현'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끝까지 동래읍성을 지키고 순국했던 당시 동래부사였습니다. 이각(李珏)처럼 비교적 높은 공직에 있어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부임한 지역의 국방의 책임을 다하며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그의 충직함과 책임감은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며 아직까지 기려지고 있습니다. 송공단(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024)과 함께 '송상현 광장'도 그런 의미에서 지어진 것 중 하나이죠.

 

일본군에 맞서 결사항전을 한 동래사람들을 기리는 송공단

동래시장의 북쪽에 송공단이 있다. 이 부근에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기를 와봤다면 다른 곳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동래시장 뒤편에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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