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장 관청의 36명의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 기장 공덕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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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장 관청의 36명의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 기장 공덕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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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동문 지역이 위치한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에 기장공덕비군이 있습니다. 원래 기장 이곳 인근 이곳저곳에 있었던 비석들을 도로 확장 등을 이유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기장 공덕비군
조선 때 동래방면에서 기장현청으로 들어오슨 용소골 장소배기를 비롯하여 남문 밖 그리고 종로거리와 현청사 주위에 세뤄져 있던 각종 비석 36기가 도시 확장과 새마을사업 등으로 유실(遺失)될 것을 우려한 공태도(孔泰道) 선생(당시 국제신문 근무,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1972년 기장초등학교 정문 왼쪽에 모아 보존되어 왔다.

2004년 도로 확장을 하면서 동문 앞 현 장소로 옮겨 정비했는데 이 비석들은 현재 기장군의 중요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

행군수이공해륜청덕거사비(行郡守李公海崙淸德去思碑)
(군수 이해륜 청덕거사비)
재임기간 1897년(광무 1) 6월 ~ 1899(광무3) 전후
비신(碑身) 크기 102cm x 37cm x 13.5cm
건립년도 1901년(광무5)
비 정면 내용 행군수이공해륜청덕거사비(行郡守李公海崙淸德去思碑)

복스러운 별 하나 변방에 떨어져 [福星垂衛]
 온 지경이 따뜻한 은혜로 적셔졌네/  [闔境煦儒]
녹미를 털어서 관청을 수리하고/ [捐廩修廨]
강학을 부과하여 유업을 일으켰네/ [謀講與儒]
탄금의 정사가 청렴하고/ [政淸彈琴]
환주의 교화가 두루 이르렀네/ [化洽還珠]
모두가 한입으로 드높여 칭송하니/ [萬口播頌]
어떻게 귀부 위의 비석만 그러하리 [何獨龜趺]
비 뒷면 내용 신축년(1901년) 4월 일
향장(鄕長) 정기대(鄭基大), 수서기(首書記) 김세홍(金世洪), 색리(色吏) 김장홍(金璋洪)

군수이공경우영세불망비(郡守李公敬佑永世不忘碑)
(군수 이경우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1895년(고종 32) 5월 ~ 1897(광무 1) 9월
비신(碑身) 크기 114cm x 41cm x 16cm
건립년도 1896년(고종 33)
비 정면 내용 군수이공경우영세불망비(郡守李公敬佑永世不忘碑)
비 뒷면 내용 ?

행군수엄공신영청덕거사비(行郡守嚴公信永淸德去思碑)
(군수 엄신영 청덕거사비)
재임기간 1905년(광무 9) 전후
비신(碑身) 크기 96cm x 47.5cm x 20cm
건립년도 1904년(광무 8)
비 정면 내용 행군수엄공신영청덕거사비(行郡守嚴公信永淸德去思碑)

정사에 부지런하여 포흠을 소탕하고 [政勤滌浦
은혜를 두루 펼쳐 녹미마저 내놓았네 [思廣捐廩]
모두 한입으로 칭송하여 노래하고 [萬口播頌]
온 고을 경내가 편안히 잠드네[一境安寢] 
비 뒷면 내용 광무 8년 갑진(1904년) 10월 일
향장(鄕長) 김우호(金瑀鎬), 도감(都監) 김병주(金秉冑), 이방(吏房) 최계은(崔啓殷), 색리(色吏) 김병홍(金秉洪)

행현감손공경현청덕선정비(行縣監孫公庚鉉淸德善政碑)
(현감 손경현 청덕거사비)
재임기간 1894년(고종31) 9월~1985년(고종32) 11월
비신(碑身) 크기 113cm x 40cm x 14cm
건립년도 1895년(고종 32)
비 정면 내용 행현감손공경현청덕선정비(行縣監孫公庚鉉淸德善政碑)

고을이 피폐하여 고질이 되어 버려 [邑弊成痼]
좋은 수단으로도 고치기 어렵더니 [良手難醫]
(손)공께서 부임하여 한 번 살펴보신 뒤로 [自公一視]
아전과 현민들 모두 편안해졌다네 [吏民便宜]
청렴하신 마음은 가을 날 강물 같고 [淸如秋水]
온화하신 성품은 봄철 햇볕 같다네 [藹似春陽]
산과 같은 은혜와 바다 같은 덕택을 [恩山德海]
길이길이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永世不忘]
비 뒷면 내용 을미(1895년) 5월 일 세움
좌수(座首) 김형련(金灐鍊), 이방(吏房) 이필신(李馝信), 색리(色吏) 김세홍(金世洪)

행군수홍공재규영세불망비(行郡守洪公在奎永世不忘碑)
(군수 홍재규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1906년(광무10) 전후
비신(碑身) 크기 117cm x 41cm x 13cm
건립년도 1906년(광무10)
비 정면 내용 행군수홍공재규영세불망□(行郡守洪公在奎永世不忘□)

고을은 피폐하고 어려운 춘궁기라 [邑弊春歉]
백성들 쌀독은 텅 비어 허전터니 [民儲磬空]
녹미마저 내놓아 골짝마다 베푸시니 [捐廩谷布]
비석을 세워서 공의 업적 칭송하네 [立石頌公]
비 뒷면 내용 광무 10년 병오(1906년) 8월에 세움
도감(都監)  신백용(辛百容)

행현감오공영석생사단(行縣監吳公榮錫生祀檀)
(현감 오영석 생사단)
재임기간 1892년(고종 29) 10월~1894년(고종 31) 9월
비신(碑身) 크기 77cm x 39cm x 10cm
건립년도 1893년(고종 30)
비 정면 내용 행현감오공영석생사단(行縣監吳公榮錫生祀檀)

?
비 뒷면 내용 ?

행군수구연호영세불망비(行郡守具然浩永世不忘碑)
(군수 구연호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1910년(융희 4) 전후
비신(碑身) 크기 111cm x 41.5cm x 18cm
건립년도 1910년(융희 4)
비 정면 내용 행군수구연호영세불망비(行郡守具然浩永世不忘碑)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격려하며 [勸學勵俗]
옛 정신을 되살려 새 풍토 이루었네 [溫舊達新]
오로지 한결같이 덕치에 전념하더니 [惟德惟一]
(오늘) 아침에 가신마냥 기억이 생생하네 [去若玆辰]
비 뒷면 내용  융희隆熙) 4년(1910년) 2월 세움
감독(監督) 김두창(金斗昌)

행현감이공규선청덕불망비(行縣監李公圭選淸德不忘碑)
(현감 이규선 청덕불망비)
재임기간 1886년(고종 23) 9월~1887년(고종 24) 9월
비신(碑身) 크기 90cm x 42cm x 14cm
(<부산지명총람 제16장 기장군(2001)>에서는 70x42x14cm라고 적고 있다)
건립년도 1910년(융희 4)
비 정면 내용 행현감이공규선청덕불망비(行縣監李公圭選淸德不忘碑)

가진 재산 털어서 부족한 곳 메워 주고 [捐銅苴罅]
황소를 내려 주어 밭갈이 구휼하였네 [賜牛恤耕]
한 조각 비석을 특별히 세워서 [片石特立]
아름다운 명성을 영원토록 전하리라 [永壽令聲]
비 뒷면 내용 광서(光緖) 13년 정해(1887년) 9월 일 남면(南面)에서 세움
면수(面首) 윤대규(尹大奎), 주사(主事)  김성옥(金成玉)·□□□□, 도감(都監) 노광정(盧光鼎), 면리(面吏)  김완□( 金完□), 방□(房□)성대일(成大一)

병방정태망무휼고정만세불망지비(兵房鄭泰望撫恤庫丁萬世不忘之碑)
(병방 정태망 무휼고정만세불망의 비)
재임기간 ? ~ ?
비신(碑身) 크기 74cm x 39cm x 16cm
건립년도 1729년(영조 5)
비 정면 내용 병방정태망무휼고정만세불망지비(兵房鄭泰望撫恤庫丁萬世不忘之碑)

옹정(擁正) 7년 기유(1729년) 정월 일
비 뒷면 내용 X

안내판에 따르면 병방(兵房)은 군영이나 지방관아에서 병전(兵典) 관계의 일을 담당했던 부서나 그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즉, 병방이던 정태망은 지방의 군사훈련·경찰업무·군역부과·성곽·도로·봉수의 관리 등에 관계된 업무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죠.

행현감홍공찬영세불망비(行縣監洪公灒永世不忘碑)
(현감 홍공찬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1880년(고종17) 8월 ~ 1882년(고종19) 4월
비신(碑身) 크기 96cm x 37.5cm x 12.5cm
건립년도 1882년(고종19)
비 정면 내용 행현감홍공찬영세불망비(行縣監洪公灒永世不忘碑)

현명한 계획으로 고을을 운영하여 [運以良籌]
이 고을 잘못된 예기(禮器)를 정비하였네. [整此欹器]
자애로운 그 사랑 천추에 남으리니 [遺愛千秋]
후인들마저도 알아보리라 [後人猶指]
비 뒷면 내용 광서(光緖) 8년(1882년) 4월 일 세움
좌수(座首) 정광□(鄭光□) 이방(吏房) 박정□(朴正□) 감역(監役) 이완□(李完□)

좌수김선국휼군비(座首金善國恤軍碑)
(좌수 김선국 휼군비)
재임기간 ? ~ ?
비신(碑身) 크기 70cm x 46cm x 22cm
건립년도 ?
비 정면 내용 좌수김선국휼군비(座首金善國恤軍碑)
비 뒷면 내용 X

안내판에 따르면 이 비석은 좌수(座首) 김선국(金善國)이 군(軍)에 물질적 은혜를 배푼 것을 기리기 위한 비석입니다.

행현감임공백은청덕선정비(行縣監任公百殷淸德善政碑)
(현감 임백은 청덕선정비)
재임기간 1872년(고종9) 4월 ~ 1874년(고종11) 8월
비신(碑身) 크기 115cm x 44cm x 18cm
건립년도 1874년(고종11)
비 정면 내용 행현감임공백은청덕선정비(行縣監任公百殷淸德善政碑)
비 뒷면 내용 동치(同治) 13년(1874년) 4월 일 세움
좌수(座首) 송인곤(宋仁坤) 이방(吏房) 김학묵(金學黙) 감역(監役) 이완영(李完英)

경저주부최동진불망비(京邸主簿崔東鎭不忘碑)
(경저주부 최동진 불망비)
재임기간 ?~?
비신(碑身) 크기 113cm x 35.5cm x 16cm
건립년도 1880년(고종17)
비 정면 내용 경저주부최동진불망비(京邸主簿崔東鎭不忘碑)


시탕금 일만 여냥을 [侍蕩萬餘]
한 고을에 적선하셨네. [善積一縣]
옛날 설(薛) (땅이) 지금 기(機, 기장)에 [古薛今機]
채권을 불사른 그 명성 남겼네 [遺名焚券]
비 뒷면 내용 광서(光緖) 6년 병진(1880년) 9월 일 세움

안내판에 따르면, 경저주부(京邸主簿)는 지방관청과 중앙의 업무 연락 및 지방세공(地方稅貢)의 납부와 입역(立役, 역(役, 노역, 군역)에 이바지하는 일) 등의 일을 처리하는 기관의 속관으로 종6품의 낭관(郞官)벼슬을 말합니다.

현감정후숙거사비(縣監鄭侯塾去思碑)
(현감 정숙 거사비)
재임기간 1869년(고종6) 4월 ~ 1871년(고종8) 8월
비신(碑身) 크기 87cm x 35.5cm x 11.5cm
건립년도 1870년(고종7)
비 정면 내용 현감정후숙거사비(縣監鄭侯塾去思碑)

세금을 줄여주니 그 덕택 넘쳐나고 [刪歛德曼]
관황을 덜어서 그 은혜 펼쳤네 [捐况恩宣]
사정의 기강을 바로잡아 세우니 [紏殖射券]
한 조각 비석에 새길 공로 많도다. [一珉三鐫]
비 뒷면 내용 동치(同治) 9년 경오(1870년) 6월 일

안내판에 따르면, 정숙(鄭塾)의 이름 가운데 후(侯)는 고을의 수장을 높여서 붙인 글이라고 합니다.

가선대부전내장원경오기영불망비(嘉善大夫前內藏院卿吳公璣泳不忘碑)
(가선대부 전 내장원경 오기영 불망비)
재임기간 ?~?
비신(碑身) 크기 95cm x 34.5cm x 10cm
건립년도 을사년(1905년)
비 정면 내용 가선대부전내장원경오기영불망비(嘉善大夫前內藏院卿吳公璣泳不忘碑)

선업(善業)을 쌓으시니 이처럼 경사롭고 [積善是慶]
복락을 누림이 절로 두텁구나. [享福亶厚]
재산을 털어 어려운 이 구하시니 [捐金救艱]
그 이름 돌에 새겨 길이 전하리. [鐫石垂久]
비 뒷면 내용 을사(1905년) 3월 일 이청(吏廳) 세움

안내판에 따르면, <장전구곡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150)를 지었던 오기영(1837~1917)이라고 합니다. 또한, 해당 비문은 을사년에 세웠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이후부터 을사년은 1845년, 1905년, 1965년, 2025년 등이 되는데, 이청(吏廳)은 조선시대 관청이고, 그가 1902년에는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1905년에 지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조선 말 금의환향하며 강변의 자연을 노래한 장전구곡가

체육공원 쪽에서 철마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장전2교를 지나면 바로 나오는 장전2교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돌아보면 갈맷길 안내판과 함께 갈맷길을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장전구곡가

mspproject2023.tistory.com

행현감오공윤영생사단(行縣監吳公胤泳生祀壇)
(현감 오윤영 생사단)
재임기간 1868년(고종5) 정월 ~ 1869년(고종6) 2월
비신(碑身) 크기 90cm x 37cm x 12.5cm
건립년도 1868년(고종5)
비 정면 내용 행현감오공윤영생사단(行縣監吳公胤泳生祀壇)

세금을줄여서 고을을 보호하니 [省斂保邑]
배소를 옮긴 것이 백성을 편케 했네 [移配便民]  
조촐한 사단이나 이처럼 높으니 [一壇斯岌]
천추토록 영원히 기리오리다. [千秋永禋]

동치(同治) 무진년(1868년)
비 뒷면 내용 계묘(1843년) 11월 19일 생

마애호장한한흥비(磨崖戶長韓漢興碑)
(마애호장 한한흥 비)
재임기간 ? ~ ?
비신(碑身) 크기 117cm x 51cm x 15cm
건립년도 ?
비 정면 내용 마애호장한한흥비(磨崖戶長韓漢興碑)
비 옆면 내용 ?

<부산지명총람 제16장 기장군(2001)>에서는 비신의 전면 윗 부분에 마애(磨崖)라고 썼는데 그 마애의 뜻도 헤아리기어렵다. 양쪽에 쓴 글은 호장 한한흥이 사재를 털어 봉화군(烽火軍)을도와준 것을 기리는 뜻이라고 합니다.

현감함공영석거사비(縣監咸公英錫去思碑)
(현감 함영석 거사비)
재임기간 1834년(순조34) 8월 ~ 1836년(헌종2) 12월
비신(碑身) 크기 105cm x 34cm x 3cm (쇠로 만듬)
건립년도 1836년(헌종2)
비 정면 내용 현감함공영석거사비(縣監咸公英錫去思碑)
비 뒷면 내용 도광(道光) 16년 병신(1836년) 8월 일 세움

객사건성비문(客舍建成碑文)
재임기간 1783년(정조7) 7월 ~ 1784년(정조8) 10월
비신(碑身) 크기 88cm x 40cm x 13.5cm
건립년도 1784년(정조8)
비 정면 내용 객사건성비문(客舍建成碑文)
현감 이공경렬(縣監李公景烈)

객사 건물 기울어 무너진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었더니 [殿宇傾壓 迨近廾祀]
다행히 현명하신 현감께서 분연히 중건할 뜻 세우셨네. [何幸賢侯 慨然有志]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집하니 하루도 되지 않아 가볍게 이루었네. [辦財募丁 不日易致]
비석에 그 공로를 새겨두노니 영원토록 이 뜻이 사라지지 않으리! [石勒其功 永世不墜]

갑진(1784년) 7□□
비 뒷면 내용 좌수(座首) 정광익(鄭光益) 도감(都監) 신치화(辛致和) 감관(監官) 심응택(沈應澤) 이방(吏房) 김□□( 金□□) 색리(色吏) 이□□(李□□)

현감이공기수거사비(縣監李公夔秀去思碑)
(현감 이기수 거사비)
재임기간 1813년(순조13) 8월 ~ 1815년(순조15) 9월
비신(碑身) 크기 70cm x 34cm x 3.5cm (쇠로 만듬)
건립년도 1816년(순조16)
비 정면 내용 세금을 덜어주어 우리 고충 면해주고 [薄稅免我]
녹미를 털어서 우리를 살게 했네. [捐廩活我]
어지신 덕으로 우리에게 베풀고 [仁德德我]
엄격하고 현명하여 경외케 하였네. [嚴明畏我]
비 뒷면 내용 가경(嘉慶) 21년 병자(1816년) 3월

청강교비문(淸江橋碑文) 현감김공수한(縣監金公受漢)
(청강교 비문 현감 김수한)
재임기간 1755년(영조31) 12월 ~ 1758년(영조34) 5월
비신(碑身) 크기 176cm x 70cm x 19.5cm
건립년도 1784년(정조8)
비 정면 내용 청강교비문(淸江橋碑文)
현감김공수한(縣監金公受漢)

대개 사물이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법이고, 때도 또한 마땅한 사람을 만나야 마련되는 법이니, 때와 사람이 서로 만난 뒤에야 사물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기장현이 설치된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하천에 다리를 고치는 일이 고질적인 폐단이다. 매 해마다 무너진 것을 수리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일에 뜻을 두어 석교(石橋)를 만들고자 하였지만, 사물이 적당한 때를 만나지 못했고, 때 역시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누구도 팔을 걷고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에야 박창휘(朴昌輝)가 이 일을 개탄하여, 모금하고 권면하며 선도하여 큰 일을 시작하였고, 송세흥(宋世興)이 재산을 내어 이 일을 도와 그 업적을 마치게 되 었다. 위대하구나! 이 일을 이루다니! 그렇다. 때가 이 다리를 이루고자 하니, 이 두 사람이 그 모습을 완성시킨 것이로다. 나는 그 공로를 찬양하고 그 일을 찬미하며 이 다리가 자랑스러워, 공로가 있는 사람들과 재산을 희사한 사람들을 기록하여 이 다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귀감으로 보도록 함으로서 오래동안 사라지지 않도록 드 러내고자 한다. 다리가 자랑스러운지 아름다운지는 다 기록하지 않으나, 대중들의 이목에 전파되어 있다.(夫物 有待時而後成 時亦待人而後作 時與人相合而後物成其形 盖機縣之設 其來已久 川橋之役 其弊痼矣 每年修壞之際 衆皆 有志於此 欲成石橋之功 而物不得其時 時不得其人 人莫扼腕 今者朴昌輝 慨然於斯 募勸善導 以始大功 宋世興輸財補役 以 終其勳 大哉功之成也 噫 時將欲成此物而後 此二人以成其形也 予讚其功 美其事 壯其物 書有功之員 記施財之人 鑑來往之耳 目 表千年之不朽 橋之壯不壯美不美 不記不錄而播在衆覽焉)
비 뒷면 내용 대시주(大施主) 가선(嘉善) 송세흥(宋世興) 건륭(乾隆) 23년 무인(1758년) 3월 일

좌수(座首) 김창회(金昌淮) 이방(吏房) 장석주(張碩柱) 시주(施主) 김찬중(金贊重) 송필삼(宋弼三) 송세덕(宋世德) 승(僧) 유간(有侃) 김검동(金檢東) 이섬돌(李暹突) 도감(都監) 김연흥(金淵興) 색리(色吏) 이순빈(李純彬) 별좌(別座) 박선작(朴善作) 동서동수(東西洞首) 윤흥창(尹興昌) 김덕윤(金德潤) 화주(化主) 박창휘(朴昌輝) 정두삼(鄭斗三)

전이조참의행현감권공적청덕선정비(前吏曹參議行縣監權公礻啇淸德善政碑)
(전 이조참의 현감 권적 청덕선정비)
재임기간 1733년(영조9) 5월 ~ 1734년(영조10) 11월
비신(碑身) 크기 109cm x 43cm x 17cm
건립년도 1737년(영조13)
비 정면 내용 정사에 청렴하긴 회양후(淮陽侯)에 버금가고 [政淸淮陽]
학문을 드높인건 조주자사(潮州刺使) 같도다. [ 學闡潮州]
한 조각 돌 위에 새겨두는 뜻은 [ 維石一片]
천추토록 길이 잊지 않기 위함일세. [不忘千秋]
비 뒷면 내용 색리(色吏) 허방익(許邦翊) 도감(都監) 유학(幼學) 김징(金澄)
숭정후재정사(崇禎後再丁巳, 1737년) 3월 일

현감장공유풍 수각교증축문
(현감 장유풍 수각교 증축문)
재임기간 1854년(철종5) 2월 ~ 1855년(철종6) 12월
비신(碑身) 크기 170cm x 66cm x 18.5cm
건립년도 1855년(철종6)
비 정면 내용 현감장공유풍(縣監張公遺豊)
수각교증축문(水榷橋重築文)

다리를 만드는 일은 왕도정치의 하나이니 읍을 다스리는데 있어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 다리 아래로 큰 하천이 길게 뻗었다. 건륭(乾隆)연간 무인년(1758)에 돌을 깎아 얹었으나, 14년뒤 신묘(1771년)에 물이 불어나자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그대로 축조하기 어려워서 백성에게 억지로 재목을 베어 해를 걸러 수리하도록 하 였는데, 이제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 더 이상 나무를 구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백성들은 강건너기가 고달프고, 관도(官途)마저 막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향청(鄕廳), 무청(武廳), 작청(作廳) 등 4청에서 의연금을 내고 두 부자와 여덟 면 에서 희사하여 돈이 팔백 꿰미가 되었다. 장인을 징발하고 현민(縣民)을 고용하여 넉달 만인 섣달 보름에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홍교(虹橋)가 아니요 평교(平橋)이다. 그렇다! 사물은 때가 되어야 번성하고, 때는 사람을 만나야 이루어진다. 이 일과 공로를 말하자면 어찌 성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이 돌에 새겨 후세의 귀감으로 삼노라. 건너는 곳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 은혜 두루 미쳐 공덕도 넉넉하다. 한 조각 비석에 새겨둔 말은 천년토록 길이길이 닳지는 않으리.(徒杠之成 王道一政 在乎邑治 可不勉歟 是橋之下 大川長流 乾隆戊寅 斲石虹之 十四年辛卯 被漲見頹 更難仍築 勒斮民木 間年修亙 山今皆赭 勢不取之 民庶病涉 官塗患阻 於是乎鄕武 作四廳捐助 兩饒人․八面舍施 錢爲八百緡强 徵工貰民 四閱月 臘望訖 匪虹伊平 噫 物待峕興 峕將人就 言其事功 豈不盛幸 肆鐫于斯 以資鑑後 銘曰 不以變濟 惠普德多 一片堪語 千 古不磨)
비 뒷면 내용 함풍(咸豊) 5년 을묘(1855년) 정월 초하루
도감(都監) 이후서(李厚瑞) 씀(記)
좌수(座首) 신응호(辛應浩) 조역(助役) 김종렴(金宗濂) 색리(色吏) 김정하(金廷河) 장관(將官) 박문회(朴文會) 이방(吏房) 최천주(崔天柱) 석공(石工) 김대선(金大先)

행현감김공성뢰무휼해맹선정비(行縣監金公聖賚撫恤海氓善政碑)
재임기간 1727년(영조3) 5월 ~ 1729년(영조5) 윤7월
비신(碑身) 크기 109cm X 48cm x 15.5cm
건립년도 1729년(영조5)
비 정면 내용 행현감김공성뢰무휼해맹선정비(行縣監金公聖賚撫恤海氓善政碑)
비 뒷면 내용 웅정(雍正) 7년(1729년) 4월 일

앞라인에는 24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비석이 세워진 끝엔 능선을 따라 기장읍성의 성벽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뒷라인에 세워진 비석들을 왼쪽부터 살펴봤습니다.

현감최공진일청덕비(縣監崔公震一淸德碑)
(현감 최진일 청덕비)
재임기간 1711년(숙종37) 2월 ~ 1713년(숙종39) 2월
비신(碑身) 크기 71cm x 27cm x 3cm (쇠로 만듬)
건립년도 1716년(숙종42)
비 정면 내용 현감최공진일청덕비(縣監崔公震一淸德碑)
강희(康熙) 55년(1716년)
비 뒷면 내용 X

현감백공세전청덕거사비(縣監白公世傳淸德去思碑)
재임기간 1685년(숙종11) 8월 ~ 1688년(숙종14) 2월
비신(碑身) 크기 123cm x 45cm x 15cm
건립년도 1685년 6월
비 정면 내용 현감백공세전청덕거사비(縣監白公世傳淸德去思碑)

봄볕같은 사랑으로 교화를 선양하고 [化扇春仁]
추상같은 형법에는 엄숙한 위엄있네. [威肅秋刑]
모두들 한입으로 다투어 칭송하니  [萬口爭頌]
한조각 비석위에 그 이름 새기노라. [片石斯銘]
비 뒷면 내용 고(孤, 고자) 수사(水使) 수일(守一) 기미(己未) 건각(建閣, 비각 건립)
숭정기원후을축(崇禎後乙丑, 1685년) 6월 일 세움

현감강공유후청덕선정만세불망비(縣監姜公𥙿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
(현감 강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

(1654년(효종5)* 임금에게(陳疏)를 올려 기장현으로 복귀시킨 인물)
재임기간 1652년(효종3) 8월~1654년(효종5) 8월
비신(碑身) 크기 112cm x 62cm x 18.5cm
건립년도 1654년 전후
비 정면 내용 현감 강공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縣監姜公𥙿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
비 뒷면 내용  

*안내문에는 1654년(효종4)라고 되어 있으나, 1654년은 효종 5년이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서 표에 적었습니다.

수사이공도재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수사(어사) 이도재 생사단)
재임기간 1883년(고종20)에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됨
비신(碑身) 크기 92.5cm x 36cm x 13cm
건립년도 1883년(고종20)
비 정면 내용 수사이공도재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來何暮兮]
그래도 하늘은 기필고 도우시네. [天必佑之]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百弊咸正]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千秌永祀]
비 뒷면 내용 광서(光緖) 계미(1883년) 봄 세움

수상국이공기춘영세불망비(水相國李公基春永世不忘□)
(수상국 이기춘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
비신(碑身) 크기 90cm x 33.5cm x 13cm
건립년도 1863년(철종14)
비 정면 내용 수상국이공기춘영세불망□(水相國李公基春永世不忘□)
비 뒷면 내용 동치(同治) 2년(1863년) 5월 일

순상국오공취선이배유혜비(巡相國吳公取善移配遺惠碑)
(순상국 오취선 이배유혜비)
재임기간 1868년(고종5) 2월 ~ 1869년(고종6) 8월
비신(碑身) 크기 98cm x 36cm x 12cm
건립년도 ?
비 정면 내용 순상국오공취선이배유혜비(巡相國吳公取善移配遺惠碑)
비 뒷면 내용 X

<부산지명총람 제16장 기장군(2001)>에 따르면, 오취선(1804~ ?)은 1867년(고종4) 2월에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했으나, 공금낭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비문의 이배(移配)는 '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김'이란 뜻이니 확실히 무언가 잘못했음을 알 수 있네요. 꼭 비석은 좋은 것만 짓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관찰사지공석영선정불망비(觀察使池公錫永善政不忘□)
(관찰사 지석영 선정불망비)
재임기간 1895년(고종32) ~ 1896년(고종33)
비신(碑身) 크기 108cm x 40cm 18cm
건립년도 1896년(고종33) 9월
비 정면 내용 관찰사지공석영선정불망□(觀察使池公錫永善政不忘□)

기울었던 예기(禮器)를 고쳐 바로 잡으시니[欹器復正]
피폐했던 장(기장) 다시 새로 펼쳐졌네.[弊機更張]
온 군현에 표상되어 이끌어주시고 [表率十郡]
한편에(=경상도 도내에) 학문을 일으켰네. [興學一方]
그 은혜 둑방공사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惠及于堤]
덕택이 우리 고을 두루 적셨네. [德洽玆鄕]
이천(二天, 관찰사)을 모두들 공경하여 [二天咸戴]
편석에 새겨두어 잊지 않고 기억하리. [片石難忘]
비 뒷면 내용 병신(1896년) 9월 일
향장(鄕長) 정기룡(鄭基龍) 도감(都監) 정광진(鄭光震) 감관(監官) 박장하(朴章夏)

여기에 등장하는 '지석영'은 그 <자전석요>를 편찬한 한글학자이자 종두법을 처음 국내에 퍼뜨린 한의사로, 한 때 동래부사직과 동래부 관찰사로 잠시 있었던 분입니다. 그를 기리는 비석은 부산 동래구 금강공원에도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찾아가보시길 바랍니다.(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250)

 

금강공원의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 선생 공덕비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 선생 공덕비'는 금강공원 정문에서 조금 올라와 케이블카를 타는 곳 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보입니다. 비문 앞에는 '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 선생 공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mspproject2023.tistory.com

순상국박공제인유애불망비(巡相國朴公齊寅遺愛不忘碑)
(순상국 박제인 유애불망비)
재임기간 1875년(고종12) 7월 ~ 1878년(고종 15) 2월
비신(碑身) 크기 122cm x 35.5cm x 13cm
건립년도 1877년(고종 14)
비 정면 내용 순상국박공제인유애불망비(巡相國朴公齊寅遺愛不忘碑)
비 정면 기준 좌측 내용 광서(光緖) 3년(1877년) 12월 세움
좌수(座首) 정기룡(鄭基龍) 이방(吏房) 이완□(李完□) 감역(監役) 박선장(朴善長)

순상국김공세호추사불망비(巡相國金公世鎬追思不忘碑)
(순상국 김세호 추사불망비)
재임기간 1869년(고종6) 8월 ~ 1871년(고종 8) 6월, 1874년(고종 11) 2월에 다시 임기 만료
비신(碑身) 크기 120cm x 44cm x 18cm
건립년도 1874년(고종 11)
비 정면 내용 순상국김공세호추사불망비(巡相國金公世鎬追思不忘碑)
비 정면 기준 좌측 내용 동치(同治) 13년(1874년) 4월 일 세움
감역(監役) 송인곤(宋仁坤) 색리(色吏) 이완영(李完英)

순상국홍공재철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
(순상국 홍재철 영세불망비)
재임기간 1840년(헌종 6) 9월 ~ 1842년(헌종 8) 4월
비신(碑身) 크기 81.5cm x 31cm x 3cm (쇠로 만듬)
건립년도 1841년(헌종 7)
비 정면 내용 순상국홍공재철영세불□□(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

변방의 물자 부족 긍휼히 여기시고 [軫彼邊需]
이 고을을 폐막에서 구해 주셨네 [捄此邑瘼]
삼분 오분 납세를 덜어 주시고 [三五除納]
모자란 것 일백을 채워 주셨네 [一百補縮]
비 정면 기준 좌측 내용 도광(道光) 21년(1841년) 10월 일

순상국조공병현거사비(巡相國趙公秉鉉去思碑)
(순상국 조병현 거사비)
재임기간 1833년(순조33) 5월 ~ 1834년(순조34) 12월
비신(碑身) 크기 101cm x 33.5cm x 4.5cm (쇠로 만듬)
건립년도 1835년(헌종1)
비 정면 내용 순상국조공병현거사비(巡相國趙公秉鉉去思碑)
비 정면 기준 좌측 내용 도광(道光) 16년 병신(1836년) 8월 일 □□

순상국서공희순거사비(巡相國徐公熹淳去思碑)
(순상국 서희순 거사비)
재임기간 1833년(순조33) 5월 ~ 1834년(순조34) 12월
비신(碑身) 크기 120cm x 51cm x 39.5cm
건립년도 1835년(헌종1)
비 정면 내용 현감 강공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縣監姜公𥙿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
비 정면 기준 좌측 내용 도광(道光) 15년 을미(1835년) 정월 일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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