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읍성 동문과 남문 그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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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기장읍성 동문과 남문 그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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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장읍성 동문

부산 기장군 기장읍 차성로 큰길을 걸어 읍내로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저 멀리 돌로 쌓은 담 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곳은 이미 농사지로 쓰이고 있었고, 집들도 들어서 있었습니다. 오르막을 오르자 비석들이 보이네요.

저 비석들이 바로 기장 여기저기에 있었던 36기의 비석을 한데 모은 기장 공덕비군입니다. 각 비석에 대한 설명은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098)을 참고해 주세요~

 

조선시대 기장 관청의 36명의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 기장 공덕비군

기장읍성 동문 지역이 위치한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에 기장공덕비군이 있습니다. 원래 기장 이곳 인근 이곳저곳에 있었던 비석들을 도로 확장 등을 이유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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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소재지 : 부산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59 일원
 기장 읍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부터 기장현의 각종 시설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기장읍 동부리·서부리·대라리 일대에 걸쳐 있으며, 둘레는 1km 정도로 너비 7m, 높이 3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 7년(1425년)에 돌로 쌓았으며, 규모는 둘레 1,527척(포백척, 약 713m)이었으나, 성종 21년(1490년)에 남쪽으로 더 쌓아서 3,197척(영조척, 약 981m)이 되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반원형의 옹성문(甕城門)이 3개소, 성벽에 붙은 적을 물리치기 위한 사각형의 적대(敵臺)가 6개소,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女墻)이 383개소, 연못과 우물이 각각 1개소가 있었다.

읍성 내부에는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관아 건물, 누각(樓閣)*, 창고, 무기고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건물이 철거되고 이후 주택들이 들어서며서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는 기장현 소속 군인들을 지휘하던 장관들의 집무처인 장관처(將官廳)만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기장읍성은 고려 시대의 성곽 축조 기법을 유지하면서 조선 시대 초기 읍성과 축조 기법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문화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 누각(樓閣) :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이 공덕비군이 있는 쪽 왼편 지역으로 조금 가면 조선 초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은 기장읍성 동문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엔 이 길을 따라 사람들이 드나들었겠지요?

2. 기장읍성 남문

기장읍성 동문 지역에서 남문 지역까진 걸어서 약 6~8분 정도 걸립니다. 이쪽엔 성 앞에 물을 받아두어 적의 육지 침입을 1차로 막던 해자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깊은 듯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쌓여 이렇게 낮은 듯한 해자의 모습이 된 듯합니다.

기장읍성 해자(機張邑城 垓子)
해자(垓子)는 옹성(甕城), 적대(敵臺), 여장(女墻) 등과 함께 성곽(城郭)을 방어하기 위한 부대시설 중의 하나이다. 체성(體城)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설치된 성곽의 1차적인 방어시설이다. 기장읍성 해자는 체성을 기준으로 사방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단종 즉위년(서기 1452년) 이후에 축조되었다.

기장읍성 남측 해자는 체성 외벽과는 9~12.6m, 옹성부는 6.4m 정도 이격(離隔)하여,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축조했다. 규모는 너비 4.8~5.0m, 잔존 깊이 0.6~1m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0.2km를 가면 기장 장관청(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099)이, 동쪽으로 0.6km를 가면 기장역이, 서쪽으로 1.8km를 가면 기장옛길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자를 따라 왼편으로 조금 더 가다보면,

 

기장 앞바다를 지켜라! 기장 장관청

부산 기장초등학교에서 쭉 내려오면 왼편으로 오래된 저택같은 느낌을 받는 '기장 장관청'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곳엔 반려동물 출입이 금지되고, 주차 또한 금지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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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곡선으로 쌓여 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들은 기장읍성 남문의 옹성의 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옹성을 지나면 뒷편에 또 다른 돌무더기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기장읍성 남문의 터입니다. 이 위에는 공신루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공신루(拱辰樓)
기장읍성에는 3곳의 성문(城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 남문은 기장읍성의 정문 역할을 했다. 발굴조사 결과로 보면 남문은 최소 2차례에 걸쳐 수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초에는 개거식성문(開据式城門)이었으며 뒤에 홍예식성문(虹霓式城門)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신루(拱辰樓)는 남문의 누각 이름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기장현편>에 식파루(息波樓)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세종 연간의 축조 때부터 있었던 성문 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신(拱辰)'이란 '뭇 별들이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으로, '사방의 백성들이 천자(天子)의 덕화(德化)에 귀의(歸依)하여 복종함'을 이른다. 적심석(積心石)*도 발견되었는데 이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 중층 성루(城樓)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또한 기록과 일치한다.

* 적심석(積心石) : 건물을 안정적으로 받치기 위한 초석(기둥받침돌) 아래에 웅덩이를 파고 넣는 잡석(雜石)

기장읍성 남문 옹성
2017년 이후 수차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남문 옹성은 체성(體城)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체성에서 약 8.2m 가량 돌출되어 있다. 평면형태는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서쪽에서 반원상의 시계방향으로 만곡하다가 동쪽에 개구부(開口部)를 설치한 형태이다. 옹성은 조사 당시 내외벽 기단석이 1단 잔존해 있었으며, 축조수법은 내외협축식이다. 개구부는 체성 진행방향과 나란하게 조성되었고, 평면형태는 입구부가 넓고 진입할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이다. 규모는 반원상인 옹성 외벽 둘레가 약 47.5m, 옹성 내벽 둘레는 약 21.7m이다. 너비는 7m, 잔존 최대 높이는 1.3m 내외이다. 개구부 너비는 3~3.5m로 확인된다. 남문지는 잔존상태로 보아 최소 2차 이상 축조되었다. 발견된 명문석의 '금ㅁ(金ㅁ), 창원(昌原), 의성(義城)' 등으로 보아 남벽 및 남문 축성역(築城役)에 동원된 군현(郡縣)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장읍성 남문 옹성과 공신루터를 지나고 쭉 나왔습니다. 그러자 '기장옛길'이라는 안내문이 보이네요. 

기장 옛길(Gijang Old Road)
1. 기장읍성 2. 기장향교 3. 장안사 4. 안적사
5. 기장군청 6. 대변항 7. 정관박물관 8. 좌천역
9. 일광해수욕장 10. 송정시장 11. 철마초등학교 12. 안평역

기장읍성 남문 안에서 남문터 방향을 바라봤습니다. 시간이라는건 정말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것 같네요.

어쨌든,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기장 장관청(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099)이 나오니 그곳도 관심있으시다면 찾아가보시길 바랍니다~

 

기장 앞바다를 지켜라! 기장 장관청

부산 기장초등학교에서 쭉 내려오면 왼편으로 오래된 저택같은 느낌을 받는 '기장 장관청'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곳엔 반려동물 출입이 금지되고, 주차 또한 금지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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