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 김정한과 그의 고향을 돌아보는 요산문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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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요산 김정한과 그의 고향을 돌아보는 요산문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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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산문학로 전체 거리

요산문학로 (출처 : 국제신문)

2016년말에 문을 연 도시철도 범어사역 1번출구 인근 팔송로 기점에서 시작해 중간에 팔송사거리가 있는 큰 횡단보도를 건너 금샘로와 팔송로가 만나는 지점까지의 750m 정도 되는 거리를 요산문학로라고 부릅니다.

팔송로(빨간색)과 요산문학로(보라색) (출처 : 카카오맵)

팔송로의 중심을 따라 요산문학관과 요산김정한생가쪽으로 이어지는 요산문학로는 봄, 가을, 겨울에 걷기 좋은 길입니다.

 

2. 요산문학로의 시작(범어사역~팔송사거리)

범어사역 1번출구로 나오면,

요산김정한의 간략한 생애와 그의 소설 속 몇 문구가 청룡초등학교 담장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산문학로 입구 (출처 : 카카오맵)

이제 입구로 들어가봅시다. 입구 사진을 찍긴 어려워 카카오맵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오른편에 청룡초등학교가 보이네요.

왼편에도 다양한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청룡초등학교 내부와 입구 모습입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엔, 남산동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이 있습니다.

일제 시절 세워졌던 범어정수장의 1954년 모습, 1930년대 남산들 모내기 모습도 보이네요.

1954년의 노포삼거리, 옛 청룡초등학교의 모습입니다.

요산문학로 입구의 건너편에 있는 금정중학교의 옛 모습도 보이네요.

남산리는 남산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1통에서 9통 일대에 있던 본동 마을이다. 남산은 마을 뒤쪽에 있는 산으로 범어사를 기점으로 보면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정산 고당봉은 할미산이고 남산은 할배산으로 대조를 이루어 이채롭다. 옛날 범어사의 사원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이 남산 기슭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남산 마을이라 지었다고 전하여 진다. 남산리는 남산동에서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본동마을, 큰 남산, 안동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향으로 지었다고 하여 남산이라 하였다. 남산당산은 마을에 있는 효성사슴농장에서 서북쪽으로 300m 지점의 산능선에 있다. 제당은 두 개로 당산의 입구에 있는 제당은 말 편자형으로 돌담을 쌓고, 그 위에 크고 널찍한 큰 돌을 얹어 동굴형으로 만들었고, 당산의 안쪽에 있는 제당은 큰 바위 왼쪽 옆에 돌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높이 116cm의 담을 붙여 제당을 만들었다. 위패나 신체가 없다. 제의는 음력 정월 14일 오후 5시경이며, 일 년에 한 번이다.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에서 청룡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50m 쯤 올라 가면 범어천을 만난다. 이 하천 다리 근처 공터에서 장이 열린다. 이 장은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열리기에 새벽장이다. 지금은 80점포로 일반 시장과 같이 개장하고 있다.

남중마을은 남산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24통에서 31통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범어천을 경계 지점으로 동쪽이며 남산 마을과 신암마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남중 마을이라고 하였다. 이곳 주민들은 머들 마을이라 불렀는데, 머들은 중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남중마을은 한집 두집 띄엄 띄덤 있었는데, 그 사이에 집을 지으니 사이사이 끼워 넣는 식으로 집이 생겼다 하여 머들이라 불렀다고 촌로는 말하고 있다. 1970년대에 남중 마을의 호수는 40호였다. 남산동은 남중 마을에서 신암 마을까지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1972년에서 1980년까지 1,2차로 실시하여 신흥주택지로 급성장하였다.
또한 1985년 도시철도가 개통되어 교통이 한결 편리해졌고 쾌적한 주택지로 발전하였다. 범어사, 금정산성 등 관광지가 인접하고, 2차 토지 구획정리 사업이 끝난 1980년부터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부산이슬람성원(남산동 30-1번지)은 도시철도 1호선 두실역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다. 마스지드(Masjid, 영어로 모스크 : 꿇어 업드려 경배하는  곳)의 둥금 돔과 첨탑 위로 초승달 모양의 상징물이 솟아 있다. [진리의 시작] 이란 초승달의 상징이다. 대지 670평에 2층 구조로 건평 470평인 이 건물은 전통적인 사라센식으로 3백여 명이 동시에 예배할 수 있다. 알라신의 예배는 이슬람 성지 메카이다.

반남산 마을은 남산동에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지금의 남산동 10통에서 11통 일대로, 남산동 새벽시장 위쪽으로 남산치안센터(남산동 975-6번지) 뒷산과 남산고등학교, 금샘초등학교 일대에 있던 작은 마을이다. 남산 마을의 바깥쪽(외남산)에 자리 잡았다고 바깥마을, 외남산 마을 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 반남산 마을의 호수는 7호였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운동장(남산동 875번지)이 있는 일부 지역이 예전에는 남산동 공동묘지였다. 이곳은 부산외국어대학교 운동장 일대에서는 9월 늦반디불이가 한 번에 평균 50~60마리, 최대 100마리 이상 발견돼 이곳이 늦반딧불이의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반딧불이는 [개똥벌]이라고 불리는데 그 똥무늬에서 나는 불빛을 [개똥불]이라고도 한다. 순수한 자연과 동심 그리고 낭만, 대다수 도시민이 잃어버린 것들을 상징하는 생물이 바로 [숲의 전령] 반딧불이다.

신암마을은 남산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12통에서 23통으로, 32통에서 35통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부터 이곳을 서검덤(서검듬, 서검뜸)이라고 불렀다. 석돌은 푸석돌인데 이 돌은 화강암이나 화강편마암과 같은 바위돌이 풍화작용을 받아 푸석푸석하게 된 돌을 말한다. 마을 이름을 신암 또는 서검덤이라 부른 것른 푸석돌이 많은 곳이라 붙였다. 1720년(숙종 46) 은진 송씨 준업공이 남산 서검덤에 입향조로 금정산 용호덤 기슭에 초당을 짓고 문무가 조화된 동량이 배출되리라는 뜻으로 당호를 서검서당이라 하였다. 그 후로 서검덤이라는 마을로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마을 이름을 신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남평 문씨 효행 이야기를 소개하면, 문연옥(1889~1946)은 16세 아버지 목 바로 밑에 등창이 나 심하게 앓게 되었다. 처녀의 입으로 등창의 고름을 빨아내어 3삭(3개월)만에 감쪽같이 낫게 되었다. 향리에서 큰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사양하였다. 서검던(서검덤) 거릿대제는 서검덤 옛길 큰바위(현재 남산초등학교 중앙 뒤편이며 큰 바위는 지금도 있음)에 위치하였고 매년 정월 14일 오후 6시에 지냈다. 1980년 남산동 토지구획정리사업 이후 서검덤 당산과 거릿대제는 없어졌다.

마을 소개와 함께 남산동의 옛 모습과 지금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항공 사진도 있습니다.

그 옆에는 그의 소설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 <뒷기미나루>, <산거족>에 나온 유명한 구절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산거족>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라'라는 문구가 가장 유명하다고 하네요~  그 문구들 옆에는 그의 생애가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1908년(1세) - 음력 9월 26일,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에서 김기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아호는 요산.
1928년(21세) - 동래고보 졸업
- 9월 양산 대현 공립 보통학교 교원 취임
- <동아일보>에 시를 투고함
- 11월 일본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교원연맹 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일경으로부터 가택 수색을 받고 피검, 울산서에서 동래서로 이관되어 심문을 받음.
1930년(23세) - 동경 조도전대학(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 입학
1936년(29세) - 1월, 단편소설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
- <옥심이>를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함.
1939년(32세) - 남해군 남명 공립보통학교로 전임감.
1956년(49세) - 창작집 <낙일홍> 출간함.
1961년(54세) - 5.16으로 6월 학교에서 물러남.
- <부산일보> 상임논선위원이 됨
1967년(64세) - 제2창작집 <인간단지>(한얼문고) 간행됨.
- 11월, 제3회 문화예술상 수상함.
1976년(69세) -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 한국 엠네스트(국제사면위원회) 위원
- 문고판선집 <모래톱 이야기>(범우사) 간행
- <김정한소설 선집> 재판이 <제3병동>으로 개재되어 나옴.
- 10월 문화훈장(은관)을 수상함.
1994년(87세) - 심산상 수상.
1996년(89세) - 11월 28일 오후 3시 30분 타계, 부산 남천성당에서 사회장, 신불산 공원묘지에 영면함.

남산동 출신의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 <산거족> 중에서
요산 김정한(1908~1996)은 경남 동래군 남산리(현 남산동)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궁핍한 농촌 현실저항을 그린 <사하촌>이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낙일홍>, <모래톱이야기>, <인간단지>, <산거족>, <수라도>,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 2006년 김정한 선생의 문학과 삶을 기리기 위해 생가(2003년 복원)와 함께 요산문학관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청룡초등학교를 등지고, 요산 김정한의 생애와 남산동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저 멀리 요산문학로 입구도 찍어봤습니다~ 정문샷을 못찍어 아쉬웠거든요~

뒤를 도랑서 쭉 나아갑시다.

갈림길이 보여도 쭉 가시면 됩니다.

지나가는 길에 요산문학길문화센터라는 곳도 있네요~ 도서관이면서 요가, 명상, 몸살림, 단식, 선무도도 하며, 인문학 교실도 여는 곳이라고 하네요.

저 멀리 팔송사거리가 보이네요!

3. 요산문학로의 끝(팔송사거리~요산문학관 인근)

팔송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건너가면,

요산문학관까지 300m, 요산공영주차장까지 150m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입니다. 

길을 건너면, 이렇게 요산의 흔적을 기리는 조형물과 의자도 보입니다.

쭉쭉 올라가줍시다.

아래 바닥에 '요산문학로'라고 적혀 있군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됩니다.

요산 김정한이 1977년에 발표한 <사밧재> 속 구절이 벽에 새겨져 있네요.

조금 더 올라가면 저 오른쪽에 길목주차장이 있습니다.

모두의 주차장에 따르면 이 '길목 민영 주차장'은 최초 1시간 2000원, 이후 시간 당 2000원이라고 합니다.

길목주차장의 벽면은 이렇게 요산 김정한의 소설 속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산거족>의 구절이 보이네요. 이 길을 걷다보면 <산거족>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구절은 외우게 될 겁니다.

다음엔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의 구절이 보입니다. '운다고 해결이 되나? 쓸개 빠진 타협과 눈물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해!' 제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만큼 따끔한 한 마디였습니다ㅎㅎ

조금 더 올라가면 주차장이 보입니다. '남산동 요산 공영 주차장'인데요.

급지 시간제 주차
(10분마다)
1일 주차권 월정기권
주간 야간
3급지 200원 4,700원 50,000원 40,000원

이곳은 최초 10분 200원, 이후 10분 200원으로, 시간제로 주차할 경우, 1시간 당 1200원입니다. 앞서 본 길목 민영 주차장보다 시간당 요금이 800원이나 더 쌉니다. 만일 차를 끌고 요산문학관을 방문하는 경우, 만차가 아닌 이상 최대한 이곳에 주차하는 것이 돈을 더 아낄 수 있는 팁인 것 같네요~

주차장 옆 요산문학로와 요산문학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입장료 관람시간
1000원 매주 화요일~일요일 10:00~17:00
(매주 월요일, 국경일은 휴관)

주차장을 지나 더 올라가야 요산문학관과 요산문학로의 끝이 나옵니다.

갈림길에서 주차장 방면으로 돌아 사진 한 컷 찍어봤습니다. 볕이 좋고 그리 덥지 않은 날이라면, 아이들과 저기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1969년에 요산 김정한이 발표한 <수라도>의 내용입니다.

1971년에 요산 김정한이 발표한 <산거족>의 내용입니다.

자 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드디서 요산문학관과 요산김정한생가가 나옵니다!

저기 입구가 보이네요!

이쯤이면 외우게 될 <산거족>의 구절이 바닥에 적혀 있습니다.

문의 왼쪽 안내문 문의 오른쪽 안내문
요산문학관 개관안내
AM 10:00~PM 5:00
휴관 : 매주 월요일·공휴일
등록문학관(부산-2018-2)
요산문화연구소

요산 김정한 문학관
  요산 김정한 선생(1908년~1996년)은 이곳에서 태어나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와세다대학 부설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다니셨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던 선생은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사하촌>이 당선되어 등단하셨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차례 옥고를 치르신 선생은 갈고 닦은 우리말로 소설을 지으며 민족혼을 지켰고,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에서 활동하다 부산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작품을 쓰셨다.
  낙동강 인근을 무대로 역사의 그늘에서 고통 받는 우리 이웃의 삶을 담아내며, 인간의 고귀성과 인간다운 세상을 추구한 선생의 작품은 민족문학의 큰 봉우리로 한국문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뒤로하고 오륜대를 바라보는 생가는 팔작지붕에 일자형의 전통한옥이며, 문학관은 선생의 삶과 정신을 살려 지었다. 거친 표면의 적벽돌 외벽으로 선생의 강인한 정신과 저항하는 삶을 담고, 낮고 트인 담으로 이웃과의 소통과 조화, 더불어 사는 뜻을 담았다.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

자 이제 요산문학관에서 나와 더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요산문학로는 끝납니다.

1966년에 요산 김정한이 발표한 <모래톱이야기>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요산문학로입니다. 

길을 걸으며 남산동의 역사부터, 그의 문학 세계까지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요산 김정한 선생

요산 김정한 선생(1908~1996)은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민족문학의 눈부신 성취를 이끈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분이다. 1936년 단편소설 '사하촌'으로 등단한 뒤 선생은 민족사의 질족을 민중과 더불어 견뎌 내면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주변부 인간의 현실을 양심적인 시선으로 고발하였으며,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삼았다.
선생은 불의와 부자유에 맞서 싸운 양심적 지사였으며, 평생 부산 경남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텃밭을 지켜낸 파수꾼이었다.
요산이 세상을 떠나신 뒤 금정산 자락에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생가

요산 선생이 태어난 동래구 북면 남산리에는 예부터 김해 김씨(상현파) 집성촌이었다. 본향이 경북 청도인 선조들이 이곳으로 세거한 때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구 4년)로 16대조 김일손이 참화를 입은 후이다. 조부 대에 와서 종가가 되고 요산은 7남매의 맏이이자 집안의 장손이었다.
생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이래 동네와 찻길이, 드넓은 들이었을 시절 선생은 서당에서 수학하기도 했고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지금의 청룡초등학교와 금정중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3.1운동을 맞이하기도 했다.
선생이 떠나신 뒤, 후배 작가들과 뜻있는 사회 인사들이 생가복원 이야기를 시작해 부산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그 해 12월 퇴락한 집을 헐고 2003년 6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뒤로하고 오륜대를 멀리 바라보고 있는 생가는 팔작지붕에 일자형의 전통한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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