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두산 신사의 연혁
1678년 4월, 두모포왜관이 용두산이 있던 초량으로 이전하면서 용두산 주위로 5개의 신사(神社)가 만들어졌다. 이들 신사 중 가장 중심은 쓰시마 후츄번(対馬府中藩)의 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 義真, 1639~1702)가 용두산 꼭대기에 일본과 조선 간의 항해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세운 코토히라 신사(金刀比羅神社)였다.
여기서 모시던 주신은 오오모노누시노카미(大物主神)로, 그는 해상교통을 관장하던 신이라고 여겨진다.
1765년 8월에는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과 텐만 천신(天満天神=스가와라노 미치자네), 1865년 3월에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1880년 8월에는 하치만 신(八幡神=무운의 신)을 모셨다.
이 코토히라 신사는 개항 후 1894년, 거류지 신사(居留地神社)로 개칭되었으며, 1899년 2월 다시 용두산 신사(龍頭山神社)로 이름이 바뀌었다. 거류지 신사 시절인 1896년 4월에는 히로쿠니 대신(広国大神)을, 용두산 신사 시절인 1899년 4월에는 스사노오(スサノオ), 진구 황후(神功皇后), 토요쿠니 대신(豊国大神=토요토미 히데요시)과 같은 일본의 전통적인 민족신도 모시기 시작했다.
제일(祭日)은 4월 21일과 22일 이틀로 정했는데, 1908년 이후 이 제일에는 신행제(神幸祭, 신령 행차(御幸) 제례)가 거행되었다.
1911년에 신위를 모시고 가는 가마인 미코시(神輿)가 생겼고, 이후 제일 때의 긴 행렬이 있을 때면 마츠리처럼 사람들이 붐비게 되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에 따라 용두산 신사를 중심으로 한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4개의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신사의 위치 또한 용두산 최정상부로 옮겨졌다.
1932년에는 원래 용미산에 있었던 용미산 신사도 이 신사의 동쪽에 이설해 함께 놓았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용두산 신사의 본전은 지금의 부산타워 자리에 위치했었다.
1933년에는 용두산 공원에 102척(약 34m)의 일장기 게양대가 세워졌으며, 일제는 덴노에 대한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조선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 가다가도 용두산 신사를 향해 큰 절을 해야만 했다.
1936년에 찍힌 사진을 보면 신사 계단 입구에 토리이(鳥居)가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지금의 용두산공원은 일본의 신사의 모습을 차례차례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1945년 8월,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식민지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즉각적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의 신사가 조선인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옳지 않아 전국의 신사와 신궁에서 신을 올려 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 명령했는데, 이에 용두산 신사도 신사에 모시고 있던 보물들을 바다에 가라앉히고 신사 건물의 일부를 일본인들의 손으로 해체했지만 다 없애진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1945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용두산 신사가 불길에 휩싸였다!! 신사는 때맞춰 불어온 해풍을 맞으며 순식간에 번져 한 줌의 재로 변했다. 소방서는 누가 방화를 했는지 급히 조사했지만, 오히려 부산 사람들은 이 불길을 보며 속 시원해했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약 267년 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식 신사(神社)는 불 속으로 타들어갔다.
2006년에 방화 당시 36세의 개신교 집사였던 민영석(閔泳石, 1909-2011) 목사가 자기가 용두산 신사를 불태웠다고 고백하면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 그는 실제로 일제에게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2번이나 투옥되고 직장까지 잃었었다. 그는 광복 후 시너(thinner)를 두 되 정도(약 3.6078L)를 넣은 병을 신사에 끌고 가서 불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가 건축물에 방화를 했다는 죄목은 있었다지만 민족적 감정에 더해 공소시효 15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저 이젠 지나간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195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호를 따 우남공원으로 개칭했다가 66년 2월에 지금의 이름인 '용두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부산 시민들의 쉼터와 관광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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