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역에서 부곡초등학교, 부산사대부설고등학교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작은 공원 하나가 있다. 바로 공수물공원이다.
공수물공원의 이름은 이 지역을 부르던 옛 명칭인 공수물마을에서 유래했다. 공수물(公須物)은 공수전(公須田, 관아의 접대비나 역(驛)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해 지급하던 토지)에서 내는 물품을 말한다. 동래부 시절 이 지역에 공수전이 있었고, 그래서 자연히 이 마을의 이름이 공수전에서 공수물을 조달하던 곳이라는 뜻에서 공수물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공수물공원에는 민영훈 거사비가 하나 있다.
좌측에는 '부사 민영훈공 거사비'라고 적힌 큰 현대식 비가 있고, 우측에는 '부사 민공 영훈 거사'라고 적힌 당시에 건립된 비석이 있다.
부사 민영훈공 거사비 '동래부사 민영훈공 거사비(東萊府使 閔永勳公 去思碑)는 동래부사로 재임(1835년 9월~1837년 3월)한 민영훈공이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려 있던 백성들을 보살피고 만인 구명을 한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생전에 마을사람들이 그 은혜를 기리고자 건립한 거사비다. 이 비석은 노포동 녹동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광복(1945년) 후 도로확장공사로 파손되어 버려진 것을 노포동 작장마을 앞 공지에 세웠고 1993년 현 위치로 옮겨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19세기 초중반에 동래부에 극심한 흉년이 있었지만, 당시 동래부사 민영훈이 이를 구제했던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마을사람들이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글자가 지워져 거의 보이지 않지만, 비의 이름은 '부사 민공영훈 거사(府使 閔公永勳 去思)'라고 적힌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정면 기준 오른편. 아래쪽에 山[메 산] 정도만 읽을 수 있었다.
비석의 뒷면.. 역시 읽을 수 없다.
'3월 10일(三月旬)', 學[배울 학] 정도만 읽을 수 있었다.
府使 閔永勳公 去思碑 迺賑迺蠲 設屯袪瘼 活萬人命 百世歌詠 |
부사 민영훈공 거사비 이에 구휼하고 이에 (조세를) 덜고 둔전을 설치하고 병폐를 흩어지게 해 만인의 목숨을 살린 (그 은혜) 100세 동안 노래하며 읊겠다. |
부사 민영훈공 거사비명 병서(幷序) 흘러간 세월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이 고장 아름다운 상징물의 하나가 지금 여기 초라하게 놓여 있다. 높이 약 73센티 너비 약 34센티의 조그만 단갈(短碣, 짧은 비석)이다. 표면중앙에 '부사 민공영훈 거사비(府使 閔公永勳 去思碑)'라 하고 좌측에는 '이에 구휼하고 이에 덜고 둔전을 설치하고 병폐를 흩어지게 하다(迺賑迺蠲 設屯袪瘼)'이라 하였으며 우측에는 '만인의 목숨을 살려 100세동안 노래하며 읊겠다(活萬人命 百世歌詠)'이라 하였다. 민공(閔公, 민영훈)의 위민공적(爲民功績, 백성을 위하는 공적)을 요약하여 말한 것이다. 또한 흉년으로 백성이 굶어 죽어가는데 부사가 곡식을 풀어 진휼하고 세금을 탕멸(蕩滅, 남김없이 없앰)하여 병폐(병통과 폐단)를 제거하여 만인의 생명을 살린 사혜(思惠, 생각과 은혜)를 칭송한다는 뜻이다. 뒷면의 비문은 두구(豆口, 두구동 지역), 작장(鵲掌, 노포동 지역), 남산(南山)의 3동민(洞民)을 구제한 사실을 다소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3개 동의 백성이 힘을 합하여 공로상(公路上)에 이 비를 세운 사연을 말하고 있다. 해방후 도로 확장 공사 등으로 파손되어 버려진 것을 뜻 있는 사람에 의하여 노포동사(老圃洞舍) 앞에 보관 된 것 |
이다. 그러나 이 조그만 단갈로 인하여 동래부(東萊府) 관내(管內) 에 거사단(去思壇)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거사단비는 본래 남문(南門) 밖의 휴산(休山) 또는 농주산(弄珠山)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동래(東萊) 학소대(鶴巢臺) 앞 유치원 경내에 옮겨 세워져 있다. 민(閔) 부사의 비에는 '생사(生祠)'란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에 배향(配享)된 분으로는 숙종(肅宗) 12년 병인(1686년) 4월에 도임(到任, 지방의 관리가 임소에 도착함)하여 동 14년 무진(1688년) 정월에 퇴임한 이항(李沆) 부사와 (조선) 숙종(肅宗) 32년 병술(1706년) 10월에 도임하여 동35년 기축(1709년)에 과체(瓜遞, 벼슬의 임기가 차서 갈림)한 한배하(韓配夏) 부사와 영조(英祖) 40년 갑신(1764년) 8월에 도임하여 동42년 병술(1766년) 10월에 병사(病辭,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둠)한 강필리(姜必履) 부사와 정조(正祖) 16년 임자(1792년) 7월에 도임하여 동19년 을묘(1795년) 3월에 과체(瓜逓)한 윤필병(尹弼秉) 부사와 헌종(憲宗) 1년 을미(1835년) 9월에 도임하여 동3년 정유(1837년)에 사체(辭逓, 벼슬 자리를 내놓고 물러남)한 민영훈(閔永勳) 부사 등 5공(五公)이다. 거사비는 단순한 선공비(善功碑, 착한 공을 다룬 비)나 송덕비(頌德碑, 덕을 칭송하는 비)가 아니라 원래는 생전에 추모의 정을 영우(永寓)하는 생사(生祠, 생사당)였다 자발적 민의(民意, 백성의 뜻)에 의한 연일차(年一次) 여정(輿情, 여론)의 전헌(奠獻, 받들어 올림)이었다. 그러나 사(祠, 사당)는 조가(朝家, 조정)의 금하는 바되어 단(壇)으로 개축한 것이다. 거사단의(去思壇義)의 축문식(祝文式, 축문을 읽는 행사)에 보이는 5공(五公)의 공적은 <(德政仁化 千秋浹髓)>(이항), <(三稅俱蠲 一域咸蘇)>(한배하), <(百牛頒惠 萬民賑活)>(강필리), <(活飢十萬 填稅三百)>(윤필병), <蠲稅賑惠 活我萬民>(민영훈) 등이다. 모두 민생의 위기를 당하여 분우(分憂, 걱정을 나눔)의 한계를 넘어선 관장(官長, 수령)의 슬기로운 구출을 말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민의의 불인지정(不忍之情, 참기 어려운 정)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실로 거사단의 제향(祭享, 제사)은 시혜(施惠, 은혜를 베풂)와 지혜(知惠, 은혜를 앎)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연구세심(年久歲深,오랜 세월)에 거사단의 유적(遺蹟)과 유풍(遺風, 전해 내려오는 풍속)도 상실되어 갔다. 이제 민공(閔公)의 단갈이 금정구(金井區)의 유일한 유물이 되었다. 민공(閔公)은 여흥 민씨(驪興 閔氏) 26세손으로, 조(祖, 할아버지)는 이세(頤世) 이조참의(吏曹參議)요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는 종길(鍾吉)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삭녕 최씨(朔寧 崔氏)이다. 공(公)은 4형제의 장남으로 영조(英祖) 기미(1739년) 생(生, 출생) 철종(哲宗) 계미(1823년) 졸(卒, 사망) 이며 문과(文科)로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공(公)의 위민공적은 정부인(貞夫人)의 조언에 힘입은바 크다 하나 생략한다. 끝으로 이 비를 |
비에 기록된 동래부사와 부임 기간 | |
동래부사 재임 기간 | 동래부사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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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04~1688.01 | 이항(李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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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0~1709. | 한배하(韓配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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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08~1766.10 | 강필리(姜必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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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07~1795.03 | 윤필병(尹弼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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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09~1837. | 민영훈(閔永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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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보관한 박용진씨(朴龍珍氏)와 지도 협력하여 주신 향토사가(鄕土史家, 향토사학자) 김해진씨(金海振氏)와 민공(閔公)의계보에 대한 교시(敎示, 가르쳐 보임)를 하여 주신 민병만씨(閔丙萬氏)의 노고에 감사하며 금정구청 앞 대로 가에 재건하게 되었다. 명왈(銘曰) 민공리위(閔公莅位 소백지사(召伯之慈) 무휼부민(撫恤府民) 부민거사(府民去思) 감당지애(甘棠之愛) 영세불망(永世不忘) 서기 1993년 10월 일 문학박사 정중환(丁仲煥) 찬(撰, 지음) 문화재전문위원 조영조(曺寧助) 서(書, 씀) 금정구청장 김부환(金富煥) 입(立, 세움) |
공수물 공원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봤다. 잠시 앉아있기 좋은 곳 같다. 이쪽에 뭔가를 깔아놓은 흙길도 있었는데, 발도 편하고 흙내음도 나서 좋았다ㅎ
공수물공원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풍경. 비석이 떡하니 서있고, 그 앞으로 큰 도로변까지도 보인다. 이쪽을 지나면서 산책을 한다면 한번쯤 이 공수물공원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잠깐 쉬면서 19세기 이 지역의 궁휼을 해결한 선정을 베푼 인물이 있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좋은 추억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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