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무서웠던 부산영락공원에서 선열의 흔적을 찾으러 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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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서웠던 부산영락공원에서 선열의 흔적을 찾으러 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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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락공원 지도

 

 

 

 

부산시설공단에서 제공하는 영락공원 안내도다. 영락공원은 보통 돌아가신 가족의 장지를 이곳으로 하거나 봉안했을 경우, 간간이 찾아오게 되는 곳이다. 영혼을 모시는 장소인 만큼, 일반인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모시고 있는데, 오늘은 그곳들을 방문해 봤다. 사실 조금 무서웠다. 무덤도 많고, 햇빛은 들지만 추운 바람이 많이 불었으며, 몇몇 마른 나뭇가지와 풀들이 땅에 떨어져 한산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산의 다양한 기념 시설을 알리기 위해 갔다.

그렇게 결심하고 간 곳은 크게 총 4군데였다. 이제 각각의 장소를 소개하겠다.

2. 한성수 동지비와 창립기념비

2-1. 한성수 동지비

차로 제1, 제2, 제3, 제4, 제7묘원으로 차를 타고 가는 길은 금정도서관을 지나 맨 좌측 길로 올라가야 한다.

금정도서관 쪽에서 올라와 가장 좌측 길로 쭉 올라가면 제2묘원으로 가는 분기점과 매점이 나오는데, 그 매점의 좌측에 이렇게 3개의 비석이 있다.

좌측 편 낮은 돌계단을 올라가 보면,

이러한 석비가 놓여 있다.

한성수 동지비

여기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일생을 마친 한 성수 동지가 잠들고 있읍니다. 한동지는 신의주 태생으로서 일본 전수대학 재학중 동원되어 중국전선으로 갔읍니다. 일찌기 조국 광복에 뜻을 가진 한동지는 곧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의 일원이 되어 상해에서 일본군 병참기지 파괴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군에게 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이어 사형을 당했읍니다. 한동지는 배달민족의 권위로서 일본말 쓸 것을 거부하고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므로써 그들과의 타협을 거절하였읍니다. 일본군은 우리 조국에 충성한 한동지를 끝내 처형하고 그의 유골만이 1971년 11월 20일 고국에 돌아왔읍니다. 동포요 아까운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한 성수 동지의 무덤 앞에 걸음을 멈추어 명복을 빌어주십시오.

1972년 5월 13일 건립
1.20 동지회

독립운동가 한성수(1920~1945) (출처 : 독립기념관)

1920년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한성수(韓聖洙, 1920~1945)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명문 민족사립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육을 받고 1939년 졸업 후 1941년에는 일본 센슈대학(專修大學/전수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1944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물량으로 국민과 식민지민을 차출하던 시기 일본군 평양 50부대에 강제 징집되어 훈련을 받았다가 중국전선에 투입된다...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3월 26일 밤에 동료 2명과 함께 철조망을 넘어 탈출했고, 이후 그는 곧장 광복군 제3지대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군에 붙잡힌 한인 청년들을 불러 모으는 임무를 하던 중 1945년 3월 13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광복군과 관련된 기밀을 발설하진 않았다. 이후 재판을 받고 1945년 5월 13일 난징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다 1차적으로 지금의 영락공원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대전현충원에 재안장되었고, 1977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된다.

2-2. 창립기념비

한성수 동지비 우측에는 길게 뻗은 창립기념비가 놓여 있다.

1966년 근대의 여명이 동천에서 밝아오던 날. 우리는 이 고장서 살다가 떠난 선인(先人, 선대의 사람)들의 영혼(灵魂)의 안식처를 찾았나니라 가며 들리고 오며 들리어 꽃도 꽂고 잔디도 손질하며 생전에 유덕을 기릴 평화로운 영혼의 터를 푸른 용이 나래치는 금정(金井)의 산맥을 서로 살짝 빗긴 동산(東山) 아늑하고 고요한 이 자리에 나라에서 처음가는 아름다운 공원묘지를 설정했나니라 이곳은 누구나 시원(始原, 처음 그대로)의 땅속에서 일체의 경계를 벗어난 무한히 탕탕(蕩蕩, 넓고 아득한)한 인생 본연의 세계 수 많은 혼령은 지금 저마다 못다한 생애의 광영(光榮, 영광)을 후인(后人,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촉하는 말로 사철 꽃은 저렇게 피고 새는 그리도 울부짖고 있나니라 찾아오는 유족과 길손들이여! 눈을 감고 조용히 유명(幽明, 어둠과 밝음, 저승과 이승)을 더듬어 생전에 고인의 유덕을 추모하고 큰 덕은 내려가며 큰 창조로 갚을지니라.
이곳은 영원한 선조의 마을 봄 가을 여름 없이 한결같은 우리의 정성으로 가꾸어져 평화와 번영은 우리들 선령(先灵, 선조의 영혼)의 뿌리쨤에서 부터 피어 나오리라.

서기 1977년 5월 일
비문 김봉룡(金鳳龍) 글씨 창남(蒼南) 고동주(髙銅柱)
건립 재단법인 부산영원(釜山靈園) 시공 영원사(灵苑社) 구자익(具滋益)

이 창립기념비의 우측에는 지금의 영락공원의 연혁이 적혀 있다.

부산시 공원묘지
1966년 7월
김대만(金大萬) 시장 재임 시
건립추진위원회 창설
위치를 부산시 동래구 두구동 산83의 1로 선정.
11월 묘지 설치 확정 고시(현 면적 : 247,712평)
1967년 2월 제1차 공사 준공
7월 재단법인 부산영원 설립 허가
9월 제1묘원 준공 (3,964기)
10월 묘지 사용 허가, 업무 개시
1968년 11월 제3차 공사 준공
1970년 10월 김덕엽(金德燁) 시장 재임 시
제2묘원 준공(2,066기)
1971년 7월 최두열(崔杜烈) 시장 재임 시
제3묘원 준공(1,971기)
1972년 8월 박영수(朴英秀) 시장 재임 시
제4묘원 준공(1,720기)
1973년 9월 제5묘원 준공(1,583기)
1974년 2월 제6묘원 준공(1,276기)
11월 제7묘원 준공(2,606기)
1975년 12월 제8묘원 준공(2,595기)
1977년 1월 제9묘원 준공(1,643기)
1977년 5월 부산직할시장 박영수 부시장 김학중 (金學重)
재단법인 부산영원 이사장 류목열(柳穆烈) 전무이사 김대열(金大烈)

이사 나문식(羅汶植) 정기영(鄭琪永) 정남식(鄭南湜) 구두회(具斗會) 감사 조인구(趙寅九)

이렇게 1977년 1월까지의 부산영락공원의 간단학 약력을 알 수 있다.

3. 영락교를 지나 마주치는 선열들의 이야기

금정도서관을 지나서 쭉 내려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쭈욱 가서 가족봉안묘 방향으로 좌측으로 꺾어 가면,

이렇게 저 멀리 다리 하나가 보인다.

영락교라고 부르는 이 다리를 건너면 제6묘원으로 갈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 전에 여러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락교를 지나면 좌측에 위에서부터 일본인총이안비, 순직선원 위령비, 태평양전쟁 의가남마위령비, 김근우공 유적지가 있으며, 우측에는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3-1. 일본인총이안비

가장 우측에 있는 일본인총이안지비(日本人冢移安之碑)다. '일본인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어(移) 모신(安) 비'라는 뜻이다.

비석의 정면

비석의 정면에서 왼편에는 '1962년 5월에 설립했으며, 1991년 9월에 옮겨 세웠다(移立)'고 적혀 있다.

1945년 일본제국이 항복을 하고, 미군정이 한반도에도 시작되면서 당시 부산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철수했지만, 그 이전에 사망하거나 묻혀 차마 수습되지 못한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지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후 1962년 5월, 당시 부산시장이었던 김현옥(金玄玉)은 서구 아미동에 위치했던 일본인용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유골, 위패, 과거장 그리고 그 외 부산 각 지에 위치했던 일본인들의 유골, 위패, 과거장 등을 한 곳에 모아 당감동 화장장 옆에 이 비석과 봉안당을 건립했다.

이후 1988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당감동 화장장이 폐지되면서 1991년 10월 현재의 영락공원에 옮겨온 것이다.

 

3-2. 로제스호 선원 위령비

일본인총이안비 바로 왼쪽에 있는 이 위령비는 로제스호 선원 위령비다.

가까이 가면 비의 정면에 위령이라고 적혀있고, 아래에 양편에 작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의 좌측 아래에 새세겨진 글귀 비의 우측 아래에 새겨진 글귀
사망 선원 명단

김성철  정원영
홍연표  최거훈

서진술  장영안
김성진  박일용
허   양  문석윤
김용석           
주운덕           
1982년 8월 9일(음력 6월 20일) 타국 먼 페르시아 만에서 예측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열셋 사람의 넋을 위로코저 이곳에 위령탑을 세워 삼가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1982년 10월 9일

 

3-3. 배너호 선원 위령비

로제스호 선원 위령비 왼쪽에도 선원 위령비가 있는데, 이 위령비는 배너호 선원 위령비다.

비의 좌측 아래에 새세겨진 글귀 비의 우측 아래에 새겨진 글귀
(31분의 인명)

   
그날 갈라지는 바람
성난 말의 갈기를 일으키던 파도
비정스런 북태평양과 싸워 싸우다
돌아오지 못한 님들이 함께 모여 평생을 다바쳐 살아왔던
이 땅의 바다를 지켜보면서 끝끝내 다하지 못한 말
돌아와 내 집으로 돌아왔어 한마디 말이 돌이 되어
여기 뜨거운 돌이 되어
우리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아
우리 뒤를 따라올 숫한 바다 사람들아
결코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주오
우리는 살아지지 않았으니 그저 바다에 안겨
그토록 좋아하던 바다의 품에
잠시 쉬고 있을 뿐이라오.

1977년 9월 일

 

3-4. 경주김공휘근우 유적비

가장 좌측 편에 있는 비는 경주김공휘근우 유적비다.

비석에 따르면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던 경주 김씨 김근우(金根祐)의 공을 기록한 비다. 그의 아내는 숙부인(淑夫人)이라는 칭호를 받은 경주 최씨였다.

이 비의 좌측에 작은 설명이 적혀 있다.

김근우공의 유적

임진년(서기 1592년, 선조 25년) 4월 14일 왜적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와 동래부를 함락하고 한달만에 서울을 함락, 두 달이 못되어 평양성으로 나아가니 그 사이 사직은 위태롭고 가는 곳마다 시혈이 낭자하고 아비규환소리로 극도의 참경(참혹한 풍경)과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할 수 없는 전황에 공은 스스로 용감하게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 창의의 용기를 가져 군문에 입대하여 임진왜란 7년 동안 수많은 공을 세워 나라를 빛내었다. 현재 충렬사에 춘혼이 봉안되어 있으며 충렬사와 표충록에는 공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대략 다음과 같다.
임진 7월부터 문무의 명장 김정서(金廷瑞)진에 종군. 동래, 울산, 양진 및 소산령진에서 싸워 토벌하여 위대한 공훈을 세웠고, 병장 김정서의 순절 후 도원수의 청문을 받아 장졸들을 이끌고 적세(敵勢, 적의 형세)를 정찰하여 훌륭한 작전 수립으로 혁혁한 전과를 획득하여 과연 지장(智將, 지혜로운 장수)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곽충익망우당 장군진에도 종군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성을 고수하여 7년 전쟁에 굳센 결의가 변함이 없었으며 무술년(서기 1598년, 선조 31년)에는 벼슬이 감군찰윈(監軍察院) 초탐장(哨探將)이 되고, 전쟁 중에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世德)의 왜군에게 보내는 유왜문(諭倭文, 왜군에게 유시한 글)을 받아 왜장에게 전달하여 가히 장군지략을 알 수 있다. 영조 때 병진년(서기 1736년)에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에 증직되고 을축년(서기 1745년)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로 벼슬을 높이게 되었다. 나라에서 공의 집대문 문미에 편액을 만들어 와서 의용(義勇) 두 자를 크게 붙여주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우러러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원래 문인이었던 김근우공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후에 큰 성공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5. 태평양전쟁 희생 한국인 위령비

오른쪽으로 건너가면 '태평양전쟁 희생한국인 위령비'라고 적힌 큰 위령비가 하나 보인다.

태평양 전쟁에 끌려간 한국인 영혼 중 총 21709위(대한민국인 : 18141위, 북한인 : 3568위)를 이곳에 모시고 있다. 

  경기 강원 충북 충남 경북 경남 전북 전남 함북 함남 평북 평남 황해 군별 합계
육군 941 419 396 449 1083 1109 472 1260 397 365 496 399 644 8430
해군 841 543 767 1173 1693 1749 2354 2892 43 227 257 204 536 13279
지역별 합계 1782 962 1163 1622 2776 2858 2826 4152 440 592 753 603 1180 21709

 

그 아래에는 이렇게 헌시가 새겨져 있다.

헌시

여기는 내 조국의 땅
몽매(夢寐, 꿈 속)에도 그리던 근역(槿域, 무궁화가 많은 땅)의 동산

그대들아 돌아오소
애타게 기다리던 부조(父祖,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품으로

봄에는 백화(百花, 온갖 꽃) 다투어 피고
가을이면 오곡이 풍요로우니
해와 달이 보호하는 청구(靑丘)의 산하로라

원통(冤痛)의 세월은
영겁의 저 편으로 보내고
이제는 돌아오소 내 조국의 땅으로

무궁토록 겨레가 보살피는
안식의 동산에서
포근히 안기어 고이 잠드소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 시였다...

 

4. 제8묘원 인근의 무연분묘 합장비와 그 위령탑

영락공원으로 가는 큰길을 따라 쭈욱 가면

제8묘원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이런 갈림길이 보일 텐데, 올라오는 사람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된다. 왜 사진이 위에서 찍혔냐고 물어볼까봐 덧붙이자면, 사실 난 제4묘원 쪽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내려왔다ㅜ 아침이었는데도 너무 무서웠다ㅠㅠㅠㅠ 뒤에서 뭔가 악령이 쫓아올 것 같은 공포심이 들었다구... 어쨌든 지금은 편안하게 집에 와서 글을 쓰고 있다 ㅎㅎ

이 길로 쭈욱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평지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무연분묘를 합장한 무덤과 이를 표시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 높은 계단으로 쭉 올라가면 위령탑이 나온다. 여긴 중양절(음력 9월 9일)이면 영락공원의 주도로 이 두 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4-1. 무연분묘 합장비

평길을 따라 쭈욱 가면 저 좌측에 큰 무덤군과 비석이 있다. 참고로 여기서 이 길 따라가면 금정구민운동장이 나오는데, 여기는 설이나 추석 연휴에 이곳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노포 IC로 건너오는 차는 이곳에 주차한 뒤 이 길을 따라 영락공원으로 걸어 올라올 수 있다.

뒤에 길게 뻗은 무덤 앞에 '무연분묘 합장비(無緣墳墓合葬碑)'라고 적힌 길고 검은 비석이 서있다.

묘비 정면 기준 좌측에 새겨진 글귀 묘비 정면 기준 우측에 새겨진 글귀
서기 1981년 9월 9일 재단법인 부산영원 건립 서기 1979년 11월 26일 7206주(柱) 합장

비석 뒷면에는 지구별 합장 내역이 표시되어 있다.

지구별 합장 내역
동구청지구 3797주
동래구청지구 1295주
서구청지구 787주
북구청지구 757주
부산진구청지구 178주
남구청지구 161주
해운대구청지구 152주
영도구청지구 67주
중구청지구 12주
합계 7206주

1979년 11월 26일에 무연분묘에 묻힌 7206주를 합장했고, 이후 이 비를 1981년 9월 9일의 중양절에 당시 영락공원에서 건립했다고 한다.

4-2. 위령탑

무연분묘 합장비 쪽에서 다시 돌아 계단을 올라가자.

저 멀리 거대한 돌탑이 보이는가?

'위령탑'이라고 적힌 높은 돌탑이 있다.

무명(無名)의 영령이시여
산자수명(山紫水明, 산빛이 곱고 강물이 맑음)한 이곳 영원(靈園)에
고이 잠드소서

작은 비문에 이런 글귀도 적혀 있었다. 이 위령탑은 글귀에서도 알 수 있듯 아까 봤던 무연분묘 합장비와 그 분묘에 있던 

뒷면에는 건립일과 건립자가 적혀 있다.

서기 1973년 12월 일 건립
부산시장 박영수(朴英秀)

 

사실 오늘 간 영락공원은 다음에 아빠랑 같이 갈까 싶었지만 용기 내서 아침 일찍 헬스 끝나고 한 번 가보자고 다짐했다.

근데 또 이 무덤으로 둘러싸인 공원을 걸어 다니는 건 무서우니 차를 잠깐 타고 갔고 혹시 몰라 소금도 뿌렸다ㅋㅋㅋㅋ 갔다 와서도 소금 뿌렸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역사의 한 흔적이 있다는데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써간다.

 

일단 당분간은 무덤가에는 최대한 가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다른 도심  속에 있는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곳들을 또 조사해서 탐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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