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구는 왜 '금정구'라고 부르게 된 걸까? - 부산의 구/군 명칭 유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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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구는 왜 '금정구'라고 부르게 된 걸까? - 부산의 구/군 명칭 유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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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

부산의 행정구역 (출처 : wikimedia)

2023년 1월 현재 부산은 15개의 구(區)와 1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
구(區) : 15개 강서구(江西區), 금정구(金井區), 남구(南區), 동구(東區), 동래구(東萊區), 부산진구(釜山鎭區), 북구(北區), 사상구(沙上區), 사하구(沙下區), 서구(西區), 수영구(水營區), 연제구(蓮堤區), 영도구(影島區), 중구(中區), 해운대구(海雲臺區)
군(郡) : 1개 기장군(機張郡)

그럼 이제 각 군의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아보자.

 

2. 부산광역시의 구 명칭 유래

2-1. 강서구(江西區) : 낙동강의 서쪽

강서구 지역은 전통적으로 김해에 속했었다. 940년부터 김해부에 속했다가 1413년에는 김해도호부에, 그리고 1896년까지도 김해군에 속했었다.

 

그러나 이후 1978년 대저읍, 명지면, 가락면 동부 지역 등이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에는 대저2동의 을숙도, 일웅도가 부산직할시 사하구에 편입된다. 1989년에는 가락면, 녹산면, 천가면이 동으로 바뀌면서 부산직할시에 속하게 되면서 부산직할시 강서구로 승격되었다. 이후 부산직할시가 1995년 광역시로 승격되며 지금까지 부산광역시 강서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미 유추했겠지만 '강서(江西)'라는 구 명칭은 낙동강(江)의 서쪽(西)이라는 뜻이다.

 

2-2. 금정구(金井區) : 금정산(金井山)이 있는 곳

금정구도 생각보다 최근에 등장한 행정구역이다.

금정구 지역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 시대부터 동래라고 부르는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동래부가 동래군과 부산부로 분리되었고, 이후 1942년에 부산부가 확장되면서 현재의 부곡동, 장전동, 금사동, 서동, 회동동, 오륜동 등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부산부 동래출장소를 설치했다.

 

이후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과 함께 동래군 북면의 선동, 두구동, 노포동, 청룡동, 남산동, 구서동을 편입해 부산직할시 북면출장소를 설치했다가, 1945년에 그 북면출장소를 부산직할시 동래구로 승격했다. 그러다 1988년 인구가 증가해 동래구의 북쪽 지역 일부를 금정구로 분구시키며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95년 부산직할시과 광역시로 승격되며 지금까지 부산광역시 금정구로 불리게 되었다.

바로 부산에서 가장 높은 산이면서 범어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는 금정산(金井山)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2-3. 기장군(機張郡)

신라시대에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라고 불렸는데, 이후 757년에 기장현(機張縣)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계속 기장(機張)이라는 지역명으로 불리다가 1895년 기장군(機張郡)으로 승격되었지만, 곧 동래군에 편입되면서 5개의 면으로 해체된다. 이후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고 이 지역은 양산군에 병합되었는데, 1986년에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하게 된다. 그러다 1995년 기장군이 부활됨과 동시에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어 지금까지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지명인 만큼 우선 한자를 풀이해보자.

 
베풀다
의미 틀/기계, 베틀, 기틀/고동, 재치, 기교, 거짓, 허위, 기회, 때/시기, 권세, 갈림길/분기점, 찌, 비롯하다, 위태롭다/위험하다 베풀다, 어떤 일을 벌이다, 기세가 오르다, 세게 하다/성하게 하다, 넓히다/크게 하다, 크게 떠벌이다, 내밀다/드러내다, 어그러지다/어긋나다, 속이다/기말하다, 뽐내다/교만을 부리다, 부어오르다/불룩해지다, 휘장/장막

한자만 보면 '틀(機)을 펼치다(張)'라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로써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는데, 그 중 몇가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옥황상제의 옥녀(玉女)가 베틀(機)을 차려(張) 물레질을 한 곳
쇠뇌 덫(機)을 이미(旣) 널리 펼쳐(張) 변방의 수비를 맡은 곳
일광산을 배산으로 하여 베틀(機)을 차린(張) 지리학적 모습

경덕왕이 지명을 한자 형식으로 바꿀 때 중국의 고사나 전설을 가지고 붙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전설과 고사와 관련된 설도 있고, 아님 지리적으로 군사 요충지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럼 그 이전에 불린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은 어떻게 해석하는게 좋을까?

 
개별 추측 발음 불 or 벌
개별 추측 의미 갓(변두리) or 첫째 불(fire) 소향(小鄕)
전체 추측 의미 갑국(甲國) or 갑향(甲鄕) : 갓마을(변두리 마을) or 첫째 마을

당시 동래 지역의 변두리에 있었던 이 마을은 바다에서 어업 활동을 마치고 육지로 들어올 때 처음 마주하는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여 '갑화량곡(갑화양곡)'으로 불린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이 지역을 별칭으로 차성(車城)이라고도 불렀는데, 여기서 차(車)는 정수리(首)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어 수성(首城)이라는 의미로 쓰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이 지역이 해안과 접하면서도 변경의 군사상의 요충지였다는 점을 다시한 번 보여준다.

 

2-4. 남구(南區) : 동래읍성의 남쪽

원래부터 동래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 부산진출장소로 일부 지역이 배속되었다가, 1953년 부산시 대연출장소의 소관이 되었다. 이후 1957년에는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와 동래구 수영출장소의 일부 지역으로 배속되었는데, 1975년에 해당 지역은 남구로 변경되어 1995년에 부산광역시 남구가 되었지만, 몇 달 뒤 이 지역의 일부를 분리해 수영구를 만들게 된다.

 

이 지역은 오래전 동래부의 읍성(동래읍성)이 있던 읍내면(邑內面)의 남쪽에 있어서 조선 후기에는 남촌면(南村面)으로 불리었다가 1995년에 남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원래는 동래읍성 남쪽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 보면 부산광역시청의 남쪽에 있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5. 동구(東區) : 옛부산의 중심(중구) 지역의 동쪽

이 지역은 1407년에는 부산포 왜관이, 1607년에는 두모포 왜관(1607~1678)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대일 관계의 거점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동래부 동평면에 속했으며, 1910년 동래군 부산면의 일부에 속했다.

1914년 동래군 부산면과 동래군 사중면이 모두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면이 되었다. 1949년 부산부를 부산시로 개칭했고, 1951년에는 이 지역에 부산시 초량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57년 구제 실시로 당시 중심부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시 동구가 되었다. 이후 1995년 부산광역시 동구로 지금까지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2-6. 동래구(東萊區) : 동래부가 있던 곳

신라시대 때부터 동래라고 불린 이 지명이 계속 이어졌다. 1740년에 이미 동래부였으며, 1910년에는 부산부에 속했다가 1914년 동래군이 된다. 1942년에는 부산부 동래출장소가, 1949년에는 부산시 동래출장소가 세워졌고, 1957년 부산시 동래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 지역의 일부는 해운대출장소(1978), 금정구(1988)로 분리되었으며, 결국 1995년 부산광역시 금정구가 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래는 동래부가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이 지명이 쓰여졌다.

이곳은 오래전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인근에 독로국(瀆盧國)도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거칠산국이라는 지명을 신라의 경덕왕이 동래(東萊)로 고쳤는데, 이에 따르면 '거칠고 경작하지 않은 땅'이라는 뜻도 가진 래(萊)가 그 어원이 아닐까하는 학설도 있으며, 독로국(瀆盧國)의 지명이 지금의 동래로 바뀌었다는 학설도 있다. 이렇게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동래라는 지명은 부산의 구의 명칭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부산 전체의 대표적인 행정구역으로 봐도 기장군과 함께 아주 전통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7. 부산진구(釜山鎭區) : 부산진성이 있던 곳

1409년 양주에 속했다가 1428년 동래현 동평현에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동래부 동평면과 서면에 속했는데, 이후 1936년 부산부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다 1957년 부산시 부산진구가 되었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지명은 지금은 부산진성과 그 관할 지역인 부산진에서 유래했다. 1407년 부산포를 개항하며 일본인(왜인)을 감시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군사를 주둔하게 했으며, 1490년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의 증산공원 인근에 성을 쌓고 부산진성(1490~1592)이라고 칭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이 성을 지키던 정발 장군이 순국했고 이후 성 자체는 무너지고 만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증산에 왜성을 쌓고(증산왜성), 그 성을 지킬 자성(子城)인 왜성(자성대왜성)을 쌓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7년 조선 수군은 일본의 자성대왜성을 수리해 새롭게 부산진성(1607~)으로 삼고 이 땅을 지켰다. 이 성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구명이 만들어졌다.

 

 

2-8. 북구(北區) : 옛 부산의 북쪽(or 동래읍성의 북쪽)

오래전에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에 속했다가 1869년 동래부 좌이면이 되었지만 곧 1875년 다시 양산군 좌이면으로 복귀되었는데 1896년에는 부산부 좌이면에 속한 적도 있지만 또 다시 1897년에 양산군 좌이면이 되었다. 왔다리갔다리...

1910년에는 양산군에서 이관되어 부산부 좌이면이 되었고, 1914년 좌이면에 속한 지역에 동래군 서하면 만덕리를 병합해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이 되었다. 1943년에는 동래군 구포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와 사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 두 출장소는 1975년 부산직할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되었고 1978년 북구로 승격하며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행정상 이 지명은 당시 부산직할시 행정의 중심부에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며, 전통적으로는 조선시대 동래의 중심지 동래읍성의 북쪽에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여겨진다.

 

2-9. 사상구(沙上區) : 사천면 상단이 있던 곳

오래전부터 동래군 동평현에 속했다가 1740년에는 동래군 사천면에 속했다. 이 사천면은 1866년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이분되어 그 북쪽인 사상면이 현재의 지역쪽을 관할했다.1914년에는 양산군 일부 지역을 편입시켜 동래군 사상면으로 개편된다. 1963년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5년에는 부산진구 구포출장소와 통합해 부산직할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1978년 북구로 승격했는데, 1995년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며 북구의 일부 지역이 분구되어 사상구가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낙동강 하구에 모래 퇴적되어 형성된 낙동강 삼각주 아랫부분이라 하여 사천면(沙川面) 상단(上端)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을 줄여 사하(下)라고 부르게 되었다.

 

2-10. 사하구(沙下區) : 사천면 하단이 있던 곳

이 지역은 동래부 사천면 하단에 속했으며, 대일 방어상 요충지였기에 다대진성과 목장과 같은 관방 시설이 있었다. 1866년에는 사천면이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나누어지며, 그 중 사하면에 속했다. 1910년에는 부산부 사하면이 되었지만 1914년에는 동래군 사하면과 부산부의 일부로 나뉘게 된다.

1942년에는 부산부 사하출장소가 관할했으며, 1951년에는 부산시 서부출장소 사하지소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 부산시 서구 사하출장소 관할이 된다. 1975년 부산직할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되었다가 1983년 북구 관할의 을숙도, 일웅도를 편입함과 동시에 서구에서 분구되어 부산직할시 사하구가 되었으며, 1995년 부산광역시 사하구가 되었다.

 

이 지역은 낙동강 하구에 모래 퇴적되어 형성된 낙동강 삼각주 아랫부분이라 하여 사천면(沙川面) 하단(下端)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을 줄여 사하(下)라고 부르게 되었다.

 

 

2-11. 서구(西區) : 옛부산의 중심(중구) 지역의 서쪽

1740년부터 동래부 사천면에 속했으며, 대일 방어상 요추잊였기에 다대진성과 목장과 같은 관방 시설이 있었다. 1866년에는 이 사천면이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나누어지며, 사하면의 일부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1914년에는 부산부와 동래군 사하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33년 부산부제 개정으로 서부 제1방면사무소, 서부 제2방면사무소, 서부 제3방면사무소 등이 설치되었으며, 이는 곧 당시 중심부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1951년에는 서구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로 서구와 서구 사하출장소가 설치된다. 이후 1963년 부산직할시 서구가 되었으며, 1995년 부산광역시 서구가 되었다.

 

2-12. 수영구(水營區)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곳

조선 전기에 동래진에 속했던 이 지역은 1740년에는 동래부 동면, 남촌면 상단 남촌면 하단에 속했으며 1904년에는 동래군 남상면에 속했다. 이후 1942년에는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부산부 수영출장소가 생겼다. 시간은 흘러 1975년에는 부산직할시 남구에 속했다가 1995년 남구에서 분리되어 수영구가 신설되며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현재의 수영사적공원 지역에 위치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좌수영)의 이름에서 현재의 구명이 유래했다. 처음엔 동래현 부산포에 있었다가 몇 번의 이전 끝에 1652년부터 군제개혁이 있었던 1895년까지 이 지역은 경상좌도의 수군 통수부로 자리잡게 되었고 여기서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라는 명칭이 줄임말인 '수영(水營)'으로도 불렸던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2-13. 연제구(蓮堤區) : 연산동 + 거제동

쭈욱 동래부에 속했다가 1914년 동래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1936년에는 부산부 서면이 되었으며, 1957년에는 부산시 동래구에 속했다. 이후에도 쭉 동래구에 속했다가 1995년 그 지역의 연산동(蓮山洞)의 연(蓮)자와 거제동(巨堤洞)의 제(堤)자를 합해 연제구라고 부름과 동시에 부산광역시에 속하게 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14. 영도구(影島區) :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로 빠른 말들을 키운 섬

신라 때부터 이 섬을 그림자(影)도 끊어져(絶) 보일 만큼 빨리 달리는 말(馬)인 절영마(絶影馬)를 키우던 국마장이 있었기 때문에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다. 고려 시대에는 양주군 동평현에 속했고, 1405년부터 동래현에 속했다. 이후 1881년에 이 섬엔 부산항 개항으로 외국 선박 감시와 해안 방비, 일본인의 수탈 방비를 위한 절영도진(絶影島鎭, 1881~1895)이 설치되며 본격적으로 섬이 아닌 행정구역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이후 1896년엔 동래부 사하면 영선리가 되어 처음 동리 체제를 갖추었다. 시간은 지나 1910년에 부산부에 속했으며, 1951년에 부산시 영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에는 부산시 영도구로 승격하며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1995년 부산광역시 영도구가 되었다.

 

1951년 이 지역의 이름을 행정편의상 절(絶)자를 빼고 영도(影島)라고 부른 것이 현재 구명의 유래가 되었다.

 

2-15. 중구(中區) : (옛)부산 지역의 중심지

1678년부터 현재의 용두산 공원 쪽에 세워진 초량 왜관이 자리 하면서 동래부 사천면 신초량리에 속했다. 이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현 동관동)과 서관(현 광복동의 신창동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청동에는 일본 사신을 맞아 연회를 베풀던 연향대청(晏饗大廳)이 있었다.

 

1879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부산항이 개항되고 이 지역에 있던 초량 왜관은 폐쇄되었고, 대신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어 일본인 거주자 수가 급증하게 된다. 그렇게 이곳은 부산의 중심지가 되어갔고, 해방 이후 1951년에는 임시 정부의 정치 중심지 구실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시 중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 부산시 중구로 이름이 바뀌면서 역사속에 등장한다. 이후 1995년에 부산광역시 중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2-16. 해운대구(海雲臺區) : 최치원이 쌓은 대가 있는 곳

이 지역도 쭉 동래에 속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 동면에 소속되었고, 이후 동래부 동상면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에는 동래군 동래읍, 동래군 남면으로 개편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와 부산부 수열출장소로 개편된다. 1953년에는 부산시 해운대출장소에 위치했고, 1957년에도 부산시 동래구 해운대출장소에 속했다. 1979년에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로 된 뒤 1995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로 바뀌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동백섬 남쪽 암벽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내려와 자신의 호인 해운(海運)을 바위에 새기면서 대(臺)를 쌓고 풍류를 즐겼는데, 그렇게 그가 쌓은 해운대(海運臺)라는 지명에서 구명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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