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군국주의 국가가 된 일본(쇼와 덴노의 등극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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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군국주의 국가가 된 일본(쇼와 덴노의 등극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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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와 시대의 개막

1-1. 섭정시대(1921.11~1926.12)

하라 타카시 암살 사건(좌측)과 사건 차기 내각총리대신이 된 타카하시 코레키요. 참고로 타카하시 코레키요는 하라 타카시 암살 사건과 무관하다.

1921년 11월 4일, 일본사 최초의 문민통제를 일부나마 실현한 총리이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었던 하라 타카시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하라 타카시 암살 사건(原敬暗殺事件, 1921.11.04)),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타카하시 코레키요(高橋 是清, 1854~1936)가 앉게 되며 타카하시 내각(高橋内閣, 1921.11~1922.06)이 성립한다. 그러는 한편, 히로히토 친왕(裕仁親王)은 육군 특별대연습 통감 대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직후 다이쇼 덴노(大正天皇, 1879~1926)는 오래된 질환을 이유로 황좌를 떠났고, 만 20세였던 1921년 11월 25일, 히로히토 친왕이 섭정에 취임하며 셋쇼우미야(摂政宮, 섭정궁)로 칭해졌다. 참고로 <구황실전범>이라고도 불리는 <황실전범(皇室典範, 1889~1947)> 아래에서 덴노를 대신해 대권(大権, 덴노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황족섭정에 취임한 것은 히로히토 친왕뿐이다.

 

그가 섭정을 시작했을 때는 전후 처리 시기에 해당해 1921년 12월부터 다양한 조약을 맺기 시작했으며,

서명 연월 조약 내용
1921.12 .13 4개국 조약
(四カ国条約, Four-Power Treaty)
태평양 섬들에의 상호 권리 존중과 현상 유지 도모
1922.02.04 산둥 현안 해결에 관한 조약
(山東懸案解決に関する条約)
1.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독일로부터 획득한 산둥성(자오저우 만, 칭다오) 독일 조차지 및 산둥 철도(山東鉄道) 반환

2. 자오지 철도(膠済鉄道)는 일본의 차관철도로 여겨지며, 해당 철도의 연선(沿線, 인근 땅)인 팡쯔(坊子), 쯔촨(淄川), 진링 진(金嶺鎮)의 광산은 중일합판(合弁, 합작)회사의 경영으로 옮김
1922.02.06
9개국 조약
(九カ国条約, Nine-Power Treaty)
열국이 중국 독립과 행정적, 영토적 보전을 약속하고, 문호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을 승인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ワシントン海軍軍縮条約)
해군 전함, 항공모함 등의 보유 제한 결정
1922.12.07 일본국-파란국간 통상 항해 조약
(に日本国波蘭国間通商航海条約)
일본과 폴란드간 통상 및 항해 승인 등

타이완 사업 공채(台湾事業公債)나 관동주 사업 공채(関東州事業公債)와 같은 공채를 민간에 발행해 타이완과 관동주에 관련된 사업 모금을 꾀하기도 했다.

타이난 지역을 시찰중인 히로히토 섭정궁(후의 쇼와 덴노) (출처 : http://khm.gov.tw/)

1923년 4월에는 전함 콘코(金剛)를 타고 타이완을 시찰하기도 했다(타이완 행계(台湾行啓)).

그 해 9월 1일에는 칸토 대지진이 일어났으며, 9월 15일에는 지진으로 일어난 참상을 직접 말을 타고 시찰했으며, 그 상황을 보고 결혼을 연기했다.

토라노몬 사건 (출처 : 만화 <쇼와덴노>)

이후 12월 27일, 토라노몬(虎ノ門) 부근에서 저격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명중하진 않았고 목숨을 건진 토라노몬 사건(虎ノ門事件)이 일어났다.

카라후토의 오오도마리 항(大泊港)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는 히로히토 섭정궁과 황족들 (출처 : 皇太子殿下樺太行啓記)

1925년 8월, 전함 나가토(長門)를 타고 카라후토(樺太, 남 사할린)를 시찰했다(카라후토 행계(樺太行啓)).

 

1-2. 즉위(1926.12)

百姓明、協萬邦
백성이
밝고 밝아져, 만방을 화합하고 화하게 한다.

- <서경><요전(堯典)>

다이쇼 덴노(좌측)과 그의 아들 쇼와 덴노(우측)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大正天皇, 1879~1926)가 사망하고, 같은 날 황태자였던 아들 히로히토 친왕이 쇼와 덴노(昭和天皇, 1901~1989)로 등극한다. 쇼와 덴노는 그가 즉위한 그날을 쇼와 원년으로 선포했고, 그렇게 1926년 12월 25일부터 쇼와 원년이 시작된다.

1926년 12월 25일은 다이쇼 15년이자 쇼와 1년이다. 즉, 쇼와 1년은 1926년 말의 약 7일 정도였다.

 

2. 입헌군주제가 돋아나다가 군부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다.

급속한 기술 진보를 이어가는 20세기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듯, 이전 시대와 달리 국토 자체를 파괴하는 대규모 근대전쟁을 동반한 동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은 국내적으로는 입헌군주제 체제를 취했고, 당초의 번벌정치(藩閥政治)를 벗어나 1920년대에는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게 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풍조를 받아 이어가는 모양으로 정당정치(政党政治)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당정치 또한 부패하게 되고, 잇따른 불황 속에서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를 사, 대륙 침략에 따른 사태 국가 개조를 지향한 세력이 대두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군부(軍部)였다. 1920년대 말부터 독립성을 확립해 나간 군부는 1930년 이후 정부의 의사에 반하는 군사활동이나 전투를 계속 일으켰고, 잇따르는 군사 쿠데타로 결국 정장정치를 없애버렸다.

 

3. 쇼와 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쟁특수로 매우 드문 호황을 맞아 일본 경제는 크게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종결되고 열강들의 생산력이 회복되자, 일본의 수출은 감소했고 일찌감치 전후 공황이 찾아왔다.

1927년 3월 23일에 일어난 뱅크런 사태 (출처 : 마이니치신문)

게다가 칸토 대지진이 일어나 지진 공황으로 이어졌으며, 진재어음(震災手形, 지진재해어음)의 회수불능상태가 누적되어 이를 계기로 뱅크런이 1927년 3월 15일부터 발생했으며, 4월 20일 전후에는 최고조에 달해 쇼와 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이라고 부르는 공황이 일어났다. 이와 결을 같이하는 일도 일어났는데,

흉년이 빈번했던 에도 시대에는 마비키가 자주 일어났다... (출처 : tanken.com)

쇼와 초기에 토호쿠 지방(東北地方)이 대흉작을 겪으면서 농가의 여성들은 아이들을 다 양육할 수 없어, 마비키(間引き, 산아를 죽이던 일)가 행해졌으며, 냉해와 빈곤으로 또 농촌에서는 딸을 성매매시키거나 결식아동이 증가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의 내각총리대신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사회문제를 포함한 경제문제가 터지자 일단 경제 안정을 시켜야겠다고 제1차 와카츠키 내각(第1次若槻内閣, 1926.01~1927.04)는 생각한다. 여차저차해보고 있던 중, 1927년 4월에 스즈키 상점(鈴木商店, 1874~1927)의 주거래은행이으로써 그 부실채권을 떠안은 타이완 은행(台湾銀行)의 부실채권 문제가 발생했다.

쇼와 금융 공황 진행도 (출처 : try-it.jp)

일본은행은 타이완 은행에의 추가 대출을 실시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정부 보증을 요구한다. 이 정부 보증에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의회는 닫힌 직후였고, 또 의회를 열어도 동의를 얻을 가망이 없었던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은 추밀원에 의한 긴급 칙령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추밀원은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반대했고, 결국 내각은 총사퇴하게 된다.

타나카 기이치 내각의 내각총리대신 타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

뒤를 이은 타나카 기이치 내각(田中義一内閣, 1927.04~1929.07)은 대장대신 타카하시 코레키요 하에서 3주간의 모라토리엄(지불유예령)을 선언해 전국 은행이 일제히 휴업하게 했고, 일본은행으로부터 9억 엔의 긴급 대출로 급한 불은 껐다. 이후 은행에 대한 정리통합이 진행되면서 5대 은행(미쓰이 은행(三井銀行), 미쓰비시 은행(三菱銀行), 스미토모 은행(住友銀行), 야스다 은행(安田銀行), 제일은행(第一銀行))으로 예금이 몰리게 된다.

 

4. 타나카 기이치 내각과 산둥 출병

만주와 몽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외교 및 군부 관계자들이 일주일 정도 모여 진행한 동방회의. 우측에서 3번째 인물이 타나카 기이치다. (출처 : 마이니치신문)

타나카 기이치 내각(1927.04~1929.07)은 중화민국의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을 움직여 만주와 몽골 지역에서의 다양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3회에 이르는 산둥 출병(山東出兵, 1927~1928)을 행하고, 도쿄에서 외교 및 군부 관계자들을 모아 동방회의(東方会議, 1927.06.27~07.07)를 열어, 만주와 몽골의 이권을 사수할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장쭤린과 교섭해 만주의 권익을 확대하려 했으나, 장쭤린은 응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봉천 군벌의 수령이었던 장쭤린(좌측)과 일본이 그를 폭살시켜버린 황고둔 사건(우측)

결국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関東軍)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시켜 암살해버린다(황고둔 사건(皇姑屯事件, 1928.06.04)). 관동군은 당초 이 사건을 중국 국민정부군의 소행이라고 공표했지만, 실제로는 관동군 참모 코모토 다이사쿠(河本 大作, 1883~1953)의 소행이었다. 이 사실을 타나카 기이치 수상이 알려드리려 했지만 쇼와 덴노는 오히려 설명을 듣고 싶지 않다고 불쾌감을 보였고, 이 여파로 타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7년 7월 초에 총사퇴한다. 

 

5. 보통선거와 사회주의, 그리고 파시즘

5-1. 보통선거와 사회주의

쇼와 시대 초기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성과로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 1900~1940)와 헌정회(憲政会, 1916~1927)의 양당제가 이루어져,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공공 투자에 의한 경제 부흥을 주장하는 입헌정우회와 재정 삭감과 민간 활력 중시를 통한 경제 부흥을 주장하는 헌정회(이후 입헌민정당)의 양대 정당이 교대로 내각을 조직하는 의원내각제로 '헌정의 상도(憲政の常道)'라고도 불리던 정당정치 시대였다.

1928년 2월 20일에 열린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 입헌정우회가 여당, 입헌민정당이 야당이 되었다.

특히 이전 내각 시절 '25세 이상 남자'로 유권자 범위를 확대한 <보통선거법(1925~1950)>을 통해, 제1회 보통선거라고도 불리는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第16回衆議院議員総選挙, 1928.02.20)가 개최되었다.

3.15 사건으로 잡혀가는 공산단원들. 이들은 개정된 <치안유지법>에 따라 대부분 사형당한다. (출처 : bunshun.jp)

선거 결과 입헌정우회가 야당이 되긴 했지만, 예상외로 꽤 많은 투표를 얻은 무산정당(無産政党, 일본 제국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류)이나 일본공산당(日本共産党, 1922~)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1928년에는 3.15사건을, 1926년에는 4.16사건을 일으켜 공산당계 활동가와 그에 동조한 사람들을 대량 검거했다. 그 동안, 긴급 칙령에 따라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925~1941)>을 개정해 최고형을 사형으로 정했다.

일본의 좌익계보(1945~1965) (출처 : Takeo Tamashiro)

한편, 문화나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융성해 1932년에는 노로 에이타로(野呂榮太郎, 1900~1934) 등이 쓴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강좌(日本資本主義発達史講座, 1932.05~1933.08)>가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1913~)에서 발행되어 지식층에 크고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해당 간행서를 집필한 사람들을 강좌파(講座派)라고 불렀는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키사카 이츠로(向坂 逸郎, 1897~1985) 등은 잡지 <노농(労農, 1927.12~1932)>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을 노농파(労農派)라고 불렀다. 두 파는 이후 활발한 논전을 펼쳤으나, 국가주의적 혁신운동이 대두됨에 따라, 탄압을 받고, 강제적으로 모여지게 된다.

혈맹단 사건으로 잡힌 맴버들이 재판받고 있다.

1932년, 이노우에 닛쇼(井上 日召, 1886~1967)는 자본주의 세력인 부유한 사업가와 자유주의 정치인을 암살하려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암살을 감행한 범인을 심문하던 과정에서 이들 단체가 밝혀졌고, 이 단체는 후에 혈맹단(血盟団)이라 불리며, 이들이 암살을 벌인 사건을 혈맹단 사건(血盟団事件, 1932.02~03)이라고 한다.

 

5-2. 경제불황과 파시즘

1929년 대폭락 이후 월 스트리트로 몰려든 군중 (출처 : SSA poster)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그날은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었다. 이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 주가 대폭락(1929.09.04~11.13)에 의해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1929~1939)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에도 파급되어 이듬해인 1930년, 타나카 기이치 내각의 뒤를 이은 하마구치 내각(濱口 内閣, 1929.07~1931.04)이 실행한 금해금(金解禁)을 계기쇼와 공황(昭和恐慌)이 야기되었다.

타나카 기이치 내각
(1927.04~1929.07)
하마구치 내각
(1929.07~1931.04)
제2차 와카츠키 내각
(1931.04~1931.12)

이 공황은 2차 세계 대전 이전 공황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식민지 포위에 의한 블록 경제로 재정비를 꾀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천문학적 배상금을 지고 있던 독일이나 고수익 식민지를 소유하지 않은 일본 등은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졌다. 이는 파시즘(fascism)의 대두를 초래해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Nazi)를 낳는 결과가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주장되어 군의 중국 진출을 추진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참가하는 미국 전권대표단 (출처 : Naval Historical Foundation)

1930년,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런던 해군 군축 회의(London Naval Conference, 1930.04.22)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첫째, 주력함을 1936년까지 연장하고, 둘째, 보조함의 보유 비율을 미:영:일=10:10:7로 하는 것이었다. 전권대사 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이를 수락했으나 일본제국 해군은 통수권을 침범하고 있다며 내각에 반발했다(통수권 간범 문제(統帥権干犯問題, 통수권 권리 침해 문제)).

 

6. 만주사변과 군부의 권력 장악

6-1. 만주사변(1931.09~1932.02)

만보산 사건의 원인이 된 용수로(상단 좌측), 당시 조선인 촌락(상단 우측), 만보산 사건 충돌 현장(하단 좌측), 만보산 사건으로 분노한 조선인이 평양의 한족 화교들을 학살한 뒤의 파괴된 평양 모습(하단 우측)

1931년 4월, 와카츠키 레이지로 수반의 입헌민정당 내각인 제2차 와카츠키 내각(1931.04~1931.12)이 성립했다. 그해 7월에는 중화민국 창춘 부근에서 조선 이민자와 중국 관청과 농민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 일촉즉발의 정세가 나타나고 있었다(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 이에 일본제국 육군은 8월에 만주 문제 해결 방침을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그렇게 또 전운이 감돌게 된다.

 

(만주사변은) 최종전쟁(最終戦争,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제1단계이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쟁

- 이시하라 칸지(石原 莞爾, 1889~1949)

 

만주사변으로 중화민국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 (출처 : japanfocus.org)

1931년 9월 18일에는 관동군의 모략으로 일어난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을 계기로 관동군은 독자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결국 만주 전역을 점령한다....

참고]

일단 이 사변은 이 당시 원로(元老) 등은 덴노가 중대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정치투쟁에 휘말리는 상황을 회피했고, 그래서 관동군을 억제할 이가 아무도 없는 정치적 공백의 사태에서 일본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대외 확장을 추진한 것이다.

 

 

일본의 만주국 건국을 전후하여 국제연맹은 당시 국제연맹 군사단장이었던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 빅터 알렉산더 조지 로버트 불워리턴(Victor Alexander George Robert Bulwer-Lytton, 2nd Earl of Lytton, 1876~1947)가 이끄는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파견해 그 조사 결과를 토대로 1933년 일본의 철수 권고안을 42대 1로 가결했다. 일본은 2월 20일의 내각 회의에서 해당 권고안이 가결될 경우의 국제연맹에서의 탈퇴를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츠오카 요스케(松岡 洋右, 1880~1946) 대표는 2월 24일 퇴장하고, 3월 27일에는 국제 연맹 탈퇴를 통고했다. 이로써 일본은 국제적으로 결정적으로 고립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한편 대다수 일본인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게 된다.

 

6-2. 군부의 권력 장악

참고) 전체주의 사회의 시작

1930년대부터 일본은 국가와 덴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1935년에는 이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에 유명했던 헌법학 교수이자 천황기관설과 관련 논문을 쓴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 達吉)가 법정에 서게 된 사건(천황기관설사건(天皇機関説事件,1935))이 일어났으며

1937년에는 문부성이 <국체의 본의(国体の本義, 1937)>라는 교과서를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은 살아계신 덴노가 다스리는 나라는 주장이 담겨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또 이를 넘어 외국인 혐오증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2년 2월에 사살된 이노우에 쥰노스케(좌측)과 3월에 사살된 단 타쿠마(우측)

또 1932년 2월 9일,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위한 선거운동 중에 입헌민정당 전 대장대신 이노우에 쥰노스케(井上 準之助, 1869~1932)가 선거 응원 중 사살되었고, 3월 5일에는 미쓰이 합명(三井合名)의 이사장 단 타쿠마(團 琢磨, 1858~1932)가 이쓰이 은행 본점 입구에서 사살된다. 이른바 앞서 언급한 혈맹단 사건이다.

해군장교들에 의해 사망한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 (출처 : 월간일본)

이어 5월에는 해군장교들이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 1931.12~1932.05) 수상이면서 만주사변에 반대했던 이누카이 츠요시(犬養 毅, 1855~1932)를 사살한 5.15 사건(五・一五事件, 1932.05.15)이 일어나 이누카이 내각이 총사퇴하게 된다. 이후 주모자를 체포해 재판에 넘겼으나 전국적으로 사면해달라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사면된다.. 

5월 26일에 사이토 내각(齋藤内閣, 1932.05~1934.07)이 성립되었으나, 제인사건(帝人事件, 1934)이라는 뇌물수수 혐의가 내각에 파급되었기에 1934년 7월 3일 총 사퇴했으며, 이후 7월 8일 오카다 내각(岡田内閣, 1934.07~1936.03)이 성립된다.

군부 급진파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 정신의 부흥, 덴노 친정을 요구하는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슬로건으로 해 우익 사상이 주창되었고, 그 영향으로 1936년에는 황도파(皇道派) 청년 장교가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 1858~1936), 타카하시 코레키요(高橋 是清, 1854~1936) 등을 사살한 2.26사건이 일어났다. 그렇게 1936년 2월 28일 오카다 내각은 총사퇴하고, 정당내각은 사실상 종언된다. 이로써 군부에 반대하지 않는 자를 내각에 앉히는 등 군부의 일방적인 독주 시작되었으며, 1940년대에는 결국 군부는 정당 정치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참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 등장 → 군부에 대한 일본인들의 절대적 지지(군부는 위기의 일본 통합할 수 있는 전통적 일본정신의 최대 저장소라는 생각) → 지지에 힘입은 군부 극우파들의 테러 와 쿠데타(5∙15 사건, 2∙26 쿠데타 등) 발생 → 정당 내각 무너지며 군부의 일방적인 독주 시작

히로타 내각이 성립하다. (출처 : botanica.jp)

그 후 같은 해 3월 9일 성립된 히로타 내각(廣田内閣, 1936.03~1937.02)은 2.26사건에 대한 조치로 대규모 숙군(군부 숙청)을 실행한 한편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 제도는 군의 협력 없이는 내각 조직에 난항을 겪게 된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부활과 함께 군부의 정치 개입과 정치적 우위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의회는 그 역할을 사실상 정지시킨다. 8월 7일 총리, 외무대신, 대장대신, 육해군대신 등 5상 회의(五相会議)가 열려 대외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요 국책(국책 기준)을 결정했다.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후의 정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 전쟁 정책을 향한 밑그림이었다.또 같은 달 5상 회의는 <제2차 북지처리 요강>을 결정했다. 여기서 북지(北支)는 중국 대륙의 화베이를 말하며,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이 예산을 더 많이 받으려고 했던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밑그림과 요강에 따라 육군은 <국방 충실 12개년 계획>을, 해군은 <제2차 보충 계획>을 세웠다.

 

이 때문에 1937년도 예산은 육해군 양성 합계로 14억 엔에 이르렀다. 11월 말 예산국무회의에서도 군에 대한 30억 엔이 넘는 거액의 예산안이 단기간에 결정되었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8억 엔을 더 일시적으로 증액(36.4%)한 것이다... 참고로 이 방대한 세출을 충당하기 위해 4억 2천만엔의 증세와 8억 3천만엔의 공채 발행이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라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하여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방공 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과 무샤노코지 긴토모 독일 주재 일본 대사

히로타 내각은 1936년 11월에 베를린에서 <방공 협정(반코민테른 협정)>을 조인했다. 1937년 1월 29일에 내각 내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각내불통일) 총사퇴하고, 2월 2일에 예비역 육군 대장이었던 하야시 센쥬로(林 銑十郎, 1876~1943)를 수상으로 하는 하야시 내각(林内閣, 1937.02~1937.06)이 성립하지만 5월 31일에는 총사퇴했다. 이후 6월 4일에 제1차 코노에 내각(第1次近衛内閣)이 성립한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시안 사건으로 납치된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사이에 국공합작이 성사돼 항일투쟁이 진행됐다(제2차 국공합작).

7. 중일전쟁(1937.07~1945.08)

중일전쟁은 동양이 서양의 맹주와 결전 전쟁을 하기 전의 준결승이며, 여기에 일본이 승리한 뒤에 중국도 포함해 동아(東亜)가 결속해 서양 문명에 맞서야 한다.

- 이시하라 칸지(石原 莞爾, 1889~1949)

1937년 7월에는 선전포고 없이 일본의 선제포격으로 루거우차오에서 중일 양군이 충돌했고(루거우차오 사건(1937.07.07)) 정전협정이 끝났지만 일본군은 지속해서 퉁저우 사건(通州事件, 1937.07.29), 제2차 상하이 사변(1937.08.13~11.12) 등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전선의 확대에 따라 사상 통제와 민생 향상을 도모하고 전시 체제에 대한 협력을 국민에게 요구한다는 광의국방론<(広義国防)>을 대신하여 국민 국력의 전부를 전쟁 수행을 위해 투입하여 총력전을 벌이려는 총동원 정책이 대두되었는데, 그 중 1937년 9월부터 정부가 추진한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다하는 국민의 정신(멸사봉공)'을 강조했던 국민정신총동원(国民精神総動員)이 유명하다.

우측에 '총동원법안 성립하다. 귀원(귀족원), 다수로 가결되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 : 도쿄법령출판)

그 결과, 1938년 3월, 국회 동의 없이 전쟁에 물자나 인원을 무작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 1938~1946)>이 제정되었다.

참고 - 방공협정이 체결된 배경]

1933.03, 일본, 국제 연맹 탈퇴
1933.10, 독일, 국제 연맹 탈퇴
1935,07. 코민테른 제7차 대회 "반소비에트, 반파시즘->독일, 일본은 코민테른의 적"
1936,11, 일본-독일, <반공 협정(반코민테른 협정)> 체결
1937.07, 중일전쟁 시작
1937.08, 중화민국-소비에트 연방, <중소불가침 조약>
1937.11, 이탈리아, <방공 협정> 서명
1937.12, 이탈리아, 국제 연맹 탈퇴

그 외 일전에 독일과 맺었던 <반공 협정>에 이탈리아 왕국이 1937년 11월에 협정하면서, 일본-독일-이탈리아는 추축국(枢軸国)이 되었다. 참고로 일본이 <반공 협정>을 맺으려고 노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정계와 여론에서 중국의 배후에 열강의 지원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난징 전투. 붉은 선이 일본군, 푸른 선이 중국군이다.

일본은 난창, 광더, 난징 등을 공격해 상하이에 상륙했고, 그 이후 중국 대륙위 주요 지점을 하나하나 점령해갔다.

화북 지역을 장악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일본은 베이핑, 톈진도 점령하고, 결국 난징에 이르게 된다. 이후 난징에서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난징에 있던 군인, 민간인 가리지 않고 30만 명을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생체 실험(1644부대, 1939.04~1945)을 하는 대학살극을 벌였다(난징대학살(난징대도살, 南京大屠殺)).

아베 내각 취임 직후 사진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또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나, 막 취임한 아베 내각(阿部内閣, 1939.08~1940.01)은 1939년 9월에 유럽 전쟁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중일전쟁을 끝내겠다고 선포했다. 시간이 지나 미국 등은 일본제국을 제재하기로 결정하고 전략물자의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그러자 일본제국은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를 ABCD라고 부르며 이 전쟁의 배후로 여겼다. 그렇게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 진주만(Pearl Harbor)을 공습하면서 또 다른 전쟁이 이어진다...

 

그러는 한편 대륙에선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일어났고, 결국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원자폭탄을 맞고, 소련까지 밀고내려오면서 1945년 8월 14일 오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고 다음날인 1945년 8월 15일에 그 사실을 공표하며 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후 중국 대륙에 남아있던 일본군은 대부분 국민당에게 항복하며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8. 태평양 전쟁(1941.12~1945.08)

8-1.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전격 기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1940년 1월, 미국 정부는 일본과 맺었던 <일미통상항해조약(日米通商航海条約, 1911~1940)>을 파기하는 등 일본에 대한 강경한 방책을 채택했다. 일본은 나치 독일이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와 1940년 9월 일독이 삼국 군사동맹(日独伊三国同盟, 1940.09~1945.05)을 체결함으로써 대처하려 했으나 미국 정부의 반발만 초래했다. 게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仏印進駐, 1940.09.22~09.26)을 일으키자 미국 정부로부터 석유 금수(石油禁輸, 석유 수입/수출 금지)이라는 경제적 보복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영국, 중화민국, 네덜란드와의 관계가 한층 냉각되면서 일본에서는 각 나라의 영어 약자를 따서 ABCD 포위망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제휴를 강화하면서 고무, 석유를 채취하기 위한 남진 정책도 펼치려는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 군 내부에서는 대소련 전쟁을 주장하던 북진론과 남쪽으로 진출해야한다는 남진론의 두 파가 있었는데, 만주에서 소련군과 충돌하게 되며 북진론을 접고, <소련-일본 중립 조약(日ソ中立条約, 1941.04~1945.04)>을 맺곤 남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 밀리고 있던 중화민국과 영국이 전쟁에 참전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고, 중일전쟁으로 국제 사회가 일본을 압박하던 와중 미일교섭도 진행되었는데 여기서 '중화민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 및 경찰력의 전면 철수'를 주장한 <헐 노트(Hull note)>가 제출 되는 등 상황이 꽤 복잡해졌다. 결국 일본은 자원 고갈, 철수 요청, 경제 제재 등을 근거로 일본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전쟁을 결정했고, 그렇게 진주만 공습(1941.12.08)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래의 기본 외교 방침이었던 영∙미 의존에서 탈피하게 되었으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8-2. 태평양 전쟁(요약)

파괴되어 침몰중인 USS 애리조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사진은 파괴되고 있는 USS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

1941년 12월 8일(현지시간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에 미 해군 진주만의 항행제한구역에 침입해 진주만 공습을 일으켰고, 이를 승리로 간주하며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번 대미영전(対米英戦)은 지나사변(支那事変, 중일전쟁)을 포함해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이라고 부른다.

- 토죠 내각(東條内閣)

 

remember per harbor (출처 : DocuBay)

그러자 미국 본토에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r harbor)'는 구호 아래 많은 장병들이 자원 입대하며 일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기 시작했고, 이를 받아들인 미군 측은 더 열심히 그리고 확실히 일본을 지도에서 없애버릴 준비를 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석유 비축량이 불과 2년치 밖에 없었기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해나갔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기에 이 전쟁을 각국의 독립의 기회로 삼아 일본군에 찬성하기도 했지만, 일본은 그들을 독립시키려 온 것이 아니었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끌어내 자원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미군 SBD-3 돈틀레스 폭격기가 불타고 있는 일본 미쿠마 순양함 위를 날고 있다. (출처 : U.S. Navy)

그런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이 패배하면서 이 때부터 일본은 연패하며, 결국 일본 본토 공습(Air raids on Japan, 1942.04~1945.08)까지 당하게 된다.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일본 산하 각국 대표들. 좌측부터 버마국의 바 모, 만주국의 장징후이, 난징 국민정부의 왕징웨이, 당시 일본제국 총리 도조 히데키, 타이의 완 와이타야꼰, 필리핀의 호세 라우렐. 인도 임시정부의 찬드라 보세 (출처 : 마이니치신문)

그러나 광적인 군부 지도자들에 의해 전쟁은 지속되었고, 일본 정부는 전투 패배를 은폐했고, 거기에 더해 1943년 10월,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열어 자주독립, 동아시아 각국의 상호 협력 등을 담은 <대동아 공동선언((大東亜共同宣言)>을 발표하며, 대동아공영권의 시대로 진입하려고 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좌측)과 나가사키 원폭 투하(우측) (출처 : U.S)

그럼에도 대세는 미국의 편을 들어주어 1945년 8월 6일, 미국에 의해 일본제국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했다. 참고로 이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폭격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중립조약에 의해 교전하지 않던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의 얄타 회담 합의에 따라 8월 8일 밤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렇게 소련은 쿠릴 열도, 사할린, 만주, 한반도 북부로 차례차례 진격했다.

 

8월 10일에는 덴노의 국가 통치권에 변경을 가할 수 있는 요구를 포함하지 않음을 양해한다면 포트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발표가 일본 국내의 라디오와 국외의 중립국에게 전해졌다.

 

8월 14일 저녁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이른바 성단(聖断, 덴노의 결단)에 따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는 다음 날 8월 15일, 쇼와 덴노가 스스로 <종전의 칙서(終結ノ詔書)>을 읽으면서 녹음한 옥음방송(玉音放送)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후 8월 17일 스즈키 칸타로 내각(鈴木貫太郎内閣, 1945.04~1945.08)이 총사퇴하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東久邇宮内閣, 1945.08~1945.10)이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태평양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러한 연속적인 전쟁은 당시 민중에게 많은 고역이 되었다.

특히 전시통제경제(戦時統制経済)로의 전환으로, 일본 자국내 기업의 활동부터 개인의 생활까지 하나하나 간섭받게 되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들의 희생(멸사봉공 정신)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가난한 청년들이나 식민지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의 군 지원은 전체 군 지원자의 80~90%나 달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또 가족에게 입을 좀 덜어주려고 이런 가난하고 힘들었던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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