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신미양요를 어떻게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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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신미양요를 어떻게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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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를 읽다가 우연히 재밌는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의 내용은 유료 회원이 아니라 읽지 못했지만, 제목만 보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신미양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미 역사 교과서를 본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겠지만, 간단히 정리하겠다.

1871년, 미국은 1866년에 일어난 제네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외국 선원의 구호와 본국 송환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지만, 교역할 물품이 없기 때문에 통상은 힘들다'고 답변했다. 이에 1871년 5월 31일, 경기도 남부 지역에 도착한 미 해군이 조선측과 접촉했다.

미국 "통상하자. 그러니까 너네 외국 관료 만나게 해줘"
조선 "너희들 목적이 뭐야? 그리고 교역하자면서 함대는 왜 끌고 온건데?"

2. 신미양요와 뉴욕타임즈의 기사

그러나 미군은 돌아가지 않았고, 한강의 수심을 재면서 현재의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있는 손돌목으로 접근해왔다. 이에 조선군은 군사구역에 무단으로 들어온 외국선에 대한 경고 포격을 날렸고, 이렇게 전투는 시작되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침략 경로 (출처 : 경인일보)

이후 6월 10일에 미군은 초지진, 광성보를 점령했다. 이 날 미군은 3명 이상의 사상자를, 조선측은 24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참패였다. 조선군과 조선 백성도 사망하고, 여러 진지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국 진무중군 어재영(1823~1871)의 수자기(帥字旗)를 냅다 뽑아버리곤 아시아 지역에 성조기를 최초로 꽂아버렸다... 

그러나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끝내 11일 철수하고 만다. 노획물로 수자기를 들고서 말이다.

 

미군은 그 지역에 잠시 철군했지만, 인근 지역에 자리잡아 조선과의 통상 교역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조선은 재정비를 하고, 내부적으로 척화비를 세우며 양이(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안 미국 함대는 다시 닻을 올리고 7월 3일, 청나라로 출항했다.

 

7월 17일, 해당 사건은 <뉴욕 타임즈>에 이렇게 발표되었다.

한국 문제(THE COREAN AFFAIR)

야만인(the Barbarians)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응징을 거부하고, (제네럴 셔먼호에 대한) 사과를 침묵한 요새

- 1871.07.17, <뉴욕 타임즈>

 

그렇다. 당시 미국은 자국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조선의 참전용사들을 야만인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해당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에게 명예훈장까지 하사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러한 소식들이 슬프게 느껴졌다...

뭐 미국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국 시민들의 탄 민간선이 사라지고, 그와 관련된 조치를 조선이 마음에 들지 않게 했기 때문에 조선측의 의중을 알고 싶어 같이 전투에 참가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뉴욕타임즈>에서 위와 같이 적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시적으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했으며, 전투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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