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르(ъ, ь)
러시아어 알파벳은 10개의 모음(혹은 5개의 모음과 5개의 모음형), 21개의 자음, 그리고 2개의 부호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서 이 2개의 부호 ъ(경음 부호, твёрдый знак), ь(연음 부호, мягкий знак)는 예전에는 각각 '예르(еръ), 예르(ерь)'라고 불렀고, 그 이전에 쓰였던 글라골 문자에서는 Ⱏ(예르)와 Ⱐ(예르)를 부르던 용어였다. 원래 이 기호들은 모음이었으며, 이 모음들은 원래 고대 교회 슬라브어(стар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OCS)에서 음운적으로 굉장히 짧은 모음인 '초단모음(超短母音, ultra short vowel, 단모음(單母音)이 아님을 주의)'을 나타냈으며, 이들을 집합적으로 예르(yer)라고 불렀다.
예르(yers) | Ⱏ (еръ, 예르) |
Ⱐ (ерь, 예르) |
ъ (еръ, 예르) (back yer) |
ь (ерь, 예르) (front yer) |
|
ъ (твёрдый знак, 경음 부호) |
ь (мягкий знак, 연음 부호) |
모든 현대 슬라브어파 언어에서 이 매우 짧은 모음들은 완전한 모음 형태로 정착했거나, 혹은 러시아어처럼 인접한 자음의 구개음화(palatalization)를 일으키는 기호나 맞춤법을 위한 단순 기호로 변했다.
1-1. 후부 예르(back yer), Ъ
철자법 개정 전 러시아어(고대 교회 슬라브어, 고대 동슬라브어 포함)에 쓰인 키릴 문자에서의 후부 예르(back yer) ъ는 현대 러시아어, 루신어 등에서는 경음 부호(твёрдый знак)로, 불가리아어에서는 큰 예르(ер голя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원래 초단모음 혹은 약화된 중원순모음(약화중원순모음) u[우]로 발음했다.
이 후부 예르는 경우에 따라 강하게(hard) 혹은 약하게(weak) 날 때가 있는데, 이 중 강한 예르(strong yer)는 о[오/어]로 바뀌었다. 그 예를 몇가지 살펴보자.
고대 슬라브어 | 현대 러시아어 | 뜻 | 격/수 |
сънъ[쑤누] | сон[쏜] | 잠 | 주격 단수 |
съна[쑤나] | сна[쓰나] | 잠의 | 생격 단수 |
угълъ[우굴루] | угол[우골] | 모퉁이 | 주격 단수 |
угъла[우굴라] | угла[우글라] | 모퉁이의 | 생격 단수 |
현대 러시아어에서 불규칙 변화처럼 보이는 격변화형이 사실 고대 슬라브어를 기준으로 보면 규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후부 예르(강한 ъ) | 모음 о로 바뀜 |
약한 후부 예르(약한 ъ) | 사라짐 |
1-2. 전부 예르(front yer), Ь
현대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 등에서 전부 예르라고 불렸던 ь가 연음 부호(мягкий знак)로 불리며, 불가리아어에서는 작은 예르(ер малък)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초단모음 i[이]와 같은 발음했다. 오늘날 세르비아어와 마케도니아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언어에서 전부 에르(ь)를 자음의 구개음화를 표기하고 있지만, 간혹 그 자체로 특정 자음의 구개음화를 표현하는 њ[ㄴ]이나 љ[ㄹ]와 같이 다른 자음과 합쳐 쓰이기도 하며, 몽골에서는 잘 쓰이지 않다가, 매우 짧은 i[이]형 모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쓰이기 시작한 사례도 있다.
이 전부 예르 또한 경우에 따라 강하게(hard) 혹은 약하게(weak) 날 때가 있는데, 이 중 강한 예르(strong yer)는 е[예/이], ë[요]로 바뀌었다.
강한 전부 예르(강한 ь) | 모음 е, ë로 바뀜 |
약한 전부 예르(약한 ь) | ь에 붙는 자음의 구개음화를 표현 |
2. 하블리크 법칙(Закон Гавлика)
1889년, 체코 출신의 학자 안토닌 하블리크(Antonín Havlík, 1855~1925)가 하블리크 규칙을 공식화했다.
이 하블리크 규칙은 단어의 위치에 따라 약화모음(reduced vowel)의 사라짐을 보여주는 슬라브어의 음율론이다. 사실 이 현상은 공통슬라브어(обще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슬라브 조어의 하나) 시대에 이미 시작되어 '열린 음절(개음절) 법칙' 시대의 막을 닫고 있었으나, 이를 안토닌 하블리크가 규칙을 성문화하며 정립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위 내용에서 '열린 음절 법칙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열린 음절(개음절)은 모음으로 끝나 또 다른 음절이 올 가능성을 열어두는 음절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가다'라는 뜻의 불완료상 동사 ехать[예허ㅉ]의 발음은 tʲ[ㅉ]라는 자음으로 끝난다. 이 상태로는 모음이 뒤에 붙어도 발음이 이상해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는 ѣхати[예허띠]로 ti[띠]라는 모음으로 끝난다. 그 뒤에 다른 자음이 붙을 수도 있다. 이런 ѣхати[예허띠]와 같은 단어 형태를 열린 음절이라고 한다.
전부 예르와 후부 예르는 각각 초기 슬라브조어와 발트 슬라브조어의 짧은 고모음 *i[이]와 *u[우](여기서 '*'는 재구성한 발음을 표시하는 기호다.)에서 유래했다. 이 예르들은 모든 음절이 모음으로 끝나야 한다는 열린 음절 법칙에서 모음으로서 역할을 해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어의 마지막에 붙은 예르는 ɪ̆[이]나 ʊ̆[우]처럼 약하게(weak) 발음되거나 엄청 짧게 발음(초단모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해당 모음은 ь와 ъ로 점차 모양을 바꿔 오늘날 단순 기호처럼 바뀐 것이다.
이 법칙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단어의 맨 마지막 예르는 약하게 발음한다. 그리고 그 직전의 예르는 강하게, 그 직전의 예르는 강하게, 그 직전의 예르는 약하게와 같이 세기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패턴을 띄게 된다. |
헷갈리지 않는가? 이런 법칙이 현대 러시아어에서 어떻게 나타난다는걸까?
고대 교회 슬라브어 | 현대 러시아어 | |
въ лъбъ | => | в лоб |
고대 교회 슬라브어에서 въ лъбъ[브 로브]라고 표현한 어구가 있다. 이 단어는 현대 러시아어에서 в лоб[브 롭-]이라고 표현한다. въ лъбъ에서 맨 뒤의 예르는 약해지며 사라졌고, 그 직전의 예르는 강해지며 о[오/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 직전의 예르는 또 약해지며 въ라는 표현에서 예르가 사라지고 в라고만 적게 된 것이다.
아래도 마찬가지다. лъбу에 있는 예르가 가장 뒤에 있는 예르가 사라지고, 그 앞에 붙은 въ는 강해져 во로 바꿔 적게 된 것이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 | 현대 러시아어 | |
въ лъбу → | => | во лбу |
이렇게 현대 러시아어에서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단어나 문구의 변화 때문에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이 예르가 약해지거나 강해지며 바뀌게 된 것이라는 걸 알면 다시 규칙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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