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대공국이 지고 루스 차르국(러시아 차르국)이 나타나다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세계사, 세계문화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고 루스 차르국(러시아 차르국)이 나타나다

728x90

1. 공국으로 분리되다.

1238년 1월, 몽골제국의 오고타이 칸(1185/1186~1241)의 명을 받은 킵차크 칸국의 칸 바투(Бату, 1205~1255)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모스크바를 점령했고, 당시 모스크바 크냐지(왕격 공작)였던 블라디미르 유레비치(Владимир Юрьевич, 1218~1238)를 성벽 앞에서 살해했다. 그러나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산이 많은 이곳을 몽골이 직접 다스리기는 힘들어 그냥 남쪽으로 내려가버렸다.
 
그렇게 모스크바 크냐지는 약 14년간 공석이었다가, 1246년 미하일 야라슬라비치 호로블리트(Михаил Ярославич Хоробрит, 1229~1248)가 크냐지 지위를 맡으며 다시 일어서게 된다. 그러나 1248년, 그가 전투에서 사망하며 모스크바 크냐지라는 직위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 해에 그의 아들 보리스 미하릴로비치(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1263)가 잠시 통치자로 있었으나 크냐지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리스 미하일로비치가 사망한 1263년, 당시 키예프 대공이자 블라디미르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라 야로슬라비치 넵스키(Александр Ярославич Невский, 1221~1263)는 막내 아들이었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Дани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1261~1303)에게 그 땅을 유산으로 주고 사망했다. 그렇게 모스크바 대공(московский князь)이라는 칭호가 승격되며 부활되었고,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는 제1대 모스크바 크냐지로 등극되고, 이렇게 모스크바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1263~1478)이 탄생했다. 좀 더 팩트를 파보자면, 처음 1263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모스크바 공작 작위를 얻었고, 1283년에 가서야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아 모스크바로 피난민들이 많아지자,  모스크바 대공 작위를 얻었다. 즉 공국 초기 20년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던 셈이다.

모스크바 공국(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 모스크바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
1263~1283 1283~1547

2. 역대 대공과 흘러가는 시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Дани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1261~1303) 제1대 모스크바 공작
제1대 모스크바 대공
유리 다닐로비치(Юрий Данилович, 1281~1325) 제2대 모스크바 대공
이반 1세(Иван I, 1284/1288~1340/1341) 제3대 모스크바 대공
시메온 이바노비치(Симеон Иванович, 1317~1353) 제4대 모스크바 대공
이반 2세(Иван II, 1326~1359) 제5대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1350~1389) 제6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Василий I, 1371~1425) 제1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7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1415~1462) 제2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8대 모스크바 대공)
(유리 드미트리예비치(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1374~1434))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1415~1462) 제2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8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유례비치(Василий Юрьевич, 1403~1448)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1415~1462) 제2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8대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유례비치(Дмитрий Юрьевич, ~1453)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1415~1462) 제2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8대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유례비치(Дмитрий Юрьевич, ~1453) 제1대 전 루스의 군주(государь всея Руси)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1415~1462) 제2대 전 루스의 군주
이반 3세(Иван III, 1440~1505) 제3대 전 루스의 군주 제3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9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Василий III, 1479~1533) 제4대 전 루스의 군주 제4대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대공
(제12대 모스크바 대공)
이반 4세(Ива́н IV, 1530~1584) 제 5대 전루스의 군주
제1대 전 루스의 군주, 차르 및 대공
(Государь, Царь и Великий князь всея Руси)

사실 1대 대공 다닐과 2대 대공 유닐이 모스크바를 다스리고 있었던 13~14세기 초에는 별 볼일 없던 공국이었다. 그러다 제3대 대공 이반이 즉위했고, 그는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1282~1341)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며 루스계 국가들이 칸국에 바치는 공물과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중간에서 차익을 얻거나 타 공국에 대출을 해주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스의 동부 지역을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반 1세는 무역 확대, 영토 확장 뿐 아니라 종교문화적 업적도 세웠는데, 그 중 1333년에 이반 1세와 그의 후손이 묻히게 되는 대천사 미카엘 대성당(Cathedral of the Archangel, 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을 건설한 일도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1236'~1795)이 영토를 확장하며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새롭게 지어진 대천사 미카엘 대성당

시간이 지나 6대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돈스코이가 1359년 재위했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모스크바 크렘린이라는 거대한 도시 요새를 건설했고, 이 요새는 1367년에 완성되었다.
 
1362년 키예프 공국(1132~1471)을 점령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점령하며 이제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결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망친 한 공작이 빌미가 되어 1368년, 리투아니아의 침공으로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1368~1372)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의 사기와 수도의 거대한 요새의 방어력에 기가 죽은 리투아니아는 <류부츠크 조약(Любутский мир, 1372)>를 맺으며 퇴각했고, 전쟁은 끝났게 되었다.
거대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막아낸 키예프 공국은 한층 자신감이 붙었고, 이 기세를 몰아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듯 했다. 이에 드미트리는 몽골과의 단교를 위해 여러 수단과 빌미를 찾고 있었다.

보자 강 전투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마마이 칸(~1380)은 1378년, 복종하지 않는 루스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타타르군을 시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입했지만, 보자(Вожа) 강 전투(1378)에서 대패하게 된다. 이 전투는 루스인들이 타타르군을 최초로 물리친 전투였다는 의의를 가진다. 루스인들에게 졌다는 분노로 이를 바득바득 갈던 타타르군은 한 번 더 모스크바를 침공하는데, 또 1380년에 일어난 쿨리코보(Куликово)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당시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마마이 칸 또한 퇴각 도중 암살당했다. 그리고 칸의 자리에는 토크타미시 칸(~1406)이 앉게 되었다.
 
이렇게 큰 국가를 3번의 전투로 막아낸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제 앞길이 활짝 열린 듯 했다.

토크타미시 칸의 모스크바 침입(19세기)

그러나 1382년, 토크타미시 칸에 의해 모스크바는 점령당했고, 드미트리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칸국에 대한 세금 징수를 약속하며 다시 대공 자리로 복권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격인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1389년에 멸망시키곤, 아들 바실리 1세에게 대공 작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바실리 1세는 정복 활동도 서슴치 않았다. 1402년에는 체르니히우 공국을, 1425년에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수즈달 공국(1341~1425)를 멸망시키며 점점 영토를 확장해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큰 흐름의 역사는 또 새롭게 뒤집혔다. 티무르 제국(1370~1507)이 1395년 킵차크 칸국을 공격해 수도 사라이 베르케를 약탈하고, 토크타미시를 추격했다. 토크타미시는 템니코프 대공국(Темниковское княжество, 1388~1684)로 도망갔지만, 암살자에 의해 사망한다. 이렇게 루스인들은 몽골에게서 차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바실리 2세 때 대공 자리를 놓고 여러 다툼이 있었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그의 아들 이반 3세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이반 3세 또한 영토 확장을 해나갔는데, 1463년에는 야로슬라블 공국(1218~1463) 1478년에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1485년에는 트베리 공국(1246~1485)을 1489년에는 뱌트카야(Вятская земля)를 차지했다. 이로써 대부분의 키예프계 및 루스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복속되었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는 중이던 1469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소피아 팔레올로그(Софья Палеолог, 1455~1503)와 혼인을 맺어 교황청으로부터 제3의 로마(Третий Рим)라는 칭호와 정통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부터 쌍두독수리(Двуглавый орёл)는 러시아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1476년에는 이흐 칸국의 아흐메드 칸(~1481)에게 조공 바치는 것을 거부해 1480년에 아흐메드 칸이 쳐들어 온 우그라 강 전투 혹은 우그라 강 대치(Стоя́ние на реке́ Угре́)가 일어났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칸은 퇴각하며 또 한번 러시아의 사기를 드높여주었다.
 
한편, 농노제와 새로운 토지 소유제 등을 실시한 <1497년 수졔브니크(Судебник 1497 года)>를 편찬했으며, 옛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만한 웅장한 성벽과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외국의 거장들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전쟁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하거나, 거의 무력화를 시켰던 카잔 칸국이 부활하며 저항하기 시작한다거나, 후계자 계승 문제가 일어나는 등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말년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그럼에도 러시아 최초로 '전루스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사절을 보낼 때 '차르'와 같은 칭호를 사용하며 후대에는 '최초의 전러시아 차르'와 같은 칭호로 존경받고 있다.

1547년까지 확장된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결국 대공 작위는 1533년에 이반 4세에게 넘어갔다. 1538년까지 이반 4세의 어머니가 섭정을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 해에 의문사하게 되었고, 당시 10세였던 그는 바로 왕좌에 올랐다. 그럼에도 주변 귀족들은 그 어린 아이를 모질게 대했고, 그렇게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점차 흑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이반 뇌제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547년 1월 16일, 그는 16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크렘린의 우스펜스키 대성당(Успенский собор)에서 루스 차르국(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1547~1721)을 선포하고 자신은 전 루스의 군주, 차르 및 대공(Государь, Царь и Великий князь всея Руси)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됨을 널리 알리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루스 차르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