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흐(1685~1750)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유럽 후기 바로크 시대의 독일 작곡가이자 음악가다.
그의 성인 Bach[바흐]는 '개울'을 뜻하며, 중간 이름 Sebastian[세바스찬]은 튀르키예의 시바스(Sivas)의 옛 이름인 세바스티아(Σεβάστεια) 출신이라는 뜻이고, 이름인 Johann[요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의 요하난(יוחנן)에서 유래한 크리스트교식 이름이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i), 첼로 모음곡(Cello Suites),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The Well-Tempered Clavier), 쉬블러 코랄(Schübler Chorales),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Toccata and Fugue in D minor), 마태 수난곡(St Matthew Passion), 나단조 미사(Mass in B minor)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바흐는 19세기 고음악 부흥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서양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바흐는 활동 장소별로 각각 유년기(1685~1703), 아른슈타트 시기(1703~1708), 바이마르 시기(1708~1717), 쾨텐 시기(1717~1723), 라이프치히 시기(1723~1750)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시기별로 작곡에 영향을 받거나, 연주한 악기, 악보 기법 등이 조금씩 달랐다.
우선 바흐가에 대해서 살짝 알아보자.
17세기 초까지 살았던 헝가리 출신의 베이트 바흐(Veit Bach, 1550'~1619)는 제분소에서 일하던 제빵사였다. 한 전언에 따르면 그는 파이프(pipe, 피리류)를 연주하던 사람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그의 아들 요하네스 바흐 1세(Johannes Bach I, 1550/1580~1626)는 카펫 만드는 일을 하면서 파이프를 같이 불었다. 요하네스 바흐 1세의 아들들 모두 작곡가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었고, 그 중 크리스토프 바흐(Christoph Bach, 1613~1661)는 바흐의 할아버지였다.
크리스토프 바흐의 아들 중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는 궁정과 마을 모두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다. 이렇게 바흐가는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특히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 가문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바흐'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요한 세바스찬 바흐'임을 단정할 수 있다. 이제 그에 대해 살짝 알아보자.
1685년,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와 모피상 겸 마부의 딸이었던 마리아 엘리자베스 렘머히르트(Maria Elisabeth Lämmerhirt, 1644~1694)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웠다. 그러는 한편,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오르간을 배웠고, 성가대에도 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9살이 되는 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10살이 되는 해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래서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악보 보는 법, 연주법과 같은 작곡 기초와 신학, 라틴어, 그리스어와 같은 중세식 인문 교육을 배웠다.
그러다 큰형이 보살펴야 할 가족이 늘어나자 1700년, 그는 세인트 미카엘 학교(St. Michael's School)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면서 합창단에 속했었고, 오르간과 하프시코드(harpsichord)를 연주하며 2년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1703년 1월, 바흐는 바이마르 공작의 예배당의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잔업을 맡았지만, 연주를 할 땐 뛰어나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런 소문이 아른슈타트 지역에 퍼져 그 해 8월 해당 지역에 새로 지어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흐가 보기에는 새로운 교회의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느꼈고, 그 때문에 여러 마찰을 빚기도 했다. 1707년에는 뮐하우젠의 교회에서 자비로 보수한 오르간을 연주를 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1708년 바흐는 바이마르로 돌아가 1714년부터 바이마르 궁정에서 악장(Konzertmeister)으로 있었으며, 이 때부터 매달 교회 칸타타를 1곡 이상 작곡하는 등 작곡에도 큰 노력을 쏟았다. 또 특히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 스타일에 매력을 느껴, 주세페 토렐리, 안토니오 비발디, 아르칸젤로 코렐리오와 같은 음악가의 작품의 특징을 받아들여 오르간 연주에 색다른 매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다 1717년 바이마르에서의 바흐의 인기가 식었고, 이 때 안할트 쾨텐 공국의 공작이 그를 어용악장(Kapellmeister)으로 고용했다. 공작은 그에게 높은 보수와 많은 자유를 주었다. 또 당시 쾨텐 지역은 칼뱅주의를 받아들인 지역이라 교회 음악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 때부터 바흐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같은 세속적 기악곡을 다수 작곡했으며, 물질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밝고 즐거운 곡들도 많이 만들었다. 또, 바흐에게 음악을 배우고자 모인 제자들과 아이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인벤션>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 연습곡도 작곡했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의회에 의해 라이프치히로 가 성 토마스 합창단의 단장인 토마스칸토르(Thomaskantor)가 된다. 이곳에서 그는 <요한 수난곡>, <마태 수난곡>, <나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포함한 160여곡에 달하는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러나 음악적 이상을 중요시했던 바흐는 종종 교회와 시의회와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와 시의회는 크리스교에 관련된 음악을 작곡하길 바랬지만, 바흐는 <골트베르크 변주곡>,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와 같은 세속적 칸타타나 기악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작곡 방식과 수많은 음악을 만든 바흐는 지금도 고전 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유럽권에서 뿐 아니라 그 영향을 일부 받은 다른 대륙에서 조차 그를 '음악의 아버지(father of music)'라고 부르며 칭송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배운 바이올린, 오르간 실력으로 교회, 궁정, 지역 음악 관리자와 같은 위치를 거쳤으며, 작곡, 아동부 라틴어 교육, 청년부 음악 연습과 같은 많은 업무를 직접 했으며, 근면하고 성실했던 사람이었다.
2. 하이든(1732~1809)
프란츠 조세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고전주의 시대의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다. 현악 4중주나 피아노 3중주와 같은 실내악(chamber music)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교향곡의 아버지(Father of the Symphony)'나 '현악 4중주의 아버지(Father of the String Quartet)'로 불리고 있다.
프란츠(Franz)는 프란치스쿠스(Franzisk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프랑키아(Francia,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라틴어 프란키스쿠스(Franciscus)에서 유래했다. 중간 이름인 요제프(Joseph)는 '더하다'라는 뜻의 요세프(יוֹסֵף)에서 유래했다. 성인 하이든(Haydn)은 '비기독교인(이교도인)'이라는 뜻의 히던(heathen)에서 유래했지만, 역설적으로 하이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그는 부유한 에스테르하지가(House of Esterházy)의 궁정 음악가로 지내며 대부분의 일생을 에스테르하자 성(Eszterháza)에서 보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귀족들에게 늘 만족을 줘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음악가가 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한편, 그는 베토벤의 가정교사이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친구이자 멘토이기도 했다.
1732년, 수레바퀴 제조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 1699~1763)과 백작의 궁전 요리사였던 마리아 하이든(Maria Haydn, ~1754) 사이에서 프란츠 조세프 하이든이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악보를 읽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은 민속음악을 하프로 연주할 수 있었다. 1738년경, 하이든이 6살이 되었을 때, 그의 친척이자 성가대 지위자 겸 교사였던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Johann Matthias Frankh)에게 도제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어린 나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며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교회 성가대에서 3중창을 연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회 성가대의 음악 감독의 눈에 띈 하이든은 1740년 오스트리아 빈의 가장 유명했던 성 스테판 대성당(St. Stephen's Cathedral)에 들어가게 된다. 역시 인생은 운칠기삼인가보다 일설에 따르면 비발디의 장례식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그는 어릴 적에도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들었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는 성가대원으로서 라틴어, 음성학, 건반 연주, 바이올린 등을 배우게 되었으나 많은 시간 배우지 못했다. 또 1749년까지 일어난 변성기로 성가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1752년, 당시 꽤 유명했던 이탈리아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의 발레 반주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작곡 수업을 받았으며, 잘할 수 있던 오르간 연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독자적으로 대위법을 공부했고, 그는 바흐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C. P. E. Bach, 1714~1788)의 음악을 많은 시간을 내어 연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1753년이 되어 <절름발이 악마(Der krumme Teufel)>라는 오페라를 발표하며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에서 연주가로서 일하기도 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하이든은 결국 귀족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의 시대에 작곡가의 경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중에는 에스테르하지가의 초청으로 그곳에서 잠시 부어용악장(Vice-Kapellmeister)으로 있다가 어용악장으로 승격되었다. 하이든은 작곡, 오케스트라 운영, 실내악 연주, 오페라 제작과 같은 광범위한 임무를 맡았는데, 이러한 엄청난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하이든에게 예술적인 면에서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과 떨어져 에스테르하지가에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했다고 한다.
한편, 그의 후원자였던 에스테르하지가의 니콜라우스 1세(Nikolaus I, 1714~1790)이 바리톤(Baryton)이라는 현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가 바리톤으로 연주할 수 있는 200여 곡들을 작곡했는데, 그 중 <바리톤 3중주(Baryton trios)>가 유명하다.
이후 1779년, 에스테르하지가와의 재개약 시즌이 되었고, 그는 그 사이 자유롭게 외국의 음악을 접하고, 다양한 음악을 출판, 작곡하며 더 많은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 때 <파리 교향곡(Paris symphonies)>,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를 포함한 '하이든 6개 교향곡'이 나오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되던 1790년,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에스테르하지가에서 나와 당시 음악 감독이었던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 1745~1815)의 제의로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한회당 350파운드에 달하는 공연을 6차례 펼쳤고, <런던 심포니(London Symphony)>를 포함한 약 12개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는 한편, 이 시기에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쓰이기도 했던 <하느님,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트럼펫 협주곡(Trumpet Concerto)>, <천지창조(Die Schöpfung)>와 같은 악곡이나 각종 미사곡을 만들었는데, 자유로운 영감과 세련된 선율, 기교적 연주어법을 사용했다. 그러다 몸이 안좋아지며 1809년, 하이든은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했을 시기에 사망하게 된다.
그는 성실하면서 친절했고 겸손했으며 배려심이 깊은 성격이었다. 단장 위치에 있으면서 단원들에게 휴가를 보내준 것처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파파 하이든(papa haydn)이라고도 불렸으며, 그의 여러 음악적 작품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3. 모차르트(1756~1791)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800곡 이상의 작품을 발표한 고전주의 시대의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름 볼프강(Wolfgang)은 '늑대(Wolf)의 길(Gang)'이라는 뜻의 게르만식 이름이며, 중간 이름 아마데우스(Amadeus)는 '신(deus)에게 사랑(amo)받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식 이름이고, 성 모차르트(Mozart)는 중고 독일어(MHG)로 '습지'를 뜻하는 모츠(mosz)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1756년, 모차르트는 작곡가겸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와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Anna Maria Mozart, 1720~1778)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누나에게 하는 음악 교육을 보고 자란 그는 3살에는 클라비어 연주를, 5살엔 작곡을 시작했다! 역시 천재!
1762년부터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유럽 전역을 여행했는데, 이 때 배운 음악적 기예, 만난 유명 인사들, 유럽의 문화는 후에 그가 작곡을 할 때 많은 영감이 되었다.
여행 중 그는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20/1735/1740~1767)에게서 작곡법을 배웠고, 약 1년간 바흐의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에게서 교향곡과 협주곡 작곡법 등을 배웠으며, 유명한 가수였던 지오반니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 1720~1782)에게서 성악도 배웠다.
나중에 1770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었던 일이 일어나는데,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연주되던 너무 아름다워서 악보가 봉인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곡을 2번만 듣고 청음(귀로 듣기만 해서 악보를 쓰는 것)했는데, 이 때 교황 클레멘스 14세(Pope Clement XIV, 1705~1774)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고 황금 박차 훈장(Ordo Militiae Auratae)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의 여행은 그에게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으나 한편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여기저기 후원자를 찌르고 다닌다'라는 소문이 나면서 그의 아버지와 그를 궁정 음악가가 되지 못하게 방해했던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러다 1773년 찰스부르크의 궁정 음악가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대규모 오페라가 아닌 소규모 오페라만 쓰며 조금씩 이 일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그가 찰스부르크에 있었을 당시 새로 부임해온 대주교는 계몽주의적, 합리적인 성향을 가졌고 그래서 대주교는 예술가들에게 보수를 줄여버렸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모차르트는 1777년 궁정음악가직을 사퇴하고 빈으로 가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는 빈에서 전업 작곡가가 되었고, 이전 작곡가들이 교회나 궁정에 소속되어 있었던 반면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여러 작곡가의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래서 현대에는 전업 작곡가의 시초격으로 여겨진다.
그는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작곡도 했고, 지지부진했지만 오페라도 만들었다. 오페라 중에서 귀족을 풍자한 <피가로의 결혼>이 크게 히트를 치게 된다. 수많은 작품을 만든 그는 마지막 의뢰를 받고 <진혼곡(Requiem)>을 작곡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현재 그의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가 유명한데 그 중 <터키 행진곡(Turkish March)>이라고도 불리는 악장이 포함된 <피아노 소나타 11번>이 매우 유명하다.
그의 자유로움과 천재성으로 인해 많은 돈을 벌고 수많은 음악을 작곡, 연주, 시연했지만 그가 진정 원하던 독립된 자유 예술가의 시대는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시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4. 베토벤(1770~1827)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고전주의 시대의 독일 출신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그는 현재까지도 하이든, 모차르트를 포함해 서양 음악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그의 삶은 전통적으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눠 설명한다.
그의 이름 루트비히(Ludwig)는 '명성있는(hlud) 전사(wig)'라는 뜻의 게르만계 이름 흐루트비히(Hludwig)에서 유래했으며, 반(van)은 '출신'을 뜻하는 네덜란드계 접속사이며, 베토벤(Beethoven)은 네덜란드어로 '비트밭들(beet hoven)'이라는 비트 호븐(beet hoven)에서 유래했다. 직역하면 '비트밭(농민) 출신의 루트비히'라는 뜻이 된다. 참고로 독일의 폰(von)은 귀족 불변화사(nobiliary particle)로 귀족계층에서만 쓰였지만, 네덜란드에서 판(van)은 일반적으로 출신을 가르키는 불변화사로 평민도 쓸 수 있었다. 이를 잘 모르던 독일 귀족들은 귀족들에게도 잘 굽히지 않는 그를 보고 조롱조 혹은 진짜 귀족인줄 알고 그를 '비트밭공 루트비히(Ludwig van Beethoven)'라고 부르기도 했다.
1770년, 궁정가수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요한 반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39/1740~1792)과 마리아 막달레나 반 베토벤(Maria Magdalena van Beethoven, 1746~1787)의 사이에서 베토벤이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폭력적이고 가혹하게 아들을 교육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는 천재소년 모차르트의 여행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아버지는 더욱더 아들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그러던 중 1781년, 궁정 음악가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를 만나 피아노 연주를 포함한 음악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교회 오르가니스트에 있다가 1789년 궁정 교향악단 부지휘자가 되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쯤부터 이미 어머니는 사망했고, 아버지는 가정으로서 돈을 벌어올 수 없게 되어 베토벤은 가정에게 돈을 부쳐주며 가족을 보살폈다.
그러다 1792년 아버지가 사망했는데, 후원을 받은 돈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빈으로 가게 되었다. 빈에서 하이든에게 과외를 받았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과외를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 일하다가 리히노프스키 공작(Prince Lichnowsky) 칼 알로이스(Karl Alois, 1761~1814)를 만나 작곡 여행을 하며 유럽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796년 귓병(진행성 난청)이 도지기 시작하며 그는 인생에서 큰 좌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조차 여러 철학과 고전을 보다가 곧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다 펼치고 죽겠다고 결심하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Symphony No. 1)>을, 1801년에는 <현악 사중주 1-6번, 작품 번호 18(String Quartets Nos. 1–6, Op. 18)>을, 1802년에는 <2번 교향곡(Symphony No. 2)> , 1803년에는 현대에는 <영웅>이라고 알려진 <보나파르트(Bonaparte)> 등을 발표했으며, 1811년에는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켜 <감람산의 그리스도(Christus am Ölberge)>라는 오라토리오를 발표했다.
이 작품 중 1803년 발표된 <보나파르트>로 그의 공화주의자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던 나폴레옹을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현해줄 영웅으로 보고 있었고, 그래서 이 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모습을 보이며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의심스럽게 보게 되었고, 결국 그가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로 즉위하자 배신감에 분노한 나머지 정성들여 작성된 악보 표지를 찢고는 그냥 단순히 제목을 <영웅>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후 그는 <장엄 미사(Missa solemnis)>, <피아노 삼중주 7번(Piano Trio)>,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바탕으로 한 <9번 교향곡(Symphony No. 9)> 등을 발표하며 대단한 음악적 업적을 남기다가 '유감이지만, 너무 늦었구만(Schade, zu spät)'이라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명언 중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나 농촌의 민요를 채집해 자신의 음악에 승화시킨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베토벤은 모차르트 처럼 자유로운 창작을 원했고, 자본주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허권, 창작권을 자신의 작품에 표시해 작품의 변질 및 수정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음악이 기술(science)가 아닌 개인의 인식(conscience)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는 한편, 이중적인 속물성과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일어난 폭력성 때문에 흔히 요즘 말로 사회성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5. 예술가와 사회
지금까지 바흐로 대표되는 후기 바로크 시대와 하모베 시대라고도 불리는 고전주의 시대(1730'~1820')의 대표적인 4명의 음악가의 일대기를 정리해봤다. 분명 빠진 부분이나 작품도 많겠지만 이번 글의 주제는 '예술가와 사회는 분리할 수 있는가'이기에 이 부분에 맞추기 위해 일부 생략하기도 한 점 양해바란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당대의 양식사와 기법에 정통해 있다. 이 말은 곧 예술가는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작업한다는 말이다. 또 앞서 언급한 음악가들이 모두 누군가를 통해 악기 연주법, 기보법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예술가는 훈련을 받게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예술가가 훈련을 받으면서 그 시절에 있었던 사조나 기술에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예술가는 사회의 기술적 발전 단계와 그의 예술에서 필요한 실재적으로 유용한 도구와 재료에 의존한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전반적인 사실을 통해 예술가는 사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예술가에 대한 순수한 영감, 천재적인 번뜩임, 현시 등에 관한 논의는 일상 및 존재론적 영역에서 벗어난다. 이런 관점을 잠시 덮어두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봐 예술가는 여러 일들을 겪으며 자신의 생각,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표현하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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