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차르국(1547~1721) 역대 차르 계보도와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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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세계사, 세계문화

러시아 차르국(1547~1721) 역대 차르 계보도와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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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차르국 류리크 왕조(1547.01~1598.01)

이름 생애 재임 가문
이반 4세(이반 뇌제) 1530.08~1584.03 1547.01~1584.03 류리크가(Рю́риковичи)
표도르 1세(축복받은 자) 1557.05~1598.01 1584.03~1598.01

표도르 1세 (출처 : pecherskiy.nne.)

이반 4세의 아들이자 선천적으로 몸과 정신이 약하고 안 좋았던 표도르 1세는 고두노프가의 일리나 고두노브나와 결혼을 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신체적으로 힘들었던 탓인지 그는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정무를 주로 보게 되었죠. 또 안타깝게도 그의 자식들이 일찍 죽어 결국 그가 사망하고 류리크 왕조는 단절됩니다.

 

2. 러시아 차르국 고두노프 왕조(1598.01~1605.06)

이름 생애 재임 가문
일리나 고두노브나 1557~1603.10 1598.01~1598.02 고두노프가(Годунов)
보리스 고두노프 1551~1605.04 1598.02~1605.04
표도르 2세 1589~1605.06 1605.04~1605.06

보리스 고두노프 (출처 : ГИМ)

표도르 1세의 부인이었던 일리나 고두노브나가 여제 자리로 앉으려고 했으나, 민중들이 반대하여, 그 자리는 류리크 왕조의 고두노프가의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재위하던 시절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지속적인 기근(1601~1603 러시아 기근)과 사회적 문제가 계속 터졌고, 거기다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후예라고 여겨졌던 표도르 1세의 이복동생 드미트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보리스 고두노프가 암살범이라고 생각한 민중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가짜 드미트리 1세 (출처 : bildarchivaustria)

이 타이밍에 한 젊은이가 자신이 살해당할 뻔 드미트리라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짜 사람들은 그가 살아 돌아온 드미트리라고 믿게 되었죠. 당연히 당시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 골칫거리를 없애려고 체포령을 내렸으나, 그는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도망갑니다.

 

이후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용병을 끌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젊은이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정부군과 크게 싸우게 되었죠. 그러다가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표도르 2세가 즉위하는데, 원래 보리스 고두노프를 싫어했던 귀족들도 드미트리 참칭자에게 붙어버렸죠. 그렇게 표도르 2세는 잡혀가고, 차르 자리에는 드미트리 참칭자가 앉게 되며, 고두노프가의 역사도 끝이 납니다.

 

3. 비정통 차르의 집권기(1605.06~1613.02)

이름 생애 재임 가문
가짜 드미트리 1세 1581~1606.05 1605.06.20~1606.05.17 류리크가
(스스로의 주장)
 
바실리 4세 1552.09~1612.09 1606.05.19~1610.07.19 슈이스키가(Шуйские)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1595.06.09~1648.05.20 1610.07.19~1613.02.21 바사 왕조

고두노프가를 물리친 드미트리 참칭자가 왕위에 올랐고, 또 실제 드미트리의 모친도 그가 자신의 아들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정통성을 가지게 된 그는 내실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내전을 일으킬 당시, 폴란드로부터 지원을 받았기에 그의 주변엔 폴란드계 인물들이 속속 앉혀졌죠. 거기에 불만을 가진 러시아계 귀족들과 백성들은 당시의 기근 문제와 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을 이유로 그를 끌어내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거기다 드미트리의 생모도 갑자기 저 남자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를 끌어내릴 명분도 확실해져 버렸죠.

바실리 4세 (출처 : Kremlin armory)

그렇게 폐위된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자리에는 귀족들이 류리크 왕조의 방계인 슈이스키가의 바실리 슈이스키를 차르로 추대하며 즉위합니다. 그는 가짜 드미트리 2세의 봉기를 진압했으나, 스웨덴과 동맹을 맺으며 일부 영토를 스웨덴에게 양위했고, 이를 빌미로 쳐들어온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패배하며 귀족들에 의해 폐위당합니다. 이후 그는 폴란드에 포로로 잡히면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외딴 성에 유폐되며 비참히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출처 : Peter Paul Rubens)

모스크바로 진격해 큰 승리를 거뒀던 폴란드는 비어있던 차르 자리에 귀족들을 강압적으로 설득해서 당시 왕자였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즉위시킵니다. 그렇게 사실상 러시아 차르국은 폴란드에게 속하게 되었죠.

 

그러나 가톨릭을 믿었던 그와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즉위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인 러시아 정교회로의 개종을 끝까지 반대했죠. 그리고 국제적으로 봤을 때 폴란드와 스웨덴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차르 자리에 폴란드 왕자가 올라가니 마니 하는 문제를 들은 스웨덴도 빡친거죠. 이에 러시아는 그를 차르 자리에서 몰아내고 결국 새로운 차르를 선출합니다.

 

4. 러시아 차르국 고두노프 왕조(1613.07~1721.09)

이름 생애 재임 가문
미하일 1세 표도로비치 1596.07~1645.07 1613.07~1645.07 로마노프가(Рома́новы)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1629.05~1676.01 1645.07~1676.01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 1661.06~1682.05 1676.01~1682.05
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
(표트르 1세와 공동 통치)
1666.09~1696.02 1682.05~1696.02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
(이반 5세와 공동 통치)
1672.06~1725.02 1682.05~1721.09

미하일 1세 표도로비치 (출처 : Tretiakov Gallery)

바로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라고 불리는 사람이 차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노프 왕조(Рома́нов)가 시작됩니다. 로마노프가(Рома́нов)는 이반 4세의 흑화를 진정시켜주던 그의 부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 1530'~1560)의 오빠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Никита Романович Захарьин-Юрьев, 1520'~1586')를 시조로 하는 가문입니다.

 

그는 1613년에 폴란드 세력을 모스크바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즉위합니다. 그는 즉위식에서 프랑스의 삼부회와 비슷한 전국회의였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와 귀족의회였던 귀족 두마(Боярская дума)의 동의를 구해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선서하죠.

 

그러나 그가 즉위했다고 해서 유럽 강국들이 그들을 황제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 내정에 적극 개입한다던가, 폴란드가 소러시아와 백러시아 지역, 스몰렌스크 지역을 1667년까지 계속 지배하거나, 스웨덴이 노브고로드를 점령한다던가하는 등와 같은 외교적 문제가 심해졌었죠. 한편, 차르국의 남쪽 지역에서 농민 반란과 서구의 영향으로 정치 방향이 진보적으로 바뀌어가자 보수 진영이 반발하면서 내분 또한 심해졌었습니다.

 

국방을 강화하며 전쟁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신생 정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신생 정부의 위치에서 외교 문제를 잘 정리한 미하일 1세는 동란기 동안 파탄난 러시아 경제를 회복하는데에도 힘썼습니다. 세금 수입을 확대하는데 온 힘을 다했는데, 특히 밀려있던 세금을 내라고 독촉했죠.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출처 : varvar)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가 2번째 로마노프가 차르로 등극했습니다.

1649년, 그는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에(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라는 법전을 만들어 농노제를 확립했는데, 농민은 자유를 잃게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법전으로 인해 계기나 양상은 다르지만 일본의 잇키처럼 근대 말까지도 농민 봉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1652년, 총대주교로 니콘(Ни́кон, 1605~1681)을 뽑고, 그를 통해 종교 개혁을 시작하기도 했죠. 다만 이 결과로 러시아 정교회는 구교도와 개혁파로 나눠지게 되었고, 구교도들의 반란도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1652년부터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을 시작했으며, 16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1654~1667)에서 승리하며 소러시아와 백러시아 지역 대부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의 치세 때도 이반 4세 때부터 시작한 시베리아 원정이 계속되었는데 그 중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나선 정벌(1652~1658)도 이 때 일어났습니다.

표도르 3세 (출처 : hermitagemuseum)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뒤를 이은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Фёдор III Алексеевич)는 문벌 폐지, 군대 개혁, 토지 조사(1680)와 같은 근대적 개혁에 힘을 썼으며, 1676년에 시작된 러시아-투르크 전쟁(1676~1681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끝내며 키예프를 지배하게 됩니다. 다만 그가 자식을 남기기 못하고 1682년에 죽어서 그의 동생들인 이반 5세와 표트르 1세가 공동으로 즉위하게 되었죠.

이반 5세(출처 : GIM)와 표트르 대제(출처 : Paul Delaroche)

1682년, 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를 차르로,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가 공동 통치자로 같이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나 병약했던 이반 5세를 본 누나 소피아가 정권을 장악했고, 표트르 1세는 그 이복누이의 눈을 피해 도망칩니다. 그러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는 등 러시아에게 안좋은 결과를 자주 내었던 소피아를 표트르 1세가 귀족들과 힘을 합쳐 신속히 진압하고, 차르가 되어 정국을 운영합니다.

 

표트르 1세는 1696년부터 1725년까지 개혁을 시작(표트르 1세의 개혁)합니다. 대사관을 설치하거나, 관등을 정비하고, 무역과 교역을 장려했으며, 정부 인원도 새로 개혁했죠. 대학도 세우고, 행정 체계도 갖추었으며, 외래 작물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721년 11월 2일, '전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ъ Всероссійскій)'라는 칭호를 받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차르국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으로 개칭 선포하며 당당히 '황제국'의 반열에 들어서며 러시아 차르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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