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결국 어떻게 될까(13개의 한국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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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결국 어떻게 될까(13개의 한국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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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보다보니, 알고리즘은 내게 역사 관련 콘텐츠를 제공해준다. 그 중 폴란드 출신 대체 역사 유튜버 Poloniae의 'all endings : korea'에 대해 보게 되었다. 한국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까에 대한 질문에 개인적인 해석 13개를 담고 있는 영상이었는데, 몇가지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틀은 Poloniae가 만들었다. 또  보충설명과 큰 틀을 이해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건들을 역사적인 고민 끝에 추가해봤는데, 이 글에서 대체역사는 푸른색 글씨로 적었다. 한 개인이 썼기 때문에 이해가 안될 수도 있으니 직접 적은 내용 외에 다양한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

1. Good : 좋은 엔딩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통일되며, 단합하고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흔히 생각하는 남북통일의 형태인 남한주도의 흡수 통일.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명과 정치체제가 바뀌지 않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반국가단체가 점유하고 있는 미수복영토를 자연스럽게 회복하게 된다. 분명 이렇게 될 경우 중국, 미국, 러시아와 같은 외세의 간섭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2. Best : 베스트 엔딩

김씨 왕조가 힘을 잃고, 한국은 평화적으로 통일되며, 북쪽은 복구되었다.

내부 쿠데타 혹은 민중 혁명으로 인해 북한의 실권자인 전주 김씨 백두혈통(김일성-김정일-김정은) 독재 체제가 몰락하고, 자연스럽게 남한에 흡수 통일이 되는 통일이다. 허나 이 방법은 특히 중국의 개입 및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구 북한 시민들의 난동 혹은 외국에 의한 북한 분할과 같은 위험 부담이 큰 통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Joseon : 조선 엔딩

일본은 계속해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 왕국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7세기부터 시행되었던 일본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이 지속되며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은 그 명백을 계속 이어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1894~1895)이나 을미사변(1895)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조선 왕국의 이름으로 명백을 잇게 된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일본이 고립되었다고 해서, 중국이나 열강이 조선 왕국에 대한 이권을 넘보지 않았을 거라는 판단은 헛된 판단인 만큼 분명,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립협회(1896~1898)가 등장하고, 대한제국 선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4. Korean Empire : 대한제국 엔딩

유럽 국가들의 도움으로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결국 아시아 최강국이 된다. 그리고 만주와 일본을 획득한다.

대한제국(1897~1910)이 건국되었을 당시는 열강이 한반도에 대한 이권과 권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다.

아관망명(아관파천, 1896~1897)을 시작으로, 열강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노골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는데, 1896년에는 조선은 러시아에게는 압록강 및 두만강 삼림 채굴권과 광산채굴권을, 미국에게는 광산채굴권과 금광채굴권, 경인설 부설권과 한양 전동, 전화, 전차 부설권을 내주었으며, 프랑스에게는 경의선 부설권을 내주었다. 이듬해인 1897년, 독일, 일본에게 금광채굴권을 빼앗겼으며, 1898년에는 일본에게 경부선 부설권을 내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주 국권을 회복하고, 국제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1897년 10월, 조선왕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의 신인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린 뒤, 전제 군주정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후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개혁(1897~1907)을 실시해 자체적으로 외세의 압력에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1906년에 고종이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을사늑약(1905)의 부당성에 대해 알리며 보낸 편지를 통해 독일은 조선에 대한 원폭적인 지지를 보였으며, 러시아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러일 전쟁 직전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을 막아낼 것을 약속했다. 결국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에게서 국권을 구한 대한제국은 이제 독일과 러시아의 갈등을 이용해 몇 년간 대외적으로 대한 제국을 향한 시선을 막으며, 내부적으로 자주국으로서 힘을 키우며 성장해 나갔다.

힘을 키운뒤,과거 만주는 고구려땅이었음을 주장하며,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도 많아 그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국경 부근에 상비군을 배치했으며, 장쭤린을 무력으로 설득하고, 러시아에게서 이권을 회수한 뒤  중화민국 만주를 획득했다.

 

만주의 풍부한 자본과 한반도의 수많은 노동력, 그리고 지금껏 이권을 넘겨주며 알게 된 서양의 산업 기술이 합쳐져 대한제국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루었다. 산업화를 통해 이룬 각종 공산품과 특산품을 육로로 이용해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까지 교류를 확대했으며, 일본의 재침을 막기 위해 해구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동해에 해군력을 집중했다. 비록 일본이 영국과 미국과 동맹과 협약을 맺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독일, 러시아와 손을 잡은 대한제국을 함부로 침탈할 수 없었고, 결국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이권에서 손을 떼게 된다. 계속해서 고립정책을 펼친 대한제국은 결과적으로 일본 대마도, 규슈를 차지했으며, 홋카이도와 시고쿠, 혼슈는 자치령으로 남겨둔 채 일본을 획득하게 된다.

5. Bad : 나쁜 엔딩

최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영원히 분단될 것이다.

한국전쟁은 휴전을 맺었고(1953), 남한은 반공을 필두로 삼은 여러 독재 정권의 지배하에 있다가 시민 운동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회복했다. 그리고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당독재체제가 강화되었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중간중간 회담을 거치며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서로의 생각과 사상이 충돌하며 영원히 분단 국가로 남게 된다.

6. Worst : 최악의 엔딩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통치 및 지배권을 유지했고, 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대공세를 펼쳤던 연합군은 일본을 얕보고 있었던 것 같다.

 

몽골에서는 반공산혁명이 일어나 할힌골 전투 때에는 소련, 몽골 대 일본의 구도에서 소련 대 일본, 몽골의 구도로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소련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며 만주에 대한 침공이 저지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지켰다는 생각에 사기가 드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앞으로의 상황을 판단해 만주장성을 세우고, 군비를 확충해 소련의 재침에 대비했다. 

 

날씨도 일본을 도왔는데, 1945년 8월 9일, B-29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히로시마 상공은 수많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래서 그나마 기상 상황이 괜찮았던 고쿠라로 목표를 변경하였다. 당시 고쿠라의 날씨는 히로시마에 비해 괜찮았지만 그래도 구름이 많았으며, 바람이 많이 불었고, 결국 투하하기 위한 폭탄을 조립하던 중 파슨스 대령의 실수로 폭파되었다. 이로 인해 폭파의 잔해로 인해 고쿠라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히로시마 때보다는(만일 실시되었다면 말이다!) 적은 피폭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렇게 첫 번째 투하작전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게 된 미 공군 측은 큰 자괴감에 빠졌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B-29 복스카가 8월 9일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기름은 떨어지고 보고된 것과 다르게 기상은 여전히 나쁜 상태였다. 이번에도 폭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절망하던 중 갑자기 나가사키의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을 먼저 막은 덕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일본 군부는 나가사키에 공습경보를 내리고 즉각 전투기를 내보냈다. 또 설상가상으로 나가사키를 파악해 팻 맨 투하 지점을 파악할 수 있었던 하늘 구멍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B-29 복스카는 큰 고민 끝에 결정을 했다. 일본 본토를 빠져나가며 최대한 빠르게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공은 했지만, 나가사키의 해안가에 그라운드 제로가 생기면서 (기존에 터졌던 것보다) 적은 피해만을 남겼다.

 

소련과 미국을 모두 이긴 일본은 양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스스로 군비를 축소해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인정받고 싶다는 의견을 내어왔고, 이미 독일을 패망시키고 힘들어하던 소련과 미국 국민들의 시위로 인해 미국, 소련은 일본 제국이 앞으로 전쟁 및 선전포고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를 인정해주었다. 당연히 한국, 대만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들은 독립을 누리지 못했으며, 한반도는 지금까지 일본령 조선으로 일컬어지며, 독립을 하지 못했다.

7. Kim : 김씨 엔딩

북한이 한국 전쟁에서 이겼고, 한국은 오늘날 김씨 왕조의 지배 아래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50년 8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낙동강 직전까지 밀고 내려왔다. 북한의 8월 대공세에도 버티던 대한민국과 유엔군에게는 곧 새로운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일부는 안심하며 전투에 해이해졌다. 이 소문은 북측에도 들어갔지만 확실히 어느 곳을 칠지는 미지수라 판단하여 북한은 최대한 많은 해군 병력을 동, 서해안에 집중시켰다. 또 온 화력을 다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부수기 시작했다. 결국 9월 26일 추석 대보름밤 부산 해운대에는 람홍색공화국기(인공기)가 걸리게 된다. 이후 몇 번의 상륙작전과 전투태세가 이루어졌으나, 결국 한반도 전체는 김씨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8. Maoist : 마오주의 엔딩

중화인민공화국(PRC)의 침략 이후, 한국은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된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이 기세를 이어받아 이들은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기 위해 북진을 지속했다. 10월 14일에는 함경도 원산에서 일어난 원산 상륙 작전이 성공했으며, 10월 17일에는 사리원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진통일을 목표로 계속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을 수복했던 10월 19일 밤, 중국인민지원군(中国人民志愿军)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어 북한을 도우러 왔다. 10월 24일, 한국군은 평안북도 온정리에서 처음 중공군을 마주치고 패배했으며, 밀리고 밀려, 12월 31일부터 이듬해(1951년) 1월 7일까지, 서울에서 1.4 후퇴를 하며, 다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는 공산 세력에게 넘어갔다.

 

점차 밀리고 밀려 여름에는 낙동강까지 밀렸으며,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세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부에서 몰래 한반도로 배를 통해 보내온 병력들로 인해 한반도는 공산화가 되었다.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 한반도를 건설했으나,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도움으로 한반도가 공산화되었으므로, 조선에서의 힘을 행세할 것이라고 공산권 내에 공포했고, 당시 전쟁 사실을 숨기고 싶고 전쟁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던 소련은 이를 극비리에 승인했다. 결국 한반도는 중화인민공화국 차오시엔성(朝鲜省, 조선성)으로 남게 되었다.

9. Far East asaian : 극동 아시아 연방 엔딩

한국과 일본은 사회주의 중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극동 아시아 연방을 만들었다.

제1차 국공합작(1924~1927)은 결렬되고 다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대결 구도를 띄게 되었는데,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1937~1945)으로 인해 두 당은 일단 일본이라는 적을 물리치자고 합의를 보고 곧바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분명 같이 일본이라는 대적에 대항하는 구조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국민당이 공산당을 은근히 멸시하고 탄압하고 있었고, 공산당도 국민당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자력을 키우고 후방 지원을 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당이 일본과의 최전선에 서게 만들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시행하지 않아 미군과의 큰 차질을 빚지 않았다. 다만 무기를 사용할 때 필요한 석유가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동남아시아에서 석유와 고무를 수입하려고 했으나, 미국령 필리핀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도 당시 '중립법' 때문에 전쟁에 대한 직접 개입을 망설이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일본 제국을 타도하려 했지만 일본제국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찾아왔다. 일본은 '반공을 위한 연합 구축을 원하며 중국 내 공산당 축출을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한 달간의 고민 끝에 일본 및 중국 국민당을 돕는다고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소규모의 지원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전쟁에서 한숨 돌린 중국은 다시 내전에 들어가게 되었고(제2차 국공내전, 1946.03.~1950.05.), 대세와 민중 그리고 영토까지 이미 중국 공산당에게 달려있었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민당의 마지막 발악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짓밟았으며 결국 1949년 12월,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를 감행했다.

 

동아시아에 공산 혁명의 움직임이 강해지자, 일본은 자신들도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고, 미국과 이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 했다. 이미 기울대로 기운 일본의 국운과 조선 내 독립 열망, 그리고 공산권의 침략 준비, 미국의 자유주의 수호라는 의견이 맞물려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원조를 실시했고, 또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는 대신 양국이 반공산연맹을 만들라고 명했다. 암울한 상황에서 일본 제국은 자진해서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운 일본 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에도 새로운 독립 정부가 세워졌다. 한국 또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공산권에 존속되기 두려워했으니, 의견이 합쳐져 아시아의 자유를 수호하는 극동 아시아 연방을 결성하게 되었다.

10. Technocratic : 기술관료적인 엔딩

70년대 한국 기업들은 나라의 총체적 권력을 얻었고, 한국은 전체주의적 기술관료 독재 정권 체제가 되었다.

전후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고 고도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1960년에는 경공업이 발전했으며,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이 육성되었다. 특히 이 70년대 중화학공업의 육성은 제조업에 대한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뤄졌다. 이때 등장한 독점적 재벌 기업들은 정치권에서도 힘을 얻고 싶어했고, 각종 기술 정당이 새워져 민주화까지 이루는 듯했으나, 경제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삼성과 같은 기업이 총체적인 권력을 얻게 되었고, 기업 독점 국가가 되었다.

11.  Christian :  기독교 엔딩

한국의 기독교화가 실제보다 빨랐고, 한국은 크리스트교 연합국이 된다.

북한에서는 '백두혈통은 하늘에서 내려온 핏줄이며, 김씨 왕조는 곧 하나님이다'라는 비기독교적 논리로 기독교가 확산되었으며, 자신에게 충성치 않으면, 지옥에 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주체 사상보다 더욱 효과적이었다. 결국 북한은 기독교 독재 국가가 되었다.

 

남한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한국교회연합은 다시 한국기독교연합으로 통합되었고, 한국기독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또한 한국기독교총연합을 새로 창설해 통합되었다.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기독교총연합은 한국기독교회로 통합되어, 남한에서는 모든 주요 교회들이 통합이 되었다.

 

한국기독교회는 북한교회와 통합을 추진했고 북한의 기독교 독재 국가와 연합 형태를 띄게 되었다. 수많은 논의를 거치고 여러 협정을 맺은 남북 교회는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로 통합되고, 한국교회본부가 중앙 통제 기구로서 기능을 하기로 하고, 한반도는 크리스트교 연합국이 되었다. 사상은 달랐으나 신에 대한 마음이 같았던 한반도는 결과적으로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12. Cursed : 저주받은 엔딩

한국은 맥아더가 내린 원폭 명령으로 점멸했고, 오늘날 한반도는 아직도 원폭의 피해를 입은 황량한 곳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9년 8월, 소련은 소련 최초의 핵폭탄 РДС-1(알디에스-1) 실험에 성공했고, 이후 핵무기를 만드는데 만전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된다. 낙동강 이남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8월 1일까지 북한의 손에 들어갔지만, 9월 15일에 실시되어 9월 16일에 완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된 듯했다. 그러나 유엔군과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10월 19일부터 중국은 인민지원군을 보내 북한을 도왔고, 이에 힘입은 북한과 중국, 소련군은 공세를 키우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 미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한국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해 12월 24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북측과 만주 지역 일부에 사용할 원자탄 34두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듬해 제4차 서울전투(1951.03.)와 제6차 서울전투(1951.04.)로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면서 북측에 원폭을 발사할 계획은 백지화되는 듯했다. 서울을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과 소련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경우 산둥 반도와 만주에 원자폭탄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루먼은 당시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의장을 역임했던 고든 딘(Gordon Dean, 1905~1958)과 밀담을 가지고 핵폭탄 마크 4를 군용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고든 딘과 미 합참 의장은 이를 제3차 세계 대전의 현실화 및 한국인 피복 문제, 맥아더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 등을 근거로 과연 대통령의 결정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유주의의 수호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치적 선전을 하고 있었고, 이에 감응한 미국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 그리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 등의 건의와 부탁에 의해 맥아더는 핵탄두를 손에 넣게 되었다. 결국 핵탄두는 한반도와 중국 국경 경계선, 평양 등에 투하되었으며, 이로 인해 북한은 전멸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은 큰 병력 손실을 얻게 된다. 중국은 이미 처음부터 지원군 명분으로 한반도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국에게 이에 대한 불만을 제대로 표출 못했지만, 소련은 미국의 원폭에 대해 강력히 비난하고 이에 자신도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곧이어 북한은 남측에 핵폭탄을 터뜨렸으며, 한반도와 주변 지역은 원폭에 오염된 채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해당 지역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에 의해 당분간은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해당 지역은 누구에 손아귀에 들어갈지 논의를 시작했다.

13. Annihilation :  점멸 엔딩

한국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전 세계는 원자 폭탄으로 인해 파괴된다. 그 이후 한국은 전 체계를 합병하고 세계주체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을 선포한다.

1955년 3월, 북한과학원 제2차 총회에서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 설치를 결정했고, 1956년 3월, 소련과 연합 핵연구소 설립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1958년 1월, 소련은 함경북도 길주 인근에 원자력 훈련센터 건설을 지원했고, 1959년 9월, 조·소 원자력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북한은 핵개발에 만전을 가할 수 있었다.

북한은 1962년 11월, 자체적으로 평안북도 영변에 녕변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한 후, 이곳에서 1963년, 연구용 원자로 IRT-2000의 건설을 시작해 1965년 완공했다.

 

1974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여 선진 원자력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의 설득에 1985년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며, 1992년 1월 31일,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없애자고 합의했다. 이때부터 북한은 핵무기를 잠정적으로 줄일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비핵화 공동선언을 한 지 한 달여만인 1993년 3월, 북한은 NPT에서 탈퇴하고 암암리에 핵개발을 착수했다.

 

북한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공식적으로 6차례 핵실험을 했으며, 지금도 수많은 미사일을 연구하며 한반도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남한 원폭 공격을 시작으로, 일본, 중국 동부 순으로 점차 방향을 넓혀가며 원폭을 했고, 이에 미국과 러시아, 유럽 세력들이 선전 포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는 각국이 발사한 원폭으로 파괴당하고 살아남은 조선인민민주의인민공화국 세력들은 세계주체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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