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한국사 용어 정리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알쓸신잡 한국사 용어 정리

728x90
흔히 한국사에서 배우는 용어들 중 생전 처음들어보는, 혹은 시험, 내신 기준으로 그다지 비중있어 보이지 않는 역사 용어들을 위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네이버사전> 등을 바탕으로 정리해봤다. 먼저 시대를 알 수 있는 용어는 시간 순으로 나열했으며, 그렇지 않은 용어는 그 뒤에 따로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1. 시대별 한국사 용어 정리

1-1. 구석기 시대(약 70만 년 전~)

도구 : 뗀석기(찍개, 주먹도끼, 슴베찌르개)
생활모습 : 사냥과 채집, 동굴과 막집, 이동생활
무리사회, 평등사회
유적지=경기도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단양 금굴, 청원 두루봉 동굴

 

1-2. 신석기 시대

도구 : 간석기(갈돌, 갈판)
생활모습 : 움집, 옷 제작(가락바퀴, 뼈바늘)
토기 : 빗살무늬토기, 이른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농경의 시작(신석기 혁명)
평등사회, 씨족사회
종교 등장(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유적지=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봉산 지탑리, 양양 오산리, 제주 고산리

 

1-3. 청동기 시대

도구 : 청동기
대표 유물 : 비파형 동검, 청동방울, 거친무늬거울
거푸집 사용의 시작
농사 등에서는 간석기(반달돌칼 등) 사용
생활모습 : 벼농사 시작(한반도 일부 지역), 구릉지대 중심의 촌락 형성, 지상 가옥화
토기 : 민무늬토기, 미송리식 토기

계급의 출현->군장국가(고조선) 등장, 지배자의 등장(고인돌)

 

1-4. 철기 시대

도구 : 철기(철제 무기, 철제 농기구)
- 잔무늬거울, 세형동검(한반도의 독자적인 청도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 거푸집)
- 철제 농기구 : 농업의 발달, 벼농사의 확대
- 활발한 정복전쟁->연맹왕국의 등장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붓 등)
무덤 양식 : 널무덤, 독무덤

 

[고조선 시대(-2333?~-108)]

<금간옥첩(金簡玉牒)>

오행치수법이 적혀 있는 죽간을 엮고 옥을 수놓아 만든 책. 우임금이 (부루태자로부터?) 이 책을 받고 중화 대륙의 물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삼국시대(기원전후 ~ 2세기 중반)]

 

 

[삼국시대(-1세기~698.12)]

구제궁(九梯宮)

고구려 때부터 고려 시대까지 존재했던 궁전. 이름은 '9개(九) 사다리(梯)의 궁(宮)'이라는 뜻이다.

 

172.11, 좌원 전투

한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의 좌원에 쳐들어 와서 명림답부가 지휘한 고구려군이 한을 대패시킨 사건

 

194~, 진대법(賑貸法)

재난이나 흉년 든 해에 어려운 백성에게 나라의 곡식을 꾸어 주던 일.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부터 비롯된 제도였는데, 고려 성종 때에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쓰였고, 조선 시대에 환곡법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372~, 태학(太學)

고구려 때에 중앙 귀족 자제에게 경학, 문학 따위를 가르치던 국립 교육 기관. 소수

 

375, <서기(書記)>

백제 근초고왕 30년(375)에 고흥이 지은 백제의 사서(史書). 오늘날은 전하지 않는다.

 

433~553, 나제동맹(羅濟同盟)

삼국 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하여 맺은 동맹. 백제 비유왕 6년(433)에 시작하여, 신라 진흥왕 14년(553) 한강 하류 지역에 대한 쟁탈전이 있기까지 약 120년간 계속되었다.

 

509~, 동시전(東市典)

신라 때에, 서울의 동쪽 저자를 다스리던 관아. 지증왕 10년(509)에 설치한 것으로 감(監) 2명, 대사(大舍) 2명, 서생(書生) 2명, 사(史) 4명의 벼슬아치를 두었다.

 

512, 우산국 정벌

512년 신라 지증왕 때, 지금의 강릉 일대에서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현 울릉도 일대)을 정복한 사건.

 

516~, 병부(兵部)

신라 때에,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법흥왕 3년(516)에 두었다.

 

531~, 상대등(上大等)

신라 때에, 나라의 정권을 맡았던 으뜸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법흥왕 18년(531)에 두었고, 화백과 같은 귀족 회의 의장도 겸하였다.

 

545, <국사(國史)>

신라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가 왕명에 따라 편찬한 역사책. 오늘날은 전하지 않는다.

 

553~1238, 황룡사(皇龍寺)

신라의 제24대 진흥왕 당시 창건했던 사찰. 원래는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가 그 못에서 솟아오른 황룡(皇龍)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짓게 되었다. 이후 645년,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측 목탑'을 지었고, 이 사찰은 1238년, 여몽 전쟁 때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

 

554, 관산성 전투(管山城戰鬪)

554년에 관산성(管山城)에서 백제와 신라가 싸워 백제가 대패한 전투. 이 전투는 양국의 운명을 건 싸움이었으며, 당연히 나제동맹은 깨졌으며, 백제의 성왕이 사망하며 침체기에 돌입하고, 신라의 진흥왕이 크게 이겨 한강 유역을 완벽히 차지하며 신라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높아졌다.

 

608, 걸사표(乞師表)

608년(진평왕 30),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이 수나라의 군사를 청하기 위해 쓴 글. 611년에 신라에서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걸사표로써 군사를 청했고, 이에 수나라 양제(煬帝)는 10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612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고 하니, 제2차 여수전쟁(612)을 자극한 문건으로 여겨지며, 결과적으로는 그 전쟁에서 수나라가 대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612, 살수대첩(薩水大捷)

제2차 여수전쟁(612) 중 을지문덕이 지휘한 고구려군이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지휘한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639~?, 미륵사(彌勒寺)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 제30대 무왕 당시 창건한 사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어느샌가 무너져 지금은 유적지로 남아있다.

 

642, 대야성 전투(大耶城戰鬪)

642년(의자왕 2, 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백제의 의자왕이 이 전투로 신라의 서부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대승을 거두는 성과를 얻으며 선왕에 대한 복수를 갚았다. 이에 신라 특히 김춘추는 대당 외교에 충력을 다하게 되었고, 백제에게 복수의 감정을 깊이 가지게 된다.

 

645~1238, 황룡사 9층목탑(皇龍寺 九層木塔)

645년에 선덕여왕이 황룡사에 세운 9층 목탑으로, 호국적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1238년, 여몽 전쟁 때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

 

648~668, 나당동맹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는 당 태종(太宗)을 만나 상호 입장을 조율하며 형성된 당과 신라의 동맹으로, 그 둘의 연합군인 나당연합군을 통해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전과를 이룬다. 그러나 668년,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먹을 야욕을 보이면서 나당동맹은 깨진다.

 

659~, 사정부(司正府)

신라 때에, 백관(百官)을 감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경덕왕 때 숙정대로 고쳤다.

 

660.08, 황산벌 전투(黃山伐戰鬪)

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 처음엔 백제가 크게 이기고 있었으나 화랑도의 희생으로 눈빛이 돌아간 신라군에 의해 강력히 역공당하며 백제는 결국 패배하고, 백제라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670~676, 나당전쟁(羅唐戰爭)

백제와 고구려 멸망한 후 신라와 당나라가 7년간 싸운 전쟁. 결과적으로 신라가 승리하며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676, 기벌포 전투(伎伐浦戰鬪)

나당전쟁 중인 676년(문무왕 16) 음력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 이 전투에서 신라가 당을 깨트리며 결정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남북국시대(698.12~900)]

주자감(胄子監)

발해 때에 둔, 최고의 교육 기관. 유학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산학(算學) 따위의 실무 과목도 가르쳤다.

 

732, 등주 공격(登州攻擊)

음력 732년 9월, 장문휴 등이 이끄는 발해군이 당나라 등주(登州, 현 중국 산동성 봉래시)를 급습한 사건. 발해의 등주공격은 발해가 당을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당이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던 것이다.

 

788~,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통일신라시대, 788년(원성왕 4)부터 시행된 관인 선발 제도. 유교적 성격을 띠었다.

 

822,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현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金憲昌)이 일으킨 반란.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여 누구를 왕으로 옹립할 지에 대한 회의를 했는데, 처음엔 그의 조카 김주원(金周元)을 옹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주원은 (기록에 따르면) 홍수 때문에 수도로 오지 못했고, 결국 김경신이 왕위에 앉게 되는데, 이가 신라 제38대 국왕 원성왕(元聖王)이다. 이 사건에 화난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822년 아예 독자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인 장안(長安)을 건국해 버렸고, 그렇게 그의 반란이 시작된다. 그러나 거듭된 신라군의 공격으로 그 힘을 쓰지 못하고 곧 김헌창이 자살하며 반란은 끝이 나게 되었다. 이 난으로 인해 신라의 중앙집권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어 호족과 같은 많은 지방세력이 성장하여 할거하는 상황까지 펼쳐지게 된다.

 

828~851, 청해진(淸海鎭)

828년(흥덕왕 3)에 신라 하대 장보고(張保皐)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설치한 해군 기지 겸 무역 기지로, 장보고의 반란으로 그가 사망한 이후 몇 년이 지난 851년(문성왕 13)에 철폐되었다. 완도는 당시 신라와 당나라·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다.

 

888년, <삼대목(三代目)>

신라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향가모음집

 

889,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亂)

889년(진성여왕 3), 중앙정부의 조세 독촉을 계기로 일어난 신라의 사벌주(沙伐州 : 현 경상북도 상주)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일으킨 농민 봉기.

 

894,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후삼국시대(900~936.08)]

904~918, 광평성(廣評省)

궁예(弓裔)가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며 관제를 정비할 때 설치한 최고중앙관서로, 내정을 통괄했다. 

 

[고려(918.07.25~1392.08.05)]

기인 (其人)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토호세력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

 

~986, 흑창(黑倉)

고려 초에 설치되었던 진휼기관이자, 궁민(窮民)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상환하도록 하는 진대기관.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제도였다. 986년에 쌀 1만 석을 더하여 의창(義倉)으로 개칭했다.

 

935~1318,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

 

936, <정계(政誡)>

고려 태조가 백관을 훈계하기 위하여 저술하여 반포한 8편으로 구성된 현전 하지 않는 교훈서

 

936, <계백료서(誡百寮書)>

고려 태조가 삼한을 평정한 후 신하의 예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1권으로 구성된 현전 하지 않는 예서

 

940, 본관제(本貫制)

고려 시대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을 제한했던 제도

 

940~, 역분전(役分田)

고려 왕조에서 처음 실시된 토지 분급 제도. 삼국을 통합할 때의 조신(朝臣)과 군사(軍士)에게 관계(官階, 관리 및 벼슬 등급)는 논하지 않고 사람의 성품, 행실의 옳고 그름, 공로의 크고 작음을 보아 등급을 나누어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942,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

고려 태조 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 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 이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으며,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를 11세기까지 계속 유지하게 된다.

 

943, <훈요10조(訓要十條)>

고려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태조 25)에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 고려왕실의 헌장으로 태조의 신앙·사상·정책·규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이라는 의의가 있다.

 

947~, 광군(光軍)

고려시대 농민으로 편성된 예비군사조직.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지방호족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예비군이었다.

 

949, 주현공부법(州縣貢賦法)

고려 광종이 시행한 중앙정부가 각 주(州)와 현(縣)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를 마련한 제도

 

956,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 하여 방량(放良, 양민으로 풀어줌)하게 한 정책. 그러나 경종 이후 호족과 귀족관료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이때 해방된 노비의 환천이 다시 이루어졌다(노비환천법(982)).

 

958~1894, 과거(科擧)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 958년 고려의 광종이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천여 년 동안 대표적인 관리 선발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 왕조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시행 절차와 내역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 측면에서는 성격이 다르지 않았다.

 

982,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

고려 전기 문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정책서 겸 상소문

 

982,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

고려 광종 때 노비안검법(956)에 따라 방량시킨 노비를 성종 때 다시 (귀족의) 종으로 환원시킨 법

 

986~, 의창(義倉)

고려와 조선의 대표적인 구휼기관. 986년, 국초부터 있던 흑창(黑倉)에 미(米) 1만 석(碩)을 더하여 설치되었다. 지방 군현의 의창은 고려의 지방제도가 성립되고, <의창조수취규정(義倉租收取規定)>이 정해진 현종 때 마련되었다. 고려가 멸하고, 조선시대에도 이 시스템은 이어졌다.

 

992~1275(~1392), 국자감(國子監)

고려시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국학(國學, 1275~1298), 성균감(成均監, 1298~1308), 성균관(成均館, 1308~1356), 국자감(國子監, 1356~1362), 성균관(成均館, 1362~1392)의 순서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 시대로 넘어가 유학 교육만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바뀐다.

 

993~, 상평창(常平倉)

고려와 조선 시대에 풍년에 곡물이 흔하면 값을 올려 사들이고, 흉년에 곡물이 귀하면 값을 내려 팔아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 흑창(黑倉) 등의 영향을 받았다.

 

993~, 강동6주(江東六州)

제1차 고려-거란 전쟁(993)에서 요(거란)의 소손녕에게서 고려의 서희와의 담판을 통해 고려가 얻은 강동 지역의 6개의 주. 이후 두 차례나 지속되는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해 요(거란)를 자주 물리쳤다.

 

996, 건원중보(乾元重寶)

996년(성종 15)에 처음 주조된 관(官)에서 주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로서 철전(鐵錢)과 동전(銅錢)의 두 종류가 있다. 외형은 둥글고, 중앙에는 사각의 구멍이 뚫린 형원공방(形圓孔方)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076~,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

기존의 전시과 재도를 또 갱신하여 개정한 완성형의 전시과로, 마군(馬軍)과 역보군(役步軍) 및 감문군(監門軍)을 비롯한 일반 병사들에게도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으로 추정되는 한인(閑人)과 잡류(雜類) 등에게도 토지를 지급했다.

 

1012~1066, 안찰사(按察使)

고려 시대에, 각 도의 행정을 맡아보던 으뜸 벼슬. 현종 3년(1012)에 절도사를 고친 것이며, 문종 20년(1066)에 도부서(都部署)로 고쳤다.

 

1019.03.10, 귀주 대첩(龜州大捷)

제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강감찬이 이끌던 고려군이 강동 6주 중 하나인 귀주(龜州, 현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요군(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승리한 전투. 고려 입장에선 거란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이후 요(거란)는 침체기로 접어들고, 고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1090,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고려전기 승려 의천이 17년 동안 고려와 송, 요, 일본 등에서 불교 자료를 수집하여 1073년부터 편찬 시작해 1090년에 완성한 3권 1책의 불교서이자 목록집

 

1097~, 주전도감(鑄錢都監)

1097년(숙종 2)년 고려 숙종 때 화폐주조를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이곳에서 만들어진 화폐는 주로 동전(銅錢)으로서, 1102년 12월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 5000관(貫)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재추(宰樞), 문무양반(文武兩班), 군인에게 분배되었으며, 이어 삼한중보(三韓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해동중보(海東重寶) 등이 만들어졌다.

 

1101~1104,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고려시대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의 창건을 관장하였던 임시관서

 

1112~, 혜민국(惠民局)

고려 중기인 1112년(예종 7)에 백성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1116~1392, 보문각(寶文閣)

고려 예종 때 설치한 문한 관서

 

1119~1392, 양현고(養賢庫)

고려시대 국학(國學)의 장학재단. 예종은 당시 9재학당을 포함한 사학(私學)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을 진흥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설립하고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입학시켜 이들의 교육과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양현고를 설립하였다.

 

1314~, 만권당(萬卷堂)

고려 후기인 1314년(충숙왕 1),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중국 베이징)에 세운 서재(書齋).

 

[조선(1392.08.05~1897.10.12)]

1398.08, 제1차 왕자의 난

 

1414.06~1894.07, 좌의정(左議政)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1품 관직으로, 고려의 첨의좌중찬(僉議左中贊)이 변한 것으로, 조선에 들어서는 문하좌시중(1392.07~1394.10), 문화좌정승(1394.10~1401.07), 좌정승(1401.07~1414.04), 판의정부사(1414.04~1414.06)으로 개칭되었다가 1414년 음력 6월에 좌의정으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갑오개혁(1894~1895)에서 관제개편과 함께 영의정, 우의정과 합쳐져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며 폐지된다.

 

1403~, 주자소(鑄字所)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

 

1403, 계미자(癸未字)

1403년(태종 3)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1434, 갑인자(甲寅字)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1453.11.10, 계유정난

 

1561~,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원으로, 처음엔 김유신을 모시던 곳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신라의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1587.09~1588, 녹둔도 전투

조선 함경도 북부에서 조선과 여진족이 녹둔도에서 별였던 전투로, 여진의 습격을 미리 목책, 참호 등을 준비한 조선군이 잘 막아냈으나, 일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과 같은 부분은 막을 수 없었다는 한계를 받으며,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매우 원통해 하여, 녹둔도의 둔전 경영은 취소되고, 이순신 등은 백의종군하게 된다.

 

1592.05.23~1598.12.16, 임진왜란

 

1597.08.27~1598.12.16, 정유재란

 

1609, <정방록(旌傍錄)>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임진왜란 때 동래 수영에서 의병 활동을 한 25명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 중앙 정부가 아닌 지방에서 편찬했다는 의의가 있으며, 아쉽게도 현전하지는 않는다.

 

1636.12.28~1637.02.24, 병자호란

 

1680.03~1680.04, 경신환국(庚申換局)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정국(政局) 혹은 사건. 이로 인해 상호공존적인 붕당 정치는 붕괴하기 시작하고, 남인 처벌 입장의 차이로 노론(남인을 강경히 처벌하고, 명분과 민생을 중시), 소론(남인을 온건히 처벌하고, 실용과 북방 개척을 중시)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1687~1775, 설점수세(設店收稅)

조선 후기 정부 주도로 설점(設店)하여 광물 채굴을 허가하고 세금을 거둔 제도. '설점수세제(設店收稅)'라고도 표현한다.

 

1689, 기사환국(己巳換局)

후궁 소의 장 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政局) 혹은 사건

 

1694, 갑술환국(甲戌換局)

기사환국(1689)으로 집권한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장악한 정국(政局) 혹은 사건

 

1712~1931,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1711년 청과 조선이 양국의 국경을 논의하고 1712년에 백두산 인근에 세운 정계비로, 백두산 천지로부터 동남 기슭으로 약 10리(약 3,927.27m)가 되는 지점, 압록강과 토문강의 강원(江原) 사이 평탄한 안부에 세웠다고 하는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725, 을사환국(乙巳換局)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한 처분. 이 사건으로 인해 노론이 소론을 이기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1740, <곽우록(藿憂錄)>

'콩잎(藿) 먹는 자의 근심(憂)을 적은 기록(錄)'이란 뜻으로,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이 국가적 당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 정책서. 이 책에서 이익은 '한전론(限田論)' 등을 주장했다.

 

1766, <의산문답(醫山問答)>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이 저술한 자연관 및 통합과학적 사상을 나타내는 실학서이자 과학사상서. 이 책은 남만주 지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살았다는 새로운 학문을 터득한 실옹(實翁)과 유학(특히 주자학과 성리학)만 공부한 허자(虛子)의 문답(問答) 형식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래서 책 이름이 '의산(의무려산)에서의 문답'이란 뜻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이 되었다. 해당 책을 통해 홍대용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무한우주론과 지전설을 주장했다. 

 

1784, <발해고(渤海考)>

조선후기 학자 유득공이 발해의 역사 · 문화에 대한 내용을 엮어 1784년에 저술한 역사서. 이 책은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인 것으로, 당대까지 '통일신라시대'라고 여겼던 시대를 '남북국'이라고 처음 부르기 시작해 발해를 우리 역사로 바라보는 관점을 넓혔다.

 

1798, <마과회통(麻科會通)>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홍역류[麻科]에 대한 지식, 특히 병증과 치료법을 수록하여 1798년에 편찬한 6권 3책 분량의 의서

 

1843~1912, 우리탕(吾禮堂, 오례당)

청나라의 통역관 및 외교관. 1883년 묄렌도르프의 초청으로 조선으로 와서 인천 해관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도 못되어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묄렌도르프가 떠난 후에도 인천해관에서 오랫동안을 근무하다가 후에는 용산과 원산의 상무위원을 역임했고, 1890년에 은퇴한다. 1901년 6월에 만국공원의 아래쪽에 제물포에 거주하는 외교관과 사업가들 30여 명이 친목을 위하여 제물포 구락부(Chemulpo Club)를 설립하였는데 우리탕은 여기의 유력한 회원이었다. 프랑스 로 후작이 전 재산을 우리탕에게 유산으로 남기게 되면서 일약 재산가가 되는데 인천 해관에서 물러난 후 부동산 등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아내의 요구에 응해서 대저택 오례당을 짓는다. 이 집은 1911년 12월 완공되었는데 우리탕은 반년 후인 1912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어로 '오례당'이라고도 한다. 

 

1852',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조선후기 실학자 김정희가 1852년경에 완성한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의 두 비문을 판독, 고증한 고증서.

 

1865.04.26~1872.09.16, 경복궁 중건

 

1866.01~1872,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4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약 8,000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1866.07,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1871년 조선에 대한 포함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응징적인 조선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1866.10.15~1866.11.18,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대 초부터 시작된 병인박해(1866~1872)로 인해, 탈출한 프랑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보복 원정을 요청했고, 그렇게 프랑스군은 1차적으로 수로 탐색을 마친 뒤, 10월 중반쯤 본격적으로 강화부(江華府)를 점령하고, 정족산성까지 공격했지만, 계속되는 조선군의 반격으로 지쳐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하며 철수했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 사건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쇄국정책까지 강화했다.

 

1868.05.11~1868.05.18,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1868년(고종 5) 5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무덤인 남연군묘 도굴미수사건. 이 사건으로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의 강화와 천주교탄압이 가중되었다.

 

1871.06.01~1871.06.11, 신미양요(조선 원정, 辛未洋擾)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1871년 '조선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해군함대를 동원해 강화도 일대를 잠시 침략하였다가, 광성보를 함락시키고 순무중군 어재연 등을 사살하고 '수자기'를 탈취하는 등 군사적 승리를 얻었으나, 완강한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그 어떤 협상도 하지 못하고, 외교적 패배를 안고 떠나갔다.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 의지를 강화했다.

 

1875.09.20, 운요호사건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 이미 1874년에 대만을 침공한 전과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그 사실에 벌벌 떠는 조선에게 적반하장으로 왜 너희들이 우리에게 함부로 포를 쏘느냐 화내면서, 영종도에 함포를 쐈으며, 상륙한 일본군은 조선수비병들을 패배시키고, 인근을 약탈한 뒤 되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을 맺게 되었으며,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1876.02.27(음 02.03),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고종 13) 2월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어 점차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 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1883.05.11, 동래민란

1883년 5월 11일 동래부의 난민 수백 명이 동래 관아를 습격하며 시작된 민란으로, 결국 정부에 의해 수습되고 정리되었다. 이를 학계에서는 '고종 대 농민 항쟁 재연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의의이자 1876년 개항 이후 최초로 개항장에서 일어난 민란'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883.07~1904.07.08, 전환국(典圜局)

1883년(고종 20)에 설치되었던 상설 조폐기관. 개항 이후 국가의 재정수요가 급증해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한 민 씨 정권은 수익성이 높은 화폐주조사업을 직접 관리·운영하기 위해 전환국을 설치했다. 근대 조폐설비를 수입하여 시험단계를 거친 뒤 1892년부터 화폐를 주조했으나 공식적으로 유통된 것은 1894년부터였다. 하지만 조악한 백동화의 주조 남발은 많은 폐해를 낳았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폐지 건의안을 수용해 폐지되었다. 15종에 달하는 화폐 주조 및 발행은 근대 화폐제도 도입을 위한 첫 시도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1883.08~1888.07, 박문국(博文局)

박영효(朴泳孝)의 건의에 따라 1883년(고종 20) 인쇄 및 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소라는 의의를 가진다. 이곳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가 발행되었다.

 

1883.10.01~1884.10.09, <한성순보(漢城旬報)>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하여 1883년에 창간한 순간신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4.12.04~1884.12.06, 갑신정변

김옥균, 박영효를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척신과 수구파 대신들을 암살했으며, 고종을 경우궁으로 피신시켰다. 민 씨 세력은 청군에게 지원 사실을 통보했으며, 오후에는 민비와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급진개화파 세력은 <정강 정책>을 발표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청군 진압군과의 격전에서 패배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의 내정 간섭은 심해지는 한편, 조선은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 등을 적은 <한성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청과 일본은 향후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

 

1885.01.09(음 1884.11.24), <한성조약 (漢城條約)>

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양력 1885년 1월 9일) 서울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전 5조의 조약.

 

1885.02.29~1894.07.18,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처음엔 광혜원(廣惠院)으로 부르다가 2주 만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885.04.15~1887.02.27, 영국령 거문도(English geomundo)

대영제국 왕립해군이 조선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 이전 1875년에도 영국 내각은 해당 섬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당시 대영제국 외무장관 제15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탠리(1826~1893)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다고 말하며 거절했다가 러시아의 조선 침략 야욕이 점점 크게 일어나자 러시아의 거문도 섬 합병을 선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약 1년 10개월간 해당 섬을 점령했다. 한국에서는 해당 사건을 '거문도 점령 사건'이라고 부른다.

 

1885.10', 러시아령 제주도

대영제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일시 점령하자 러시아 제국이 이에 반발해 조선 제주도의 제주도 북부 지역 일부를 단기간 점거한 사건. 한국에서는 해당 사건을 '제주성 위협사건'이라고 부른다.

 

1887.12~1907.08, 기기창(機器廠)

1887년, 조선 정부가 근대식 무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건립한 기기국 소속 무기공장. 이곳에서  주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병기들을 많이 만들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1894~1895)과 청일전쟁(1894~1895)을 계기로 유명무실해졌으며, 그에 따라 1895년 3월, 군부(軍部) 산하의 '포공국(砲工局)'으로 재설치했다가, 러일전쟁(1904~1905) 이후엔 '군기창(軍器廠)'으로 개칭했으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조치를 통해 함께 사라졌다.

 

1892~1904.07.08, 백동화(白銅貨)

1892년(고종 29), 전환국(典圜局)에서 발행한 액면가 2전 5푼의 동전. 이후 1904년 7월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전환국을 공식적으로 폐쇄하게 하고 <화폐정리방침>을 세워 백동화와 엽전을 신식 화폐와 교환하는 화폐정리사업을 제도적으로 추진시켜 나갔다.

 

1894.01.10~1895.04.23, 동학 농민 혁명

 

1894.07.27~1894.12.17, 제1차 갑오개혁

 

1894.11.20(음 1894.10.23)~1894.12.10(음 1894.11.14), 우금치 전투

 

1894.12.17(음 1894.11.21)~1895.07.06(음 1895. 윤 05.14), 제2차 갑오개혁

 

1895.10.08, 을미사변

 

1895.10.08~1896.02.11, 을미개혁

 

1896.07.02~1899.12', 독립협회

 

1897~1914, 환구단(圜丘壇)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 조선 고종은 이곳에서 천지에 제를 드리고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1914년,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면서 환구단이 철거되고 현재는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만 남아있게 되었다.  '환단(圜壇)'이라고도 한다.

 

[대한제국(1897.10.12~1910.08.29)]

1898.09.01, <여학교설시통문>

서울 북촌의 양반여성 300여 명이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 정치참여권, 경제 활동 참여권을 명시해 발표한 통문. '여권통문'이라고도 한다.

 

1898.11.04, 독립협회 익명서 사건

수구파의 조병식, 이기동(李基東) 등이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무대신 정교(鄭喬)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조작된 내용의 익명서를 거리에 뿌리고 황제에게 보고한 사건. 이 사건으로 고종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해산시키게 된다.

 

1899.06.22~1904,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1897년 2월, 아관(俄館)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해 자강(自强)을 꾀하는 동시에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갔다. 이러한 자강의 의지를 바탕으로 1899년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즉, 군통수권자인 황제가 대원수로서 모든 군기(軍機)를 총괄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는 원수로서 육해군을 하나로 통솔하기 위해 황궁(皇宮) 안에 원수부를 둔 것이다.

 

1899~, 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眀殿)

1899년 초에 완공된 황실 도서관으로, 당시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1년 화재로 중건했으며, 1904년부터 고종 황제의 집무실 겸 외국사절 알현실로 쓰이면서 중명전(重眀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을사조약(1905)>이 맺어진 비운의 장소이면서, 1906년 황태자였던 순종의 결혼식이 이뤄진 곳이었다. 이후 1960년대까지

 

1899.08.17,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1900'~2005, 삼강주막(三江酒幕)

1900년경부터 2005년까지 영업했던 한국 최후의 주막. 마지막 주모는 유옥련 할머니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2005년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그가 빗금으로 그어 적었던 외상장부가 남아있다.

 

1900.10.27,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의 불법적인 어업 및 벌목 행위를 막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를 대한제국령으로 선포한 칙령

 

1903.05~1903.07.20, 러시아령 용암포

압록강 주변에서 벌채사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이 용암포 및 압록강 하구 일대를 단기간 불법 무단 점령한 사건. 일본 제국과 대영제국의 반발로 실패하게 되며, 러일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해당 사건을 '용암포 사건'이라고 부른다.

 

1904.02.08~1905.09.05, 러일전쟁

삼국간섭으로 인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준 일본 제국이 만주 뤼순커우 구와 주변 해역에서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제국 해군 여순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한 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 인해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된다.

 

1905.11.17, <을사조약>

 

1906.06.17~1907.06.29, <만세보(萬歲報)>

동학의 제3대 교주 손병희의 발의로 1906년에 창간한 일간신문. 이인직의 <혈의 누>라는 신소설을 우리나라 신문사상 첫 번째로 5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이어 10월 14일부터는 <귀의 성>을 연재하는 등 다채로운 지면구성을 시도했다. 고종황제도 이 신문을 애독하여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돈)에서 1,000원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도교 측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여 창간 1년이 지난 1907년 6월 29일 제293호로 종간호를 내었다. 그 뒤 이인직이 시설 일체를 매수하여 1907년 7월 18일부터 <대한신문(大韓新聞)>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되었다.

 

1906.09.01~1911.11.01,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개항 이후 생긴 여러 일어학교, 영어학교, 법어(프랑스어)학교, 아어(러시아어)학교, 한어(중국어)학교, 덕어(독일어)학교 등을 1906년 학제 개혁에 따른 <외국어학교령>에 의거해 통합한 외국어학교로, 1911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따라 폐교되었다.

 

1907.07.18~1910.09.01, <대한신문(大韓新聞)>

1907년 7월 18일 이인직(李人稙)이 천도교계의 <만세보(萬世報)>를 인수해 제목을 고쳐 창간한 일간신문.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 사망을 애도하는 등 친일적인 행보를 보인 신문이다. 경술국치 직후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했으나, 9월 1일 <매일신보>에 병합, 폐간되었다.

 

1907.02~1908, 국채보상운동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1907.06,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1907.07.24, <제3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정미조약, 정미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1908.05~1911?, 태극서관(太極書館)

1908년 5월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등이 평양에서 서적이나 유인물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설립한 서점. 최남선(崔南善)이 주관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간행서적과 잡지 <소년(少年)>, 그리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의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었던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구였다.

 

1909.07.12, <기유각서>

 

1909.10.26,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1910.08.22, <한일합병조약>

 

[일본제국령 조선(일제강점기, 1910.08.29~1945.08.15)]

1919.02.08, 2.8 독립선언

 

1919.03.01~1919.04.11, 3.1 운동

 

1919.04.11, <대한민국 임시 헌장>

 

1919.04.15, 제암리 학살 사건

 

1919.11.09~, 의열단

 

1919.05~1935.02, 이륭양행(怡隆洋行)

 

1919.12~, 암살단

김상옥이 만든 항일 비밀 암살 조직

 

1920.06.06~1920.06.07, 봉오동 전투

 

1920.07.05~1921.04, 한인비행사양성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윌로우스 애국부인회와 윌로우쓰 한인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즈(Willows)에 창립한 한인 비행사 양성학교. 이미 1920년 3월 초에 임시 개소하여 24명의 학생으로 출발했으며, 그 해 6월 학생 수 30명, 훈련기 2대를 확보하고 미국인 프랭크 K.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를 비행교관으로 임명해 비행훈련에 매진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라고도 부른다.

 

1920.09.14,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0.10.21~1920.10.26,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1920.10.02~, 간도 학살

 

1921.05.01~, 천도교소년회

1921년 5월 1일 설립된 천도교 내 소년회 단체로, 창립 1주년인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소년 운동을 전개했다.

 

1921.06.28, 자유시 참변

 

1921.09.12,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1923.03.22, 황옥 경부 폭탄 사건

'황옥 폭탄 사건'이라고도 한다.

 

1922.03.28, 황포탄 의거

 

1923.01.1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3.01.17, 후암동 대격전 의거

서울 용산구 효제동에서 김상옥이 일본 형사 1명을 사살하고, 경사 2명을 부상시킨 사건

 

1923.01.22, 효제동 대격전 의거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김상옥이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권총 두 자루로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군경 15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 발로 자결한 사건

 

1923.09.01~, 관동대학살

 

1924.07.11~1925, 조선키네마

일제 강점기 부산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영화 제작사. <해의 비곡(1924)>, <아리랑(1926)> 등을 포함하여 총 61편을 상영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최초로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하여 네 작품이나 완성한 선진성은 물론이고 나운규, 안종화(安鍾和), 이경손(李慶孫) 등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영화인들이 이 회사를 거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점 등은 당시 부산 영화 산업의 선진성과 역사성을 가진다고 평가된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라고도 불린다.

 

1925.04.12~1945.10.15,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925년 4월 12일 공포되었고, 5월 12일 시행된 1925년(다이쇼(大正) 14) 법률 제46호로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일본의 법률. 반일본적 사상뿐 아니라, 공산주의 금지의 목적 외에도 사회주의나 노동운동 역시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져 많은 활동가들과 운동가들이 치안유지법에 의한 탄압을 받았다.

 

1926.06.10, 6.10 만세 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혹은 인산일(因山日))을 기점으로 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 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으며, 신간회의 설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27.02~1931.05.16, 신간회(新幹會)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함과 6·10 만세운동(1926)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1929.06.~1941.11, <삼천리(三千里)>

1929년에 6월에 김동환이 창간했다가 1941년 11월에 종간된 월간 종합지. 종합지이면서도 문예란에 주력하여 문단에 이바지했다.

 

1929.11.03~1930.05,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31.10~, 한인애국단

 

1932.01.08, 사쿠라다몬 의거(櫻田門 義擧)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경, 한인애국단원(韓人愛國團員)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궁성 사쿠라다문을 나서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를 죽이려 했던 거사. 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봉창은 직접 자수했고, 그 해 10월 사형당했다. 한편, 사건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불행히도 되지 않음'이라 보도한 중국의 칭다오 국민일보(青島民國日報)를 본 일본은 격노했고, 결국 제1차 상하이 사변(1932.01~1932.03)으로 이어졌고, 승리했다고 주장한 일본이 대관병식(大観兵式, 전승 기념행사 등을 포함한 군대 행사)과 천장절 축하회(天長節祝賀会, 덴노 탄생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때 '훙커우 공원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사쿠라다몬 사건, 이봉창 의거'라고도 부른다.

 

1932.04.29, 훙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義擧)

제1차 상하이 사변(1932.01~1932.03)으로 상하이를 점령하는 등 어느 정도 중국에게 승리했다고 여긴 일본이 1932년 4월 29일 대관병식(大観兵式)과 천장절 축하회(天長節祝賀会)를 열었다. 이때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尹奉吉)이 물통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 대장, 일본해군 중장, 일본육군 중장, 상하이 총영사, 상하이 거류민단장과 그를 호휘하던 일본군 병사 수십 명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훙커우 공원 사건, 윤봉길 의거'라고도 한다.

 

1932.09.20~1932.11.17, 쌍성보 전투(雙城堡戰鬪)

지청천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만주 지린성(吉林省) 하얼빈(哈爾濱) 서남쪽 쌍성보(雙城堡)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1차 전투는 대승을 거두어 쌍성보를 탈환했으나, 일본측의 복수로 시작된 2차 전투에서 패전하게 된다. 이 전투는 한중의 항일 공동전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의를 가진다.

 

1933.06.30, 대전자령 전투 (大甸子嶺戰鬪)

지청천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이 연합해 만주 헤이룽장성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그곳을 지나는 일본군을 기습격파한 전투.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전리품을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연합은 곧 깨지고 말았다.

 

1933.08~, 구인회(九人會)

1933년 8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결성된 문학 단체. 순수 문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1937.06.04, 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

동북항일연군(혹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김일성이 이끌던 항일 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의 보천군 량강도 보천읍)를 습격해 승리했다는 전투. 

 

1938.04.01~1945.12.20,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

1938년 4월 1일에 공포되고 5월 5일에 일본과 그 식민지에서 시행되어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발표한 전시통제의 기본법

 

1938.07.01~1945.12.20, 보국대(報国隊)

일제가 일본인 및 조선인 학생, 여성과 농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

 

1940.07~1945.08,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関東軍防疫給水部本部)

일본제국육군 관동군에 둔 질병대책을 목적으로 한 의료 및 정수 확보를 목적으로 한 부대 본부로, 통칭호는 '만주 제731부대'였으며, 지휘관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982~1959)였다. 만주국 하얼빈시 핑팡구(平房区)에 설치했으며, 인근에서 잡아온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등에 대한 잔인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흔히 '만주 제731부대, 731부대'라고 한다.

 

1945.07.26,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26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포츠담 체칠리엔호프 궁전(Cecilienhof Palace)에서 열린 연합국 중 미국, 소련, 영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 공동선언. 해당 선언엔 '몰락 작전의 예고, 카이로 선언의 이행, 전범 처벌, 일본의 민주주의화 및 자유 확립,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무장해제'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고, 미군은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퍼부었으며, 소련군은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1945.09.06~1946.02,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세운 외세의 도움 없이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스스로 세웠다는 의의를 가지는 주석제 국가로, 이후 민족주의자들의 중요직 탈퇴와 미군정의 간섭 등으로 와해되며 결국 1946년 2월 해산됨과 동시에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재집결한다.

 

[군정기(1945.08.15~1948.09.09)]

1946.01.15~1948.08.15,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

미군정 산하에 국군 통합 목적으로 설치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으로,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와 공군의 전신인 항공대를 예하에 두고 있었다.

 

1946.02.16~1948.09.09, 북조선인민위원회

 

1946.03.05~1946.11.30,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미군정 당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월남자들이 조직한 청년단체로, 서북청년회의 전신이다. 

 

1946.11.30~1949.10.18, 서북청년회(西北靑年團)

미군정 당시 각 출신지역 별로 조직되어 있던 월남자들이 좌익공격에 적극 가담하는 한편 능률적인 체제를 갖추기 위해 설립한 청년단체.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단과 평안청년회를 중심으로 대한혁신청년회, 북선청년회, 양호단, 영락교회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 청년부 등이 모여 결성되었으며, 남대문 충돌사건, 부산극장사건, 좌익단체사무실 점령사건, 4.3 사건 등에서 좌파(사회주의계열(아나키즘, 공산주의 등)을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 색출 및 대북공작을 목표로 민간인 학살 등을 일으켰다. 이후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으며,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했다.

 

1946.12.12~1948.05.30,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946년 12월,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기관. 1948년 5월에 해산되기까지 약 1년 반 동안 앞으로 수립될 정부의 입법부로서의 준비단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47.03.01~1954.09.21, 제주 4.3 사건

 

1947.11.14~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제2차 유엔(UN) 총회’(1947.11.14) 결정에 따라 한반도 내의 선거의 공정한 감시와 관리를 위해 입국한 유엔 산하의 임시기구. 1948년 1월에 한반도로 입국했으나,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유엔 총회가 결의한 전 한반도 선거는 무산되었다. 결국 의견이 엇갈린 위원단은 독자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엔 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소련 등 공산진영 11개국이 불참하고 11개국이 기권한 상태에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31개국이 찬성하여 위원단이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한반도 남측에서만 열린 5.10 총선거의 계기가 된다.

 

1948.08.15~, 대한민국 육군

육군은 공식적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립된 1946년 1월 15일을 육군 창설일로 잡고 있지만, 여기서는 정식 명칭이 변경된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설립 기준일로 잡았다. 

 

1948.0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한국사 최초로 다당제가 정착한 선거이면서 최초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선거임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총선거라는 의의를 가진다. '5.10 총선거'라고도 한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1948.08.15~1960.06.15)] - 이 항에서는 9월 9일까지의 군정기를 다룸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분단시대(1948.09.09~)

[대한민국 제1공화국(1948.08.15~1960.06.15)] - 이 항에서는 9월 9일 이후의 대한민국사를 다룸

1948.10.23~1949.1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흔히 '반민특위'라고 줄여 부른다.

 

1948.12.19~1953.09.10,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1948년 12월 19일에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서북청년회 등 여러 우익 청년 단체를 통합한 대한민국의 우익 청년 단체

 

1949.06.21, <농지개혁법>

 

1949.10.01~, 대한민국 공군

 

1950.01.12,. 애치슨선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규정한 선언. 이 선언으로 인해 알류샨 열도-일본-필리핀을 잇는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라인(애치슨 선)'이 규정되었는데, 이는 6.25 전쟁의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애치슨 선언'이라고도 한다.

 

1952.01.12~1952.01.15,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평양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한 당시 북한군 보급물자 수송로상의 전략 요충지이자 미국 공군이 B-29까지 동원하여 500소티에 달하는 폭격을 퍼부었음에도 파괴에 실패한 승호리 철교를 대한민국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가 대공포에 피탄 될 위험을 무릅쓴 1,500피트 초저고도 공격으로 철교 폭파에 성공한 작전.

 

1952.03.28~1952.04.09, 송림제철소 폭격 작전

대한민국 공군이 황해북도 송림시에 총 74회 F-15D 전투기를 출격시켜 송림제철소의 제련공장의 용광로, 건물, 군수공장 등의 전략, 전술적 목표를 약 3회에 걸쳐 폭격한 작전. 이를 통해 북한군 보급요충지였던 송림제철소를 전소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2.08.29, 제3차 평양 대공습

폭격 전에 평양 시민에게 군사목표인 평양을 떠나라는 사전경고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살포한 뒤, 한국 공군 36대를 포함한 1,122대가 참가해 평양 금속공장, 평양 곡산공장지역 등의 공장건물을 포함한 약 19동의 구수시설을 파괴한 공습으로,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평양 대폭격 작전'이라고 부른다.

 

1952.10.28~1953.07.27, 351 고지 전투 항공지원 작전

동부전선의 마지노선이자 지리적, 전술적 요충지였던 351고지 쟁탈을 위해 대한민국 공군이 미국 제5공군, 미국 제7함대와 연합해 38도선 북쪽의 설악산, 속초, 거진, 간성지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금강산을 얻지는 못한 근접 항공지원 작전.

 

1953.10.01,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1953.11.27, 부산역전 대화재

경상남도 부산시 중구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건. 이 화재로 부산역에서 대청동 일대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전소되었으며,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되고, 29명의 사상자와 6천 여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954.11.21, 독도대첩

 

1954.11.27,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이라고도 한다.

 

1955.02.17~1994.12.22, 대한민국 보건사회부

보건 위생, 방역, 의정, 약정, 구호, 자활 지도, 부녀, 아동, 가족계획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행정각부. 이후 보건복지부(1994~2008)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며, '보사부'라고도 불렀다.

 

1956.11.10~1958.02.25, 진보당(進步黨)

1956년 11월 10일,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과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조봉암이 '공산독재도 자본주의 독재도 다 같이 거부하고 인류의 새 이상인 진보주의의 진리를 파악하고 만인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당의 이념을 천명하면서 생긴 정당으로, 1958년 1월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을 근거로 관련 간부를 차례로 체포하고 검거당하고, 진보당 총재였던 조봉암도 자진출두하였고, 그가 사형당한 뒤 해산된다.

 

1958~1960.11.11, 대한민국 국방부 중앙정보부

미국 CIA와의 정보 교류 및 대응을 위해 설치된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부 장관 직할 예하 정보기관. 국방정보본부의 전신이며 중앙정보부의 뿌리이며, '(국방부) 79호실, 79부대'이라고도 불렀다.

1959.07, 진보당사건 (進步黨事件)

1959년 7월,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여 조봉암을 사형 집행했던 사건.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그의 명예를 일부 회복시켰다.

 

1960.03.15,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와 함께 '3.15 부정선거'라고 불린다.

 

1960.03.15,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함께 '3.15 부정선거'라고 불린다.

 

1960.03.15~1960.04.11, 3.15 마산 의거

 

1960.04.11~1960.04.26, 4월 혁명

흔히 '4.19 혁명'이라고 한다.

 

1960.0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대한민국 제2공화국(1960.06.15~1963.12.16)]

1961.05.16, 5.16 군사 정변

 

[국가재건최고회의(1961.05.19 ~ 1963.12.16)]

1961.05.19~1963.12.16,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06.10~1981.04.08,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국가 안전 보장에 관련되는 정보와 보안, 범죄 수사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던 기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1981~1999)'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며, '중정, 남산'이라고도 불렀다.

 

1962.01.13~196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대한민국 제3공화국(1963.12.17~1972.12.26)]​

1964.06.03, 6.3 항쟁

'한일협상 반대 운동'이라고도 한다.

 

1964.09.11~1973.03.23, 베트남 전쟁 파병

 

1965.06.22, <한일기본조약>

'한일 협정'이라고도 한다.

 

1967.01.19, 당포함 격침 사건

 

1968.01.16~1968.01.31, 1.21 사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김신조 소위 등)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 및 주요 간부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이 사건으로 군 내부적으로는 현 대한민국 예비군의 전신인 대한민국 향토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순경, 684부대가 창설되었으며, 방첩대가 국군보안사령부로 개편되었고, 병사의 복무 기간이 3~6개월 연장되었다. 또 휴전선 전구역에 철책이 설치되었고, 천리 행군 훈련, 유격 훈련 같은 훈련도 실시되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고, 주민등록증 발급이 시작되었다. 또 북악 스카이웨이가 개통되고,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흔히 이 사건을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68.01.23~ 푸에블로 함 피랍 사건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라고도 한다.

 

1968.12.21~, 경부고속도로

 

1968.12.22, 동래시장 대화재

1968년 12월 22일, 당시 동래시장 상인 김 씨의 떡 가게에서 가게 주인의 딸이 온돌 위에 2푼짜리 베니어판을 얹어둔 채 집으로 돌아간 뒤 연탄불이 과열되면서 베니어판으로 옮겨 붙으면서 시작되어 약 1시간 만에 겨우 진화된 대형 화재 사고. 이 화재 사고로 시장 안에 있는 점포 317개 전부와 연말 대목을 보려고 준비해 둔 상품 1억 5000만 원 상당을 태운 뒤 옆에 있는 동래군청 가청사 일부까지 태우고 1시간 만에 진화되었다.

 

1970.04.08,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경,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한 개동(제15동)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

 

1970.11.13,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 자살한 사건. '전태일 분신 항거 사건'이라고도 한다.

 

1971.04.27,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과 신민당 김대중 의원, 전 국민당 박기출 의원, 자민당 이종윤 총재, 민중당 성보경총재, 정의당 진복기 총재 등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로, 민주공화당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이 신민당 김대중 의원보다 946,928표 더 획득하며 당선되었다.

 

1971.12.06, 제1차 국가비상사태선포

대통령 박정희가 중공의 UN 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급변, 그 틈을 탄 북한의 남침 위협 등을 이유로 들며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상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다며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하고 사회불안을 없애며, 최악의 경우 국민자유의 일부도 유보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6개 항에 담아 발표한 특별조치. 이 특별조치 선포에 따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이 통과되고,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으며, 향후 있을 10월 유신의 기초가 되었다.

 

1972.07.04,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 통일은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평화통일로 해야 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해야 한다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남북조절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남북공동성명>, <7.4 공동성명>'이라고도 부른다. 

 

1972.10.12~1973.08.28,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

<7·4 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들을 추진하고 남북관계를 개선, 발전시키며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설립된 남북한 당국 간의 정치적 협의기구. 8월 29일,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한 남북대화를 중단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남과 북은 각각 유신체제 선포와 사회주의 헌법 제정 등 각자의 내부 체제 강화에 몰두하면서 남북 대화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72.10.17, <10월 유신>

대통령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해서 발표한 대통령 특별선언. 이 발표로 인해 '유신헌법'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8호가 발표되었으며, 그 헌법이 개정된 1980년 10월 27일까지 '유신 체제'가 되었다.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1972.12.23~1980.10.27,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1972.12.27~1981.02.24)]

1973.08.08, 김대중 납치 사건

제1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 김대중이 미국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중 일본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잠시 일본에 방문했다가 괴한에 의해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될 뻔했지만, 갑작스러운 국적불명의 항공기의 등장, CIA 요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찾아가 나눈 이야기, 갑자기 그가 감금되었던 용금호에 걸려온 전화 등으로 인해 김대중은 무사히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대학에서 유신반대운동이 번졌고, 유명 종교인, 문화인, 정치인들이 개헌청원 100만 서명 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막고자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하게 된다.

 

1974.08.15,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 저격 사건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국립중앙극장에서 진행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경축사를 하던 도중에 청중석에 있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쏜 총에 의해 영부인 육영수가 맞아 사망한 사건.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사망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이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일본 정부는 외무장관 시나 에쓰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 수사기관에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했다.

 

1976.03.01, 3.1 민주구국선언(三一民主宣言)

1976년 3월 1일 일부 재야 정치인들과 가톨릭 신부, 개신교 목사, 대학 교수 등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빚어진 유신체제하 최대의 반정부선언사건.

 

1976.10.14,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1976년 10월 14일 오후 6시에서 8시 사이 수도경비사령부 관할 지역인 서울특별시 강북 일대에서 있었던 미확인비행물체(UFO) 근접 조우 사건. '청와대 UFO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77.12.22, 100억 달러 수출의 날 기념식

1977년 12월 21일에 대한민국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긴 것을 기념한 기념식

 

1979.10.04,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1979년 9월 29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의 1979년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 중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내용을 문제 삼아 10월 4일 국회에 징계동의안을 제출, 김영삼을 징계, 의원직을 박탈한 사건.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1979.10.16~1979.10.20, 부마 민주 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부마 소요 사태'라고도 한다.

 

1979.10.26. 10.26 사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등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운전기사 등을 살해한 사건. 이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거의 막이 내렸다고 할 수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독재를 끝내려 했던 이 사건으로 새로운 독재자 전두환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79.12.12. 12.12 군사 반란

10.26 사건의 사건 수사를 마친 국가보안사령관 소장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제9보병사단장 소장 노태우,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박희도,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최세창,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장기오,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 등이 모인 하나회에 의한 군권 찬탈 및 장악한 사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를 사로잡기 위한 작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5.17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2.12 사태'라고도 한다.

 

1980.05.18~1980.05.27,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05.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1980년에 설치된 대통령자문기관.

 

 

[대한민국 제5공화국 (1981.02.25~1988.02.24)]

1982.01.06, 통행금지 해제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이동 제한되었던 조치가 풀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심야 주유소가 문을 열고, 야시장이 성시를 이루었으며, 열차와  전철의 운행 시간도 늘려졌고, 도로에 자동차들도 많이 다니게 되는 등 밤문화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3.12.21, 학원자율화 조치

 

1984.11.19, 초능력 소년 사건

경상북도의회 교육위원회 상황실에서 중학교 3학년이었던 김성한이 도지사, 교육감, 대한초능력회 회원 등 20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초능력을 증명해 낸 사건. 김성한은 손에 쥐고 있던 날콩 20여 개 중 6~7개를 3분 만에 3~15cm의 크기로 싹을 틔우고, 나침반과 시곗바늘을 손도 대지 않고 돌렸다. 이에 정보기관에서 학자금 등을 일체 지원하는 조건으로 일을 도울 수 없겠냐고 요청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무마되었다고 한다.

 

1986.06.06~1986.06.07,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1986년 6월 6일과 7일에 노동 현장 위장취업 혐의로 연행된 경희대학교 여대생에게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성고문을 가한 사건. 해당 사건은 1989년 6월 26일경 외부로 알려져 재판까지 갔으나, 

 

1987.06.10~1987.06.29, 6월 민주 항쟁

'6.10 민주 항쟁'이라고도 한다.

 

1987.06.29, <6.29 선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 선언

 

[대한민국 제6공화국 (1988.02.25~)]​

1988.09.17~1988.10.02, 1988년 하계 올림픽

 

1988.11.02~1989.12.31, 5공비리청문회

제13대 국회(1988.05.30~1992.05.29)에서 제5공화국 정부에서의 비리와 5.18. 광주 민중 항쟁(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개설한 5공비리특별위원회의 국회 청문회 활동.

 

1990.09.04~1990.09.07,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0년 9월에 대한민국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개최된 최초의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으로, 이후 <남북기본합의서>로 불리는 문서 제정을 위해 개최된 첫 번째 회의였다. 최초의 고위급회담인 만큼 쌍방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강력히 주장해 큰 성과는 없었지만, 분단 45년 만에 남북의 총리가 처음 만났다는 사실 자체와, 회담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1990.09.30, 한소수교

한국의 최호중 외무장관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양국수교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정착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하며 각자의 제3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공동 커뮤니케에 서명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0.10.04,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국군보안사령부가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인 여러 사건이 대한민국 육군 이병 윤석양에 의해 폭로된 사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가 한 민간인 사찰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 인사를 비상계엄이 선포될 D-데이 전후로 전원 검거하기 위한 계획(청명 계획)의 일부였다. 대통령 노태우는 이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보안사 대공처 6과(서빙고 대공분실, 빙고 호텔)도 즉시 폐쇄시켰다. 또 국군보안사령부는 '국군기무사령부'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또 국방부 장관 이상훈이 해임되고, 국군보안사령관 조남풍이 경질되었다.

 

1990.10.13, 10.13 특별선언

대통령 노태우가 1990년 10월 13일 특별선언을 통해 범죄와 폭력에 전쟁을 선포한 사건. 헌법에 보장되는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 발휘하여 범죄와 폭력 등 민생치안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전국의 폭력조직은 거의 와해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범죄발생 건수도 감소했다. 그러나 경찰의 실적 위주의 수사와 검거가 있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 사건을 흔히 '범죄와의 전쟁,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이라고 부른다.

 

1990.12.16~1990.10.19,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0년 12월에 북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은 큰 성과 없이 각자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던 회담이었다.

 

1990.12.11~1990.12.14,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0년 12월에 대한민국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많은 논의를 거쳤으나, 결국 쌍방 간의 기본 입장 차이로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의 개최일자 합의  외에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1991.08.08,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02호>

이 결의로 인해 남북이 UN에 동시가입하게 되었다.

 

1991.10.22~1991.10.25,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1년 10월에 대한민국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쌍방은 합의서를 단일문건으로 할 것과 합의서의 명칭을 <남북기본합의서>로 하며, 내용 및 체계 등에 합의함으로써 타결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1991.12.10~1991.12.13,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1년 12월에 북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하고, 채택 및 서명하게 되었으며,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란 핵문제와 관련된 사항을 협의하기 위한 판문점 접촉을 약속했으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을 1992년 2월에 열 것을 합의했다.

 

1991.12.13, <남북기본합의서(南北基本合議書)>

1991년 12월 남한과 북한 사이에 합의된 남북관계의 기본적 사항들에 관한 외교문서. <7.4 남북공동성명(1972)>에서 발표한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재확인하고, 그러한 방향에 맞춰 통일준비를 하되 서로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임을 인정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 있다.

 

1991.12.26,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제1차 대표접촉

1991년 12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대표접촉. 이 회담은 이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협의한 첫 번째 접촉이었다는 의의가 있다.

 

1991.12.28,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제2차 대표접촉

1991년 12월 28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대표접촉. 이 회담은 이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협의한 두 번째 접촉이었다는 의의가 있다.

 

1991.12.31,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제3차 대표접촉

1991년 12월 31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핵문제협의를 위한 대표접촉. 이 3번째 회담의 결과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각측이 서명했다.

 

1991.12.31,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1991년 12월 31일 남북 측이 서명하고, 1992년 2월 19일에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에서 공식 발효한 '남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분, 사용을 하지 않고, 핵에너지를 오로지 평화적 목적에서만 사용할 것'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비핵화 관련 합의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라고도 부른다.

 

1991.12.13, 광주 F-5A 추락사고

1991년 12월 13일, 당시 제1전투비행단 이상희 중위가 F-5A 전투기에 탑승해 비행훈련을 하던 중, 다른 훈련기와 충돌 사고가 일어나 기체가 제어 불가 상태에 빠지자 비상 탈출을 시도하기 직전 전방에 마을을 확인하고는 '탈출 불가'를 선언하고, 기수를 돌려 광주직할시 서구의 덕흥마을의 밭에 추락해 순직한 사고.

 

1992.02.18~1992.02.21,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1년 12월에 북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시키고,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 발효시켰다. 아울러 남북 쌍방은  남북정치분과위원회, 남북군사분과위원회,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들이 명단을 1992년 3월 6일 서로 상대측에 통보하기로 하고 각 분과위원회 개최 장소와 날짜도 합의하였다.

 

1992.05.05~1992.05.08,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2년 5월에 대한민국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쌍방은  5월 7일 <남북군사공동위원회,  남북교류·협력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발효시키고, '8.15 해방 47돌'에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1992.09.15~1992.09.18,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1992년 9월에 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 이 회담에서 쌍방은 9월 17일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다.

 

1992.12.11, 초원복집 사건

부산직할시 남구 대연동의 복어요리 음식점 초원복국에서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과 현지의 정부 기관장(부산직할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직할시 교육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등)들이 모여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대놓고 부추기자고 모의한 사건. 이 사건은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도청에 의하여 드러나게 되었다.

 

1993.08.12,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이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전격 실시되었다.

 

1993.10.10,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4.10.21,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06.29,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08.15, 조선총독부 철거

 

1996.12.12, 대한민국 OECD 가입

 

1997.12.03~2001.08.23, 대한민국 IMF 관리 체제 기간

 

1998.10.08,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1998년 10월 일본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오부치 게이조와 만나 '두 나라가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공동선언. 특히 최초로 문헌적으로 일본이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공식적으로 명시한 첫 번째 선언이라는 의의가 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도 부른다. 

 

1999.06.30,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2000.03~2020.11, 무안단물

전라남도 무안군의 무안만민교회에서 2000년 이후 만든 바닷물 담수호. 교회에서는 마시면 권능의 효과가 나타나는 신비의 액체라고 주장하는 물이지만, 수질검사 결과 식용부적합판정을 받고 폐쇄했다고 한다.

 

2000.06.13~2000.06.15, 2000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북한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대한민국에선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선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이 회담에 참석했으며,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만났다는 의의를 가지며, 이 회담으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2000.06.15, <6.15 남북 공동선언>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노력을 위해 발표한 공동선언. 이 선언에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 '2000년 8월 15일 즈음에 이산가족 상봉 만남 추진', '남북의 경제협력과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 및 교류 활성화', '상기 4개 안의 실시를 위한 후속 대화 일정 규정'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2000.10.17~2004.06.30,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2.05.31~2002.06.30, 2002년 FIFA 월드컵

 

2002.06.13,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2004.05.14.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2007.04.02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2007.10.02~2007.10.04, 2007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북한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대한민국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에선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이 회담에 참석했으며,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만났다는 의의를 가지며, 이 회담으로 <10·4 선언>이 발표되어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약속했다.

 

2008.05.02~2008.08.15,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

 

2009.01.20,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2009.11.08, <친일인명사전>

 

2009.11.10, 대청해전

 

2009.11.27,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5명에 관한 명단. 조사 대상은 1937년 7월 7일에 발발한 중일 전쟁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며, 5개 부문, 25개 분야로 구분된다.

 

2010.11.11~2010.11.12, 2010 서울 G-20 정상회의

 

2010.11.23, 연평도 포격전

 

2010.12.13~, 6.25 전쟁 납북 진상규명위원회

 

2012.02~2015.07,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스마트폰 해킹 사건

- 국가정보원이 5163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해 이탈리아 보안업체 해킹 팀(Hacking Team)에게 9억 원을 주고 원격 조종 스마트폰 해킹 시스템 RCS를 구입해 운용한 사건. 조사 결과 2015년 상반기에만 최소 189건의 감청 시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국가정보원은 프로그램은 대북용, 해외용일 뿐 국민사찰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2012.10.02,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2014.04.07,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2015.04.09, 성완종 자살 사건

- 자원외교 비리 관련 조사 대상인 새누리당 제19대 국회의원이었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서울특별시의 북한산 자살하며 8명의 고위 인사에 대한 로비 리스트를 남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 이 사건으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허태열 전 대통령비서실장, 홍문종 전 새누리당 사무총장, 서병수 부산광역시장,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은 불기소 처리되었으며,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이완구 국무총리는 불구속 기소되었다.

 

2016.04.05,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

 

2017.10.21~2017.10.27, 391 흥진호 나포사건

 

2017.11.13,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2018.04.01~2018.04.03, 남북평화협력기원 평양공연

- 북한 평양 동평양대극장(4월 1일)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4월 3일)에서 열린 '봄이 온다'라는 부제목으로 진행된 남북 합동공연

 

2018.04.27,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3번째 남북정상회담으로, 최초로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이 정상회담으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으며, 2018년 5월 중 북한 핵 실험장 폐쇄 및 대외공개를 합의했으며, 북한은 평양시간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표준시와 같은 시간 선택하게 된다.

 

2018.04.27,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

<판문점선언>이라고도 한다.

 

2020.09.22,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살 사건

 

1. 기타 용어 정리

만파식적(萬波息笛)

682년경 동해에 있었다는 작은 산에 있었던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피리.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하며, 신라시대 때는 국보로 정했다. 만파식(萬波息)​이라고도 한다.

 

용담검무(龍潭劍舞)

동학 1대 교조 수운 최제우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목검을 쓰는 칼춤

 

후테이센진(不逞鮮人, ふていせんじん)

불령선인. 일제강점기 조선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해 일본 제국이 불온하고 불량하다고 판단한 조선인. 일본에서 '불령선인'이라고 불린 사람은 오히려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독립 운동가, 독립 열사'라고 불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