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선전하고 있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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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선전하고 있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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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에서 보천보 전투에 대해 방송했다. 이에 당시 발간한 신문을 보며 보천보 전투의 자세한 내용을 정리해봤다. 북한 찬양글이 아님을 미리 알린다.

1.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에서 보천보 습격에 관한 호외(급보)를 보도하다.

 

함남(咸南) 보천보(普天堡)를 습격 우편소, 면소(面所)에 충화(衝火, 방화)

작야(昨夜, 어젯밤) ㅇㅇ 2백여명이 돌연 내습(來襲, 습격)
보교(普校, 보통학교), 소방서에도 방화


 [체신국 오전 9시 반입 전] (1937년 6월) 4일 오후 11시 30분경 함남(咸南) 국경 보천보(普天堡) 우편소에 ㅇㅇ 2백여명이 습래(습격)하여 동우편소를 포위방화하고 계속하여 보천보 부근에 있는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소방사무소 등을 습격방화했는데 부상자는 1명이다.
 이 급보에 접한 혜산진(惠山鎭)우편국에서는 (6월) 5일 오전 3시경, 츠네카와(常川)체신서기외 공수(工手, 공사 인부) 2명이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현지에 자동차로 급행했는데 동 우편소장 이하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함남경찰부(咸南警察部)에서 출동


김일성(金一成) 일파 ㅇㅇㅇㅇ로 판명

 [함흥지국전화(咸興支局電話)] 함남경찰부 입전에 의하면 지난 (6월) 4일 오후 11시 30분경 김일성(金一成, 1912~1994) 일파와 최현(崔賢, 1907~1982) 일파 3백여명은 국경대안인 혜산진에서 동북으로 22km지점에 있는 보천부에 나타나 보통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소방서 등을 습격하고 방화를 했는데, 그 중 우편소와 면사무소는 전소되었으며, 그 (난리)통에 그들은 1명을 사살시키고 도주했다. 이 급보를 접한 함남경찰부에서는 키타무라(北村) 고등과장이 부원 수십명을 대동하고 금야(오늘 밤) 11시에 현장으로 출동하리라하는바 아직 쌍방의 자세한 사상자는 판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號外)

호외에 따른 사건의 타임라인은 아래와 같다.

1937년 6월 4일 오후 11시 30분경 함남 보천보 우편소, 2백(혹은 3백)여명 습격
이후, 면사무소, 보통학교, 소방사무소 습격 방화 (1명 부상 혹은 1명 사상)
1937년 6월 5일 오전 3시경 츠네카와 체신서기 및 공사인부 2명, 휴대전화기를 들고 보천보 지역으로 급행
->우편소장 및 가족은 무사했음
오후 11시경 키타무라 고등과장 및 부원 수십명, 현장 출동 예정

 

2. 1937년 6월 6일, 동아일보에서 보천보 습격에 관한 속보를 보도하다.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被襲事件) 속보]

추격 경관과 충돌
양방(兩方, 쌍방) 사상(死傷) 70여

 [함흥지국전화(咸興支局電話)] 보천보를 습격한 200여명의 비적단과 추격경관대는 드디어 충돌했다.
 (6월) 5일 오후 1시경 압녹강(압록강)대안 13km지점, 23도구(道溝)에서 오오카와 부대(大川部隊) 30여명 경관과 김일성 일파가 충돌했는데, 경관측에서는 즉사 7명, 부상 14명, 김일성파에서는 즉사 25명, 부상 30명을 내고 계속해서 격전중이다.
 오후 3시 이 급보를 접한 함남경찰부에서는 키라(吉良)  키타무라(北村) 고등과장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현장에 급행했다.
 계속하여 사태가 위험하다는 보고가 있어서 경관대 70여명으로는 부족하므로 호인(好仁)경찰서, 신갈파(新乫坡)경찰서, 삼수(三水)경찰서에서 90명을 증발하여 응원출동케 했다.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被襲事件) 속보]

혜산(惠山), 신갈파(新乫坡), 호인(好仁) 등 3서(署) 경관 총동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 일파는 곧 23도구(道溝)로 도주했는데, 이 급보를 접한 혜산진경찰서에서든 곧 근처 신갈파 경찰의 응원을 얻어 축격(逐擊, 추격)했는데, 오오카와 부대에서도 31명 경관을 출동시켜 23도구에서 격전중이며, 혜산진서에서는 무장경관 11명을 또 증원파송했다. (호외재록(號外再錄))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被襲事件) 속보]

군경연합대가 퇴로를 차단

함남 보천보보전주재소(普天堡堡駐在所)에 반만군(反滿軍, 반만주국군)이 습래(습격)했다는 급보를 받은 혜산진서(惠山鎭署)에서는 시오야(鹽谷) 서장 이하 오오카와(大川)경부, 타카하시(高橋) 경부보가 3대로 나누어 해산진수비대와도 연락을 취해 4대로 되어 비적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각각 5일 오전 0시 50분에 출동했다. 시오야 서장은 가림의 상류 약 1km의 지점에서 선발한 오오카와 부대가 반만군의 1부와 교전중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이마무라(今村) 경부보의 1대를 응원하기 위해 급행케 했는데 시오야 서장은 그대로 보전(堡)에 급행해 오전 2시 보전주재소에 도착했는데 반만군은 이미 도주한 후라 막 수사중이다.
 가림상류 1km의 지점에서 오오카와 부대와 교전 중인 반만군은 대안 21도구 재천리(在天里) 고지에 있어서 보전에 침입한 반만군의 퇴로를 열려고 했으므로 때마침 진행해 온 오오카와 부대에 견제되어 사격을 개시했으므로 오오카와 부대는 이에 응전해 습격했다. 중심비단(핵심 비적단)은 아직 선내를 탈출치 안한 것이 명백하므로 시오야 서장 이하 각부대급 해산수비대는 연락을 취해 비단(匪團)의 전멸을 기하고 오전 4시 대기 진형을 취했다.

처음 적었던 타임라인과 위의 3개 신문의 타임라인을 합쳐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37년 6월 4일 오후 11시 30분경 함남 보천보 우편소, 2백(혹은 3백)여명 습격
->면사무소, 보통학교, 소방사무소 습격 방화 (1명 부상 혹은 1명 사상)
1937년 6월 5일 오전 0시 50분 혜산진서 시오야 서장 및 오오카와경부, 타카하시 경부보, 해산진수비대 비적 퇴로 차단 위해 출동
오전 2시 시오야 서장, 보전주재소 도착. 반만군은 이미 도주
오전 3시경 츠네카와 체신서기 및 공사인부 2명, 휴대전화기를 들고 보천보 지역으로 급행
->우편소장 및 가족은 무사했음
오전 4시 시오야 서장 이하 각부대급 해산수비대, 연락을 취해 중심비단의 탈출을 막고 전멸시키기 위해 대기 진형을 취함
오후 1시경 23도구, 오오카와 부대 31명 경관과 김일성 일파 충돌. 계속 격전 중
-> 경관측 즉사 7명, 부상 14명/김일성파 즉사 25명, 부상 30명
오후 3시경 함남경찰부, 키라 및 키타무라 고등과장, 현장 급행
호인경찰서, 신갈파경찰서, 삼수경찰서의 총 90명 증발

3. 1937년 6월 7일, 동아일보에서 보천보 습격에 관한 속보를 보도하다.

[보천보 습격사건 피해 판명]

우편소, 면사무소와 삼림보호구 전소(다 타 버림)

소방조, 보통학교도 연소회신(불이 번지고흔적 없이 다 타버림)
총피해 5만여원

 [함흥지국전화(咸興支局電話)] (6월) 4일 함남 갑산(甲山)군하 보천보에 김일성 일파 2백여명이 습래했다함은 누보(여러번 보도함)했으나 금(오늘) (6월) 6일 오정(午正, 오후 12시)까지 판명된 피해액은 약 5만원 가량이라는데 습격 당시에 살해된 사람은 일본내지인 2명으로 작보(어제 보도함)한 하네 코사부로(羽根小三郞)는 즉사했고 순사부장 딸 노나이 에미코(野内えみこ, 2세)는 작(어제) 10시 40분에 절명했다.
 우편소와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는 모두 전부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는데, 우편국 손해가 약 7천원, 면사무소 피해가 약 1만원, 삼림보호구 피해가 약 3만원에 달하고, 이 방화로 인해 다시 연소되어 소방조와 보통학교도 전소되었는데 그 손해는 약 2천원으로서 총 피해액은 5만원을 넘는다 한다.

[보천보 습격사건 피해 판명]

추격 경관 7명 사망
6명은 부상, 쌍방 사상자 다수


 [함흥혜산진지국전화(咸興惠山鎭支局電話)] 보천보를 습격하고서 도주하는 김일성일파와 이를 추격하는 경관대가 충돌되어 쌍방의 사상자가 다수한데 경관측에서는 순사 7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는데 사망한 경관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 한다.

켄세이 이와오(兼淸岩男, 25세)
타노쿠치 쇼우지(田野口正治, 29세)
이누이 후이츠(戍亥淸一, 27세)
히라오 신지(平尾信二, 28세)
오카베 만키(岡部萬記, 25세)
조연진(趙然軫, 36세)
황진식(黃辰植, 33세)

◇ 중상자(수출(輸出)을 요함) 3명=안도우 쇼우지(安藤正治), 오오스미 슌지(大角俊二), 카와모토 준이치(川本潤一)

6월 7일자 신문까지의 타임라인을 합쳐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37년 6월 4일 (오후 10시) (조선인민혁명군, 5개조로 나눈 뒤 보천보 지역 습격 시작)
오후 11시 30분경 함남 갑산군 보천보 우편소, 김일성일파 2백(혹은 3백)여명 습격
->면사무소, 보통학교, 소방사무소 습격 방화 (1명 부상 혹은 1명 사상)
1937년 6월 5일 오전 0시 50분 혜산진서 시오야 서장 및 오오카와경부, 타카하시 경부보, 해산진수비대 비적 퇴로 차단 위해 출동
오전 2시 시오야 서장, 보전주재소 도착. 반만군은 이미 도주
오전 3시경 츠네카와 체신서기 및 공사인부 2명, 휴대전화기를 들고 보천보 지역으로 급행
->우편소장 및 가족은 무사했음
오전 4시 시오야 서장 이하 각부대급 해산수비대, 연락을 취해 중심비단의 탈출을 막고 전멸시키기 위해 대기 진형을 취함
오후 1시경 23도구, 오오카와 부대 31명 경관과 김일성 일파 충돌. 계속 격전 중
-> 경관측 즉사 7명, 부상 14명(중상자 : 3명)/김일성파 즉사 25명, 부상 30명
오후 3시경 함남경찰부, 키라 및 키타무라 고등과장, 현장 급행
호인경찰서, 신갈파경찰서, 삼수경찰서의 총 90명 증발
1937년 6월 6일
(오전?오후?) 10시 40분 노나이 에미코(2세, 순사부장의 딸) 사망
오후 12시 피해액 : 약 5만원(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소방조, 보통학교)
민간인 사망자 : 2명

4. 보천보 전투와 그 이후

보천보 전투 약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북한측에 따르면, 1937년 6월 4일 오후 10시, 동아일보측에 따르면 오후 11시 30분,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 휘하 주력부대 150명이 5개의 조(습격조 2조, 차단조 2조, 정치공작조 1조)로 나누어 보천보우편소, 보천보면사무소, 보천보삼림보호구사무소, 보천보소방조, 보천보보통학교를 공격하고 전소시켰다. 북한측과 동아일보측의 시작 시간이 다른데, 작전 시작 시간은 10시지만 보천보에 도착해 습격이 시작된 것은 11시 30분이었이지 않을까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현재 남북한의 상황, 다양한 연구 성과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김일성일파의 소규모 물자 보급 투쟁이지만 30년대 후반 독립군 세력이 국내에 침투한 사건' 정도로 평가되고 있는데 반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라거나 '축지법을 써 산을 단숨에 넘나들었다'라며 과장하고 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오버테크놀로지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거냐~? 어느 쪽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던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에게는 적잖이 충격이었고 당시 조선인에게도 명성이 자자했다.

 

1943년, 학자 가마타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郞, 1894~1979)가 한 소학생와 중학생들을 모아서 '조선학생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에 대한 투표에서 67%가 김일성이라고 적었다고 한 일화나 1945년, 잡지 <선구>에서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국방부장관)으로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투표에서 김일성이 1위를 했다는 일화를 보면 당시 일부 조선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문단을 가지고 북한을 찬양하니 뭐하니 하면서 논란을 일깨울까 싶어 미리 말하지만, 당시에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 안에서의 김일성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 그를 찬양코자 쓴 내용이 아님을 알린다!

그리고 그는 이 전투로 인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천보 전투 아니었으면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군사학적 관점에서 이 작은 마을에서 적은 인원에게 입힌 피해(총 9명 사망)는 크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항일 무장투쟁 세력이 말살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과 핍박받던 조선인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주게 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의 교훈. 과거에 좋은 일을 했어도 지금 잘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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