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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초량역 3번 출구로 올라오면 공원과 동상이 보입니다.
이곳엔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 혹은 부산진첨사를 지내다 장렬히 전사하신 '충장공 정발 장군상'이 서 있죠!!
건립문은 장엄한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문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건립문 |
우리는 오늘 임진왜란 때 이곳 부산을 지키다 순국하신 정발장군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장군이 지키시던 옛 성터의 남쪽에 장군의 모습을 동상으로 모셔 그 뜨거운 순국충절을 자손만대에 전하려 한다. 일천오백구십이년(1592년) 사월 열사흘 피비린내에 굶주린 왜는 그들 문화의 어머니나라인 우리 조국을 넘어다 보고 야만스러운 침략을 개시하여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을 칠년에 걸친 전란의 수렁으로 몰아 넣어 무수한 생령을 참살하고 또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그 분하고도 원통함은 피눈물을 뿌려도 이루 달랠 길 없다. 그 캄캄한 역사 가운데서 우리 민족이 쳐든 항쟁의 횃불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는 으뜸이 바로 우리 향토에서 정발 장군이 쳐들었던 그 거룩한 불길이다. 장군은 나라의 남쪽 관문이던 부산첨사로서 부임 즉시 허술했던 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닦아 외침에 대한 방비를 서둘렀으나 때는 이미 늦어 일만 팔천을 헤아리는 왜적들의 밀물같은 침공 앞에 오직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용맹스런 군사와 백성들과 더불어 활을 당기고 칼을 휘둘러 결사의 대결을 시작했으니 그 충절과 용기에 포학무도한 적마저 놀라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임전무퇴 물러섬을 모르던 장군은 부산포의 흙을 피아의 피로 물들인 이 싸움터에서 분전, 이틀만에 원통하게도 원수의 흉탄에 전사하시니 비록 그의 육신은 천지로 돌아갔으나 그의 장렬한 죽음은 임진란 내내 그칠 새 없이 치열하고도 모질었던 자주적인 민족항쟁의 길잡이가 되었으니 어찌 장군의 높은 얼이 청사에 빛나는 애국애족의 거울로 영원히 살아있다 아니하리오. 지금도 멀리 동해의 물마루를 지켜보고 계실 장군이시어, 장군의 높은 호국정신은 이 민족이 국토와 함께 영원할 진저. |
일천구백칠십칠년(1970년) 삼월 이십오일 |
동상 뒷편의 한 공간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이 자매결연을 맺은 것을 기념하면서 '정발 장군'의 업적을 같이 기리는 라이온스클럽(국제사자회)의 영문 기념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 THE STATUE OF ADMIRAL JUNG BAL ~ |
The status of Admiral Jung Bal, 1553~1592, who made the great sacrifice to the defence of Busan, standing here at the southeast of Busan Castle, where they fought to death, is dedicated by the citizens of Busan to remember the ████ and their spirit. At the early stage of Japanese invasion, which started on April 13, 1592 and devastated the peaceful land of Korea for the next seven years, Admiral Jung Bal led volunteers of Busan citizens to meet the overwhelming Japanese invaders. He died a glorious death at the age of forty, and so did all the volunteer-soldiers. However, his sacrifice at the beginning of the war set an example to the nation and his model guided the people throughout the rest of seven-years war until Korea finally chased the aggressors out of the land. We ask you to remember him and his braves who fought to death for the defense of this city. |
대한민국 동부산라이온스클럽/중화민국 기륭중앙국제사자회 자매결연기념공동사업 1977.3. 16.(혹은 1977. 8. 16.) |
처절한 부산진성을 마지막까지 수호했던 장군의 뒷모습은 마음 한쪽에 뜨겁고도 슬픈 감정을 일으킵니다...
정 충장공 약전(1553~1592) |
공의 이름은 발(撥)이요 자는 자고(子高)이다. 관향은 경주(慶州)요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로 일천오백오십삼년(1553년) 시월 스무닷샛날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벽서에 능통하였으며 성품이 과묵하고 풍모가 의연하여 무장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스무다섯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선전관을 지내고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다가 종성(鐘城)으로 가 북방의 병환을 평정하고 거제 현령이 되었다. 비변사의 낭관(郎官)으로 병조의 무비사랑직(武備司郎職)을 겸하다가 다시 위원군수(渭原郡守)로 나갔다. 임기를 마친후 훈련원의 부정(副正)이 되었으며 사복시(司僕寺)의 정으로 옮겨 내승을 겸하였다. 이때 왜에 대한 근심이 있는지라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공을 당상관의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벼슬을 올려 부산진수군첨절제사로 임명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성을 수축하고 전구를 갖추며 군사를 조련하여 방비를 굳게 하였다. 일천오백구십이년(1592년) 사월 열사흗날 왜적이 부산포로 내습하자 공은 바다에 나아가 항전하였으며 성에 들어와서는 수성준비를 가다듬는 한편 군민들을 진정시켰다. 열나흗날 적은 성을 포위하여 총을 발사함이 비와 같은데 공은 휘하를 격려하여 적을 수없이 죽여서 시체가 세 군데나 산더미같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화살이 다하여 부하장수의 피하자는 권유도 일축하고 분전을 거듭하다 장렬히 순사하니 때에 공의 나이 마흔이었다. 공의 충의에 감격한 모든 성민들도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여 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일천오백구십사년(1594년)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일천육백팔십육년(1686년)에는 환란중에도 나라를 잊지 않음은 충이요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음은 장이라 하여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일천육백팔십일년(1681년)에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게하는 높은 벼슬로 가증되었다. 한편 난이 끝난후 사우(祠宇)와 단묘(壇廟)에서는 그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끊이지 않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
제자 : 박정희 헌납 : 박영수 약전 : 정중환 건립문 : 허만하 조각 : 한인성 글씨 : 배재식 |
임진왜란 초기 부산진성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1970년 이곳에 세워진 동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초량역에서 두 정거장을 더 간 좌천역에서 내리면 그를 모시는 제단인 정공단에 다다를 수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같이 가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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